엘리베이터 50

낯선 도시의 어둡고 길고 눅눅한 굴/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낯선 도시의 어둡고 길고 눅눅한 굴/김주완 열쇠는 없었다. 그러나 열려하고 있었다. 우리 사이의 높은 벽은 완고한 침묵이었다. 잠긴 문門은 열어라 하며 더욱 육중하고 빈주머니에 묶인 채 맹목盲目은 마비되고 있었다. 낯선 도시의 굴은 어둡고 길고 눅눅하..

엘리베이터 안의 20초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엘리베이터 안의 20초 / 김주완 아무도 없었다. 벽에 갇힌 눈 감은 눈을 눌렀다. 불투명한 아크릴판 아래로 네모난 그것이 충혈된 눈을 뜨자 물방울 구르듯 음계를 밟아 내린 빈 공간이 열려지고 있었다. 슬그머니, 외계의 내장內藏을 오르내리는 단단한 두레박..

벌판에는 바람이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벌판에는 바람이 / 김주완 벌판에는 바람이 불어요.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뜬 구름이 몰려다니고 있어요. 소리의 물줄기가 어지러이 흐르고 몸과 몸을 부딪쳐 맹목의 수목들이 사생결단을 하고 있어요. 바람의 칼날에 넋은 넘어지고 있어요. 갈대밭에서 나온 미..

표류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표류 / 김주완 창에 부딪친 바람은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음, 오후 내내, 지엄한 콘크리트 벽에 사나운 이빨을 갖다 박고 바람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음. 몰려다니던 구름이 스스로의 무게로 주저앉자 밤은 호우가 쏟아져 퍼붓고, 한 고층아파트가 한 척의 배..

은어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은어 / 김주완 강물은 흐르고 뛰어 오르는 놈만이 본다, 역류의 아픔으로 부서지며 쪼개지는 물살의 칼날 위 벼랑 끝을 돌아 나가는 그녀의 흐느낌을 건너편 산들의 근엄과 바람결에 쓸리는 수목들의 얼굴을 숨어서 떨어지면서 본다, 일제히 침묵하는 물의 길, ..

벽돌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벽돌 / 김주완 1 생존의 끝에서 나는 나 아닌 내가 되고 있었다. 우연의 명제에 땀 한 방울 떨어지고 운명도 의미도 살 껍질 조금씩 묻은 채 삭막한 독립으로 내던져져 있었다. 내 살을 나누어 받은 이탈의 신비는 단지 나의 것이었다. 나의 운명은 나의 눈물의 것..

밤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밤 / 김주완 밤은 창 밖에 있고 이쪽의 나는 저쪽에서 분열한다. 두 시 너머 다섯 시 사이 말라가면서 나무를 보는 떨어진 꽃잎은 자유가 된다. 연鳶줄을 끊고 탈출하는 저 분방한 정신의 유영; ㅡ 시원始原의 벌판을 달려 나와 방황하는 바람의 실명失明은 무자..

데미쓰 루쏘스의 집시 레디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데미쓰 루쏘스의 집시 레디* / 김주완 데미쓰 루쏘스가 노래하고 있었다, 겨울 저문 분지의 산비탈에서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 근처 머릿결에서 진한 샴푸 향을 뿌리며 집시 레디가 웃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산수유 붉은 목젖 부근 무너짐의 징..

잊혀진다는 것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잊혀진다는 것 / 김주완 잊혀진다는 것이 더 이상 슬픔일 수는 없다, 그것은 사라지는 한 점 바람의 얼굴이거나 혹은 텅텅 비워내는 맑고 맑은 몸짓이거나 순수로 돌아가는 외길일 뿐이다, 밤을 지난 잿불로 묵은 흔적을 소리 없이 날리고 맞이하는 어릿한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