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 2018년 봄호(통권 97호) 수록 - 기획연재-<언령> 동인의 추천시
― 경당일기 2 을묘년乙卯年(1615년) 7월 병오丙午(1일) / 김주완
400세 조선 경당敬堂이 900세 송나라 정이程頤를 만나는 아침,
어제는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굵은 비의 혀가 만 가지 단서를 일으켜 참과 거짓의 경계를 가르니 지극히 큰 밝음이 어둠을 밀어냈다, 꿈속에서 서애 류 선생을 뵈었다
닭이 울어 새벽에 깨었다, 다시 잠들 수 없어 주역 서문을 읽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걸어 묻는다, 선생의 선생은 말을 콩처럼 골라서 답변을 하는데 분별이 어렵다, 하늘과 땅의 정적이 둥글게 부풀어 일어서고 있다
오래도록 가물다가 비가 내리니 모든 백성이 모를 옮겨 심는데 검은 머리 아이와 흰머리 늙은이가 논길에서 기뻐하며 함께 손뼉을 쳤다, 지난봄의 일이다
마음은 계란과 같으므로 인仁은 곧 생生하는 성性이다, 마음이 살면 길吉과 흉凶이 한 몸 안에 있어 천하의 걱정이 앞을 향하니
주역 서문을 삼독三讀하면 둔갑을 한다고 미욱한 자들이 믿고 있다, 싸리 울타리 너머가 숲이고 어둠이다, 아 두려운지고 깜깜한 내일이여, 대업을 내는 사람이여
머리를 빗지 않았다, 마음만 가지런히 빗고 족인族人의 초대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취해서 돌아왔다, 일전의 일이다, 때는 처음부터 하나만 있지 않으니
주역의 말은 질문이고 대답이다, 만물은 변하기에 변하지 않음에 붙어 있다, 변화의 근본은 간단하다, 다음인 지금이 변화이다, 앞과 뒤가 없어야 불변이다
듣고 말하는 서책書冊은 사람이다, 소리가 없는 데서도 듣는 듯이 하며 얼굴이 없는 데서도 보는 듯이 해야 하느니, 삼천 년이 지나도 하늘에서 비 오고 해 진다, 달 뜨고 새 난다, 뿌리 있는 자만이 꽃을 피우느니, 피지 않은 꽃은 꽃이 아닌지라
[시 감상] 시로 읽는 철학 / 김인숙(시인)
김인숙 :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으며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꼬리』 『소금을 꾸러 갔다』 『내가 붕어빵이 되고 싶은 이유』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방식』 이 있으며 신라문학대상, 한국문학예술상, 농어촌문학상 대상, 석정촛불시문학상, 경상북도문학상, 경북작가상을 수상했다. 경북문협 사무국장을 역임한 후 경북문협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시동인 <언령> 회장을 맡고 있으며 구상문학관 시창작 강좌 지도교수이다. |
촌철살인의 서정시가 일순에 우리를 압도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서정시의 본령이 그러해야 한다는 데도 따로 토를 달고 싶지 않다. 그러나 시에서 세상을 읽고 과학을 접하며 철학에 빠져드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김주완의 시 「주역 서문을 읽다」는 바로 그러한 접점에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공부하던 유교경전 4서 3경 중의 하나가 역경(易經) 즉 주역이다. 역(易)이라고도 한다. 역에는 이간(易簡)·변역(變易)·불역(不易)의 세 가지 뜻이 있다. 이간(易簡)이란 하늘과 땅이 서로 영향을 미쳐 만물을 생성케 하는 이법(理法)은 실로 단순하며, 그래서 알기 쉽고 따르기 쉽다는 뜻이다. 변역(變易)이란 천지만물은 멈추어 있는 것 같으나 항상 변하고 바뀐다는 뜻으로 양(陽)과 음(陰)의 기운(氣運)이 변화하는 현상을 말한다. 즉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현상의 원리를 설명하고 풀이한 것이다. 불역(不易)이란 이런 중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있으나 그 변하는 것은 일정한 항구불변(恒久不變)의 법칙을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법칙 그 자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철학적 원리를 가장 잘 녹여낸 시가 곧 김주완의 『주역 서문을 읽다』가 아닌가 생각된다. 시인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시작노트를 옮겨본다.
『경당일기』를 펼친다. 대중없이 열리는 날이 을묘년(乙卯年) 7월 1일(丙午)이다. 변환하여 양력 1615년 7월 26일 일요일이다. 농경사회에 요일 개념은 없었을 터, 잔글씨로 쓰인 일기는 날짜와 일진만 적혀 있는 날도 더러 있고 두 줄이 넘는 긴 글로 기록된 날도 어쩌다 있는데 이날은 딱 세 자로 요약되어 있다. ‘독역서(讀易序)’, ‘주역 서문을 읽은’ 날이다.
경당(敬堂)은 400년 전 조선의 산림처사이며 그가 읽는 주역 서문은 900년 전에 송나라 정이(程頤)가 쓴 글이다. 주역의 정신과 의의를 가장 잘 피력한 명문, 주역 서문이 있어 400세 조선 경당과 900세 송나라 정이가 만나는 아침이 열린다. 초야에 묻힌 학자의 청빈한 모습과 학구생활의 고뇌가 짐작되고 향촌사회의 생활상이 떠오른다. 밤새도록 비가 내리는데 학자는 참과 거짓의 경계를 궁구한다. 정신은 잠들지 않는다. 꿈에서도 원리와 수리를 찾아 논구하고 스승인 서애 류성룡을 만나 학문에 천착함으로써 어둠을 밀어내는 지극히 큰 밝음을 맞이한다. 앞 사람과 뒤의 사람이 서로 다른 강물에 발 담그고 선 채로 주고받는 정신으로 이어져 진리가 온축된다.
『주역(周易)』은 글자의 뜻과 같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현상의 원리를 설명하는 책이다. 주역에서는 자연법칙의 네 가지 근본원리로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을 내세운다. 이는 봄에 태어나고(春生) 여름에 성장하고(夏長) 가을에 거두어들이며(秋收) 겨울에 저장한다(冬藏)고 하는 농경사회의 계절적 순환질서가 된다. 이러한 자연법칙을 천명(天命)이라고 한다. 중용 1장에는 “천명을 성이라 이른다(天命之謂性)”고 한다. 그러니까 천명의 다른 이름이 성이다. 천명인 성이 사물 속에 들어가면 물성(物性)이 되고 인간 속에 들어오면 인성(人性)이 된다. ‘사람이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한다(率性之謂道)’. 여기서의 도(道)는 도덕법칙으로서 맹자가 말한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이다. 자연법칙인 원형이정이 사람 속에 들어와 인의예지라는 도덕법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仁)은 곧 생(生)하는 성(性)이다. 인의 거처인 마음은 계란과 같다. 마음은 눌러 닦아야 한다. 마음이 살면 길(吉)과 흉(凶)이 한 몸 안에 있어 천하의 걱정이 앞을 향하게 되어 미욱한 지경에 들게 된다.
모든 것은 태극에서 나왔지만 태극에 붙들려 있지 않고 천변만화의 조화로 이어진다. 따라서 때는 처음부터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역의 말은 질문이고 대답이다, 만물은 변하기에 변하지 않음에 붙어 있다, 변화의 근본은 간단하다, 다음인 지금이 변화이다, 앞과 뒤가 없어야 불변이다.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시공을 넘어선 불변의 것(가치, 본질, 수학적 법칙, 논리적 법칙)이 변화하는 시공에 붙어 현상한다. 하나가 둘인 이유이고 둘이 하나인 이유이다.
선경의 복숭아(반도:蟠桃)는 삼천 년에 한 번씩 열매가 열린다. 삼천 년이 지나도 하늘에서 비 오고 해 지기에 가능한 일이다. 달 뜨고 새 날기에 가능한 일이다. 뿌리 있는 자만이 꽃을 피우느니, 피지 않은 꽃은 꽃이 아닌지라. 400세 경당이 900세 정이를 만난다.
우리는 한 권의 철학서를 읽었을까, 뛰어난 묘사의 서정시를 읽었을까. 물론 둘 다이다. 사유하는 인간의 내면적 지주는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경제ㆍ사회의 발전으로 육체와 생활이 풍요해졌다면 심리적ㆍ정신적 발전은 인간학의 대경대법, 철학이 기초가 되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딱딱하고 메마른 철학의 세계를 한 편의 서정시로 풀어낸 것이 김주완의 시 「주역 서문을 읽다」이다. 천천히 곱씹으면서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장면 장면들의 묘사가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시의 독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당대의 고절한 선비였던 경당이 되어 400년 전의 일상을 살게 된다. 나아가 현대의 지성인이 살아야 할 삶의 자세를 배우게 된다. 변화의 반영인 현상과 그 배후에 있는 불변의 원리가 각각 따로 있는 개별자가 아니라 하나 안에 함께 있는 통합자라는 것은 삼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이다. 바로 그 사실이 궁극적으로 유한한 삶을 영원성으로 이어지게 하고 부정적 현실을 긍정적이게 만드는 것이다.
김주완 시인은 나의 스승이다. 2008년 처음 시인을 만났을 때 한 발 다가가기 두려울 만큼 칼 같은 분이었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는 자상, 자애하였다. 나는 시인의 기존의 글을 읽고 반했다. 지금껏 시인보다 글을 더 잘 쓰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문단의 지명도와 글의 수준은 정비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김주완의 시 「주역 서문을 읽다」는 한국문협에서 주관하는 제54회 한국문학상( 2017년) 수상 시집 『주역 서문을 읽다』의 표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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