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 시집 수록 시편/제3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50

9월을 보내며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9월을 보내며 / 김주완 망초꽃이 지고 달맞이꽃도 졌다. 그 여름이 자나자 몇 개의 무늬를 만들며 자욱한 소리들이 스러져 갔다. 그 해 9월의 그곳은 그러나 남아 있는 섬이다. 뿌리 없이 떠도는 적막한 표류, 무너짐과 흩어짐의 현장 사이로 빈 창 너머 언덕을 내..

소묘 87.5.12.- 어떤 TV 생방송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소묘 87.5.12. /김주완 - 어떤 TV 생방송 - 걸기, 주렁주렁 끼우기 귀ㆍ목ㆍ팔ㆍ손목ㆍ손가락 거기다 머리끝ㆍ어깨끝ㆍ팔굽ㆍ다리굽ㆍ온몸 치렁치렁 귀신처럼 늘어뜨리기, 아무튼 그런 내기였다. 칠하기, 더덕더덕 찍어 바르기 눈ㆍ코ㆍ입ㆍ눈썹 거기다 손톱ㆍ발..

소묘 87.5.31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소묘 87.5.31 / 김주완 「86-88」사이. 아시아와 세계 사이. 사이는 언제나 틈이고 틈은 언제나 좁았다. 좁은 틈에서 끓는 열기는 강한 법. 사람들은 허둥거리고 있었다. 용을 쓰며 용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규칙 아래서 규칙 속에서 규칙에 복종하며 규칙을 용인하..

토종꿀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토종꿀 / 김주완 딸아이가 다니는 여중학교 교실 바깥벽에는 봄철 내 붕붕거리던 토종벌들이 아이들 팔뚝만한 벌집들을 두어군데 슬래브 처마 밑으로 어느새 매달듯이 지었다고 한다. 왜 벌들은 산을 내려와 도회의 중간에다 역사를 하는지 아무도 생각지 못하..

우기雨期와 월식月蝕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우기雨期와 월식月蝕* / 김주완 임진강에 비가 내리고 자유의 다리에 비가 내리고 참전용사의 탑이 비를 맞고 망향단이 비를 맞고 임진각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삭아 내리는 철마의 녹물 같고 육신 같고 숨결 같고 얼굴이 검은 키 작은 유우엔군이 비를 맞고 임..

불에 관하여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불에 관하여 / 김주완 1 태초의 모반은 불 아니가. 불을 만지면서 추위를 배운 거 아니가, 어둠도 절망도 두려움도 그리하여 살아나고, 잠든 시간이 깨어나 강가로 나가고, 그 때 내리던 비,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닌 환상의 비가 벼랑 끝으로 밀려갔던 거 아니가, ..

푸른 불빛 따라 귀향하는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푸른 불빛 따라 귀향하는 / 김주완 무릇 진실로 강한 자는 힘을 쓰지 않고도 이기고 내놓고 쭐렁거리지 않고 불뚝거리지 않고 여밀수록 더욱 세어지는 그것의 생리를 알고 가치서열을 알고 한정된 자장磁場을 아는데 싸안아 굴복시키는 슬기를 아는데, 속으로 ..

이리 귀한 눈발이 내리는 저녁엔 / 김주완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이리 귀한 눈발이 내리는 저녁엔 / 김주완 웬일이냐, 분지 대구의 겨울 저녁 이리 귀한 눈발이 하늘 가득 내리다니, 웬일이냐 오늘은 파이프 가득 담배를 재워 물고 한적한 레스토랑의 창가에 앉아 아득히 색 바랜 날들을 홀로 찾아내어 바라보고 싶다니, 사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