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시 해설/시 해설

<시> 청녀/김인숙

김주완 2025. 2. 28. 12:14

<칠곡문화> 제20집(2024) 축시, 칠곡문화원, 2024.12.31., 10~11쪽

 

 

청녀(靑女)* / 김인숙[각주:1]

 

 

청녀가 오는 아침이면 하얀 면도날이 천지만물에 곤두선다 녹고 싶었지만 녹여 주는 자가 없어 간혹 한여름 냉동고 인부의 눈썹 위에도 앉는 청녀

 

처음을 처음으로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청녀는 얼음 서린 표정을 보전한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또 잊어버리면서

날마다 변하고 바꾸면서 사는데

 

살아 있지 않은 자는 살아 있지 않으므로

잠 자지 않고

유리창 위 꽃잎으로 쩍쩍 피면서

청녀는 살아있는 주검으로 꼿꼿하다

 

떠나가는 가을을 얼리고 사람들을 얼리지만

눈처럼 덮거나 눕히는 것이 아니라

선 채로 하얗게 사람이 사람을 증거케 한다

 

청녀는 가시가 아니지만 가시가 되기도 하여

 

지혜로운 자는 함부로 웃지 않아서 높은 방석을 얻고 청녀를 두려워하는 자는 복이 있으나 어리석은 자는 웃을 때를 몰라 가시에 찔리고 그의 혀에는 형벌의 검정 바늘이 돋는다

 

청녀는 차가운 아름다움을 관장해서 오직 청녀를 경외하는 사람만 신선한 미모와 청렬한 선함을 받을 것이며 감사의 열매가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 겨울 바다를 건너면서도 따뜻한 바람을 받을 것이다

 

청녀는 갈 때도 한 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뿐히 가느니 그가 앉은 자리를 찾지 말아라 녹여 주는 자가 올 때 사방으로 도망치 않은 그는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곳에 없으니 생명 있는 모두가 영원히 그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

 

 

* 서리를 맡아 다스리는 신.

 

 

  1. 경북 고령 출생으로. 2010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꼬리』 『소금을 꾸러 갔다』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방식이 있고, 논문으로 구상 시인의 생애와 왜관 낙동강이 있다. 신라문학대상, 한국문학예술상, 농어촌문학상 대상>, 경북작가상, 경상북도문학상, 석정촛불시문학상등을 수상했다. 예천생태원에 2016년 예천군에서 세운 시비가 있다.. 현재 낙동강문학관 운영위원,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지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