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시 해설 696

<시> 청녀/김인숙

청녀(靑女)* / 김인숙  청녀가 오는 아침이면 하얀 면도날이 천지만물에 곤두선다 녹고 싶었지만 녹여 주는 자가 없어 간혹 한여름 냉동고 인부의 눈썹 위에도 앉는 청녀 처음을 처음으로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청녀는 얼음 서린 표정을 보전한다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또 잊어버리면서날마다 변하고 바꾸면서 사는데 살아 있지 않은 자는 살아 있지 않으므로잠 자지 않고유리창 위 꽃잎으로 쩍쩍 피면서청녀는 살아있는 주검으로 꼿꼿하다 떠나가는 가을을 얼리고 사람들을 얼리지만눈처럼 덮거나 눕히는 것이 아니라선 채로 하얗게 사람이 사람을 증거케 한다 청녀는 가시가 아니지만 가시가 되기도 하여 지혜로운 자는 함부로 웃지 않아서 높은 방석을 얻고 청녀를 두려워하는 자는 복이 있으나 어리석은 자는 웃을 때를 몰라 가시에 찔리고..

심촌 이필주 문집 서시_돌밭에 피는 영원의 꽃/김주완

광주이씨 석전종중, 心村 李弼柱 八旬紀念文集, 『돌밭과 因緣』, 대구:대보사, 2024.10.01., 58~61쪽. [서시(序詩)] 돌밭에 피는 영원의 꽃  김주완시인, 철학박사, 대한철학회장, 대구한의대 교수 돌밭은 돌만 있는 밭이 아니라옥(玉) 같은 사람이 나와 옥밭이며학(鶴) 같은 선비 정신이 솟아 강학의 터전입니다백일홍 붉은 꽃잎과청렬한 고드름처럼 반짝이는 지고지순이천년 동안 피는 언덕 위의 꽃밭입니다 동산에 집 이 있어만년을 넘어아침마다 붉은 해가 뜹니다 420세 낙촌 선생이남한산성 임금님을 사모하며해 뜨는 동쪽 매원을 거닙니다 잔설 날리는 대숲을 나와잔가지 창공으로 벋은 회화나무 아래로도포자락 흰 눈처럼 휘날리며강직한 바위로 높이 선 옥안의 영의정401세 귀암의 등 뒤로일곱 빛깔 눈부신 무지..

<시 감상> 시로 읽는 철학/김인숙(시인)_김주완 시, <주역 서문을 읽다> 감상

2018년 봄호(통권 97호) 수록 - 기획연재- 동인의 추천시  [시] 주역 서문을 읽다   ― 경당일기  을묘년乙卯年(1615년) 7월 병오丙午(1일)  /   김주완    400세 조선 경당敬堂이 900세 송나라 정이程頤를 만나는 아침, 어제는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굵은 비의 혀가 만 가지 단서를 일으켜 참과 거짓의 경계를 가르니 지극히 큰 밝음이 어둠을 밀어냈다, 꿈속에서 서애 류 선생을 뵈었다 닭이 울어 새벽에 깨었다, 다시 잠들 수 없어 주역 서문을 읽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걸어 묻는다, 선생의 선생은 말을 콩처럼 골라서 답변을 하는데 분별이 어렵다, 하늘과 땅의 정적이 둥글게 부풀어 일어서고 있다 오래도록 가물다가 비가 내리니 모든 백성이 모를 옮겨 심는데 검은 머리 아이와 흰머리 ..

<시 감상> 되돌아 나오는 슬픔/김선자(시인)_김주완 시,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 감상

2018년 가을호(통권 99호) 수록 - 기획연재- 동인의 추천시 [시]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김주완 강의 서쪽에 그녀의 집이 있네 자동차로는 못가는 길 걸어서 가야만 하네 철교를 지나서 심장을 움켜쥐고 굽이굽이 꺾어들면 휘영청 돌아가는 한적한 길이 있네 인적 드문 하늘길 강길 높이 뜬 둘레길이네 눈 내린 새벽이면 저벅저벅 발자국이 푸른 도장으로 찍힌다네 갓 감고 나온 숱 많은 그녀 머릿결 늘어질 때쯤 보름달 대문은 열려 있지만 조용히 기웃거리다가 밤 깊은 사람은 돌아오네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 성스러운 집은 잡인을 금하느니 스스로 높이 받들어야 존귀해지기 때문이네 몰래 가슴에 담아 오기만 해야 하네 내가 남긴 발자국 조용히 닦아내며 안개처럼 스러지며 돌아와야 하네 집이 아름다운 것은 높이 혼자..

[시] 위지악 이선기인울 외 2편/김주완

2020년 봄호(통권 105호) 수록 [신작시특집] 3편 위지악 이선기인울* /김주완 -음악 노년이 되면서 맑고 높은 음에서 눈물이 난다 청력을 잃은 음악가는 눈물의 높이에 음자리를 그렸을까 동굴 벽을 뚫고 나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어두운 바닥에 부딪쳐 온몸이 부서질 때 비로소 가늘고 맑은 소리가 된다 술대를 튕기면 떨어지는 소리 한 방울 튀어서 귀먹은 가슴에 들어서듯이 안에서 밖으로 베풀면 안은 비워지고 넓어져서 편안해진다 집 안에 빈 하늘이 있고 빈 땅이 있어 그 사이로 해가 들어온다 따뜻하고 곧고 하얀 햇살들이 빈 구석구석을 밝히고 덥힌다 오, 베풂과 들어섬의 성스러움이여 높고 구성진 소리는 귓속의 어둠을 밝히며 가슴의 동공을 후려친다 터져 나온 강물이 굽이치는 설움의 물결 최고의 말은 무언이다..

<시와 산문> 2018년 여름호(통권 98호)_[신작시특집]_근곡* 선생의 달빛 조상(彫像) 외 2편 / 김주완

2018년 여름호(통권 98호)_[신작시특집]_근곡* 선생의 달빛 조상(彫像) 외 2편 / 김주완 김주완 1949년 경북 왜관 출생. 1984 「현대시학」 등단.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그늘의 정체」, 「주역 서문을 읽다」 외. 카툰에세이집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 저서 「미와 예술」,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외. 근곡* 선생의 달빛 조상(彫像)/김주완 낙동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하늘에는 뭉게구름 인다 바람 불면 일어서는 억새풀, 흘러 낮은 곳에 처한 자는 강을 섬기고 땅에 발 딛고 하늘을 머리에 인 모 심고 밭 가꾸는 사람이 참 사람이라 하늘 아래 하늘이 되는데 하늘수박 익는 천봉산 후한 자락의 근곡 선생이 다함없이 높은 고을 상주(尙州)를 꺼내 닦는 새벽 은척동학교당의 ..

이연주 제3시집 <우비>牛屝 - (해설) 프리즘을 통과한 찬란한 스펙트럼의 시편

우비(문학시티 시선집 24)(양장본 HardCover)이연주 제3시집 저자 이연주 출판 문학시티 | 2021.4.20. 페이지수 184 | 사이즈 140*217mm 판매가 서적 10,800원 책소개 표제 시 「우비」는 서정적 감성으로 도덕적 가치의 본질을 노래한 철학 시라 할 수 있다.이연주 시인은 ‘시’라는 그릇에 삶의 풍경들을 담아낸다. 프리즘을 통과한 스펙트럼처럼 시적 굴절을 통해서 나오는 색깔의 분산은 다양하다. 굵었다가 가늘었다가 선명하였다가 몽환적이었다가 진하였다가 여렸다가 하는 색의 띠에는 깊은 사유가 깔려 있거나 따뜻한 사랑이 녹아 있거나 불가적 인연 생기에 이어져 있거나 도가적 초월에 닿아 있다. 세상만사에서 온기를 느끼는 시인은 스스로 만물을 시로 녹이는 용광로가 된다. 어떤 소재나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