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토종꿀 / 김주완
딸아이가 다니는 여중학교 교실 바깥벽에는 봄철 내 붕붕거리던 토종벌들이 아이들 팔뚝만한 벌집들을 두어군데 슬래브 처마 밑으로 어느새 매달듯이 지었다고 한다. 왜 벌들은 산을 내려와 도회의 중간에다 역사를 하는지 아무도 생각지 못하는 사이, 벌집은 무거워져 그 중 하나가 떨어졌단다. 허둥거리는 벌들의 하늘 아래 떨어져 부서진 벌집을 주워 아이들은 선생님께 가져갔단다. 머리띠를 두른 벌 몇 마리는 윙윙 울며 생존의 권리와 주거의 자유를 지키려고 교무실 창밖까지 따라왔단다.
꿀은 교장 선생님께 대접하고 빈 벌집은 과학실 표본대에 두었다고 한다. 그 날 오후 모기장을 덮어 쓴 청부아저씨는 남은 벌집 하나마저 따 내려서 교무실로 가져갔단다. 집을 잃은 벌들은 무더기를 지어 아카시아 꽃 주저리처럼 주렁주렁 옥상 끝에 매달리고, 또 얼마의 벌들은 공중을 선회하며 왕왕 절규하고 있었단다. 그 때는 여름 방학 중 보충수업이 막 끝나가던 무렵이었는데, 거리에는 저임금의 노동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나와 이제 희생의 시대는 끝났다고 소리소리 질러대던 시기였다.
1987년 9월 1일, 화요일. 이때 아이들은 도덕을 배우고 있었다. 필요 이상을 탐하지 않고 양만큼만 일용할 그들의 양식을 뺏어와 송두리째 높은 사람부터 대접하는 이 땅의 예절을 그렇게 배우고 있었다. 민주ㆍ평화ㆍ정의ㆍ평등의 개념을 실천으로 배우며 이 시대의 학교에서 고만고만 자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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