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낙강문학> 창간호, [강변 산책] _ 물가를 걷다/김주완, 낙동강문학관 발행, 2022년 10월 25일, 29~52쪽.
[강변 산책]
물가를 걷다
김주완 1
이 글은
철학 에세이를 쓴다는 생각으로 시작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물가에서 물을 건너며 시와 철학을 섭렵하는 글이 되었다.
<세상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듯이 글 또한 그러하다.>
집을 나선다.
물가를 걷는다. 허리를 펴고 팔을 흔들며 가볍고 꼿꼿하게 독일 병정처럼 걷는다. 너무 딱딱한 보법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걷는 나는 경쾌하다. 자세가 경쾌하면 마음도 산뜻해진다. 처음에는 내가 전방을 열면서 걷는데 나중에는 내가 전방으로 끌려 들어가며 걷다가 마침내 전방과 내가 하나가 되어 걷는다. 바람을 가르며 걷는다. 바람은 계절마다 불지만 그때마다 차거나 따뜻하거나 더운 바람이다. 바람, 나, 길, 물이 함께 살아 있음을 느낀다. 생동하는 물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나도 물이 되어 흐른다. 걸으니까 지금 나는 살아 있는 것이고 살아 있으니까 지금 나는 걷는 것이다. 흐르는 것이다.
나의 산책길은 왜관 낙동강이다. 지도상으로 보았을 때 낙동강의 유일한 직강 구간이라 할 수 있는 지점이다. 왜관읍 시가지 서쪽에 위치한 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직선으로 흘러간다. 매일 오후 3시쯤 강가에 있는 나의 집에서 나와 강의 좌안을 따라 남쪽을 향해서 걷다가 제2왜관교를 서쪽 방향으로 건너 강의 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와서 다시 동쪽 방향으로 인도교(낙동강 구 철교, 호국의 다리) 2를 건너 집으로 돌아온다. 8km 거리이다. 조금 더 걸을 때는 코스를 늘려서 10km를 걷는다. 중간에 두어 번 쉬면서 물을 마시는데 전체 소요 시간은 2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대학 강단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 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2008년 이래 지금까지의 나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물가를 걷는 일이다.
집을 나선 뒤 20분쯤 걸으면 왜관 아랫개 강둑의 동쪽으로 구상문학관이 있다. 구상 시인의 부인인 서영옥 여사는 의사였는데 여사가 순심의원을 경영하던 자리가 바로 여기이다. 칠곡군에서 이 부지를 매입하여 문학관을 세운 것이다. 문학관이 비교적 많지 않았던 2002년 10월 4일 개관되었는데 병상에 계셨던 구상 선생은 개관식에 참석하지 못하였고 1년 7개월 후인 2004년 5월 11일 향년 86세로 작고하였다. ‘물을 보면서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의 ‘관수세심(觀水洗心)’이라는 편액 3이 걸려 있던 선생의 서재 관수재(觀水齋)가 있던 곳이다. 1953년에 구상 시인이 여기에 정착하자 화가 이중섭이 잠시 식객 생활을 했으며 친구 구상의 단란한 가족들을 보면서 이중섭은 <K씨네 가족들>이라는 그림을 그리는데 현재 구상문학관 1층에 이 작품이 걸려 있다.
나는 구상 선생의 추천을 받아 198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 후 선생은 만날 때마다 짧은 시학 강의를 내게 열정적으로 설파하셨다. 선생의 지론은 분장만 일삼는 시를 멀리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란 모름지기 표상과 실재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의 엄숙성과 경건성의 견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시와 시인의 정직성과 개결성에 대한 신념이라고 나는 보고 싶다. ‘언어에는 신령한 힘이 있다’고 믿어 선생은 ‘언령(言靈)’이라는 말을 만들어 애용하였다. '언령'은 곧 '언어의 정신(Geist der Sprache)'이라는 의미에서 선생의 시론은 N. 하르트만과 M. 하이데거의 미학 이론에 닿아 있다. 나는 선생의 사후인 2007년부터 10년간 이곳 구상문학관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였다. 이 강좌를 수강하여 등단한 시인들로 구성된 시동인 <언령>은 매주 3시간씩 쉼 없이 공부하면서 구상 시인의 시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동인지 연간 <언령>은 2021년 말에 제16집이 발간되었으며 이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지고 있다. 2017년부터는 이 강좌 출신의 김인숙 시인이 지도교수의 자격으로 언령을 이끌고 있다.
강둑의 서편에는 옛 왜관나루터 4자리가 있다. 60여 년 전에 구상 시인이 강가에 나와 앉아 낚시를 하거나 산책을 하면서 명상을 하던 곳이다. 옛 자취는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은 둔치가 되어 버린 선창가 자리에 표지석만 덩그러니 서 있다. 1960년 전후의 이곳 정경을 구상 시인의 시에서 만난다. 전쟁의 폐허 앞에서 고뇌하는 시인이 본 선경이다.
아지랑이가 아물거리는 강에
백금의 빛이 녹아 흐른다.
나룻배가 소년이 탄 소를
싣고 온다.
건너 모래톱에
말뚝만이
홀로 섰다.
낚싯대 끝에
잠자리가 조은다.
멀리 철교 위에서
화통차가
목쉰 소리를 낸다.
풀섶에 갓 오른
청개구리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구상, 「그리스도 폴의 강 7」 전문
강 건너 강정나루터에는 철로 침목을 총총히 세우고 그 위에 얼기설기 걸쳐 놓은 잔교가 있었고 이 다리 밑으로는 푸른 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물가는 삶의 근처에 있고 가장자리에 있어 언제나 벼랑이다. 197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던 강정나루에 달뜬 정경을 잊을 수 없다. 물가(涯)에 달(月)이 뜨면 그곳이 애월이다. 애월은 제주도 북제주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걷는 이 강가에도 지난밤에 뜬 달이 아직 남아 있다. 강물에 얕게 떠 있는 희미한 낮달에 다가가려면 나는 지금 까마득한 벼랑을 내려가야 한다. 강의 벼랑이 아니라 영혼의 벼랑이다. 벼랑 아래로 흘러가는 길을 따라 깜깜한 책장을 넘겨야 한다. 구상 시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김인숙 시인의 시 「물가(涯)를 걷다」를 떠올린다.
길이 끝나는 곳에 벼랑이 있었고 벼랑 아래 물이 흘러 다시 길이 열렸다
배는 여전히 건너편 먼 육지에 정박해 있다
새벽에 누가 또 이곳을 지나간 것인가
물기슭에 자국을 남기며 가장 낮은 곳을 걸어간 족적이 지금은 벽에 걸려 있다
무늬 돌이 구들장처럼 쌓여 있는 허공의 책들이 검게 물결 진다
벼랑 끝을 걷다가 떨어지는 사람의 천 길 낭떠러지에 매달린 앙상한 갈비뼈는 희다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물가에서 하얀 피리를 불고 있다
갈비뼈를 깎아 만든 소리
물결의 젖은 손에 붙들린 피리 소리가 해안을 철썩이고 있다
순결이란 그런 것, 언제 떨어질지 모르게 일촉즉발로 장전된 침묵
안내도 없이 하늘 아래 외로움이 물가를 걷는다
걷는 모습이 달빛 같아 애월(涯月)이다
―김인숙, 「물가(涯)를 걷다」 전문
시의 후반부가 나는 특히 좋다. <갈비뼈를 깎아 만든 소리> 물결소리를 들으며 <안내도 없이 하늘 아래 외로움이 물가를 걷는다>. 물가를 걷는 자 중에 외롭지 않은 이, 누가 있겠는가. 실존적 삶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이며 ‘고독’이라는 선천적이면서도 숙명적인 천형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걷는 모습이 달빛 같>으면 그는 곧 애월이다.
나는 평생 외로웠다. 사람과 지식으로서는 채울 수 없는 허공이 내 속에 있었다. 나의 영혼은 어떤 안내도 받지 못한 채 길의 끝까지 하염없이 갔다가 허무하게 돌아왔다. 들뢰즈와 자크 아탈리가 규정한 대로 인간의 속성은 <호모 노마드(Homo Nomad)>에 있다. <유랑하는 인간>은 누구나 상실한 자기 자신을 찾아 끊임없이 순례의 길을 떠나지만 결국은 허무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길을 돌아오거나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서게 된다. 사람의 삶은 <길 위에서의 삶>이다. 삶은 길이고 흐름이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라고 하는 자크 아탈리의 명제는 불편하지만 불변이다. 물이 드나드는 왜관 아랫개에서 나의 고독과 방랑은 시작되었다.
꽃을 보는 눈이 있었다
계절 밖에서도 꽃은 피었다
히말라야시다가 있는 붉은 벽돌집 정오의 정원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맑은 꽃잎을 처음으로 본 적이 있다 눈뜨는 봄날에 가지와 가지 사이 돌연한 냉이꽃 옆에서 책장을 넘기는 파리한 창조주가 있었다
물이 드나드는 길의 끝에서 가로수는 만나고
나는 섬이 되어 떠내려가면서도 꽃 피는 섬으로 눈길을 보냈다 섬의 큰 키와 휘날리는 머릿결은 가물가물 피어나는 붉은 구름 사이에서 물결처럼 출렁이다가 사라지곤 했다
해류가 바뀌는 길목마다 꽃은 몸으로 부딪히며 산이 솟듯이 터져 나왔다 해적선이 데려가는 꽃의 행로를 보면서 나는 꽃잎에 매달린 물방울 같은 아나키스트가 되어 있었다
바다의 끝에 닿을 때까지 파도처럼 지지 않고 꽃은 피기만 할 것이다 흐르는 길을 따라 보는 이가 없어도 저 혼자 필 것이다
꽃은 질 때 꽃잎을 떨군다
―졸시,「왜관 아랫개에 대한 다큐」 전문
제2왜관교 쯤에서 멀리 낙산리 쪽으로 흘러가는 왜관 낙동강의 하구를 바라본다. 이 강이 흘러서 남해에 닿는 곳, 한반도의 남녘 끝인 부산에는 맑은 영혼을 지닌 지사(志士)이자 아나키스트인 김성국 5교수가 있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의 길을 가면서 잡종(hybrid)을 핵심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는 그는 신국판 93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독보적인 저서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으로 제62회 대한민국학술원상(2017)을 수상하였다. 잡종은 곧 원융과 회통하는 개념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그는 나의 졸시 「해무」 전문을 인용한 후, 다음과 같이 이 방대한 저서를 마무리하고 있다.
나는 해무에 익숙하고 해무를 좋아한다. 잘 아는 편이다. 바다의 침묵과 변심에도 담담할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화답한다.
해무는
아나키스트자유주의의 검은 깃발을 단
해적의 무리가
해방의 무국가와
해탈의 무소유를 노래하는
해 저무는 바다의 하나인
해변의 나를
사랑의 만파식적처럼
감미롭게 허무는
신비한
바다의 춤, 해무이다.
해방적 자유―문명전환의 춤이다. 6
김성국 교수의 배려로 나의 졸시 「해무」 7는 일약 해양시(海洋詩)라는 정관사가 붙었고 삼 년여가 지난 2019년에는 <해양시(詩) 「해무(海霧)」의 철학적-詩문학적 고찰>이라는 제목으로 국제학술대회의 기조강연 8으로 초대되어 발표하는 영광까지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졸시 「해무」는 어느새 나의 대표시가 되어 버렸다.
나는 김성국 교수를 형상화한 시 한 편을 쓰고 싶었다. 오랫동안 벼르다가 2018년에야 겨우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발표하였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가 잡종이었다
잡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저쪽과 이쪽을 모두 친구로 삼고 싶어
너도 자유, 나도 자유였던 처음
떠나온 곳을 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주어진 것이 빈손뿐이던 출항은 설레었다
살아 있음은 경건하고
개인은 자연에서 왔으므로 자유이며 하늘이라
사람을 사랑하여 사름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닷가에서 바다를 보며 바다가 되고 싶었던 사람
해적처럼 붉고 더운 피를 가진 자유의 수행자가 있었다
35세 연상의 허유 선생이 대단하다, 존경한다 했던
높고 먼 시선을 가진 오롯이 키 큰 사람 하나
부름에 응답하는 푸른 사람은
선혈 같은 동백꽃이 되어 밤새도록 피었다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해방의 바다를 꿈꾸며
바람을 가르며 잘라 온 한 떨기 수평선을
입춘 무렵이면 펼치고 또 펼쳤다
마침내 소리가 되어 먼 들판을 가로질러
눈물겹게 다가오는 것은 모두가 잡종이었다
세계의 빛이 모이는 남쪽 바닷가
잡종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졸시,「아나키스트 김성국 교수」 전문 9
이 시에 등장하는 허유 선생은 하기락 교수이다. 김성국 교수는 하기락 교수의 아나키즘을 계승하는 유일한 적통이고 하기락 교수는 생전에 35세 연하인 김성국 교수를 극찬하였다. 하기락 교수가 일생 동안 쌓아 온 양대 작업인 철학과 아나키즘 중에서 그 반에 해당하는 아나키즘을 김성국 교수가 계승한 것이다.
나는 하기락 10교수의 말제자이다. 그는 한국 현대철학의 제1세대 철학자로서 최고봉의 족적을 남기신 분으로서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다. 선생은 과거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던 고 박종홍 선생과 더불어 한국철학계의 쌍벽으로 불렸다. 지행합일은 물론, 만년까지 노동운동을 하다가 향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이 운명한 1997년 2월 3일에도 기관지 <평협>을 울산공단 지역에 배포하기 위해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나서다가 마당에 쓰러져 이승을 떠났다. 나는 당일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실무 총괄 11을 맡아 경북대 인문대와 영남호텔 객실에 추진 사무소를 열었으며 대한철학회장으로 4일장을 입장(入葬)하였다. 전국 최초의 학회장이었다. 장례위원회 고문으로는 경북대 총장을 역임한 한명수 교수, 구상 시인, 설창수 시인 등을 모셨다. 동년 2월 6일 08:00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봉행된 영결식에서 나는 자작 조시를 낭독하였고 영결식 사회는 뒤에 원광대 총장을 역임한 김도종 교수가 맡았다.
그 후 5년이 지난 2002년 6월 8일에 전국의 철학교수들이 성금을 모아서 하기락 교수의 고향인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공원에 학덕비를 세웠다. 문인으로는 구상 시인과 김춘수 시인이 성금 모금에 참여하였다. 비문은 내가 짓고 비명은 효정 채수한 교수가 썼다. 비석의 후면에는 일대기를 넣고 전면에는 명문을 넣었다. 전면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한 손에 실존적 자유의 깃발을,
다른 손에 인간적 해방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
일생을 통한 뜨거운 열정으로
이론과 실천을 하나로 어울러
이 나라 현대철학의 제1세대 학자로서
최고봉을 이루셨던 분,
이 곳 안의 출신의
허유 하기락 선생이시다.
비석 후면의 일대기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다.
실로 선생은 세우신 학문과 닦으신 실천이 높고 맑아 고결하셨으며 곤궁한 자 허약한 자의 편에서 매사를 생각하셨고 산과 자연을 좋아하시어 순정(純正) 순일(純一) 순전(純全)한 기품으로 청빈한 한 생을 사시면서 한국 현대철학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셨으며 실존적 자유와 인간적 해방의 실현을 위해 구도의 길을 걸으셨으니 그 뜨거운 학구정신과 강인한 실천의지를 추모하는 후학과 후진들이 이 유서 깊은 땅 안의공원에 돌 하나를 세워서 그 빛나는 삶을 길이 전하는 바이다.
하기락 교수는 아호를 허유(虛有)로 썼다. ‘빈 있음’이란 뜻이다. ‘없음으로서의 있음’, ‘항시 비워둠으로서의 가득함’, ‘허(虛)의 현실 저편에 빛나는 유(有)의 이상’에 다름 아닌 말이다. 존재를 증명하고 구도를 추구하는 말로서 이보다 더 철학적인 말이 있을까. ‘허유’는 그 자체로 존재론적이고 변증법적이다. 실사와 이법의 종합을 세계로 본 N. 하르트만의 존재학이나 “존재는 무(無)이다(Das Sein ist das Nichts)."라고 설파한 헤겔의 변증법과도 직결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은 존재(有)의 해명에 주력하고 동양철학은 공허(無)의 해명에 주력한다고 보았을 때 선생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을 염원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선생의 생전 마지막 저서가 크라운판 719쪽의 방대한 저서 『조선철학사』였음을 고려하면 동서양 철학을 아울러서 종내는 한국철학으로 수렴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현실적인 사람들이 명리와 재부와 일신상의 안일을 추구하는 세태 속에서 허유 선생은 시류에 영합하지 않았다. 소외되고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세운 높은 철학적 이념을 현실 속에 실현시키고자 평생을 바친 실천인이다. 자유와 평등을 하나의 목표로 삼은 그는 어둠을 밝히는 철학자이자 인격의 근원적 해방을 위해 한 몸을 불태운 아나키스트였다. 하기락의 사상과 삶을 조명한 김춘수의 시 「허유(虛有) 선생의 토르소」, 「제18번 비가(悲歌)」 등이 전해진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제2왜관교를 건넌다. 다리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강의 상류를 조망하면 멀리 인도교와 왜관교, 기차 철교 너머 칠곡보가 보이는 먼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람이 센 날은 모자가 날리기도 한다. 나는 걸을 때 비교적 편한 복장을 한다. 겨울에는 방한복과 털모자와 방한 장갑을 착용하고 여름에는 타이츠와 반바지와 쿨링 토시와 자외선 차단 마스크를 한다. 여름용 모자는 주로 밀짚 중절모이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선글라스를 착용하며 항시 지참하는 호신용 소품도 있다. 삼단봉과 가스 스프레이와 전기충격기가 그것이다. 젊은 날은 태권도와 검도 유단자라는 자신감이 있어 몸으로 막아 나를 보호할 수 있었지만 노년인 지금은 몸의 기능이 떨어져서 그것이 여의치 않다. 그래서 장비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스프레이와 전기충격기는 말 그대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호신용이고 삼단봉은 개를 퇴치하기 위한 것이다. 간혹 목줄을 길게 늘여서 착용하거나 아예 착용하지 않은 애완견이 내게 접근할 때가 있다. 제법 큰 맹견이 입마개도 하지 않고 으르렁거리며 다가오기도 한다. 이때 삼단봉을 뿌려서 뽑아 들고 개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번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요즘은 버려진 개가 들개가 되어 무리 지어 배회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필요한 것이 삼단봉이다. 칸트는 산책길에서 고양이를 겁냈다는데 나는 개가 두렵다.
250년 전 칸트는 프레겔강 변을 걷고 230년 전 괴테는 마인강 변을 걷었는데 나는 지금 낙동강 변을 걷는다. 극복할 수 없는 서로 다른 시간대이지만 지구과학적인 큰 시간대에서는 어쩌면 엇비슷한 지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대는 중요하지 않다. 강변을 걷는다는 사실, 걸으면서 인간과 자유와 평등을 사유하고 세계와 해방과 평화를 생각한다는 사실,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아 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세계를 질서 지우고 인간의 본질을 밝히며 우리 속의 수많은 창고에 숨어있는 미지의 보석들을 캐내는 작업이 바로 물가를 걷는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는 이전의 빛을 모두 사라지게 하고 다가오는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춰준 철학자이다. 괴테는 대문호이며 과학자, 정치가, 법률가, 기업인, 여행가였던 사람이다. 문호로서의 괴테의 업적과 명성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흔히들 칸트를 저수지에 비유한다.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이 칸트로 흘러들고 칸트 이후의 모든 철학이 칸트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괴테는 인류 역사의 진행 과정에 있어서 문학이나 인문학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한 최고봉으로 남을 사람이다. 나는 칸트나 괴테에 감히 비할 수 없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걸으면서 이루었다’는 그들의 방법은 따르고 있다. 내가 쓴 대부분의 시들은 왜관 낙동강변을 걸으면서 착상이 되고 구성이 되었다. 걷다 보면 막힌 말이 물 흐르듯이 걸어 나오고 말의 집이 지어지는 것이다.
칸트의 산책길은 불후의 일화를 남기고 있다. 태어난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칸트는 매일 오후 대학 연구실에서 나와 시가지를 거쳐 프레겔강변을 걸었다. 그의 철학이 정확성과 체계성으로 단단하게 구성되어 있듯이 그의 산책 또한 규칙성으로 이루어졌다. 얼마나 정확한 산책이었으면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시계를 맞추었다고 하지 않는가. 칸트는 산책에 지각한 일이 딱 두 번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신문을 보느라고, 또 한 번은 루소의 『에밀』을 읽다가 너무 집중해서 시간을 놓쳤다고 한다. 이성을 존중하고 평화를 사랑했던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2차 대전 후의 UN 창설의 기본 정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번도 떠나지 않은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는 2차 대전 후 포츠담회담에 따라 소련연방에 편입됨으로서 그가 태어난 도시와 재직한 대학의 명칭조차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제2왜관교를 건너서 강변을 따라 북쪽 방향으로 걷는 길은 기산면 지역으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좌우로 도열한 황톳길이다. 이국적이다. 1Km에 조금 못 미치는 짧은 길이지만 봄에 돋기 시작한 초록 잎들이 여름에 무성했다가 가을이면 붉은 갈색으로 단풍이 들고 낙엽으로 진다. 겨울에는 나목으로 지난다. 어느 계절이건 이등변 삼각형의 첨탑으로 뻗어 오른 수형이 아름다운 건 매 마찬가지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말로만 듣던 독일의 <철학자의 길>과 <괴테의 산책로>가 떠오른다. 하이델베르크 네카강 건너편에 있는 철학자의 길은 헤겔, 하이데거, 야스퍼스, 막스 베버가 걸었던 길이다. 칸트는 고향을 떠난 적이 없으므로 이 길을 걸어 보지 못 했을 것이다. 괴테의 산책길은 11km 정도이며 3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인데 프랑그푸르트 마인강 우안을 따라 가다가 아이젤너 다리를 건너서 유럽의 심장부라고 불리는 비즈니스 중심지를 지난다고 한다. 독일 인문학의 발상지라고 한다. 일본 교토, 캐나다 토론토, 샌프란시스코에도 철학자의 길이 있다. 한국에도 서울 서초구 양재천에 칸트의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산책길은 과학적 실험의 길이 아니라 인문적 사유의 길이기에, 유랑하는 인간의 속성을 충족시켜 주는 공간이다. 길을 가면서 길을 찾는 인간, 유랑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인간, 걸으면서 세계로 미래로 나가는 인간의 인간다움이 바로 이러한 산책길에 있다.
메타세쿼이아 길이 끝나면 잠시 이팝나무 길과 대나무 길이 이어지다가 그 다음 약목면 관호리 지역으로 들어서면 데크로 조성된 잔도가 나온다. 강을 따라 강물 위로 높게 설치된 구조물이다. 산기슭에 비스듬히 선 물버들, 수양버들, 뽕나무의 가지들이 지나는 사람들의 머리 위까지 드리워져 있다. 오른쪽 아래로는 출렁거리는 물결이 모래톱에 철썩이고 있다. 중간쯤에 아늑한 휴식 공간이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몇 그루 늙은 수목의 무성한 그늘 아래 강물 위에 잔도를 넓혀서 설치한 데크가 있고 10여 명이 쉴 공간을 따로 만들어 난간을 세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양 옆으로 난 잔도는 굽어서 나가고 발아래는 강물, 등 뒤는 산기슭이다. 포근하고 안온하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나는 거기를 ‘그녀의 집’이라고 나 혼자 이름 붙여 부른다. 여기까지 오면 걸음을 멈추고 물을 마시면서 그 품속에서 느긋하게 쉰다. 어느 여인의 품이 이렇게 아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대개 혼자서 이 분위기를 즐긴다. 뽕나무에서 오디가 떨어지는 오월이면 갓 떨어진 오디를 주워서 먹기도 하지만 발에 밟혀 뭉개지는 것이 부지기수라 가히 발 디딜 틈이 없어진다. 조금 지나면 약간의 오르막도 있지만 요즘 말로 뷰가 정말 좋다. 오른편 전방으로 강을 가로 지르는 인도교의 상판 트러스트가 선과 조형미를 뽐내며 그림처럼 아름답게 서 있다. 각진 돌로 쌓은 오래된 교각도 일정한 간격으로 도열해 있어 은근히 친근하고 정감이 간다.
인도교 너머, 경부선 철로 상하행 철교를 너머 멀리 칠곡보가 보이고 그 너머 KTX 경부선 선로가 있는 위치가 가늠된다. 저리로 죽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낙단보와 상주보가 있다. 낙동강 700리의 시발지인 거기 상주 시에는 경천섬이 있고 낙동강문학관이 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우리 시대의 인격과 지성의 표상인 박찬선 시인이 계신다. 호를 근곡(謹谷)으로 쓰는 선생은 겸손과 인자의 표상이다. 상주와 낙동강과 동학을 노래하는 높은 산, 박찬선 선생의 시집 『우리도 사람입니다』의 해설을 쓰면서 나는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했다.
박찬선 시인은 시를 모시고 그의 시는 사람을 모신다. 어미는 새끼를 품고 신은 사람을 품는다. 두보를 시성이라 이르고 이백을 시선이라 칭한다면 시로서 사람을 모시는 박찬선 시인을 우리는 시의 신인(神人)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시의 신인(神人)은 시신(詩神)이면서 시인(詩人)이다. 시신 박찬선 시인의 시정신은 고결하다. 외로이 높고 맑아 밤하늘의 별처럼 빛난다. 시의 신인은 낮은 곳에 처한 자를 떠받들어 밝고 높게 모신다. 바로 동학의 정신이다. 혁명은 정신에서 나온다. 성공한 혁명은 권력으로 변질되지만 미완의 혁명은 정신으로 남아 마침내 신앙이 된다. 미완의 혁명은 미완이기에 영원하다.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은 모두 하나(人中天地一)이니 한민족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천부경이 곧 동학정신으로 이어지고 시신 박찬선이 일가를 이룬 상주와 낙동강과 동학의 시정신으로 구현된다. 시신은 시로서 사람을 하늘로 모신다. 사람이 시고 사람이 하늘이다. 그런 시를 쓰는 박찬선은 시신(詩神)이다. 시의 신(神)이다. 시의 신은 모든 것을 모시고 맺힌 것을 풀며 의미 있는 것을 남긴다. 모두가 눈물이다.
― 졸고 해설, 「사람을 모시는 신인神人의 시」 마지막 단락 12
2016년에 상재한 나의 졸 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에서 나는 헌사를 썼다.
이 시집을
평생에 걸쳐
높은 고을 상주와 낙동강과 동학을 노래하는
박찬선 시인과
멀고 외로운 길 위의 한 그루 푸른 솔
아나키스트 자유주의자
김성국 교수에게
진정을 다해 바친다. 13
나는 박찬선 선생에 대한 시도 한 편 쓰고 싶었다. 존경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던 중 2018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발표하였다.
낙동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하늘에는 뭉게구름 인다
바람 불면 일어서는 억새풀,
흘러 낮은 곳에 처한 자는 강을 섬기고
땅에 발 딛고 하늘을 머리에 인
모 심고 밭 가꾸는 사람이 참 사람이라
하늘 아래 하늘이 되는데
하늘수박 익는 천봉산
후한 자락의 근곡 선생이
다함없이 높은 고을
상주(尙州)를 꺼내 닦는 새벽
은척동학교당의 교인들은 줄지어 길 나서고
북천에는 감꽃 떨어진다
흐르는 강물 위로
여름 내내 뚝 뚝 땡감 떨어진다
―졸시,「근곡 선생의 달빛 조상(彫像)」 전문 14
내친 김에 유년을 소환하는 박찬선 선생의 그림 같은 시 한 편을 떠올린다.
갯밭에 참외가 익는 여름에는
어머니와 외가엘 갔습니다. 타박타박 걸어서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가 흘러내렸습니다.
외답 지나 성골 너머 신촌
쉬엄쉬엄 부채질하듯 불어오는 강바람은
얼음과자처럼 시원했습니다.
나루에서는 말소리가 아주 잘 들렸습니다.
강 건너 사람들의 주고받는 말도 잘 들렸습니다.
갑자기 귀가 크게 열려진 듯 했습니다.
강물은 머문 듯 조용히 흘러갔습니다.
처음에는 배를 타는 일이 겁이 났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거나
뱃전을 움켜잡고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뱃전에 닿는 푸른 물살이 무서웠으나
사공의 당당한 모습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밀짚모자를 쓰신 얼굴에 물빛이 어른거렸습니다.
사공의 긴 지매 소리는 물소리입니다.
조심스레 물에 닿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소리입니다.
배를 타고 앉았으면 마냥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오른 곳은 멀어지고 내릴 곳은 가까워집니다.
배를 타고 있는 시간이 무척 길고
이 쪽과 저 쪽이 무척 멀었습니다.
배 삯도 받지 않았습니다.
병성댁 외손자라면 다 통했습니다.
물줄기처럼 구비 돌아드는 옛길
상주시 중동면 오상리는 멀기만 했습니다.
멀리 흐르는 강물처럼
―박찬선 시,「강창나루」 전문 15
맑고 곱고 아름다운 시다. 웅숭깊은 비올라의 선율이 들려오는 듯한 시다. 그가 떠올리는 유년은 지나간 시공간이 아니라 상주하는 시공간이다. 오상리 가는 옛길은 예전에 지나갔지만 지금껏 머물고 있다. 실사하는 시공간이 아니라 직관하는 시공간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나루에서는 말소리가 아주 잘 들린다. 배도 사람도 소식도 막힘없이 건너다니기 때문이다. 뱃전에 닿는 푸른 물살은 무섭지만 물에 빠지지 않으면서 물을 가장 가까이 대하는 방식이다. 물살을 가르는 배는 세파를 가르는 실존의 전진과 다르지 않다. 방향을 잡아 주는 지매(키)가 내는 소리는 물소리와 하나가 된다. 어느 소리가 어느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는 않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소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배를 타고 앉았으면 마냥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오른 곳은 멀어지고 내릴 곳은 가까워집니다.> 이 부분이 가히 절창이다. 시인의 예리한 직관이 실존적 삶의 본질을 해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은 삶의 현장이고 배와 사공은 삶의 주인공인 실존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면서 한결같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지나온 생은 멀어지고 다가올 종점은 가까워지고 있다. 어린 나이에도 투명한 직관력과 원융한 사유력을 갖춘 병성댁 외손자와 화자와 시인은 하나로 꿰여지고 있다.
나는 물가를 걷는다. 혼자서 걷지만 시공간을 넘어 영혼이 맑은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구상 시인, 박찬선 시인, 하기락 교수, 김성국 교수, 김인숙 시인과 함께 걷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칸트, 헤겔, 괴테, N. 하르트만, M. 하이데거, 횔덜린과도 함께 걷는다. 사람은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이지만 정신의 영역은 경영하기에 따라서 외롭지 않을 수 있다. 도서관 속의 고독은 고독이 아니라 풍요일 수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상주시와 낙동강문학관에 하나의 제언을 드리고 싶다. 상주시 중동면 낙동강문학관 앞에는 절경의 낙동강 산책로가 있다. 회상나루에서 출발하여 낙강교와 경천섬을 지나 도남서원에 이르는 상주 낙동강을 동서로 횡단하는 산책로이다. 이 길을 <시인의 길>이라 공식적으로 명명하고 세계적인 명소로 가꾸면 좋을 것이다. 구간을 나누어 <시인의 길>, <예술가의 길>, <철학자의 길>, <화가의 길>, <뮤지션의 길>, <도예가의 길> 등으로 세분해도 좋을 것이다. 길 입구에는 <박찬선 길>을 한 구간 두어도 좋겠다. 박찬선 시인은 칸트와 비유될 수 있는 인물이다. 한평생 고향을 지켰다는 것도 그러하고, 고려 시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상주문학이 박찬선에게로 흘러들고 이후의 모든 문학이 박찬선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상주문학의 저수지일 뿐만 아니라 경북문학의 저수지이며 한국문학의 저수지이기도 하다. 문인이나 예술가의 이름을 가져와 도로명으로 정해 놓고 사용하는 도시는 이미 국내에도 여러 곳이 있다. ‘상주(尙州)’의 ‘상(尙)’ 자는 ‘높다’는 의미가 있고 ‘주(州)’ 자는 ‘고을’을 의미한다. 글자 그대로 ‘높은 고을’인 ‘상주’가 ‘상주다워지는 길’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시인의 길>, <박찬선 길>을 걷기 위하여 인터넷으로 사전에 신청한 전국의 인파가 몰려와서 경천섬의 절경을 즐기고 상주의 높은 정신을 접하면서 회상나루에서 숙박을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일이 또 있겠는가.
나는 인도교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너서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은 지쳐 있다. 피곤하지만 몸과 마음을 비워 개운하다. 가득 차 있으면 답답할 텐데 몸도 마음도 숨 쉬기가 훨씬 편해졌다. 인도교도 그럴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의 시간대에선 숨이 막혔을 텐데 다른 시간대인 지금은 강물 소리를 들으며 적막에 들어 있다. 크러스트 군데군데 남아 있는 포탄 자국과 탄환 자국도 거기 그대로 남은 자리에서 그날을 말없이 반추하고 증거한다.
인도교를 건너며 인도(人道)를 생각한다. 여기서의 ‘인도’는 당위가 아니라 존재이며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실존적이다. ‘인도(人道)’는 ‘사람의 길’이다. 사람이란 무엇이며 길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불사름’이다. 태어나면서 불붙인 불꽃을 평생 꺼트리지 않고 이어간다.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면 불꽃이 꺼진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그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불꽃처럼 뜨겁게 자신을 태우다가 이승을 떠난다. 길이란 무엇인가? 길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길의 의의는 길을 가는데 있다. 길이 있어 길을 가고 길이 끊어지면 길을 이어서 간다. 길의 끝에는 으레 목표가 있다. 길의 끝까지 갈 수 있다면 목표에 도달해서 좋은 것이고 가지 못한다면 가야할 곳이 아직 남아 있어 좋은 것이다. 길은 살아있음을 증거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길 위에서 살아 있다. 길 위에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 길 위에 있는 자는 길 위에 있으므로 살아있는 것이다. 길이 끝나면 삶도 끝난다. 죽음은 길에서 내려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의 길이 끝나고 목표가 달성되면 다른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새 길을 나선다. 그런 의미에서 길은 정지성이 아닌 운동성이며 정적이 아니라 동적이다. 완료형이라기 보다는 영원한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길이 길로 이어지는 연유이다.
― 졸고 칼럼, <도(道)를 찾아 길을 나서다> 부분. 16
길은 가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人道)’은 ‘인생길’이며 ‘초목이 살아가는 길’은 ‘초목길’이다. 누구든 그의 길을 간다. 그만의 삶의 길을 치열하게 걸어간다. 이 길은 앞으로만 열려 있으며 뒤로 되돌아 갈 수가 없다. 앞으로만 열린 길도 한 걸음, 한 걸음 나갈 수만 있고 한꺼번에 건너 뛰어 미래로 갈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한계 속에 있으며 연약하다. 그러나 과거나 미래로 갈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상상으로 먼저 가볼 수 있고 과거는 회상이나 반성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인간만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위대하다.
인도교를 건너면 집이 있다. 집이란 무엇인가? 집은 어머니다. 인간은 누구든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조금 넓혀서 생각하면 세상 만물이 모두 그러하다. 만물은 모두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도 있고 심리적 공간으로서의 집도 있으며 영혼적 공간으로서의 집도 있다. 이 모든 집은 사랑의 집으로 귀결된다. 사랑의 집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다. 미래의 집은 내일 다시 상상하자. 현재의 집은 지금 들어간다. 들어가면서 과거의 집을 회상한다. 아름답다.
횔덜린 17도 회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멀리까지 가서 힘들게 얻은 가정교사 자리에서 3개월 남짓 만에 해임된 그가 1801년 5월 10일 남프랑스의 보르도를 떠나 2개월 간 걸어서 고향인 독일 뉘르탕겐으로 돌아가던 길에 스친 남ㆍ중 프랑스의 가론느 강과 돌도뉘 강의 가파른 강 언덕과 여울과 그 위의 참나무와 은백양나무의 모습을 회상 18한다. 프랑스에서 독일로 들어가는 관문 슈트라스부르크로 가는 어둡고 긴 숲속 고갯길을 넘은 그는 4년 뒤에 마침내 그의 가난하고 어둡고 긴 마지막 단칸방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거기 상주하였다. 그는 그의 시 속에도 상주하였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를 해명하는 자신의 존재론 건설에 적지 않은 자양분을 공급한 횔덜린을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횔덜린은 가난한 시대의 시인의 선행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의 어떠한 시인도 그를 추월할 수는 없다. 선행자는 미래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도래하는 것이다. 19
“상주(常住)하는 것은 그러나 시인이 건설한다.” 20상주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집이다. 시(詩)가 집이다. 집은 어머니이고 시는 고향이다. 산책을 끝낸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시로 돌아간다. 그러나 나의 집인 <시의 집>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영원한 미완일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하루치의 산책인 또 한 번의 유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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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1949~ ) : 경북 왜관 출생, 1984년 《현대시학》 추천완료. 철학박사(대구한의대 교수, 대한철학회장, 한국동서철학회장, 새한철학회장 역임), 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 외, 카툰에세이집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 저서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외, 논문 「시의 정신 치료적 기능에 대한 철학적 정초」 외 다수. 한국문학상ㆍ경북문학상ㆍ경북예술대상 수상. 한국문협 이사ㆍ경북문협 회장 역임. [본문으로]
- 현재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와 약목면 관호리를 연결하는 낙동강의 교량이다. ‘칠곡 왜관 철교’, ‘인도교’, ‘낙동강 구 철교’, ‘호국의 다리’로 불린다. 일제가 1905년 군용 단선 철도로 개통한 경부선 철도교로서 약목역과 왜관역 사이에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철교로 건설되었다. 1941년 11월 30일 이곳에서 북쪽 100m 지점에 길이 510m의 복선 철교가 가설되면서 이 다리는 경부선 국도로 사용되어 왔다. 이 철교는 한국전쟁(1950~1953) 시 북한군과 유엔군의 주력 부대 사이에 격전이 전개된 중심 지역에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이 조금 지난 때인 1950년 8월 3일에는 왜관 소개령이 내려졌고 전체 주민은 피난길에 나섰다.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같은 날 오후 7시 40분 경 미군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의 명령으로 왜관에서 약목 방향의 제2 경간이 폭파되었다. 이때 다리를 건너다 희생된 피난민들의 참상은 아비규환이었다는 구전이 있다. 이후 같은 해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돌파하던 날 왜관에도 피난민들의 복귀 명령이 내려졌는데 이때까지 이곳 낙동강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면서 아군과 UN군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오늘날에는 ‘호국의 다리’라고 명명되고 있다. 1953년 휴전 후 목교(木橋)로 임시 복원된 후 차량과 사람이 함께 내왕하는 인도교로 사용되었다. 교폭 4.5m의 1차선 다리로서 장차(오일장이 서는 곳으로 상인들의 물건 보따리를 실어나르던 화물차)가 간혹 지나다녔지만 차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주로 사람들이 걸어서 이용했던 다리여서 인도교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에 홍수 피해를 입어 교각이 유실되자 통행이 전면 차단되었다. 이후 1991년 8월에 보수작업에 착수하여, 전면 복구가 완료된 1993년 2월 10일부터 차량 통행은 금지되고 사람의 통행만 허용하였다. 이때 설치한 동판으로 제작된 교명판(橋名板)에는 ‘낙동강구철교’로 표시 되어 있다. 4대강 사업이 진행되던 2011년 6월 25일에 집중 호우로 서쪽 끝부분의 교각 1개와 상판 2개가 유실되었으나 2013년 4월 30일에 완전 복구하였다. 상판 크러스트 철판에는 아직도 크고 작은 포탄과 탄환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2008년 10월 1일에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으며 등록문화재 제406호(칠곡 왜관철교)가 되었다. [본문으로]
- 서예가이자 전각가인 여초거사(如初居士) 김응현(金膺顯:1927~2007) 선생의 작품이다. [본문으로]
- 원래는 ‘돌밭나루터’였는데 왜관이 생김에 따라서 ‘왜관나루터’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강의 동쪽인 왜관읍 쪽으로는 왜관(돌밭)나루터가 있고 강의 서쪽인 기산면 쪽에는 강정나루터가 있어서 나룻배가 오고 갔다. [본문으로]
- 김성국(1947~ ) :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인디애나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박사, 부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교수 정년퇴임, 녹색도시부산21추진협의회 공동회장, 부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한국사회학회 회장,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역임. [본문으로]
- 김성국, 『잡종사회와 그 친구들』 -아나키스트 자유주의 문명전환론-, 서울:(주)이학사, 2015.12.23. 892~893쪽. [본문으로]
- 전체 분량 11연 26행 977자.(이 글에서는 시 본문을 인용하지 않았음) [본문으로]
- 2019년 지역사회학회·해양사회학회 춘계 국제학술대회, 2019.05.17.금.~05.18.토. 부경대학교 장보고관 3층 리더십홀, 기조강연 2, <해양시(詩) 「해무(海霧)」의 철학적-詩문학적 고찰>(200자 원고지 68매 분량), 프로시딩 177~187쪽. 이날 기조강연은 2명이 하였는데 다른 한 사람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인 임현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이 하였다. [본문으로]
- 계간 <시와 산문> 2018 여름호(통권 98호) 76~77쪽. [본문으로]
- 하기락(1912~1997) : 경남 안의 출생, 와세다대학 문학부 철학과 졸업, 경북대학교 철학박사, 대구대(영남대 전신), 경북대, 동아대, 계명대 교수 역임, 광주학생의거 가담(1929), 항일 학생 운동(1939), 노동 운동, 샌프란시스코 아나키스트 대회 기조연설(1989), 국제 아나키스트 연맹 한국대표, 소비에트 과학 아카데미 공식초빙 방소 강연(1990), 세계평화협회 이사장, 〈독립노동신문〉 편집인, 〈평협〉 편집인, M. 하이데거를 연구하다가 N. 하르트만 연구로 전공을 변경함, 한국칸트학회(대한철학회 전신) 창립(1963), 『조선철학사』 등 철학 저서 12권, 『존재학 법주론』 등 철학 역서 13권,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역사』(영문판) 등 아나키즘 관련 저서 7권 등이 있다. [본문으로]
- (고 허유 하기락 박사 대한철학회장 업무분장) 총괄:김주완, 접수:유철, 대언론 업무:장윤수 정낙림, 행사준비(회계) 전반:이윤복, 연락:김윤동 문성학 김용섭 허재훈, 식순 약력소개 원고:이남원, 영결사 원고:이우백, 조사 원고:조육연(장윤수 퇴고), 조시:김주완 등 대구권의 철학 교수들로서 실무진을 꾸렸다. [본문으로]
- 박찬선 시집, 『우리도 사람입니다』, 시인동네 시인선 068, 서울:문학의 전당, 2016.11.30., 147~148쪽. 이 시집의 발문은 정진규 시인이 썼다. [본문으로]
- 김주완 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 현대시세계 시인선 066, 서울:북인, 2016.04.07. 4쪽. [본문으로]
- 계간 <시와 산문> 2018 여름호(통권 98호) 74~75쪽. [본문으로]
- 박찬선 시집, 『물의 집』, 상주:한일사, 2021.09, 23~24쪽. [본문으로]
- 김주완 칼럼, <도(道)를 찾아 길을 나서다>, 칠곡포럼 회보 《풍경소리》 제5호, 2019.04. 38~39쪽. [본문으로]
-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őlderlin, 1770~1843) 독일의 시인, 몹시 가난하게 살다가 35~6세(1805~6) 때 정신착란을 일으켜 그 뒤부터 튀빙겐의 한 단칸방에 갇혀 있다가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횔덜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 있다가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횔덜린 연구와 여러 차례에 걸친 강연을 통해 재조명되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해명’의 존재론 건설에 횔덜린의 시는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횔덜린 시, 「회상」 1연. [본문으로]
- M. 하이데거 저, 소광희 역, 『시와 철학』, 박영사, 1975. 275쪽. [본문으로]
- 횔덜린의 시 「회상」의 마지막 행.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