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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감상> 되돌아 나오는 슬픔/김선자(시인)_김주완 시,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 감상

김주완 2024. 9. 21. 16:30

<시와 산문> 2018년 가을호(통권 99호) 수록 - 기획연재-<언령> 동인의 추천시

[시]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김주완




강의 서쪽에 그녀의 집이 있네 자동차로는 못가는 길 걸어서 가야만 하네 철교를 지나서 심장을 움켜쥐고 굽이굽이 꺾어들면 휘영청 돌아가는 한적한 길이 있네 인적 드문 하늘길 강길 높이 뜬 둘레길이네 눈 내린 새벽이면 저벅저벅 발자국이 푸른 도장으로 찍힌다네 갓 감고 나온 숱 많은 그녀 머릿결 늘어질 때쯤 보름달 대문은 열려 있지만 조용히 기웃거리다가 밤 깊은 사람은 돌아오네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 성스러운 집은 잡인을 금하느니 스스로 높이 받들어야 존귀해지기 때문이네 몰래 가슴에 담아 오기만 해야 하네 내가 남긴 발자국 조용히 닦아내며 안개처럼 스러지며 돌아와야 하네 집이 아름다운 것은 높이 혼자 있기 때문이네 그녀는 숙연한 허공 침묵으로 서 있는 나무의 집이네



[시 감상] 되돌아 나오는 슬픔/김선자


걷는다는 것은 일상이며 숨을 쉬는 것과 같지 않을까. 똑바른 길을 가길 원했으나 굽은 길로 접어들 때도 있었을 것이다. 가다가 뜻하지 않게 낭떠러지 위에서 비로소 멈추어서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길을 걸어왔지만,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의 길이라 붙여서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 김주완 시인의 시의 길을 따라서 가보기로 하자.

김주완 시인은 내가 살고 있는 칠곡군 왜관 출생이다. 시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철학과를 선택했다는 시인은 철학박사이기도 하다. 단시, 장시, 산문시 등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시인이 가까이에 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시의 배경이 익숙한 곳이라 더욱 친근함으로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 가고픈 마음에 이 시를 추천한다.

마주했으면서도 기억하지 못하거나 습관처럼 지나치고 만 이 곳을 향해 나선다. 시인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거주하면서 운동을 겸한 산책로로 이 곳을 이용한다. “강의 서쪽에 있는 그녀의 집”은 걸어서 가야만 하는 곳, 철교를 지나서 심장을 움켜쥐고 가야 하는 곳이다. 평화로이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한결같이 이곳을 지나는 시인은 수많은 상념 속에서 걸었을 것이다. “심장을 움켜 쥐고 간다”는 건 오롯이 혼신의 열정을 받쳐들고 간다는 말이다. “걸어서 가야만 하는‘것은 경건한 고행으로 가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녀의 집은 둘레길가의 버드나무 숲이다. 버드나무 숲은 강의 서쪽에 실재한다.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집이 가지고 있는 원관념은 무엇일까.

철교가 끝나는 곳에 앙증스러운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흔들거리는 벤치가 있어 잠깐 목을 축이며 휴식을 취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드디어 다시 시의 길을 찾아가는 입구이다. 굽이굽이 꺾어들면 휘영청 돌아가는 한적한 길이 있는 곳, 혼자서는 무섬증이 일어나는 곳이라 우연을 가장한 기다림 끝에 적당한 두 명의 뒤를 따랐다. 일행이 되어서 한적한 둘레길 속으로 들어섰다. 키 큰 버드나무를 지나서 머릿결 늘어진 그녀, 수양버드나무가 오랜 세월 강을 굽어보며 버티어 온 곳에 도착했다. 모든 것을 순리대로 받아들인 것 같은 그녀를 내려다보니 크기가 엄청나다. 안아도 몇 사람이 둘러싸야 될 것 같은 둘레이다.



이쯤에서 다시 시인의 시를 보자.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 성스러운 집은 잡인을 금하느니 스스로 높이 받들어야 존귀해지기 때문이네 몰래 가슴에 담아 오기만 해야 하네 내가 남긴 발자국 조용히 닦아내며 안개처럼 스러지며 돌아와야 하네 집이 아름다운 것은 높이 혼자 있기 때문이네 그녀는 숙연한 허공 침묵으로 서 있는 나무의 집이네



평소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 특별해지기 시작하는, 놀라운 맛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이 곳 벤치에 앉아서 망설였을까? 잡인을 금하는 나무의 집을 기웃거리며 망연한 눈으로 보름달 대문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쯤 되면 왜관 낙동강변 둘레길가, 강물에 발 담그고 서 있는 버드나무는 이미 나무가 아니라 신성을 띤 성소가 된다. 성스러운 집의 원관념은 무엇인가? 끝내 들어가 보지 못한 이념이나 사상 또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쩌면 유토피아라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완전한 곳’, ‘없는 곳’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유토피아는 성스럽고 존귀한 곳이다. 그러나 시인은 ‘여인’이라고 한다. “숙연한 허공 침묵으로 서 있는 나무의 집”은 지나간 먼 날의 다가서지 못한 여인인가.

그 너른 품속에서 저쪽으로 건너보는 풍경은 또 다르다. 거기 구상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김주완 시인은 구상 선생님이 추천한 몇 안 되는 시인 중 한 분이며 십 여 년을 넘게 구상문학관 2층 사랑방에서 연중무휴로 시창작 수업을 2016년까지 이끌어 왔다. 수제자에게 지도 교수 자리를 넘겨주고 여전히 후학을 위해서 참관 수업으로 참여하면서 버팀목으로 계신다. “글 쓰는 사람은 세속의 명리에 연연하지 말고 묵묵히 실력을 늘려야 한다.” “행세하려 하지 말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계속 들은 가르침이다.

여기쯤에 김주완 시인의 시비를 세우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 또한 시인의 흉내를 내면서 발자국을 지우며 되돌아 나온다.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 나도 나를 모르고, 또한 이 시의 깊이를 모른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의 몸을 모르고 존재하는 삶을 다만 우리가 이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성스러운 근원에 다가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슬픔이 곧 진실한 삶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