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 시집 수록 시편/제3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이리 귀한 눈발이 내리는 저녁엔 / 김주완

김주완 2011. 3. 14. 10:26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이리 귀한 눈발이 내리는 저녁엔 / 김주완



웬일이냐,

분지 대구의 겨울 저녁

이리 귀한 눈발이 하늘 가득

내리다니,

웬일이냐 오늘은

파이프 가득 담배를 재워 물고

한적한 레스토랑의 창가에 앉아

아득히 색 바랜 날들을

홀로 찾아내어 바라보고 싶다니,

사라져 버린 말들의 의미와

지워진 이름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파내어 마주하고,

진한 커피 향에 젖은

시대의 피로를 문득

미련 없이 던지고 싶어지다니,

가슴을 열어

축축한 감성을 풀어놓자,

벌판이 있다면 멀리 끝으로

가진 자의 무지막지를 지금은

잠시 용서하자,

살아 있다는 고마움으로

이 하늘 아래 아직은 같이 있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하염없이 앉아

가장 소중한 역사의 눈발들을

떠나는 창밖의 몸짓들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자,

분지의 속주머니 깊이깊이

이리 귀한 눈발이 내리는

저녁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