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우기雨期와 월식月蝕* / 김주완
임진강에 비가 내리고
자유의 다리에 비가 내리고
참전용사의 탑이 비를 맞고
망향단이 비를 맞고
임진각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삭아 내리는 철마의 녹물 같고
육신 같고
숨결 같고
얼굴이 검은
키 작은 유우엔군이 비를 맞고
임진강을 건너
통일촌을 지나
머리 숙인 갈대밭이 비를 맞고
지뢰지대를 밟고 선
상수리나무 숲이 비를 맞고
오리나무 숲이 비를 맞고
남방 한계선을 넘어
들어서면 또
선線
선 하나 사이에 두고
길은 서로 등을 맞대어 돌아 나가고
아픈 날의 말을 잃은
미루나무가 비를 맞고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비가 내리고
우리의 용사가 비를 맞으며 섰고
저들의 어린 군인이 마주 서 있고
군사분계선이 비를 맞고
통일의 집과 판문각이 마주 서 있고
대성촌과 기성촌이 마주 서서 비를 맞고
삼십 수년을 마주 서 있고
반 칠십을 노려보고 있고
거친 숨 몰아쉬며 꼿꼿이 마주 서서
눈엣 핏발 돋우고 있고
던지면 던져야 하고
때리면 때려야 하고
숨결이 맞닿는 거리
입김이 마주치는 거리
사천강 사이에 두고
이쪽엔 우리가 있고
저쪽엔 그들이 서 있고
유년이 떠오르고 있었지, 집 앞 공터였지 해 질 때까지 재그럽게** 재글럽게 석필로 줄을 긋던 땅 따먹기였지, 동네 중간의 우리들 공유의 큰 공지였지, 그중 구석 얼마를 우리는 마주서서 잠시 짬을 잡아 반원을 그어 갔지 야금야금 서로 열심히 먹어 가고 있었지, 저쪽이 먼저 그은 줄 너머 저쪽 땅엔 발 한 짝 들여 놓지 못했었지 아이들은 자기 땅을 지킨다고 돌 같은 걸 들고 서로 위협하고 있었지 그 중엔 모질고 표독스런 아이도 있었지 철저하게 규칙만 지키는 아이도 있었지 그건 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지키는 거였지, 대단찮은 자존을 지키는 거였지 그러나 그게 하늘만치 거대한 거였지 돌은 언제 날아올지도 몰랐지 날아오기만 하면 바로 이쪽도 던질 요량으로 손에 힘을 주고 있었지, 돌을 던지는 것은 규칙 위반이었지 그러나 날으는 돌 앞에서 규칙만 지킨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거였지, 늘 머리끝이 스멀스멀했지 가슴이 콩콩 뛰었지 힘을 뺄 수가 없었지 어떤 땐 사금파리 같은 것을 쥐기도 했었지 참 위험한 무기였지 장난감도 위험하면 그게 무기이지, 그러나 해가 지고 집에 돌아갈 때면 먼지 묻은 무릎과 흙 묻은 손들을 아이들은 정겹게 쥐고 갔었지, 촐랑촐랑 흔들며 갔었지,
소년이 되었을 때 봄 갈로 운동회가 열렸지, 푸른 띠는 청군 흰 띠는 백군이었지 머리띠만 다르면 서로 얼러댔지, 청군도 나오고 백군도 나오는 백군도 들어가고 청군도 들어가는 청룡 황룡 기둥의 개선문이 있었지 개선문 앞엔 모두가 채점 종목이었지 개선문 뒤엔 채점 종목이 응원 밖에 없었지, 개선문 앞에선 기마전도 릴레이도 공굴리기도 서로 악을 쓰며 했었지 청군은 백군이 백군은 청군이 그렇게도 미웠지, 혹 가다 개선문 뒤에선 머리띠가 다른 아이들이 맞붙어 닭쌈을 했지, 싸움은 언제나 뒤진 점수의 억지쟁이가 걸었지 차고 때리고 물고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지 누가 말려도 막무가내였지 일단 붙은 싸움은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지 힘이 다 해야 끝이 났지 그러나 해가 지고 집에 돌아갈 때면 튀어 나온 혹불***을 보고 아이들은 서로 웃었지 깔깔 웃으며 여럿이 갔지
우리의 초병과
저들의 감시병이
꼭 같은 비를 맞고
서로의 허리에 차고 있는
제조원이 다른 무기들이
꼭 같은 비를 맞고
사람들이 붉은 눈을 부릅뜨고
서로 마주 서 있고
저녁이 와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비를 맞고,
안개비를 맞으며
통일로를 되돌아
우리 땅으로 우리는 돌아오고 있었지
수원 이남은 맑아지고 있었지
가슴엔 우기가 사라지지 않는데
금강엔 달이 뜨고 있었지
하얀 갯돌들이 울고 있었지
둥그런 얼굴들이 번들거렸지
금강에 뜬 달은
얼굴이 자꾸 깎여 나갔지
누가 달을 갉아 먹고 있었지
어둠은 자꾸자꾸 늘어나고
젖은 얼굴은 자꾸자꾸 줄어들고
일행 중 누군가
월식을 한다더라고 했지
달과 그늘은
땅 따먹기를 하고 있었지
태양계의 질서 속에서
그들은
청백의 싸움을 하고 있었지,
* 이 시는 1986년 4월 24일 판문점을 견학하고 개인적으로 보고 느낀 바를 쓴 것인데 마침 그날은 월식이 있었음
** 재그럽다 : 자그락거리는 소리가 온몸의 피부를 움추려 들데 한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 혹불 : ‘혹’의 경상도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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