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비(문학시티 시선집 24)(양장본 HardCover)이연주 제3시집
저자 이연주
출판 문학시티 | 2021.4.20.
페이지수 184 | 사이즈 140*217mm
판매가 서적 10,800원
책소개
표제 시 「우비」는 서정적 감성으로 도덕적 가치의 본질을 노래한 철학 시라 할 수 있다.이연주 시인은 ‘시’라는 그릇에 삶의 풍경들을 담아낸다. 프리즘을 통과한 스펙트럼처럼 시적 굴절을 통해서 나오는 색깔의 분산은 다양하다. 굵었다가 가늘었다가 선명하였다가 몽환적이었다가 진하였다가 여렸다가 하는 색의 띠에는 깊은 사유가 깔려 있거나 따뜻한 사랑이 녹아 있거나 불가적 인연 생기에 이어져 있거나 도가적 초월에 닿아 있다. 세상만사에서 온기를 느끼는 시인은 스스로 만물을 시로 녹이는 용광로가 된다. 어떤 소재나 주제이든 이연주라는 시적 용광로를 거치면 새로운 생명이 되어 탄생한다. 초벌구이가 끝난 도자기에 투명유약을 바르듯 시인은 만년 소녀의 자연주의적 감성으로 시의 소통성을 강화한다. 시인의 시인성은 시에 대한 헌신성으로 규정된다. 시력 15년을 하루처럼 쉼 없이 시의 밭(詩田)을 경작하고 있는 시인은 성장을 멈춘 시가 아니라 성장을 계속하는 시를 추구하고 모색한다. 앞으로 그가 이룰 일가에 신뢰가 가는 이유이다- 김주완(시인, 철학박사) - 작품 해설 중에서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저자
이연주ㆍ대구에서 출생ㆍ《문학미디어》 수필 등단ㆍ계간 《문장》 시 등단(2008년)ㆍ한국문인협회, 경북문인협회, 칠곡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회, 문학미디어, 문장작가회 회원, 시 동인〈언령〉으로 활동하고 있다.ㆍ수상- 문학미디어문학상, 경북작가상, 대한민국독도문예대전 특선, 내성천문예공모전 입상 등ㆍ저서- 시집 『우비牛?』,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하는』, 『어느 곳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수필집 『봄날은 꽃비 되어』,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외
시인의 말
우비(牛屝)는 소에게 일을 시킬 때에 신기는 짚신입니다.
헌신에 대한 배려이며 노동에 대한 공경입니다.
시업(詩業)에 있어서 우비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사랑과 깨어 있음을 저는 시작(詩作)의 우비로 삼고 싶습니다.
제가 시를 사랑하고 시가 저를 배척하지 않을 때
시의 세계에 머물기 위하여 저의 영혼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때
저와 이웃이 시로서 이어질 수 있을 때
저의 시 공부는 계속될 것입니다.
코로나-19로 피폐해진 삶이 빈사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회복에 대한 확실한 기약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치고 쇠약해질수록 시는 기사회생하는 능력을 가진 예술입니다.
모두들 힘든 시기에 염치없이 3시집을 묶어 냅니다.
들쭉날쭉하지만 매듭 하나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따뜻한 모든 분들에게
강건한 삶의 간절한 기도 한 자락을 올립니다.
2021년 5월
이연주
목차
시인의 말
작품 해설/김주완(시인, 철학박사)
제1부 잉아
생물
파필(把筆)
감자
겨울새
얼음새꽃
새물내
골몰
시를 만지다
계절의 액자
간절기
까무러쳤다가 피는 꽃
꽃그늘 아래
바람
의자 위에 앉은 오전
끈은 허약하였다
만감(萬感)
등 푸른 카페
환한 어둠
땅 위
렛 미 아웃(Let me out)
목화밭
바깥이 지루하다
설원의 꽃들
알집
여백
역고드름
연주회(Concert)
잉아
푸름을 펼치다
흔들리는 땅
제2부 나비의 숲
섬은 노래합니다-독도 1
옥색 치마폭의 아들-독도 2
초간정 원림
회룡포
호국의 다리
강물 속 모래알들
나비의 숲
늘 그랬다
뜸을 들이다
마성(魔聲)
수차
시간의 정원
체리
거리에서 거리를 두다
환기
귀에 사는 새
폭염
가뭄
갇힌 시간들
산악 열차
제3부 우비
우비
격돌
등의 정치학
이름들, 시간들
몰라
하나의 방향으로 걷는 나무들
소리나무
수심
눈치
바람은 구름에 구름은 바람에
별자리
부력
시인의 자리
우물 속의 달
좌표
진채(眞彩)
창 너머 언덕 위의 나무들
폐쇄
블록체인
한 점의 판화
제4부 문을 열다
방울새를 헹구다
봄결은
비를 대하다
참빗 같은 봄비
강둑길
집적대는 바람 1
집적대는 바람 2
가을
주머니에서 꺼낸 부호
엄마의 반달
등골이 시리다
창질
아버지의 강
저기, 어디쯤
시스템 종료
청실홍실
투 트랙
엄마처럼
아들의 방
문을 열다
수면과 불면 사이
갈기
빙어
어깨선이 아리네
비명
역주행
노란색 아이들
홑마음
코로나 블루
낙화
표4-추천의 글
이연주 시인은 ‘시’라는 그릇에 삶의 풍경들을 담아냅니다. 프리즘을 통과한 스펙트럼처럼 시적 굴절을 통해서 나오는 색깔의 분산은 다양합니다. 굵었다가 가늘었다가 선명하였다가 몽환적이었다가 진하였다가 여렸다가 하는 색의 띠에는 깊은 사유가 깔려 있거나 따뜻한 사랑이 녹아 있거나 불가적 인연생기에 이어져 있거나 도가적 초월에 닿아 있습니다. 세상만사에서 온기를 느끼는 시인은 스스로 만물을 시로 녹이는 용광로가 됩니다. 어떤 소재나 주제이든 이연주라는 시적 용광로를 거치면 새로운 생명이 되어 탄생합니다. 초벌구이가 끝난 도자기에 투명유약을 바르듯 시인은 만년 소녀의 자연주의적 감성으로 시의 소통성을 강화합니다. 시인의 시인성은 시에 대한 헌신성으로 규정됩니다. 시력 15년을 하루처럼 쉼 없이 시의 밭(詩田)을 경작하고 있는 시인은 성장을 멈춘 시가 아니라 성장을 계속하는 시를 추구하고 모색합니다. 앞으로 그가 이룰 일가에 신뢰가 가는 이유입니다.
― 김주완(시인, 철학박사)
고요한 듯 쉬지 않고 흘러가는 강물을 닮은 시인이 있습니다. “등 푸른 카페”에 앉아 시를 빚는 이연주 시인은 우아합니다. 불심(佛心)을 날실로 하고 시심(詩心)을 씨실로 하는 시인의 교직은 감성이라는 “잉아”와 지성이라는 북이 교차하면서 완성됩니다. 거창한 주제는 물론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를 시로 엮어내는 재주가 그에게는 있습니다. “시간의 정원”에서 “산악 열차”가 출발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걷는 나무들” 사이로 옛 우물이 다가오는데 “우물 속의 달”이 살아서 일렁입니다. 대지에 “참빗 같은 봄비”가 내립니다. “실타래 줄들에 매달린 튼실한 호박씨”처럼 속에 잠재되어 있던 언어들이 술술 풀려나옵니다. 물푸레나무의 수액을 뽑아서 영혼의 안료에 버무린 물감으로 채색한 수채화가 이연주 시인의 시 세계입니다. 섬김, 배려, 자비가 이연주 시의 근본이며 토대입니다. 한결같이 한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계절은 사계가 봄입니다. 그의 다음 봄을 보는 기쁨을 기다리겠습니다.
―김인숙(시인, 언령 지도교수)
해설
프리즘을 통과한 찬란한 스펙트럼의 시편
김주완(시인, 철학박사)
1. 성공한 삶과 문학
이연주 시인은 삶도 문학도 성공한 사람이다. 1948년생인 시인은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왜관으로 시집을 왔다. 신혼 초에는 매우 곤궁한 형편이었다고 하는데 부부가 힘을 합하여 재물을 쌓았고 집안을 일으켰다. ‘새 사람이 잘 들어오면 집이 흥한다’고 하는 속설이 맞아 떨어진 경우이다. 자수성가한 시인 부부는 흔히들 말하는 지역 재력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 후덕하게 보이는 시인의 외모 구석구석에 재물운이 담겨 있음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다. 이연주 시인의 문학적 서포터즈인 부군은 유명 뮤지션이다.
시인은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장녀는 특수교육학 문학박사로서 성직자가 되었고 차녀는 판화가로서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다. 장남은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차남은 가업인 철물점을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다.
이연주 시인은 2007년에 구상문학관 창작교실에서 문학 공부를 시작하여 당년에 《문학미디어》에 수필로 등단하였고 다음해인 2008년에는 계간 《문장》에 시로 등단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시인과 수필가로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시집 2권과 수필집 1권을 상재하였으며 유수한 문학상도 여러 번 수상하였다. 이번에 상재하는 시집 『우비』는 시인의 제3시집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적 업적만으로 시인의 문학을 성공한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시인을 두 부류로 대별하면 문단 활동에 주력하는 시인과 작품 창작에 주력하는 시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자를 정치적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학구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어느 정도의 시적 수련을 한 후 등단이라는 통과 의례를 거치고는 더 이상 정진은 하지 않으면서 여러 문학 행사에 참석하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며 일반인들 앞에서 시인 행세를 많이 한다. 이들은 문단에 형성된 파벌에 동참하여 목소리를 크게 내면서 시인연하고 문단의 크고 작은 감투를 차지하여 으스대면서 이권에 개입하지만 작품 창작이나 시집 발간 등 문학적 업적은 대체로 빈약하다. 이와 반대로 후자는 시작과 공부에 주력한다. 최상급 수준의 시인들만 경쟁상대로 생각하면서 더 좋은 시를 쓰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가지고 시작 공부에 주력한다. 이들은 문단 권력이나 문단 정치에 참여할 생각을 애당초 하지 않고 자기 발전을 위해 매진한다. 순진하게도 좋은 글을 쓰면 지명도가 올라가리라 믿는 사람도 있다. 후자는 출사가 아닌 수양에 전념하던 조선조의 산림처사와 상당히 닮았다. 전자에 속하는 사람 중에는 빈 수레나 모리배가 많고 후자에 속하는 사람 중에는 외톨이나 은거자가 많다. 전자는 후자를 외면하고 후자는 전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연주 시인은 문단 활동과 작품 활동을 함께 하는 중간 지대에 속하는 사람이다. 양자의 조화를 꾀하는 중립적 입장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어느 쪽으로 소속시켜야 한다면 후자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몇 군데의 문학 단체에 소속되어 있고 각종 행사에도 참석한다. 그러나 문단 파벌에는 휩쓸리지 않으며 문단 권력의 심층부로 다가가지도 않는다. 그저 회비를 내고 작품을 발표하고 행사장의 좌석을 채워 주는 그 정도의 역할만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시적 정진과 자기 발전을 위한 공부에는 끈기 있게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 2007년부터 참가한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강좌와 시 동인 <언령>의 스터디에 지금까지 15년째 참가하고 있다. <언령> 창립 멤버로서는 유일하게 아직 머물면서 후진들을 이끌고 자기 발전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매주 한 편씩의 습작시를 거의 거르지 않고 써내는 저력이 시인의 학구열을 대변하고 있다. 만학을 하여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위를 취득한 것 또한 시인의 학구열을 증거한다.
2. 성장을 계속하는 시
우리가 ‘어떤 시인의 시 세계’라고 했을 때 그 세계는 그가 쌓은 하나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시 세계는 자존을 지키는 시인의 독창성을 전제로 한다.(표절을 일삼거나 무늬만 시인인 사이비 시인들에게는 ‘시 세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스스로 성채를 쌓고 그 안에 들어앉아 그만의 시를 쓴다. 시력(詩歷)이 오래 될수록 성벽은 더 두터워지고 더 높아진다. 그만의 시를 쓴다는 점에서, 시인의 개성과 시적 정체성이 그 성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성은 폐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 안에 들어앉은 시인은 외부 세계와 소통하지 못하고 새로운 시 세계의 건립을 시도하지도 못하면서 그만의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정체성과 폐쇄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시 세계’는 시인이 쓴 시편들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래서 그러한 시인의 시편들은 유사성을 가지게 된다. 거기서 거기인 시, 비슷비슷한 시를 그들은 쓰는 것이다. 주제 면에서나 표현 면에서나, 또는 진술의 형식에 있어서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철학성에 있어서나 변화나 발전이 없이 거의 일정한 수준과 경향성에 머물게 된다. 생각보다 이러한 시인들이 많다. 자기가 이전에 쓴 시와 비슷비슷한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시를 자기가 표절하는 것이기도 하다. 환언하면 그러한 시인은 한 평생 자기 표절을 하는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시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비슷비슷한 시를 반복적으로 쓰는 시인을 성장을 멈춘 시인이라고 한다면 변증법적 지양을 통하여 꾸준하게 자기변모를 꾀하는 시인을 성장을 계속하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변증법적 지양이란 긍정-부정-종합에 이르는 역동적인 자기 극복을 의미한다. 지양은 발전과 유의어이다. 따라서 전자는 공부를 멈춘 시인이며 후자는 공부를 계속하는 시인이다. 여기서 성장의 동력은 공부이고 과정은 운동이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이연주 시인은 성장을 계속하는 시인이다. 시인의 시적 면모는 계속해서 변해가고 있고 그 수준 또한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시만 하더라도 그 층위가 다른 것들이 발견된다. 발전 단계의 서로 다른 층위에 있는 시들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갑각류가 탈피를 하며 성장을 하듯 이연주 시인은 이전의 시 세계의 껍질을 찢고 벗어나서 새로운 시 세계의 껍질을 다시 만든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에 그의 시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며 움직임을 통하여 확장하는 공간이 되고 자유가 충만하는 공간이 된다. 이리하여 이연주 시인의 시 세계는 횡적인 폭이 넓어지고 종적인 높이가 높아진다. 소리로 치면 음역대가 넓고 호흡으로 치면 장단이 자유자재이다.
성장하는 시를 쓰는 이연주 시인은 단시(1부), 젊은 시(2부), 철학시(3부), 자전시(4부)를 다양한 빛깔로 변주하면서 이번 3시집을 구성한다. 먼저 단시 한 편을 보자.
잉아가 끌어올린 날실 사이로
북이 숨 가쁘게 왕래하였다
나는 늘 당겼고 그는 자주 숨었다
베틀이 덜커덩거렸다
끊어지는 씨실을 다시 이어 당기면
날실의
숨 가쁜 심장 소리가 담장 밖을 넘나들었다
눈이 바닥을 하얗게 덮는다
아직 마름하지 않은 생인 양
모시 한 필이 바닥에 펼쳐진다
― 「잉아」 전문
잉아는 베틀의 날실을 한 칸씩 걸러서 끌어올리도록 맨 실이다. 잉아가 오르내릴 때마다 날실은 교차하여 벌어지고 그 사이로 북이 드나들면서 피륙이 짜여진다. 베를 짜는 데는 베틀의 모든 부품들이 유기적으로 작동되어야 하겠지만 교직을 직접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잉아이다. 잉아와 베틀을 작동시키는 자가 아낙네이다. 이 시에서의 피륙은 한 가정의 사랑과 완성과 유지를 가리키고 잉아와 북과 베틀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도 한 집안을 받치고 있는 어머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 가정에서의 어머니의 역할은 ‘베를 짜는 여인’, ‘베틀’, ‘잉아’, ‘북’ 등의 이미지로 교차하면서 오버랩 된다. 이 시는 10행의 단시를 연 구분 없이 1행씩 건너 배열함으로써 쉼표와 같은 호흡의 단절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숨 막히는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과 노역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모시 한 필은 어머니의 노고의 결실로서 새롭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마주서는 내일의 은유라고 할 수 있겠다. 시가 잔잔하고 조근조근하며 차지다.
태초의 할아버지는
해 뜨는 곳에 옥색 치마폭을 펼쳐 놓았다
생명의 잉태에는 숭엄한 영기가 서리고
병풍 같은 바다 안개는 넓고 멀리 부풀어 올랐다
동백기름 발라 참빗으로 빗은 엄마의 머리
꼿꼿한 자존을 지탱하는 은비녀가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반짝, 눈부시게 비늘을 세우는 아침
뼈대 있는 집안의 유약한 아들은 외로운 바다 끝
섬이 되었다
그녀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바람 부는 날에는 시퍼렇게 흐르는 아들의 콧물을
치마를 걷어 올려 쓱 닦아주었다
박 덩이가 엄전하게 앉아 있는 초가집 부엌의 아궁이에서
연기가 뭉텅뭉텅 바람에 튕겨 날고
엄마가 무쇠솥에 밀수제비를 떠 넣을 때마다
감자는 펄쩍펄쩍 세상천지 도망을 다녔다
도둑은 자정쯤에만 오기에
이웃집의 개 짖는 소리가 깜깜한 밤의 정적을 흔들면
강단 있는 엄마는 바깥을 살피며
푸른 치마를 아기의 머리까지 씌워 토탁토탁 잠재웠다
잡인의 범접을 금하며 형형한 눈으로 어둠을 지키는 푸른 결기
먼 육지에서 출발한 쇠북 소리가 파도에 실려 오면
엄마는 옥색 치마폭을 휙 감아쥐며 표연하게 손을 흔든다
태초의 할아버지 어진 미소가 하늘에 뜬다
― 「옥색 치마폭의 아들-독도 2」 전문
독도를 노래한 이 시는 응모를 목적으로 쓴 시로 보이는데 문청 시절에나 씀직한 문체로서 시가 무척 젊다. 시인의 이름을 가리고 읽으면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문청이 쓴 시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앞의 단시 「잉아」가 압축과 비약과 상징으로 주제를 형상화 했다면 이 시는 진술과 묘사와 은유로 형상화 했다고 할 수 있다.
토속적 서정을 바탕에 깔고 있는 이 시는 서사의 주인공으로 할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을 등장시킨다. 태초의 할아버지는 조물주이거나 아니면 단군 할아버지로 보인다. 어머니는 단아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모성과 자정이 넘치지만 결기와 강단 또한 가지고 있다. 유약한 아들을 걱정하면서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유약한 아들이란 “외로운 바다 끝/섬”인 독도를 가리킨다. 한반도와 한민족을 성스러운 곳의 고결한 겨레라고 내세우고 일본을 “도적”, “잡인”으로 명명하면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 주장을 품격 있게 반박하는 내용이다. 동백기름-참빗-엄마의 머리-은비녀-햇빛-비늘-아침으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전개가 명징하고 동해 바다를 옥색 치마폭으로 묘사한 것은 매우 감각적이다. 일흔이 넘은 시인이 이와 같이 젊은 시를 쓴다는 것이 여간 놀랍지 않다.
손바닥을 보면 지나온 길이 보입니다
순한 호수가 껌벅이는 시선 위로 들판이 어른거립니다
못 박힌 손바닥으로 비벼서 피운
호박꽃 같은 우비를
들녘으로 가는 노동의 발에 동여맵니다
꿇은 무릎 아래
부석부석 고운 짚 소리에 온기가 묻어 있습니다
소는 조상 같이 섬기는 집안의 기둥입니다
무논을 썰며 앞산 그림자를 끌고 가는
연자방아를 돌리며 빛 밝은 가을날을 펼치는
당신은
당산나무 둘레에 색색의 오방낭을 매달며
마을의 만복을 기원하는 만신처럼
고된 네 발의 노역으로 사람을 사람의 자리에 앉힙니다
돌아보면
열다섯 식구
삼시 세끼를 해대던 소 같이 요긴했던 사람
부엌문을 넘어서며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훔치는
젊은 어머니의 검정 고무신이 뭉개진 묵처럼 헤져 있습니다
― 「우비」 전문
표제시 「우비」는 서정적 감성으로 도덕적 가치의 본질을 노래한 철학시라 할 수 있다. 우비(牛屝)는 소에게 일을 시킬 때에 신기는 짚신을 가리킨다. 농경 사회에서의 소는 가축이라기보다는 가족이다. 소는 인간과 한집에 머물며 식구처럼 친근하다. 소가 아프면 주인이 가족처럼 돌보며 걱정을 한다. 소는 고집이 세고 끈질기고 성실하며 힘이 세지만 사납지 않다. 주인을 구하기 위해 호랑이와 싸우다 죽은 소를 묻은 무덤인 의우총이 상주에 구미에 있다. 그리고 큰 몸집에 비해 걸음이 느린 소는 힘든 일도 묵묵히 해낸다. 소는 최고의 노동력이며 운송 수단으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소에게서 노동력을 얻는 사람들은 감사와 섬김의 표시로 소에게 짚신을 신긴다. 짚신은 소의 발을 보호하면서 소의 노동력을 보다 오래 유지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얻음’과 ‘섬김’은 자연주의적 선순환의 구조적 일항이 된다. 또한 듬직하고 편안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소는 근면, 성실, 인내 등의 덕목을 보여 주는 존재이다.
“못 박힌 손바닥으로 피운” 짚신(우비)을 소의 발에 동여매는 농부는 소와 온기를 나누게 된다. 여기서 교감이 일어난다. 짚신을 신기는 농부의 행위는 소의 헌신에 감사하는 배려에서 나오는 것이며 소의 노동에 대한 공경과 외경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의 전반부는 이러한 묘사를 통하여 소의 신성성으로 이행하며 이리하여 “소는 조상 같이 섬기는 집안의 기둥”이라고 한다. 소를 당신으로 지칭하는 후반부에서는 소가 있음으로서 사람이 사람의 지위에 오른다고 함으로써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것은 소가 보여주는 실천적 덕목의 덕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열다섯 식구/삼시 세끼를 해대던“ 젊은 어머니로 소를 치환함으로써 이 시는 마침내 ’어머니 같은 소‘, ’소 같은 어머니‘라는 깊고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문면 상으로는 소에게 짚신을 신기는 농부의 행위를 통해서 소의 고마움과 농부의 배려를 노래하면서 소처럼 헌신하는 어머니의 희생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면에서는 소와 사람의 유대성과 교감성, 노동의 신성성, 헌신과 희생, 섬김, 배려심 등 인간의 사회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도덕적 가치를 제시하고 있다.
소와 인간의 교감은 농경 사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소 껴안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보도했다(2021.03.14. 중앙일보). 코로나19로 고립감을 느낀 사람들이 예약한 농장에 찾아가서 소를 안는 치유법이 ‘소 껴안기’이다. 소 껴안기가 일종의 심리 치유법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애리조나주의 한 농장은 시간당 75달러(약 8만5000원)인 소 껴안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오는 7월까지 예약이 차 있다고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친구를 안을 수도, 손자를 안아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소는 안전하게 사람과 교감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포옹은 신체적 접촉이고 대화를 하거나 만나서 함께 밥을 먹는 것은 심리적 접촉인데 둘 다 인간의 정서 형성과 안정에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BBC는 소 포옹이 '옥시토신' 분비를 활성화한다고 전했다. 옥시토신은 사회적 유대 관계를 맺을 때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로, 사랑과 신뢰의 감정을 높여 '사랑 호르몬'으로도 불린다. 소를 껴안으면 스트레스가 줄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특히 껴안는 포유동물의 몸집이 클수록 정서적 진정 효과가 커진다고 BBC는 전했다.
3. 만년 소녀의 자연주의적 감성
곱고 따뜻한 감성을 가진 이연주 시인은 만년 소녀이다. 시인의 첫 시집에 필자가 보탠 표사 글을 옮겨 본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대개 삭막해지고 정서가 메말라진다. 그러나 이연주 시인은 세월을 거꾸로 산다. 만년 소녀이다. 인상은 후덕하고 마음엔 부처가 들어앉아 있는데 무엇보다 시가 곱고 맑다. 푸른 날들에 박힌 분홍의 못 아직 그대로이고 기차의 꽁무니를 따라오던 그믐달이 은행나무 가지 끝에 걸려 있다. 길고 가는 참빗 빗줄기 사이로 사람들의 살갗에 청보리 고운 물이 들고 찔레꽃은 청상의 하얀 치마 같다. 가을바람에 상처 난 노란 모과가 연등처럼 환하다. 그렇다. 독실한 불교도인 이연주 시인에게 있어서 시작(試作)은 곧 연등을 내거는 일이다. 시인의 말처럼 팍팍한 삶에 숨 고르는 여유를 시(詩)를 통해서 이연주 시인이 한결같이 얻기를 바란다. 맑고 고운 순수의 시심, 오래 반짝이기를 기대한다.
―김주완(시인, 전 대구한의대 교수)
“맑고 고운 순수의 시심, 오래 반짝이기를 기대한다”고 한 첫 시집이 나온 것이 2014년인데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21년에 와서도 여전히 이연주 시인의 시심은 순수하고 맑고 곱다. 곱고 여린 소녀의 감성으로 빚어내는 시는 명품의 반열에 올려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시의 전달은 감성을 통로로 하지만 시의 수준은 정신성으로 그 층위가 결정된다. 이번 3시집에 실린 시편들 중에서 시인의 자연주의적 감성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는 맑고 고운 시 2편을 살펴본다.
사월의 문 앞에
밤사이 폭설이 하얗게 내렸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묵은 책장 속에서 묵힌 먼지들이
눈구경 가는지 뛰어나간다
하얀 커튼에 홍매화 빨간 입술이 달각거리고
산수유가 눈을 털며 노란 손 내민다
봄볕이 눈바람 사이에 들앉는다
하루도 못 가서 녹는 눈은
계절의 경계를 따라 자기 길을 적시며 간다
― 「간절기」 전문
기상 이변으로 근래에 와서는 삼월에도 눈이 내리는 경우가 있다. 폭설이 내린 삼월 말의 어느 날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한 이 시에 시인은 ‘간절기’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한 계절이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시기가 간절기이다.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하루도 못 가서 녹는 눈은/계절의 경계를 따라 자기 길을 적시며 간다>고 하는 마지막 연이 시인의 메시지인 것 같다. 제철에 내리는 눈도 날씨에 따라 일찍 녹을 수가 있지만 사월의 문 앞에 늦게 내린 눈이야말로 하루도 못 가서 녹는 것이 당연하다. 녹기에 땅을 적실 수 있고 그것도 계절의 경계를 따라 난 자기 길을 적실 수 있는 것이다.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와 존재가 걸어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 행로를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누구든 그가 가는 길은 자기 길이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적시며 가는 길이 자기 길이다.
울퉁불퉁 못 생긴
몸이지만
자줏빛 근육질이 탄탄하다고
겉은 강해 보여도
속은 여려서
삶아 보면 분꽃이 핀다
― 「감자」 전문
6행에 불과한 단시이지만 잘 영근 시이다. 물론 감자는 줄기 식물로서 뿌리가 아니다. 식물학적으로 감자는 줄기이고 고구마는 뿌리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시에서의 감자는 감자가 아니라 인간 실존이다. 두 번의 반전이 있다. 겹변증법이라 할 수 있다. 외모는 못 생겼지만 몸은 탄탄하다. 그와 같이 강한 몸속에 여린 마음이 있다. 그 증거로서 시인은 <삶아 보면 분꽃이 핀다>고 하였다. 감자를 삶았을 때 나오는 하얗고 포슬포슬한 분(가루)을 시인은 분꽃이라고 한 것이다. 하기야 모락모락 솟아나는 김 아래로 하얗게 포슬포슬 일어서는 가루를 꽃이 피는 형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시인만이 가진 시적 시선이며 감성이다. 다르게 보기이며 새롭게 보기이다. 외모로만 사람을 평가하지 마라는 경계의 시라 할 수 있다. 6행의 시 전체가 하나의 아포리즘이다.
4. 돌아보는 시간과 내다보는 시간의 교차
어린 시절에는 돌아볼 것이 적어서 앞만 내다보고 노년이 되어서는 내다볼 것이 적어서 뒤만 돌아본다. 유년엔 미래를 꿈꾸고 노년엔 과거를 회상한다. 70대 전반을 살고 있는 이연주 시인의 시에는 추억과 회상의 장면들이 상당히 보인다. 가족사를 시적으로 승화하기기도 한다. 주변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도 있다. 그것이 현재적 시점의 실존적 풍경이기 때문이다. 발달심리학에서는 노년의 발달 과제를 죽음에 대한 긍정과 수용이라고 한다. 서진산 선석사와 서진사의 신도회장을 지내기도 한 독실한 불교도인 시인의 눈에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내세로 가는 관문으로 보인다.
먼저 돌아보는 시 한 편을 살펴보자.
사진첩에 들앉은
세일러복 흑백사진
부연 안개에 멀어져 보이는 친구들 모습에서
먼 여행을 출발한다
매서운 바람과 함께 눈이 하얗게 뿌리는 어느 날
동성로 골목길에서 호호 불며 먹던 찐빵과 만두
친구들과 가끔 가는
코코아 향기 가득한 음악 감상실
신청곡을 틀어주던 장발의 디제이 목소리에
마음이 휘청거렸고
우리를 반기는 눈망울은 가슴 설레게 했다
나만을 바라보는 착각에 빠져 그 모습 들킬까 봐
두근거리는 가슴 쓸어 내렸다
그 곳, 그 모습 어디에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데
양지바른 풀숲에 핀 눈 속의 노란 복수초
저기, 어디쯤 여행하고 있을까
― 「저기, 어디쯤」 전문
시제 ‘저기, 어디쯤’은 지나온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세일러복을 입은 여고생이 있고 대구의 번화가인 동성로의 한겨울 찐빵과 만두가 있고 음악 감상실이 있다. 돌아보는 시선에는 아련하고 감미로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장발의 디제이 오빠의 목소리에 가슴 설레는 순박한 여고생의 마음이 맑다. 그러나 눈 속에 핀 노란 복수초가 지난해 봄을 떠올리는 것처럼 지금은 계절의 끝 지점에 서서 마음으로만 박제된 원색을 되돌아 볼 수 있다. 누구나 가졌음직한 하나의 그림이기에 이 시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계절에 밀려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들
꽃피던 시절은 문득 소리 없이 사라진다
노인정 앞마당에
벚꽃이 떨어지는 어느 날
친구가 보고 싶어 울먹이던
할머니의 초점 없는 눈은 먼 산만 바라보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는 꽃잎이 다시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
할머니의 입술은 바싹 마른 나뭇잎 같다
꽃피우며 열매 거두던 먼 날을 회상하면
노을처럼 입가로 웃음이 지나간다
줄지어 바람에 흔들리는
곤줄박이가 전깃줄에 앉아 말을 건넨다
허공은 가팔라서 어지러워
짹짹
강물은 흐르고 꽃잎은 그림자를 버리고 떠간다
― 「낙화」 전문
낙화는 떨어지는 꽃이다. 핀 꽃은 언젠가 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한때의 찬란했던 계절은 소리 없이 사라진다. 벚꽃은 봄에 피어서 봄에 떨어진다. 벚꽃이 피고 지는 그곳에 자리 잡은 노인정의 할머니는 겨울 초입에 있다. 떨어지는 벚꽃은 봄 속의 낙화이지만 할머니는 지금 겨울 속의 낙화의 시간을 향해서 가고 있다. 먼저 떠난 친구가 자꾸 그리워지는 할머니지만 회상 속의 꽃피는 봄과 열매 맺던 가을이 떠오르면 자기도 모르게 입가로 웃음이 번진다. 이렇게 서사를 끌어 온 화자는 천연덕스럽게 <줄지어 바람에 흔들리는/곤줄박이가 전깃줄에 앉아 말을 건넨다>고 함으로써 곤줄박이를 소환한다. 곤줄박이는 <허공은 가팔라서 어지러워//짹짹>이라고 우짖는다. 여기서 곤줄박이는 전지적 시점의 화자의 대상화이자 할머니의 대상화이다. 어지러운 허공은 어디인가? 지나온 삶의 현장이며 낙화를 기다리는 현재 시점의 현장이다. 본질적으로 외로운 실존은 헤쳐 온 삶의 순간순간이 어지러웠고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도 어지럽다. 삶은 현기증 그 자체이다. 삶이 현기증이라는 것은 삶 다음의 내생이 안락이며 안식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시인의 내세관은 건강하고 긍정적이다. <강물은 흐르고 꽃잎은 그림자를 버리고 떠간다>고 하면서 시는 마무리된다. 강은 이생과 내생을 관통하는 시간의 강이며 강물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쉼 없이 흐르는 흐름 그 자체이다. 그런데 꽃잎은 왜 그림자를 버리고 떠가는가? 여기서 불자인 시인의 불가적 관점이 나타남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꽃잎은 떨어진 낙화이며 이생의 삶을 끝낸 존재이다. 근원적으로는 이심전심의 매개물로 알려져 있는 연꽃과도 연결된다. 그림자는 이생에서의 삶의 흔적이다. 이생의 것은 이생에 두고 맨몸으로 가는 것이다. 내생은 또 다른 세계이기에 내생의 것은 내생에서 다시 생길 것이다. “그림자를 버리고 떠간다”는 것은 이생의 흔적을 모두 버리고 빈 몸으로 내생으로 간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이 시 「낙화」는 죽음에 대한 달관적 수용을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시’라는 그릇에 담아내는 삶의 풍경들 - 작용 분석과 대상 분석
시집의 말미에 붙이는 해설은 대개 시적 주제나 기법이 유사한 시를 모으고 분류하여 시인의 이전 작품의 경향과 현재 작품의 변화 경향을 분석하고 시 정신을 진단하고 해석한 후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예상하는 방식으로 작성된다. 여기에는 문예 비평적, 미학적, 철학적 이론의 틀을 차용하여 그 틀 안에 분류한 시를 대입하는 방법을 쓴다. 이와 같이 작성되는 해설은, 자유의 산물인 시를 정형화된 이론의 틀에 구속시키는 폐해를 발생시킬 수 있다. 기성 신발에 발을 맞추듯 기성 이론에 시를 끼워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해설은 시인의 생산적 작용 즉 시적인 창작 작용의 분석과 해설자의 수용 작용 즉 감상 작용의 분석에 주력한다. 이것을 우리는 존재론적 작용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용 분석은 대상에 대한 일면적 관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해설자의 관점과 그가 가지고 들어온 이론적 틀의 범위 내에서의 논의에 그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해설자가 열이면 열 모두가 다른 이론적 틀을 가져올 수 있고 다른 해설을 쓸 수 있다. 작용 분석은 그런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이연주 시인의 제3시집 『우비』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개해 온 이 해설의 입장은 시인의 인간학적 해석에 기반하고 존재론적 대상 분석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시적 대상 분석은 시의 구조와 존재 방식의 분석과 시에 붙어있는 가치(일반화될 수 없는 가치)의 분석을 의미한다. 작용 분석이 주관성에서 이루어진다면 대상 분석은 객관성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생산과 수용이라는 것은 반드시 어떤 지향대상과의 관계에서만 이해되는 것인데, 여기서 지향대상을 도외시하게 되면 온전한 이해가 안 되고 일면적 이해에 머물고 말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 분석은 시가 가진 객관적 성격을 시 자체에서 자율적으로 발견하고자 한다. 모든 시는 단편적으로 창작되며(설사 그것이 기획된 의도에 따른 연작시라고 하더라도 개개의 작품은 단편적으로 쓰인다) 존립한다. 시라는 존재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시 감상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라 시 작품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 존재론적 대상 분석의 입장이다.
그렇다고 하여 대상 분석만이 중요하고 작용 분석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 둘은 언제나 서로 얽혀 있으며 다만 불균형을 해소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시집 해설은 여전히 압도적으로 작용 분석에 매달려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며 작용 분석과 대상 분석의 균형 잡기를 통하여 시 비평문학의 발전 도모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작용 분석과 대상 분석은 어느 정도 서로 독립성을 가지고 서로 적당하게 제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그 둘을 올바르게 종합할 것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이연주 시인은 ‘시’라는 그릇에 삶의 풍경들을 담아낸다. 프리즘을 통과한 스펙트럼처럼 시적 굴절을 통해서 나오는 색깔의 분산은 다양하다. 굵었다가 가늘었다가 선명하였다가 몽환적이었다가 진하였다가 여렸다가 하는 색의 띠에는 깊은 사유가 깔려 있거나 따뜻한 사랑이 녹아 있거나 불가적 인연생기에 이어져 있거나 도가적 초월에 닿아 있다. 세상만사에서 온기를 느끼는 시인은 스스로 만물을 시로 녹이는 용광로가 된다. 어떤 소재나 주제이든 이연주라는 시적 용광로를 거치면 새로운 생명이 되어 탄생한다. 초벌구이가 끝난 도자기에 투명유약을 바르듯 시인은 만년 소녀의 자연주의적 감성으로 시의 소통성을 강화한다. 시인의 시인성은 시에 대한 헌신성으로 규정된다. 시력 15년을 하루처럼 쉼 없이 시의 밭(詩田)을 경작하고 있는 시인은 성장을 멈춘 시가 아니라 성장을 계속하는 시를 추구하고 모색한다. 앞으로 그가 이룰 일가에 신뢰가 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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