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엘리베이터 안의 20초 / 김주완
아무도 없었다. 벽에 갇힌 눈 감은 눈을 눌렀다. 불투명한 아크릴판 아래로 네모난 그것이 충혈된 눈을 뜨자 물방울 구르듯 음계를 밟아 내린 빈 공간이 열려지고 있었다. 슬그머니, 외계의 내장內藏을 오르내리는 단단한 두레박이 벌려지고 있었다.
선녀도 나무꾼도 아무도 없었다. 편하다! 누가 성큼 베어 무는 시커먼 입이라고 했던가, 광활한 선경의 그늘에서 자존도 자멸도 비굴도 자조도 버릴 것은 모두 버리며 소요한 하루의 탕진, 무중력의 무구해진 육신은 한 줄기 동아줄에 매달린 습관성 귀환을 서두른다,
내 문을 닫아도 세상은 흐르고, 살아봐야 안다던 어머니의 하늘이 송풍구의 바람 끝에서 날리고 있다. 편하다! 아무도 없는 밀폐된 공간은 편하다. 내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만큼 편하다, 방해받지 않는 오로지 홀로의 시간, 튼튼한 성곽 속의 구겨진 휴지는 편하다, 참으로 기계적인 기계의 일부분으로 더불어 있음으로 안락하다,
지겨운 완전무장이 어깨에서 내려오고 끊임없는 공격을 감행하던 손은 비로소 화평의 자유를 얻는다, 눈ㆍ코ㆍ귀ㆍ입 모두는 각각이 되고 단지 홀로가 된다, 한달음의 자유가 된 홀로는 홀로여서 가벼웁다, 가벼움이어서 편안함이다, 안락이다,
그 아닌 무엇이 되고자 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슬프지 않아도 된다, 진실로 어긋남은 진실로 바로 맞음이다, 이승 저편의 저승이 이러할까, 오로지 홀로이며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 이 같은 안락일까,
20초가 지나고 또 한 번의 차고 긴 종소리가 울리고 안온한 벽이 갈라지면 이 편안은 깨어져야 한다, 거기 12층의 낭하엔 갑각류의 육식동물이 떨어뜨린 번쩍이는 욕망의 미생물이 갈증으로 허덕일 것이다.
내 무구한 육신은 나서야 한다, 그들의 구물거리는 전장으로 운명적으로 던져져야 한다, 절대편안의 이 안락이 부서져야 한다, 해체되어야 한다, 더 이상 버릴 것이 없는데 인륜은 인륜대로 또 요구할 것이 있으리라,
가장 현실적인 귀환의 종착지에서 응전할 실질적 힘이 내게는 없다. 아직은 은둔하기로 한다, 내 은밀한 칩거의 음습한 동굴이 매달린 이 공중에서, 어떤 강제도 아직은 침범하지 못하는 공중의 성곽에서 가장 짧은 시간을 가장 길게 늘이기로 한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마침내 엎드린 날들이 지나면 지상의 어느 날짐승과 들짐승보다 더 진하고 독한 초유의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앞선 자ㆍ풍요한 자ㆍ키 큰 자가 없는 지금, 오로지 홀로인 이곳에서 나의 병사를 간추려야 한다.
더불어 살고자 하여도 돌아서 가버린 그들을 향해 내가 던질 돌팔매는 무엇인가, 충분하다는 것은 기실 늘 부족함인데, 반대 명제의 진위를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여기는 지금 아무도 없고 그리하여 내가 편하다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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