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시 해설/근작시

[시] 바람의 투신 / 김주완 [1996.11.15.]

김주완 2001. 6. 3. 17:52

 

[시]


         『자연시』동인지 제9집(1996.11.15) 발표



                    바람의 투신

    

                                                    김주완


대밭에서 겨울바람 일면

칼바람 소리가 난다.

댓잎이 바람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댓잎에 몸을 던져

스스로 부서지는 육신의 소리


붉게 솟는 꿈들을 잡아가둔

대밭은 아득한 어둠의 성벽으로 있고

싸늘한 웃음을 흘리는

댓잎은 삼엄하게 일어서는 권위로 있다.


지상에서 가장 약한 이웃과

그들의 내일을 사랑하는 자들의 숨결이 모여

한때 세상을 휩쓰는 거대한 힘이 되었다가

그러나 끝내 빈 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절절히 보여야 할 때,

혹은, 바람으로 달려온 무게가 쌓여

바람이 더 이상 바람일 수 없을 때

그들의 장렬한 죽음은 대밭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조각난 바람에 내키는 대로 색칠을 하지만

육신이 비어 있으므로

그들은 색깔도 냄새도 없다.

투신 이후의 바람은 그러므로 침묵한다.


                                               <1996.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