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표류 / 김주완
창에 부딪친 바람은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음, 오후 내내, 지엄한 콘크리트 벽에 사나운 이빨을 갖다 박고 바람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음. 몰려다니던 구름이 스스로의 무게로 주저앉자 밤은 호우가 쏟아져 퍼붓고, 한 고층아파트가 한 척의 배로 바다 중간을 떠가고, 다른 고층아파트 한 동이 또 다른 한 척의 배로 바다 저편을 떠가고 한 도시가 한척의 더 큰 배로 바다 가운데로 떠가고, 바다엔 온통 자욱한 비가 몰아치고 있었음.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는 곳간에 쌓여진 곡식처럼, 머릿속에 저장된 언어만큼 우린 풍요해지고 우린 안락해진다는 점. 그대여! 그대만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언어로 살아 주기를,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떠돌면 떠도는 대로 우리 언어로 웃고 우리 언어로 즐거워하고 우리 언어로 침묵해 주기를. 표류해서는 안 되는 것, 바다 가운데의 아무도 보지 않는 익사는 마침내 뿔뿔이 흩어지는 무기질의 해방인 것. 누구도 구조해줄 자는 없음, 그것이 미덕인 때는 이미 지나가 버렸으므로 승선해야 함, 스스로 붙들고 올라타야 함. 화물실 옆이거나 오물실 옆이라도 감사히 자리 잡고 우리 거처, 우리 정신의 처소를 마련해야 함. 단단히 동여매어 아직은 스스로 묶여져야 함. 크고 작은 조직의 혹은 체제의 부분만이, 끈끈히 들어붙어 들어붙은 부피만큼 그것을 키우며 들어붙은 부피만큼 더 커진 그것의 부분이 되는 것이 생존의 슬기일 뿐. 우리는 지금, 나는 그대의 언어로 그대는 나의 언어로 도와야 한다고 함.
그러나 나는 지금, 하얀 공포를 벗어나 산골의 깊숙한 빗소리를 듣고 싶음, 무기질로 오늘밤, 번들거리는 나뭇잎들의 색깔과 든든한 언덕과 골짜기가 있는 노자老子의 뭍이 그리워짐. 바다 가운데 욕망을 채운 바람이 사지를 벌린 채 퍼질러진 혼곤으로 쓰러져 있는데, 바다 가운데 떠가는 배의 찬란한 객실의 떨어지는 불빛 그림자를 보며, 불혹을 향해 표류하는 연륜의 열등한 초조감이 지금은 역겨움. 끈끈한 생존의 점액질이 지금은 역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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