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자연시』동인지 제9집(1996.11.15) 발표
개와 함께 언덕을 내려가다 머뭇거리는
-- 김관식의 사진작품 「4328년 겨울」
김주완
겨울바람이 만든 모래언덕을 넘어
빈 벌판을 내려가고 있다.
등허리와 다리근육이 발달한 개 한 마리를 끌고
벼랑 끝 관목림 숲에 닿은 긴 그림자에 끌려
달밤의 분화구 근처를
사내가 머뭇거리고 있다.
분화구를 내려가면
거기, 내장과 심장과 폐와 자궁 등 죽은 듯이 살아있는 뭇 기관이
어둠 속의 미로로 얽힌 채 아마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돌아갈 넓은 땅’*에
숲은 지천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끝에 있는 벼랑을 감추기 위해
숲은 한켠에 모여서 있다.
곧장 숲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
그 속에서 문득 길은 사라져버릴 것이고
사라진 길은 벼랑으로 우회할 것이다.
꿈틀거리는 달빛이 지하 수천 길
욕망의 강으로 흐를수록
능선은 굴곡 선연히 미끄러지고 있다.
떠돌다 추락하는 존재의 섭리가
끝없이 넓은 땅의 한쪽
절벽 끝으로 아득히 매달려 있다.
* ‘우리 모두 돌아갈 넓은 땅’은 작가 김관식이 자신의 사진작품 소재인 알몸의 여체에 부여한 의미규정이다.
<199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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