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시 해설/근작시

[시] 머물지도 않으면서 남기고 간다 / 김주완 [1997.10.02.]

김주완 2001. 8. 3. 23:46


[시]


    머물지도 않으면서 남기고 간다


                                                        김주완


            1


머물지도 않으면서 남기고 간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그대 지나간 자리의 여진

남모르게 숨은 떨림이

내 정신의 가지 끝에 자욱히

사라지지 않고 여지껏 있다

나는 

지금

이동할 수 없어 서러운

붙박이 묵은 나무이다

그대

돌아가는 길 멀리

황금 네거리에서 중동교 쪽으로

직진 신호를 기다리며

내 속에 남아있는 그대를 밀어낸다

그대 긴 목

긴 두 팔이 만들어내던

안개꽃 여린 기억을 닦아낸다

그러나 자국들 너무 깊다

--나는 이제

모 방속국 기상 캐스트 L양이 나오면

채널을 돌려 버린다

나의 시간 정지하여 있고

그대의 삶 살아 있으므로서이다 

                    

                                                   <1997.10.07.>



              2


1997년 7월에서 9월 사이

잠시이면서도 잠시가 아닌 동안

영혼을 짜낸

정신의 피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너는

고이지 않는 항아리 너머로

돌아서 갔다

너의 발길을 적실 힘도 없이

흔적없이 잦아드는

내 푸른 피를 보며

진리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를

나는 하염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너의 일과 나의 일

너의 문제와 나의 문제에 대한

결국은 내 탓인

너의 탓에서 연유하는 우리의

오늘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너를

그냥 그대로 둘 것이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얼음같이 차가운 진리를

단지 보기만 할 것이다

기억의 지층 깊이 이쁜

너의 반쪽을 묻을 것이다

언제까지건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정한 내일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 1997.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