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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청녀 / 김인숙

계간 2025 봄/통권 125호, 도서출판 시와산문사, 2025.03.01., 280~283쪽.  청녀(靑女)김인숙 [1] 청녀(靑女)의 글자적 의미는 '푸른 여인'이다. 사전적 의미는 “서리를 맡아 다스린다는 신” 또는 “서리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청녀는 서리와 연관된 말 또는 서리 그 자체이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의 아침 들녘에 나가 보면 하얗게 서리가 내려 마치 눈이 온 듯한 풍경을 마주할 때가 있다. 서리는 ‘하얀 색깔’인데 왜 '푸른 여인'이라 하는가?> 서리의 신은 왜 남성이 아니고 여성인가?> 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중국어의 ‘靑女’나 일본어의 ‘せいじょ’는 우리 말의 청녀와 같은 의미이다. 다만 여기서는 서리뿐만 아니라 눈(雪)의 의미도 더하고 있다. 러시아어 ‘этн. дух..

<산문> 왜관 첨상(瞻想)/김주완

왜관 첨상(瞻想) 김주완 ○ 프롤로그 이 글은 왜관에 대한 술회이다. 소설이나 기록이 아니다. 주장이나 논증도 아니다. 다만 나의 기억과 회상 그리고 가벼운 상념(想念)을 따라가며 서술하는 작은 소묘(素描)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누구든지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은 그들의 서술 지평에서는 전적으로 옳을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종류의 토론이나 논쟁에 대해서도 나는 미리 문을 닫는다.이 글의 시간축은 내가 태어난 1949년부터 현재인 2024년까지 75년 동안이며 공간축은 나의 출생지인 왜관읍과 칠곡군 일원이다. ○ 아름다운 칠곡 왜관은 1914년 이래 칠곡군의 군청 소재지이다. 행정구역 안의 8개 읍면 가운데 제일의 위상을 아직은 지키고 있다. 그러나 칠곡군은 197..

<시> 청녀/김인숙

청녀(靑女)* / 김인숙  청녀가 오는 아침이면 하얀 면도날이 천지만물에 곤두선다 녹고 싶었지만 녹여 주는 자가 없어 간혹 한여름 냉동고 인부의 눈썹 위에도 앉는 청녀 처음을 처음으로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청녀는 얼음 서린 표정을 보전한다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또 잊어버리면서날마다 변하고 바꾸면서 사는데 살아 있지 않은 자는 살아 있지 않으므로잠 자지 않고유리창 위 꽃잎으로 쩍쩍 피면서청녀는 살아있는 주검으로 꼿꼿하다 떠나가는 가을을 얼리고 사람들을 얼리지만눈처럼 덮거나 눕히는 것이 아니라선 채로 하얗게 사람이 사람을 증거케 한다 청녀는 가시가 아니지만 가시가 되기도 하여 지혜로운 자는 함부로 웃지 않아서 높은 방석을 얻고 청녀를 두려워하는 자는 복이 있으나 어리석은 자는 웃을 때를 몰라 가시에 찔리고..

오래된 약속/김주완

동의대학교 명예교수인 강손근 박사가 귀목(貴木)에 양각으로 새긴 서각 현판 居敬窮理(거경궁리)>를 보내왔다. 서로 소식이 막힌 지가 오래되었는데 무려 16년 만의 연락이다. 허허 웃으면서 강 교수는 "아마 잊었을 것 같은데 오래전에 한 선물 약속을 이제야 지킨다"라고 했다. 내용을 풀어 달라고, 동양철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한국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대구교육대의 장윤수 박사에게 현판을 사진으로 찍어 보냈다. “좋은 선물을 받았다”며 축하해 주면서 “작품이 아주 좋다”고 높이 평가했다. 까마득한 기억의 실마리를 찾아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른다. 2010년에 치러질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나는 고향 마을로 돌아가 칠곡군수에 출마하기로 마음먹고 사전 준비를 위하여 재직하던 대학에서 선거 1년 전에 미리 명예퇴직하였다..

심촌 이필주 문집 서시_돌밭에 피는 영원의 꽃/김주완

광주이씨 석전종중, 心村 李弼柱 八旬紀念文集, 『돌밭과 因緣』, 대구:대보사, 2024.10.01., 58~61쪽. [서시(序詩)] 돌밭에 피는 영원의 꽃  김주완시인, 철학박사, 대한철학회장, 대구한의대 교수 돌밭은 돌만 있는 밭이 아니라옥(玉) 같은 사람이 나와 옥밭이며학(鶴) 같은 선비 정신이 솟아 강학의 터전입니다백일홍 붉은 꽃잎과청렬한 고드름처럼 반짝이는 지고지순이천년 동안 피는 언덕 위의 꽃밭입니다 동산에 집 이 있어만년을 넘어아침마다 붉은 해가 뜹니다 420세 낙촌 선생이남한산성 임금님을 사모하며해 뜨는 동쪽 매원을 거닙니다 잔설 날리는 대숲을 나와잔가지 창공으로 벋은 회화나무 아래로도포자락 흰 눈처럼 휘날리며강직한 바위로 높이 선 옥안의 영의정401세 귀암의 등 뒤로일곱 빛깔 눈부신 무지..

<시 감상> 시로 읽는 철학/김인숙(시인)_김주완 시, <주역 서문을 읽다> 감상

2018년 봄호(통권 97호) 수록 - 기획연재- 동인의 추천시  [시] 주역 서문을 읽다   ― 경당일기  을묘년乙卯年(1615년) 7월 병오丙午(1일)  /   김주완    400세 조선 경당敬堂이 900세 송나라 정이程頤를 만나는 아침, 어제는 밤새도록 비가 내렸다, 굵은 비의 혀가 만 가지 단서를 일으켜 참과 거짓의 경계를 가르니 지극히 큰 밝음이 어둠을 밀어냈다, 꿈속에서 서애 류 선생을 뵈었다 닭이 울어 새벽에 깨었다, 다시 잠들 수 없어 주역 서문을 읽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을 걸어 묻는다, 선생의 선생은 말을 콩처럼 골라서 답변을 하는데 분별이 어렵다, 하늘과 땅의 정적이 둥글게 부풀어 일어서고 있다 오래도록 가물다가 비가 내리니 모든 백성이 모를 옮겨 심는데 검은 머리 아이와 흰머리 ..

<시 감상> 되돌아 나오는 슬픔/김선자(시인)_김주완 시,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 감상

2018년 가을호(통권 99호) 수록 - 기획연재- 동인의 추천시 [시]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김주완 강의 서쪽에 그녀의 집이 있네 자동차로는 못가는 길 걸어서 가야만 하네 철교를 지나서 심장을 움켜쥐고 굽이굽이 꺾어들면 휘영청 돌아가는 한적한 길이 있네 인적 드문 하늘길 강길 높이 뜬 둘레길이네 눈 내린 새벽이면 저벅저벅 발자국이 푸른 도장으로 찍힌다네 갓 감고 나온 숱 많은 그녀 머릿결 늘어질 때쯤 보름달 대문은 열려 있지만 조용히 기웃거리다가 밤 깊은 사람은 돌아오네 나무는 나무의 몸을 모르고 성스러운 집은 잡인을 금하느니 스스로 높이 받들어야 존귀해지기 때문이네 몰래 가슴에 담아 오기만 해야 하네 내가 남긴 발자국 조용히 닦아내며 안개처럼 스러지며 돌아와야 하네 집이 아름다운 것은 높이 혼자..

[시] 위지악 이선기인울 외 2편/김주완

2020년 봄호(통권 105호) 수록 [신작시특집] 3편 위지악 이선기인울* /김주완 -음악 노년이 되면서 맑고 높은 음에서 눈물이 난다 청력을 잃은 음악가는 눈물의 높이에 음자리를 그렸을까 동굴 벽을 뚫고 나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어두운 바닥에 부딪쳐 온몸이 부서질 때 비로소 가늘고 맑은 소리가 된다 술대를 튕기면 떨어지는 소리 한 방울 튀어서 귀먹은 가슴에 들어서듯이 안에서 밖으로 베풀면 안은 비워지고 넓어져서 편안해진다 집 안에 빈 하늘이 있고 빈 땅이 있어 그 사이로 해가 들어온다 따뜻하고 곧고 하얀 햇살들이 빈 구석구석을 밝히고 덥힌다 오, 베풂과 들어섬의 성스러움이여 높고 구성진 소리는 귓속의 어둠을 밝히며 가슴의 동공을 후려친다 터져 나온 강물이 굽이치는 설움의 물결 최고의 말은 무언이다..

[수필]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김주완

[수필] 2022년 가을호(통권 115호) 발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김주완 시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 중의 하나가 라는 명제이다. M. 하이데거가 처음으로 규정한 이 명제는 그러나 시 창작에만 한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 명제는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철학적이다. 하이데거는 R. M. 릴케의 20주기를 맞은 1946년에 릴케를 회상하고 그의 시를 분석하는 논문 한 편을 조그마한 교회에서 발표한다. 논문의 제목은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이며 이 논문 가운데서 하이데거 자신의 유명한 명제 가 최초로 등장한다. 하이데거는 철학자이면서 그 자신도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 릴케의 시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가운데서 현존재를 분석하는 하이데거 자신의 존재론이 구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인인 릴케도 철학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