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철학연구] 제86집, 대한철학회, 2004.05.31., 91~114쪽.에 수록되었음.
니콜라이 하르트만 철학에서 정신과 언어
김주완(경산대학교 교수)
[논문개요]
이 논문은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언어관을 해명함을 목적으로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언어철학자가 아니며 언어를 독립적 주제로 다루는 어떤 저서나 논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대한 저술 곳곳에서 언어에 대한 언명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그의 저서 『정신적 존재의 문제』(Das Probrem des Geistigen Seins)에서는 언어를 정신적 존재의 일종(객관적 정신)으로 규정하면서 매우 폭 넓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 『정신적 존재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고 그 밖의 다른 여러 저술에서 나타나는 언어에 대한 그의 견해를 광범하게 색출하고 정리하는 이 논문은 그 내용상 본격적인 정신철학적 언어철학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정신철학적으로 보았을 때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이 논문의 단적인 주제해명을 위하여 문제로 삼은 세부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니콜라이 하르트만에 따라 언어를 정신적 존재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러한 정신적 존재의 근본형식은 무엇이며, 그것은 또한 몇 종류로 분류되는 것인가? 그리고 언어는 어떤 종류의 정신에 속하는가?
② 언어의 정신적 내용은 무엇이며, 언어의 습득은 유전성과 학습성중 어느 것으로 파악되는가?
③ 언어의 생명적 기반은 무엇이며, 언어의 실사성과 산 언어의 본질은 무엇인가?
④ 언어와 사유와 현실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사이의 소유와 지배관계는 어떻게 파악되는가?
⑤ 언어와 이해의 문제는 어떻게 해명되며, 언어 - 말 - 글자의 관계는 단순한 협정관계이기만 한 것인가?
이러한 세부적 문제해명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한 귀결은 한마디로 ‘언어는 곧 정신이다’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때의 정신은 곧 문화와도 연결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를 통하여 언어 이외의 다른 제반 정신적 존재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므로 정신적 존재의 한 가운데 언어적 존재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의 결과가 가지는 기대 효과로는, 우선 고전적 언어철학에서부터 현대의 언어분석철학과 철학적 언어철학에 이르기까지 거의 간과되어온 언어 그 자체의 존재해명을 통하여 언어철학 전반에 대한 기초를 공고히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라 언어가 정신적 존재의 영역에서 여타의 정신적 존재 모두를 담지하고 또한 그것들에 담지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이 연구의 결과는 철학과 문학은 물론 그 외의 예술분야와 문화전반의 연구자들에게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확장시켜줄 것이며 나아가 그들의 창조적 작업의 기초로 활용되리라는 점이다.
※ 주제분야 : 존재론, 정신철학, 언어철학
※ 주 제 어 : 개인적 정신, 객관적 정신, 객체화한 정신, 말함, 언어 그 자체, 말해진 말, 산 정신, 산 언어, 실사성, 언어-말-글자의 관계, 언어-사유-현실의 관계
Ⅰ. 문제제기
이 연구는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정신과 언어의 연관성에 관한 해명을 목적으로 한다. 지금까지의 언어에 대한 철학적 연구는 대개 두 갈래로 진행되어 왔다. 하나는 일상언어의 명석화를 목적으로 하는 영미계통의 언어분석철학이며, 다른 하나는 언어의 의미를 해석학적 입장에서 밝히는 유럽중심의 철학적 언어철학이다. 그러나 언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정신철학적 해명은 두 입장 모두에서 취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지금까지의 두 연구방향 모두에서 취약했던 정신과 언어의 관계를 존재론적 입장에서 해명함으로써 존재론적 언어철학 또는 정신철학적 언어철학이라는 새로운 연구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중심적인 연구대상이 되는 철학자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이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언어를 독립적 주제로 다루는 어떤 저서나 논문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어철학을 정신철학의 한 분과영역으로 확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저서 곳곳에서 언어에 대한 존재론적 해명을 계속하고 있으며, 특히 그의 저서 『정신적 존재의 문제』1)에서는 언어를 정신적 존재의 일종(객관적 정신)으로 규정하면서 매우 폭 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서 언어에 대한 그의 견해를 광범하게 색출하고 정리하여 분석․종합함은 물론 특히 『정신적 존재의 문제』에서 많은 시사를 받아 그의 언어관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필요한 경우에 있어서는 하르트만의 명시적 언급을 넘어서서 필자의 이해와 해석이 포함되어 논의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문제로 삼고자 하는 하위의 세부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니콜라이 하르트만에 따라 언어를 정신적 존재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러한 정신적 존재의 근본형식은 무엇이며, 그것은 또한 몇 종류로 분류되는 것인가? 그리고 언어는 단지 객관적 정신에만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종류의 정신에도 속할 수 있는가?
② 언어의 정신적 내용은 무엇이며, 언어의 습득은 유전성과 학습성 중 어느 것으로 파악되는가?
③ 언어의 생명적 기반은 무엇이며, 언어의 실사성과 산 언어의 본질은 무엇인가?
④ 언어와 사유와 현실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사이의 소유와 지배관계는 어떻게 파악되는가?
⑤ 언어와 이해의 문제는 어떻게 해명되며, 언어-말-글자의 관계는 단순한 협정관계이기만 한 것인가?
Ⅱ. ‘정신’이라는 개념의 애매성
<정신>이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정신적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 문제인 이 문제의 역사는 가장 무거운 오류의 부담을 안고 있다. 하르트만은 “정신적 존재를 파악하려고 하는 거의 모든 시도는 일면성과 전통적 선입견 또는 사변적 구성에 빠지고 있으며, 특히 세계관의 양극(관념론과 유물론:필자)속에서 움직여 정신을 만물의 기초로 이해하거나 물(物)의 단순한 부산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2)고 한다. 다시 말해서 정신의 본질에 관한 정의는 여러 학설체계에서 다양하게 규정되어 왔지만 그 어느 것도 완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하르트만은 먼저 정신에 대한 잘못된 정의로서 <삶의 철학에서의 정신개념>과 <정신은 곧 의식>이라고 보는 관념론적 학설들 그리고 <정신과 심리를 동일시>하는 견해들을 들고 있다.3) 또한 하르트만은 <정신을 자기의식>이라고 보는 견해와 <정신을 이성과 동일시>하는 고대의 학설들, <인간학의 정신개념>과 <작용수행으로서의 정신생활>이라는 개념들은 모두 일면적인 견해라고 한다.4)
하르트만은 정신을 해명하기 위한 그 자신의 “연구를 그 대상(정신:필자)의 개념규정 없이 시작한다”5)고 한다.6) 그는 스스로 “처음엔 비록 불만족하더라도, 실제로 있지도 않은 논리적 선명성을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속임수를 거부하는 방식이 훨씬 더 깔끔하다.”7)고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하르트만은 <정신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에 대한 개념 규정 없이 출발하면서도 그러나 동시에 문제의 제한을 설정한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또는 적어도 무엇이 정신을 두루 특성 짓는 것이 아닌지를 결정할 필요”8)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제를 제한하는 일은 물론 그의 예비연구에 속하며, 연구의 출발점이 된다.
이리하여 하르트만은 그의 존재론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제기될 수 있는 정신적 존재의 문제 제한으로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설정한다.9)
① 먼저, <땅에서 유리된 정신>(Schwebender Geist)을 거부하고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정신>(aufruhender Geist)만을 인정한다. 여기서 그가 <땅에서 유리된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형이상학적 사변과 몽상을 일컫는 것이고,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존재학에서 실질적으로 논구되는 경험적 현상에서 출발하는 정신이다.
② 다음으로 , 정신은 아래층의 존재에게 부담되어 있으면서도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정신을 의존성과 자율성이라고 보는 이러한 종합적 견해는 동시에 정신을 합성물이라고 이해하는 견해를 제거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③ 형이상학적 양자택일을 폐기한다.
④ 마지막으로, 통속적 세계관의 반정립적 근본주의(Anti-thetischer Redikalismus)를 그의 존재학적 사유로서 극복한다. 통속적 세계관은 언제나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는 “세계는 <위로부터>(von oben)가 아니면 <밑으로부터>(von unten) 설명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믿고, 정신의 전능이냐 아니면 물질의 전능이냐에 대해 결정을 내린다.”10) 요컨대 이것은 세계설명의 두 가지 근본형이다. <위로부터>의 세계설명은 이성, 정신, 이념, 신(神)에 의거하고, <밑으로부터>의 세계설명은 물질, 자연법칙, 인과성 등에 의거한다. “전자는 물질과 자연을 정신화 하고 후자는 정신을 물질의 부속물로 격하시킨다.”11) 이와 같은 통속적 세계관에는, 단일원리에서의 세계설명이 최선의 설명이고 단순성이 진리의 표지라는 케케묵은 선입견이 개입하고 있다.
Ⅲ. 정신적 존재의 근본형식
하르트만에 의하면 정신은 세 가지 존재형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즉 개인적 정신(personaler Geist), 객관적 정신(objektiver Geist), 객체화한 정신(objektivierter Geist)이 그것이다. “소박한 시선에 대해서는 언제나 시선이 부착해 있는 임의의 정신적 통일체로서 우선 개개의 사람들이 제공된다. 역사적 시각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아주 자연스럽게 대규모의 상태, 사건, 변천 등이 두드러지게 보이고, 정신과학에게는 정신적 창조의 산물인 작품들이 마중을 해준다.”12) 이렇게 보았을 때, 개인적 정신은 주관적 정신이며, 객관적 정신은 역사적 정신이며, 객체화한 정신은 각종의 정신 재(財)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 정신>은 소박한 이해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정신적인 단일성들은 개인적인 인간이다. 이 정신의 주요 징표는 탈 중심성 (ExƷentrizität), 즉 충동과 환경세계에 동물적으로 구속되어 있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여기서 비로소 객관성(Objektivität)이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충동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던 중심 이탈적인 의식을 통해서만 사물이 객관적인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정신은 단순히 실사적이며 이상적인 세계를 반영하는 정신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연관의 현실성 안으로 편입된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행위하고, 말하고, 의욕하고, 괴로워하는 존재로서, 다른 정신적 개별 존재와 결합해 있는 한에서 인간 개체가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의 단일성과 전체성은 한 실체의 단일성과 전체성이 아니다. 시간 흐름에 있어서의 개인 정신의 동일성은 자신으로부터 이 시간 흐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 흐름의 자기 고유의 실행을 통하여서 항상 다시 이 동일성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예컨대 불신, 사랑, 다른 사람의 우정에 대한 배신 등등은 대상의 상실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기 변화와 자기 포기를 의미한다. 개별 정신은 항상 새로운 상황에 빠져들게 되고 자유로운 결단에로 강제된다. “강제는 결단의 <사실>(Daβ) 속에 놓여 있고, 자유는 결단의 <방법>(Wie) 속에 놓여 있다”13)고 하는 사실은 더욱이 개별 정신의 특징을 이룬다. 또한 자기의식은 이 정신의 본질에 속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 대한 직접적 반성이라는 공허한 자기의식이 아니라 내용적 자기의식이며, 이 후자는 행위 하면서 세계에 열중해 있고 자기 자신의 행위의 거울 안에서 되돌아보는 것에서 자신을 바라다보았을 경우 비로소 시간의 경과 속에서 획득하게 되는 자기의식인 것이다.
<객관적 정신>이란 초개인적 공동정신이다. 그것은 “인간사회의 집단적 정신이며, 편견 없는 언어사용에 있어서 우리는 시대의 정신, 한 시기의 정신, 이를테면 바로크 기(期)의 정신, 어떤 민족의 정신 등을 말하게 되고, 또한 보다 작은 척도에서는 어떤 계급의 정신, 어떤 직업의, 어떤 당파의, 어떤 학급의 또는 어떤 가족 등등의 정신을 말한다. 그것은 보통 그 속에서 우리가 활동하고, 그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서로 의사를 소통하는 매체이다.”14) 이러한 객관적 정신의 영역을 하르트만은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즉 “언어, 생산과 기술, 현행관습, 현행법, 널리 행하여지고 있는 가치 평가, 지배적인 도덕, 재래의 교육형식과 교양형식, 태도와 마음씨의 유력한 유형, 모범적인 취미, 예술의 경향과 예술적 이해의 경향, 인식과 과학의 현 상태, 지배적인 세계관, 거기다가 신화적 세계관이든 또는 종교적 세계관이든, 또는 철학적 세계관이든 간에 모든 형식의 세계관 등이 그것이다.”15)
이 정신은 매양 어떤 특수한, 다른 모양의 것과 구별되는 정신이라는 것을 좀처럼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그것은 이 정신이 우리에게 자명하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양의 정신과 마주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특수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객관적 정신은 독자적 실체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한갓된 개인들의 총화도 아니라 다만 해당한 인간 속에 구체화되어 있음으로 해서만 실존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그것은 하나의 “잡을 수 있는 통일성이요 전체성”16)이다. 객관적 정신은 자립적 존재를 지닌 것은 아니면서도 그러나 역시 주관적 정신으로서의 개체에 못지않게 실사적이다. 이 정신은 그 자체 산 정신이요, 발전에 있어서 이해되는 정신이니, 역사적 현실의 일부로서 발생하고 발전되고 언젠가 한번은 다시 사멸하는 정신이다. 개인은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 객관적 정신 속에서 자라나며, 그것의 형식을 받아들여 그 속에서 형태를 얻는다.
정신의 세 번째 근본형식은 <객체화한 정신>이다. 이것은 살아 있는(개인적 또는 객관적)정신이 물질적 질료 속에 <자기를 객체화한>(sich objektiviert)17) 것이다. “이 형성체는 정신 자신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의 담지자로서의 산 정신에 들어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그것을 자기 밖으로 <끌어내 세웠으며>, 말하자면 자기의 변천의 동요에서 <벗어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그것을 자기 밖으로 끌어내 세우고 자기한테서 떠나게 함으로써, 정신은 결코 고정시켜질 수 없는 자기 자신과 대립시켜서 그것을 <고정 시킨다>. 정신은 그것을 자기로부터 분리시키고 자립시킴으로써 그것을 자기에게 맞세워 존립시킨다.”18) 이리하여 정신은 자기의 산물을 창조적인 생산자로부터 분리시켜 그것을 역사에게, 다시 말해서 그 생산자와 교대하게 될 장래의 산 정신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시켜진 정신 자신은 창작된 형성체 속에 내용적으로 존속한다. 비록 이 존속이 절대로 무시간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물질적 세계에 속한 형성체로서 그것들은 파괴에 내어 맡겨져 있기 때문19)이다.
개별인간은 그의 언어, 행동, 작용, 작업, 작품에 있어서 벌써 자기를 객체화하고 있다. 단지 그의 사고 안에 있을 뿐이었던 것이 그의 행위를 통한 실현에 의하여 그의 내부로부터 나와 대상계 속으로 들어선다. 작가는 자신의 정신을 형상으로 만들어내는데, 그 형상을 통해 그가 인식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형상은 그의 정신에서 떨어져 나온 형상이며, 그의 정신은 그 형상을 통해 그를 볼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적 파악의 대상으로 되는 것”20)이기 때문이다.
“객체화의 중심적이고 가장 완전한 형식은 저작과 예술적 창조물에서 나타난다.”21) 요컨대 “예술작품은 정신적 산물이며, 따라서 이 작품의 생산자는 어떤 정신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은 정신적 존재, 다시 말하면 객체화한 정신의 한 특수형태에 속하는 것이다.”22) 그러나 “객체화한 정신은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도구로부터 서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정신적 산물들을 말하는 것이다.”23) 이리하여 하르트만은 객체화의 순수한 대표자를, 인간의 작품이라는 성격을 띄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24) 각종의 예술적 창작물, 각종의 기념물, 건축물, 기술적 작품, 그리고 어느 한계 내에서의 도구, 무기, 이용과 목적달성을 위한 물건들, 수공업과 공업의 산물들이 그것이다. 약간 확대된 의미에서는 저작 속에 간직된 모든 사상적 창작물, 예컨대 과학적 및 철학적 세계상(체계)들, 신화적 및 종교적 관념들도 있다. 나아가서는 그 속에 역시 일정한 사고방식과 직관방식이 인식될 수 있는 한에서, 특별히 형성된 개념들이 있고, 또한 그것들과 유사한 도그마와 상징, 상징적인 것으로 높여지고 일반화한 모습들(영웅들, 신(神)들, 운명을 짊어진 자들)이 있다. 이러한 모든 형성체들이 가지는 특별한 점은 그것들이 그것들을 산출한 일정한 역사적 정신의 근본구조 ?? 말하자면 그 정신적 좌표계 ??를 아직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취하는 다른 산 정신에게, 이 산 정신이 이해하는 한에서, 매번 매개해 줄 수 있다는 데 있다.
Ⅳ. 정신의 존재형식과 언어
하르트만에 있어서 언어는 ‘정신적 존재의 일종’이다. 위(Ⅲ)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르트만은 언어를 객관적 정신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논지가 가지는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언어는 도대체 어떤 정신에 속하는가? 언어는 정신의 세 가지 존재형식 각각에 속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언어는 주관적 정신이기도 하고 객관적 정신이기도 하며 객체화한 정신이기도 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가능한가? 우리는 여기서 <언어 그 자체>와 <말함>과 <말해진 말>을 구분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언어 그 자체>는 객관적 정신이다. 하르트만도 ‘언어 그 자체로서의 언어’를 객관적 정신의 대표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것이 통용되는 어떤 문화권이나 어떤 지역 내에서 거기에 속한 사람들에게 자명하게 주어져 있고, 상호간의 의사소통과 사고의 도구로서 통일성과 전체성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발생하고 발전되고 언젠가 다시 사멸하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살아있는 언어’25)가 된다. 살아있는 언어(객관적 정신)는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언어라는 문화적 환경으로서 우리에게 자명하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좀처럼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모양의 정신과 마주칠 때 비로소 우리는 객관적 정신으로서 언어의 특수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예컨대 박물관의 먼지 쌓인 장서 속에서 발견된 고대의 문서(객체화한 정신)는 우리에게 낯선 것이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아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고고학자나 언어학자가 그 문자를 해독하여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로 옮겨 놓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외국어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양자 모두 지역성과 시대성이라는 한계 내에서 공통성을 가진다. 그 지역과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은 그들이 쓰고 있는 언어 자체를 언어로서 또한 객관적 정신으로서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들의 공동재산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서로 다른 언어가 번역되어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정신적 존재로서 ‘언어 그 자체’가 가지는 공통성에 그 기반을 가지고 있다.
<말함>이란 개인이 그의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 또는 사상이나 개념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그가 속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언어 그 자체(객관적 정신)를 이용하여 발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이 그의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 사상이나 개념들은 모두 주관적․개인적인 것이다. 사상이나 개념들은 언뜻 객관적․공통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개인 속에 있는 것은 어쨌든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서의 그만의 것이기에 엄밀하게 말했을 때 주관적인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까 ‘말함’은 주관적․개인적인 정신인 것이다. 그것들의 발성은 곧 주관적․개인적 정신의 발성이다. 그러므로 ‘언어 그 자체’는 객관적 정신인데 비해서 ‘말함’26)은 주관적 정신이다. 말함이란 개인적 정신이기에 개인적 정신이 가지는 특성들을 모두 가진다. ‘말함’으로써 인간은 충동과 환경세계에 동물적으로 구속되어 있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즉 탈중심성을 가진다. 인간들은 행위하고, 말하고, 의욕하고, 괴로워하는 존재로서, 다른 정신적 개별 존재와 결합해 있는 한에서 인간 개체가 되는 것이다. 개인은 항상 새로운 상황에 빠져들게 되고 어떻게 말해야 할지에 대한 자유로운 결단에로 강제된다. ‘말함’의 자기의식은 자신에 대한 직접적 반성이라는 공허한 자기의식이 아니라 내용적 자기의식이며, 이 후자는 행위 하면서 세계에 열중해 있고 자기 자신의 행위의 거울 안에서 되돌아보는 것에서 자신을 바라다보았을 경우 비로소 시간의 경과 속에서 획득하게 되는 자기의식인 것이다.
“살아있는 정신(언어; 필자)은, 공통하는 정신계의 건설과 유지라는 자기 자신의 당면요구를 위하여 객체화(말해진 말; 필자)를 필요로 한다.”27)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언어 그 자체’와 개인적 정신으로서의 ‘말함’은 살아있는 언어이다. 살아있는 언어는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변천한다. 끊임없는 변천 속에서 정신계는 유지될 수가 없다. 그러나 유지는 고정된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하여 ‘객체화’라는 작업이 생겨난다. 언어의 객체화는 곧 ‘말해진 말’이다.
<말해진 말>은 ‘말함’이 소리라는 질료 속에 고정되어 발성된 것을 말한다. ‘말함’이 개인적 정신인데 비해 ‘말해진 말’은 객체화한 정신이다. ‘말해진 말’은 소리라는 질료 속에 고정되어 버린 것이며 이미 말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에게서 떠난 버린 것이기에 그 이전 단계로 되돌이킬 수가 없다. ‘해버린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물론 말해진 말은 녹음되어 재생되지 않는 한 일회성으로 끝나고 말지만 그렇다고 하여 객체화가 아닌 것은 아니다. 개인이 ‘말함’을 통하여 소리라는 물질적 질료 속에 자기를 객체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말해진 말’은 그 담지자로서 개인의 산 정신에 들어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인은 ‘말함’을 자기 밖으로 끌어내 세웠으며 변천할 수 있는 ‘말함’ 자기 자신의 동요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개인은 그것을 자기 밖으로 끌어내 세우고 자기한테서 떠나게 함으로써, 그것을 자기에게 맞세워 존립시킨다. 이리하여 개인은 자기의 산물인 ‘말해진 말’을 자기로부터 분리시켜 그것을 듣는 다른 산 정신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해진 말’을 통하여 정신계는 건설되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됨으로써 정신계는 유지된다. 다시 말해서 ‘말해진 말’을 통하여 개인은 듣는 이에게 이해되고 인식될 수 있다. 개인은 ‘말해진 말’을 통해서 그것을 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적 파악의 대상으로 되는 것이다.
Ⅴ. 언어의 정신적 내용
언어의 정신적 내용은 무엇이며, 언어의 습득은 유전성과 학습성 중 어느 것으로 파악되는가?
언어의 정신적 내용은 의미이다. 이 때의 의미는 물론 광의에 있어서의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정신적 형식은 무엇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하르트만은 명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언어의 정신적 형식은 주관성과 객관성 그리고 객체화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구분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언어의 정신적 내용과 형식을 종합하여 말했을 때, 주관적 언어와 객관적 언어 그리고 객체화한 언어가 된다. 주관적 언어는 ‘말함’이고 객관적 언어는 ‘언어 그 자체’이며 객체화한 언어는 ‘말해진 말’이다.
주관적 언어로서의 ‘말함’이 그 속에 담고 있는 의미는 객관적 언어로서의 ‘언어 그 자체’의 의미를 근거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순전히 그러한 의미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 그 자체’의 의미와 동일한 상황이나 생각은 있기가 힘들고 대개 유사한 생각이나 상황에서 그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말하는 자(주관적 정신)가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변용하거나 추가하여 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언어로서의 ‘언어 그 자체’가 가지는 의미를 매개수단으로 하여 말하는 이의 말이 듣는 이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언어 그 자체’가 전달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언어 그 자체는 공통성과 전체성으로 특징화된다. 여기에 언어의 상호소통적 근거가 있다. 만약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각자가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어의(語義)를 가지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면 이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여진다. 따라서 어의의 일반성은 모든 전달의 기초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은 최대의 안정성을 가짐으로서 언어의 지배영역을 확보하고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기능”(allgemeine Verständigungsfunktion)28)을 언어가 보장하도록 한다.
언어가 가지는 이와 같은 의사소통의 기능을 하르트만은 공통성을 유통시키는 “화폐”(Scheidemünze)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29) 언어가 정신인 한, 그것은 곧 “정신의 화폐”(Scheidemünze des geistigen)30)인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공통성과 전체성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그것은 느낌으로서 주어지며 직접적인 공통의 이해가능성에서 입증된다. “언어는 하나로서, 통일적인 전체성으로서 감지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전체성의 감지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시대인들을 결합하는 이해의 직접성 가운데 그 증거(Beleg)를 가지고 있다.”31) 언어의 공통성과 전체성은 바로 공통성과 전체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비대상적으로 주어진다. 세대에서 세대로, 시대에서 시대로 언어는 ‘소리없이 들어서는 것’32)이며, 따라서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고 그것이 또한 우리 속에 살아 있지만 실천적 생활에서는 아무런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므로 대체로 대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언어 그 자체는 이와 같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이 유전되는 것은 아니고 전승되는 것이다. “개개인은 그의 언어를 스스로 조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언어를 말하여지고 있는 언어로서 발견하고, 함께 말하는 가운데 말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언어를 ‘넘겨 받는다’ (⋯⋯) 이러한 발견과 넘겨받음은 학습의 기나긴, 다양하게 단계 지어진 과정인 것이다.”33) 다시 말해서 언어는 유전되지 않고 언어의 소질만이 유전된다. “한 어린이가 말을 할 바탕(소질)을 타고나도, 자기의 환경을 통해서야 비로소 말을 배우게 된다. 어린이는 공통적인 언어영역에서 성장함으로써, 자기에게 넘겨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인다. 넘겨주고 넘겨받음으로서 언어는 계속 유지되며, 세기를 거듭하면서 발전하게 된다.”34) 하르트만은 이와 같이 언어 그 자체의 공통성과 전체성이라는 지반 위에서 언어의 전승과 발전, 비대상성 및 의사소통의 기능을 설명하면서도, 언어는 그 이상의 것이라고 한다. 하르트만에 따르면 언어는 “언제나 동시에 교환의 수단 이상의 것”35)이다. 그러니까 어의의 일반성은, 직접적으로 체험된 것, 욕구된 것, 직관된 것이나 또는 이해의 대상적 형성에 있어서는 쓸모 없게 되는 것이다.36) 물론 이것들은 주로 주관적 정신으로서 ‘말함’이나 객체화한 정신으로서 ‘말해진 말’의 영역에서 해명될 문제들이다.
Ⅵ. 언어의 생명적 기반
언어의 생명적 기반은 무엇이며, 언어의 실사성과 산 언어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기서 문제로 되는 것은 산 언어와 죽은 언어, 그리고 산 정신과 죽은 정신이 가지는 본질특징의 구분문제이다.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언어 그 자체’나 ‘주관적 정신’으로서의 ‘말함’은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 살아 있다37)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객체화한 정신으로서의 ‘말해진 말’이나 ‘글로 쓰여진 말(문자)’은 살아있지 않은 물질적 질료(음성이나 문자) 속에 고정시켜짐으로서 살아있지 않다38)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전자(언어 그 자체와 말함)는 살아있는 언어로서 말해지고, 후자(‘말해진 말’이나 ‘글로 쓰여진 말’)는 죽은 언어로서 말해지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서 서로 구별된다.39) 다시 말해서 객관적 정신으로서의 ‘언어자체’나 주관적 정신으로서의 ‘말함’은 ‘살아있는 언어’이며, 객체화한 정신으로서의 ‘말해진 말’이나 ‘글로 쓰여진 말’은 ‘죽은 언어’인 것이다. 물론 이 때의 ‘죽은 언어’라는 말에서의 죽음의 의미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와는 다른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리하여 “살아있는 언어를 통하여 하나의 살아있는 민족이 사유하고 자기를 이해하며, 그 언어의 형식들과 낱말들에 있어서 사람들의 표현, 전달, 시작(詩作), 객체화 등이 행하여진다.”40) 그러나 ‘죽은 언어’는 ‘살아있는 언어’에서 분리되어 나온 언어로서 고정화되었으므로 살아있는 언어의 변천의 흐름에서 벗어나와 있고 “그의 창조물이요 소유물이었던 바의 산 정신(‘언어 그 자체’와 ‘말함’ : 필자)보다 오래 존속한다.”41)
언어의 생명적 기반은 그러니까 산 정신이다. 산 정신에는 주관적 정신과 객관적 정신 둘 다 포함된다. 소박하게 말했을 때, 언어가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은 살아있는 개인과 지속되고 있는 사회를 전제로 해서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살아있는 언어는 살아있는 개인과 살아있는 사회를 기반으로 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곧 실사성을 의미한다. 실사적인 것은 시간과 공간 내에서 생성소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산 언어의 본질은 생성하고 발전하고 소멸하는 것이 된다. ‘말해진 말’만이 객체화한 정신으로서 여기에서 벗어난다. 그렇다고 하여 ‘말해진 말’이 영원히 존속한다는 것은 아니다. ‘말해진 말’도 실사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말해진 말’은 ‘말함’이나 ‘언어 그 자체’와는 또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Ⅶ. 언어와 사유와 현실
언어와 사유와 현실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사이의 소유와 지배관계는 어떻게 파악되는가?
사유가 언어로 이루어지고 언어가 또한 사유한 것의 표현이라면 인간은 언어적 존재일 수밖에 없고, 사유나 언어가 모두 정신적 존재라면 인간은 또한 정신적 존재일 수밖에 없으며, 그러할 때 언어(정신)는 곧 삶 자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정신)없는 인간의 삶이나 역사를 생각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과 역사 없는 언어(정신)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언어 속에 갇혀 있다. 우리가 파악하는 모든 것은 언어에 의하여 형성되고 이해되고 해석되어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언어 속에 어쩔 수 없이 갇혀 있으며, 단지 언어를 통해서만 우리는 세계를 잡아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언어가 매개해 주는 대로만 사물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42)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형성되어져 있는 언어의 여러 형식이 매개하는 대로 느끼고, 지각하고, 사유하고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43) 일반적으로 우리는 언어를 습득하고 구사함으로써 그 언어를 우리가 소유하고 지배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하게 말했을 때 오히려 우리가 언어에게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하르트만은 적절하게도 “우리가 한 언어를 지배한다고 일컫는 것은 오히려 언어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44)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언어일반에 대하여 타당하다. 그러나 보다 한정적 언어인 일상적 언어나 개념적 언어에 있어서는 이러한 구속현상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기존의 세계만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뿐이지, 그것이 기존의 세계라는 것을 의식하지는 못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의 일상적 시각은 사물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들의 용도에 따른 이용가치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인줄로 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때그때 이미 언어 속에 체류한다. 이러한 체류가 고유하게 파악된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45) 그러니까 “우리는 언어 자체를 알지도 못한 채 그 언어 속에서 생활하고, 그 언어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46)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언어의 일상성 속에 유폐되어 있다. 이러한 언어의 일상성과 폐쇄성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자가 시인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모든 사물을 그 본질에 있어서 명명하는 자이기 때문이다.47) ‘언어 속에 갇혀있음과 벗어나감’ -이것은 인간의 삶이 가지는 본원적 순환이다.
언어가 인간을 자기 속에 구속시키기도 하고 자기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언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말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가진 생명력이나 활기, 그러니까 꼭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신령한 힘을 말한다. 이와 같은 ‘말의 힘’48)을 하르트만은 언령(言靈, Geist der Sprache)이라고 하면서 언어와 삶의 관계를 말한다. 즉, 인간은 언령에게 몸을 맡긴다. 본능적으로 언령과 동행한다. 왜냐하면 개인이 언령에 지배당함으로써야 개인의 움직이는 힘이 생겨나기 때문이다.49)
Ⅷ. 언어와 이해의 문제
언어와 이해의 문제는 어떻게 해명되며, 언어-말-글자의 관계는 단순한 협정관계이기만 한 것인가?
말은 말을 통해서 이해된다. 듣는 자는 ‘말해진 말’을 통하여 말하는 자의 생각(말함)을 이해한다. 그러니까 객체화한 언어를 통해서 주관적인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객관적 언어로서의 ‘언어 그 자체’이다. ‘말해진 말’은 듣는 이에게 있어서 이해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공통성으로서의 객관적 언어를 매개로 해서라야만 성립되는 것이다. ‘말함’은 ‘말해진 말’ 속에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내재되어 있고, 그것은 ‘언어 그 자체’를 매개로 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다. ‘말함’-‘말해진 말’, ‘말해진 말’-‘이해’ 사이에는 간주관성을 성립시키는 ‘언어 그 자체’가 객관적 정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이해의 문제에 있어서는 객체화한 정신으로서의 ‘말해진 말’이 가장 중요시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말해진 말’은 이해의 대상이고, 본질적으로 대상 없는 이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해진 말’이라고 하는 것은 광의의 것으로서 물론 ‘글로 쓰여진 말’을 포함한다. 양자가 모두 객체화한 정신이고 객체화한 언어이다. 객체화한 정신으로서 ‘말해진 말’이나 ‘글로 쓰여진 말’은 우선 존재적으로 2중성의 구조를 가진다. 전경(Vodergrund)과 배경(Hintergrund)50)이 그것이다. ‘말해진 말’,의 소리는 전경이며, 그것이 가지는 일반적 의미는 배경이다. 마찬가지로 ‘글로 쓰여진 말’ 즉 문자(기호)는 전경이며 그 문자가 가지는 의미는 배경이다. 전경인 음성이나 문자는 감성적·실사적인 것이며, 배경인 의미나 의의는 비실사적·정신적 내용이다. 이 두 가지가 합해야만 말이나 글이 된다.51) 전경이나 배경 어느 한 가지만으로는 말도 글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소리와 기호를 통하여 그것들의 의미를 파악한다. 그러니까 전경을 통하여 배경을 파악하게 되는데 이는 곧 배경이 전경으로 현상함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의미’는 실사(Realität)도 아니고 환상(Illusion)도 아니라52) 단지 현상(Erscheinung)일 뿐이며, 이 현상은 음향체계 및 기호체계와의 대응의 원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음성과 의미 또는 문자와 의미 사이에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방식이 발견된다. 이는 다른 나라들의 언어나 방언들에서 입증된다. “문자와 음성과 의미 사이에는 일정한 대응관계가 있고, 이 대응관계에 의하여 말이나 글이 이해되는 것이지, 말이나 글이 의미와 구조, 기타에 있어서 유사하기 때문에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53) 이 대응관계는 “거의 일반적으로 단순한 협정에 의한 관계”54)이다. 협정에 의한 관계이기 때문에 당사자들 사이에 있어서 공통성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니까 음향과 의미(또는 문자와 의미)의 연관에 대해 본질적인 것은 하나를 다른 것에 부속시킴에 있어서의 그 확고한 규정성뿐인 것이다. 이 확고한 규정성에 따라 언어의 의미는 고정되고 또한 의사소통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의미의 변통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응관계의 성격에서 밝혀진다. “이 대응관계는 구조적 일치에 영향을 받음이 없이 임의적이고 우연적인 경우에 가장 자유스럽고 가장 완전하게 기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요소는 고정한 것이지만 이 요소간의 대응관계는 극히 유동적이어서 무한히 다양한 의미내용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대응관계가 단순한 상징적 관계일 때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55) 따라서 “의미는 일시적인 약속에 의해 음성(또는 문자; 필자)과 결부하는 것”56)이며, ‘말해진 말’이나 ‘글로 쓰여진 말’(글)은 “전경과 배경의 연결이 하나의 약속에 불과한 객체화”57)인 것이다.
Ⅸ 정신과 언어의 관계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정신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명제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언어가 정신을 산출하고 정신이 언어를 규정한다.’
‘언어의 생성은 정신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언어의 소멸은 정신의 사멸로 이어진다.’
‘모든 언어는 정신이지만 모든 정신이 언어인 것은 아니다.’
‘언어의 생명적 기반은 산 정신이고, 그것은 곧 인간의 삶 자체일 수밖에 없다.’
‘언어와 사유와 현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의해서이다.’
‘언어와 이해의 문제에 있어서는 ‘말해진 말’(객체화한 정신)이 중심적인 요소가 된다.’
‘언어-말-글자의 관계는 단순한 협정관계이지만 그러나 그것들 각각이 의미의 변통성을 가짐으로써 무한하게 다양화될 수 있다.’
요컨대 하르트만은 인간의 특성을 정신과 언어라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는 곧 정신이다’라는 단적인 귀결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정신이 모두 언어인 것은 아니만, 모든 언어는 그 모두가 정신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성향이 항상 다시 새로운 체험 앞에 세워지는 개인들의 표출성향에 있고”58) 그러한 표출의 내용이 곧 정신이라고 한다면 언어와 정신은 불가분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동일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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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it and Language in Nicolai Hartmann's Philosophy
Kim Ju-Wan(kyungsan University)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lucidate Nicolai Hartmann's view of the language. As well known, Nicolai Hartmann is not a linguistic philosopher, and he doesn't have written any works or treatise which deals with language as a independent subject. Nevertheless he continuously makes the remarks on language everywhere in his works.
Especially, in his work of Das Probrem des Geistigen Seins, defining a language as a sort of spiritual being, he deals with it very widely. Therefore this treatise, which seeks and rearrange his view on language appeared mainly in Das Probrem des Geistigen Seins and other his works, can be seen in its contents as a serious study of the linguistic philosophy in the spiritual philosophy.
The problems in detail, which this treatise deals with in order to elucidate the main theme i.e. 'What is the language on the spirit-philosophical point of view', are as follows:
① If a language could be regarded as a sort of spiritual being according to Nicolai Hartmann, then what's the fundamental forms of that spiritual being, and how many kinds could they be classified into? And what kind of spirit could the language belong to?
② What is the spiritual contents of the language? By what means could we acquire a language, by heredity or by learning?
③ What is the life-sustaining ground of the language, and what is the reality of the language and the essence of the living language?
④ What is the relationship among language, thought and actuality? How and as what can we conceive the relation of possession and rule among them?
⑤ How can we solve the problem of the 'language and understanding'? Is the relation among language, speech and the letter only the relation of convention?
Through detail discussion on these problems, we could conclude in a word that 'language is the very spirit'. This spirit is the spirit which connected with a culture. In other words, because all sorts of spiritual being other than language can be established through the language, the linguistic being has its position in the middle of the spiritual being.
This study would provide the basic understanding on the whole field of linguistic philosophy, through the ontological exposition of the language itself which has been neglected from classic to comtemporary linguistic philosophy. Furthermore, suggesting that the language is implying every sorts of other spiritual being and also is implied in them, the result of this study would afford a new and extended understanding on language not only to the researchers in philosophy and literature but also to researchers in arts and culture. They could use this study as the ground of their creative work.
[Key Word] Nicolai Hartmann, Language, Spirit, individual Spirit, th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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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icolai Hartmann, 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 Untersuchungen zur Grundlegung der Geschichtsphilosoph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1933), 3. Aufl. Berlin. 1962.(이하 PdGS로 약기함)
2) PdgS. Vorwort, Ⅲ.
3) 이에 대해서는 PdgS. 45-51을 참조할 것.
4) 이에 대해서는 PdgS. 51-58을 참조할 것.
5) PdgS. 46.
6) 어떤 학설체계에 접근하려고 할 때 우리는 대개 그 학설체계에 있어서의 근본개념의 정의를 먼저 알아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오해를 배제하고 정당한 진입방향을 취하기 위해서는 벌써 하나의 정의가 적어도 명목상으로 만이라도 요구된다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다.
하르트만은 “이 요구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PdgS. 45.)는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근본개념은 일반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ebd.)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주제로 되는 대개의 근본개념, 예컨대 물질, 실체, 생명, 의식, 존재, 실사성, 가치 따위는 일반적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들이다. 개념규정은 대체로, 수행되어야할 연구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 규정을 구성하는 각 부분은 연구를 통해서 얻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개념규정을 기초로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순환에 빠지게 될 것”(ebd.)이라는 것이 하르트만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 우리는 종말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연구의 결과에 가서 우리는 규정의 큰 계열을 얻어내게 되는 것이며, 규정은 이러한 전체계열 내에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출발점에서 사람들이 요구하게 되는 “명목상 정의는 방법적으로 오도될 뿐만 아니라 결코 유용한 이해의 수단이 될 수도 없다”(PdgS. 45.)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연구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신을 해명하기 위해서 정신에서 출발할 수는 없는 것이며, 우선은 정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어떤 규정도 없이 출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7) PdgS. 45.
8) PdgS. 46.
9)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PdgS. 58-66을 참조할 것.
10) PdgS. 64.
11) PdgS. 15.
12) PdgS. 78.
13) Nicolai Hartmann, Zur Grundlegung der ontologie(1935), 4. Aufl. Berlin 1965. S. 271.
14) Otto Friedrich Bollnow, "Lebendige Vergangenheit"―Zum Begriff des objektivierte Geistes bei Nicolai Hartmann, Nicolai Hartmann 1882-1982, Herausgegeben von Alois Joh. Buch, Bonn 1982, S. 71.
15) PdgS. 212.
16) PdgS. 205.
17) 하르트만은 객체화와 객관화를 분명하게 구별한다. “객관화(Objektion)는 하나의 특색 있는 인식현상이다. 이미 존재하는 사물이 어떤 주관의 객관으로 되는데, 이때 사물 그 자체에 있어서는 변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객체화(Objektivation)에 있어서는 이와 반대로, 그것에 앞서서는 있지 않았던 어떤 것이 - 적어도 대상적인 일정한 형성체로서는 있지 않았던 어떤 것이 - 비로소 처음으로 생겨나게 된다. 객관화에 있어서 산 정신은 받아들일 뿐인데, 객체화에 있어서 산 정신은 창작하고 있는 것이다.”(PdgS. 407.)
볼노는, 객관적 정신과 객체화한 정신의 이러한 구별은 정신적 존재에 관한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저작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높이 평가한다.(Otto. Friedrich Bollnow, "Lebendige Vergangenheit", S. 71.) 그 이유는 <객관적 정신>이란 개념이 헤겔이나 딜타이에게서도 쓰여 지고 있지만, 지나칠 정도로 광범하게 쓰여짐으로써 오히려 불명료하게 되었는데, 하르트만이 객관적 정신과 객체화한 정신을 선명하게 구별함으로써 비로소 이들 개념이 분명하게 해명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8) PdgS. 406-407.
19) 조각상이 새겨진 대리석도 파괴될 수 있다. 그것은 우상파괴에 의하여 고의로 파괴될 수도 있다. 텍스트가 기록된 종이가 해체되거나 또는 잉크가 바래질 수도 있다. 서적도 또한 불타버릴 수가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하여 볼노는 “<객체화한 정신>이라 하기 보다 차라리 <정신의 객체화>라 하는 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Otto, Friedrich, Bollnow, “Lebendige Vergangenheit”, S. 72.)고 한다.
20) ebd.
21) ebd.
22) Nicolai Hartmann, Ästhetik(1953). 2 Aufl. Berlin. 1966.(이하 Ä.로 약기함) S. 83.
23) ebd.
24) PdgS. 416.
25) 살아있는 언어는 실사적 정신(주관적 정신, 객관적 정신)이지만 ‘죽은 언어(死語)’는 그것이 살아있었던 그 당시의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정신일 뿐이지 현 시대의 그것은 아니다. 죽은 언어는 이미 죽었으므로 현 시대에는 어떤 작용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전혀 실사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26) ‘말함’에는 개인이 그의 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 또는 사상이나 개념들은 물론 그것들을 소리로 표현하는 발성까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발성되는 순간에 그것은 또한 ‘말해진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말해진 말은 객체화한 정신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발성되기 이전까지의 ‘말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함’으로 규정하고, 발성되는 순간부터의 말은 ‘말해진 말’로 규정하여 쓰기로 한다.
27) Ä. 87.
28) PdgS. 179.
29) PdgS. 411, 522, 546. 참조.
30) Ä. 87.
31) PagS. 263.
32) 과거가 현재 속에 들어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서 ‘소리없이 들어섬’(stillschweigend Hineinragen)과 ‘소리내고 들어섬’(Vernehmlich Hineinragen)에 대해서는 PdgS. 35-37쪽 및 김주완, 『미와 예술』, 서울:형설출판사, 1994, 253-255쪽 참조할 것.
33) PdgS. 213.
34) Nicolai Hartmann, Einführung in die Philosophie, überarbeitete vom Verfasser genehmigte Nachschrift der Vorlesung im Sommersemester 1949 in Göttingen (Bearbeitung Karl Auerbach), 5 Aufl. S. 126.
35) PdgS. 546.
36) PdgS. 546. 참조.
37) PdgS. 294. 참조.
38) ‘말해진 말’은 기억 속에 살아남을 수 있고 ‘글로 쓰여진 말’은 문서 속에 보존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것들도 살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것들의 이와 같이 살아 있음은 언어자체의 살아있음과는 다른 살아있음이다. 언어 자체는 변화와 일정한 생존기간을 본질특징으로 하지만, 한번 말해진 언어나 글로 쓰여진 언어는 그러한 변화와 생존기간을 벗어나 있다. 전자는 변화를 본질로서 가지고 후자는 고정화를 본질로서 가지는 것이다.
39) PdgS. 294. 참조.
여기서 ‘말해진 말’은 ‘살아있는 언어’라고 혼동할 수 있다. 이러한 혼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말해진 말’은 구전의 과정에서 달라질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것도 곧 변화를 본질로 하는 ‘살아있는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 그 자체’는 ‘객관적 정신’으로서 ‘살아있는 언어’이고 ‘말함’ 또한 ‘주관적 정신’으로서 ‘살아있는 언어’인데 반해서, ‘말해진 말’은 ‘객체화한 정신’으로서 ‘죽은 언어’이다. 물론 ‘말해진 말’도 구전되는 과정에서 변화할 수 있지만, 그 변화는 ‘언어자체’의 변화와는 다른 변화인 것이다. ‘언어자체’의 변화는 어의 그대로의 변천이지만, ‘말해진 말’의 변화는 처음의 ‘말해진 말’에 무엇인가 가감되어 새로이 말해짐으로써 그것은 변천이 아니라 그때마다의 새로운 고정화의 성립인 것이며, 엄밀하게 말했을 때 그것은 추창작에 해당하는 것이다.
40) PdgS. 294.
41) PdgS. 409.
42) 이러한 견해는 이미 오래된 것으로서, Cassirer 나 Humboldt의 사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43) O. F. Bollnow 저, 한국철학회 편,『현대철학의 전망』, 서울:법문사, 1967, 86쪽 참조.
44) PdgS. 215. 315.
45) W. 비이멜 저, 백승균 역, , 『하이데거의 철학이론』(박영문고 217), 서울:박영사, 1980, 227쪽.(“Die Frage nach der Fechnik”, 1953. S. 19.)
46) 같은 책, 221쪽.
47) 일상적 무의식과 자기욕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자로서의 시인의 역할과 시의 본질에 대해서는 김주완,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서울:형설출판사, 1998, 399-400쪽을 참조할 것.
48) ‘말의 힘’은 약속의 현상에서 입증된다. 약속은 말로 하지만, 바로 그 약속의 말이 우리를 구속하는 힘을 가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약속을 지키도록 만드는 것이다.
49) PdgS. 219. 참조.
50) 전경과 배경에 대해서는 김주완, 『미와 예술』, 188-210쪽을 참조할 것.
51) Ä.87.
52) Ä. 103. 참조.
53) Ä. 88.
54) PdgS. 428.
55) Ä. 88.
56) Ä. 87.
57) Ä. 90.
58) PdgS.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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