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 시집 수록 시편/제3시집 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불에 관하여 / 김주완

김주완 2011. 3. 14. 10:31


[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불에 관하여 / 김주완


1


태초의 모반은 불 아니가. 불을 만지면서 추위를 배운 거 아니가, 어둠도 절망도 두려움도 그리하여 살아나고, 잠든 시간이 깨어나 강가로 나가고, 그 때 내리던 비, 물도 아니고 불도 아닌 환상의 비가 벼랑 끝으로 밀려갔던 거 아니가, 입어도 입어도 추운 원시의 벌판이 거기 무한공중 속으로 부서지고 있음을, 다시 불로 돌아가고 있음을, 어찌 사람이 알겠는가, 삭은 양피지에서 솟아오른 선악과는 춤추고 혈관으로 스미던 뜨거운 과즙의 불김, 운동은 운동을 낳고, 낳고, 낳고…, 내려가고 올라오는 힘 위에 얹힌 사람 아니가.

- 헤라클레이토스*가 저 밖에서 모형의 불꽃 한 떨기 들고 웃고 있다.


2


불장난을 하면 오줌을 싼다. 지엄하신 할머니의 말씀, 불로 흥한 자 불로 망할지고, 외경을 잃는 날 인간도 잃을지니, 향해서 가는 종말.


너에 대한 가슴 설레임에서

우리들 미망迷妄의 나무

눈 먼 촉 뜬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지 벋는다.

너를 다스리면서 시작한

우리의 놀이는 격정이 되고

눈물 그리고 시가 되다가

끝내 서로를 향해 던지는

투쟁이 된다,

거리에서

땅에서 하늘에서 혹은

물 밑에서

묵지 않는 너의 생명

벼락처럼 거대한 힘을 안고

우리는 종말을 재촉한다.


3


바라보면 빛이다,

천 길 낭떠러지로 유인하는

열이다, 끝없는

길이다, 깜깜한

칼이다, 

꽃이다,

춤이다,

삭아서 날리는 바람이다,

그러나 

힘이므로 모인다,

처음이므로 끝이다,


4


인간은 춤추는 불. 불 한 점 지펴들고 불타며 사는 불, 주머니에 가슴에 거리에 발끝에, 그래 안과 밖 어디든 붉고 푸른 불덩이 감추고 사는 삶, 불과불이 부딪쳐 역사가 열리고 방자放恣한 질주는 마침내 분쇄한다. 열린 역사의 숨통을 끊고 뚫는다. 한니발의 불 페이비언의 불, 나폴레옹의 불, 히틀러의 불, 불 밝혀 든 자가 가고 죽지 않는 불만 남는다. 더 큰 불이 되어 마지막 한마당을 예비한다. 우선은 잠든 불 이름(원자력 혹은 핵이라는)을 달고 도처에 살아남아 도사린다. 가장 큰 놀이, 장엄한 불놀이를 꿈꾸면서 눈 감고 벼랑으로 가는 삶, 영속을 꿈꾸며 춤추는 날, 불힘은 솟구치고, 비껴가는 시간의 바깥으로 멸망은 창궐할 것, 내다보면 보인다.


5


언 몸 녹일 만큼만 받으며, 가는 표적으로만 두고, 떨어져 멀리 팔랑거린다면,


*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35-475경) :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우주의 근본은 불이라고 했다. 헤겔은 그를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