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데미쓰 루쏘스의 집시 레디* / 김주완
데미쓰 루쏘스가 노래하고 있었다,
겨울 저문 분지의
산비탈에서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우리의 시간 근처
머릿결에서 진한 샴푸 향을 뿌리며
집시 레디가 웃고 있었다, 입을
벌리고
산수유 붉은 목젖 부근
무너짐의 징조를 은폐한 채
살아있음을 증거했다, 떠남으로써
섣달 그믐밤을 세워 두고 우리는
포인세치아 아픈 잎이 시드는
마침내 현장을 보고 말았다.
작고 흐린 전방을 통해
역사적 80년대가 만든
마지막 의상들의 무리가
눈먼 만족과 도취의 찬란한 문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현란한 네온의 어둠 아래로
혁명가도 부를 줄 모른 채
빈속의 견고한 헛말들을 부려 놓고 있음을
마침내 절망을 보고 말았다.
집시 레디처럼 은밀히,
밀리는 물결처럼
깊이 앓는 시대의 비탈에서
우리는 젖어들고, 그래도
여전히
데미쓰 루쏘스는 노래하고 있었다.
* 집시 레디는 데미쓰 루쏘스가 부른 팝송이다.
'제1~7 시집 수록 시편 > 제3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벽돌 / 김주완 (0) | 2011.03.14 |
---|---|
밤 / 김주완 (0) | 2011.03.14 |
잊혀진다는 것 / 김주완 (0) | 2011.03.14 |
무화과 / 김주완 (0) | 2011.03.14 |
자리 / 김주완 (0) | 2011.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