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철학연구 제62집, 대한철학회, 1997, 59-92쪽에 수록되었음.>
문인수의 시 「간통」에 대한 미학적·가치론적 고찰
김 주 완
1.
문인수의 시 「간통」1)은 계간지 『시와 반시』 1996년 여름호에 실려 있다. 이 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는지, 그리고 이 시를 읽은 사람들로 하여금 얼마나 큰 메시지를 전달받게 했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가 다분히 철학적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 하면 이 시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로 추정2)되지만, 표제인 「간통」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실사적 삶의 근원적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은 윤리적 현실의 한 국면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인수의 시 「간통」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간통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 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문인수는 여기서 도덕의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행위에 대한 종교적 심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시를 통하여 간통이라는 하나의 사태 혹은 사건에 대한 윤리성과 적법성 여부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나 평가가 가능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독해자의 몫이다. 문인수는 사태와 사태의 진전에 대한 전달자로서 중도적 입장에 서 있으며, 미려한 문장과 투명한 상징으로 상황의 총체적 진술에 충실하고 있다. 시속에 등장하는 사람은 이녁과 이녁의 아내인 화자, 그리고 선무당네 등 세 사람에 불과하지만, 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간통과 질투와 분풀이, 밀회와 갈등과 저항과 외면이라는 사건과 사건의 연결 구조는 삶의 원형질로서 이 시를 꼼꼼하게 읽어 가는 독자로 하여금 옳고 그름의 분간이 흐려지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독자의 일상적 사고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며, 하나의 원리만이 최고의 것이어야 하고 최근원적인 것이어야 하며 다른 모든 것은 이러한 최고 원리에 종속되고 지배되거나 혹은 최근원적인 기반 위에 서야만 한다는 유일에 대한 우리의 형이상학적 편견에 균열이 가게 하여 마침내 화석화된 우리의 가치관과 윤리관을 혼미의 늪 속에서 방황하게 한다. 그것은 성(性)에 대한 실질적 풍속도는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에 대한 규범적 요청은 여전히 보수적·봉건적 지반 위에 고정되어 있는 이중적 구조의 성 윤리가 공존하는 한국적 현실에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익숙해져 가고 있는 이중성에 대한 불감증에 자각과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인수의 이 시에서는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구분해 낼 수 없으며, 간통의 당사자와 이해 관계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모두 가치로서 존립하는 가치 다양성이 이야기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 각자에게 간통에 대한 근원적 문제 의식을 일깨워 주고, 일정한 사태가 가지는 다양한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가치 간취의 계기를 제공하는 이 시는 도덕적·법률적 화두로서의 기능적 성격 또한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론은 법률학적·사회학적 고찰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물론 여기서도 그러한 분야에서 이미 상당히 진전된 논의의 결과에 도움을 받기는 하되, 오히려 법률학과 사회학의 토대로서의 가치론적 입장에서 간통을 인간의 근원적 삶의 문제로 보고 순수한 철학적 고찰에 주력하고자 하는 것이 이 소론의 본래적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소론은 가치론적·미학적 고찰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2.
시행(詩行)을 따라 가는 이해와 논의에 앞서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이 시의 표제인 「간통」과 관련되는 각종 개념들의 구분과 정리이며, 그리고 간통의 본질 특징과 간통이 가지고 있는 내적·외적 문제를 해명하는 일이다. 그것은 곧 뒤이어 우리가 행할 논의의 범위와 방향을 획정짓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간통의 유개념은 간음으로 이해된다. 서구어에서는 간통(Adultery)과 간음(Adultery)의 용어상 구별이 엄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어에서는 강간·준강간·간통의 총칭이 간음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니까 간음이란 남녀가 성적 관계를 부정하게 맺는 행위 일반을 말하며, 간통이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합의의 성교를 맺는 특수 행위를 말하는데 이 때 그 상간자는 기혼, 미혼에 상관없고 매춘 행위도 이에 포함된다. 간통은 국가에 따라 그 개념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그것이 범죄로 성립하기 위한 요건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통은 남녀간의 합의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강간과 다르며, 배우자가 있다는 점에서 사통(私通)4)과 다르다.
간통이 형법상의 범죄로 규정되어 있어 이를 처벌하는 나라가 현대에 와서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5), 그러한 나라에 있어서 대개 일치하는 것은, 간통은 혼인이라는 사회 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이다. 혼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당사자간의 단순 결합이 아니라 정신적·육체적·경제적·가정(문)적인 복합 결합이다. 혼인을 통해 얻게 되는 여러 가지 권리와 의무 가운데 하나가 성교의 권리이며 그것도 독점권이다. 혼인이 제도화되기 이전의 무질서한 군서 생활에서는 성의 방종이 있었을 것이며, 성교의 권리가 독점적이 아닌 공유의 것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간통이나 간음 또는 정조의 관념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공동생활을 하는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질서 유지를 위한 법률이 발생하고 혼인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만들어져 차츰 인간의 성은 법적 제한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혼인을 통해 성립하는 부부는 동거·협력·부조의 의무를 가지며 성적 독점권을 유지시키기 위한 정조의 의무 또한 가지게 된다. 이 때 정조의 의무라는 것은 법률상으로 보았을 때 부부가 서로 지켜야 할 성적 순결을 의미하며 이것은 혼인의 가장 본질적인 효과가 되므로 정조 의무는 결국 혼인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간통은 결혼을 통하여 획득한 성적 독점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정조6)의무 즉 혼인의 순결 유지 의무를 위배하는 것이다. 혼인의 순결 유지는 도덕적 가치라기 보다는 사태 가치이다. 이 의미에서 현행 법률은 가치가 있다. 그러니까 정조의 의무는 성적 독점권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필요하고, 이것들을 포괄하는 혼인의 순결 유지 의무는 안정적 가족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했을 때 그러한 의미에서 간통죄를 규정하고 있는 현행 법률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간통죄의 보호 법익을 혼인의 순결 유지와 사회적 성도덕이라고 볼 때, 간통죄에는 자기 모순이 내재한다고 아니할 수 없다. 간통죄가 있으므로 해서 오히려 혼인이 파괴되고, 간통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통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통의 금지, 즉 혼인의 순결 유지가 사태 가치이며, 사태 가치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매춘 행위를 간통에 포함시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매춘이 간통에 포함되는 것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합의의 성교를 맺는 행위’라는 간통의 성립 요건을 매춘의 상당한 경우가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매춘은 심리적 합의가 아니라 물질적 대가를 지불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계약적 합의라는 점이 조건 없는 간통과 다르기는 하나, 두 경우 모두 합의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혼인 형태의 변천 과정과 오늘날까지 잔존하는 혼인의 습속들을 살펴보면, 정상적인 혼인 속에도 매매춘적 요소와 성질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배상 혼인과 구매 혼인은 신부를 가격으로 환산하여 배상 또는 보상하는 혼인이므로 모두 매매혼인 것이며, 오늘날에도 간혹 부자와 빈자 사이에 행해지는 매매혼의 잔재가 특례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으며, 민며느리제도 매매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혼인 습속이라 할 수 있는 결혼 예단이나 예물 또한 신부 또는 신랑을 가족으로 데려오는데 대한 ‘고마움’ 또는 ‘사례’의 뜻으로 주는 비단 혹은 물건들이므로 이것 역시 광의에 있어서 매매혼적 잔재라고 할 수 있다. 매매혼과 매매춘은 그 외연이 일정 정도 일치한다. 이러한 매매혼은 신랑 또는 신부의 제반 능력과 구비 조건, 예컨대 노동력·미모·지력·생산 능력·성적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거기에 대한 배상 혹은 보상을 하는 것이라고 보면, 성적 능력에 대한 대가 지불은 곧 매매춘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간통의 금지와 죄악시의 역사는 적어도 3,500년이나 된다. B.C. 1500년경의 모세의 율법(十誡命) 중에서 벌써 ‘간음하지 말라’는 금지 조항이 나타나고 있으며, 불교의 십계(十戒)나 조선 시대의 칠거지악에서는 ‘음탕한 생활’에 대한 경계를 하고 있다. 물론 전자는 간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후자 또한 간통과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간음은 간통을 포함하고 있으며 ‘음탕한 생활’이라는 표현 속에도 간통이 포함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나라에서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여 간통죄를 폐지함으로써 현대에 와서는 간통죄가 형법 규정으로 존치되어 있는 나라가 극소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적 현실에서는 아직 형법상의 범죄로서 간통의 처벌 규정이 살아 있지만, 존폐론이 뜨거운 공방을 벌인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이다.7)
우리는 여기서 존폐론의 어느 한 입장에 서기보다는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식욕은 식용 가능한 물(物)을 대상으로 하고 성욕은 교접 가능한 물을 대상으로 한다. 양자 모두 물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재가치로서의 관능적 만족과 쾌감을 동일하게 추구하는 것이지만, 후자에 있어서는 애정이라는 감정과 혼합되기 쉽고 사랑이라는 정신적 가치가 상승 작용을 일으켜 강화됨으로써 어떤 면에서는 식욕보다 더 강렬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식욕과 성욕은 다 같이 인간의 제1차적 본능이다. 그러나 식욕의 충족은 물(物)을 훔치거나 빼앗지 않는 한 제한받지 아니 하지만, 성욕의 충족은 혼인을 통해서만 허용되고, 그것도 이중혼이나 그 이상이 아닌 법률적 혼인 관계 내에서만 인정되는 것이며, 그 이외의 어떠한 성적 관계도 허락되지 아니한다. 그것들이 재가치 이며 인간의 제1차적 본능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식욕과 성욕이 그 충족 방향의 허용 범위는 이와 같이 크게 달라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본능적 욕구를 지배하는 힘은 정신이나 이성보다도 생리적인 것이 더욱 강하다. 생리적으로 본능적 욕구가 약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강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생리적·체질적으로 본능적 욕구가 약한 사람은 따르기가 쉽고, 강한 사람은 따르기가 어려운 제한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요구한다는 것은 보다 근원적 의미에서의 형평성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다른 조건에 처한 사람에게 동일한 요구를 강제한다는 것은 이미 그 속에 모순과 무리를 내포하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실행 불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컨대 혼인하지 않은 미혼자 또는 독신자의 성본능은 어떻게 해결하라는 것인가? 물론 형식 논리적으로 말한다면, 부부로서의 성적 파트너가 없는 미혼자나 독신자는 동일한 조건의 미혼자나 독신자를 상대로 하여 합의의 성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합의에는 개인적인 선호와 그것의 합치가 전제되어 있다. 합의는 자기 결정에 의한 것을 말함이지 외적 강제에 의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성행위는 단순한 동물적 행위가 아니라 거기에 감정이 개입하고 정신이 매개되는 것이므로 특수한 환경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혼인 여부는 가장 약한 영향을 거기에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음을 계속 진전시켜 나간다면, 그러니까 미혼자와 독신자가 성적 관계를 가질 만큼 마음에 드는 다른 미혼자나 독신자를 찾을 수 없고, 오히려 기혼자 중에서 그러한 자가 발견되는 경우 그들은 그들의 의사에 반해 어쩔 수 없이 인내하여야만 하는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요구가 아무리 절실하고 진실하며 강렬하더라도 그들은 단지 참아야만 하는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요구는 이들에게 인내와 금욕만을 요구하고 있으며, 미혼자나 독신자가 같은 조건의 사람과 행하는 성적 관계조차도 백안시하고 범죄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경우 인내와 금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성적 관계의 본원적 의의가 자기 결정성에 있으며 그것은 쌍방에 다 같이 존중되어야 한다면, 쌍방의 자기 결정성이 하나로 합치하여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며, 그것이 곧 인격의 존엄성이 확보된 공동의 행복 추구가 아니겠는가? 법률적인 부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성행위의 경우에도 쌍방 혹은 어느 일방의 의사에 반한 성행위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는 자기 결정성에 결여가 있는 것이며, 또한 그 만큼 행복 추구권이 침해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전혀 처벌의 대상으로 고려되고 있지 않다. 인격적 행복 추구를 위한 성(性)인가? 혼인이라는 제도를 위한 성인가? 사회의 이념적 요구를 위한 성인가?
이렇게 보았을 때, 간통은 인간적 삶의 근본 문제가 된다. 인간이 만약 완전한 정신적 존재라면 성적 욕구에서 온전히 벗어나 있을 것이며, 전적으로 동물적 존재이기만 하다면 처음부터 간통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정신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마찬가지로 육체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정신과 물질, 가치와 가치의 갈등 현장인 인간과 인간의 삶에서 그러므로 간통은 거부할래야 거부할 수 없고 지워 버릴래야 지워 버릴 수 없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3.
이제 문인수의 시 「간통」이 개시하는 미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로 우리는 들어가야 한다.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도, 어떤 입장이나 주장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시 세계 안으로 들어가, 있는 그대로의 정경과 삶의 모습을 우리는 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것도 미리 가진 것이 없고, 우리 앞에는 시와 그것이 펼치는 세계만이 있다.
시인은 아무 것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등장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의 의식과 심리와 행위의 추이를 따라서, 비약과 상징과 메타포가 적절히 배합된 시인 자신의 치밀한 설계를 쫓아서 간접적으로 상황을 제시하고 사건의 전개를 이끌어 낸다. 문인수는 이녁 아내의 입을 빌린다. 등장 인물의 언설 그것은 곧 시인의 말이다.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허리란 위아래가 있는 것의 가운데 부분을 말한다. 따라서 허리의 위치는 중간이며 그것의 본질은 이어짐이다. 허리의 이어짐에 의하여 허리의 위쪽은 그 아래쪽으로부터 받쳐지고, 아래쪽은 위쪽의 이끔에 따를 수 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허리는 버팀 기둥이고 통로이다. 이 기둥에 의지해서 개체적 삶은 유지되고 이 통로를 따라 생명은 숨쉰다. 허리는 사람의 신체 부위만이 아니다. 국토의 허리도 있고 조직의 허리도 있고 관계의 허리도 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에는 허리가 있다. 그러므로 허리의 부실은 삶의 부실이고 역할과 기능의 부실이다. 그러한 부실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은 삶과 위아래의 기능과 관계가 약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절을 향한 총체적 침강이다. 단절의 순간이 오면 위와 아래는 이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무한 진행하는 결별을 겪어야 한다. 이녁의 아내는 어쩌면 흐릿하게나마 이것을 예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불안과 불행과 절망과 고립을 예감하며 공포에 떤다. 아직은 다가오지 않았지만 곧 다가올 일이 예감으로 먼저 와서 그녀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단절과 결별을 진실로 바라지 않는 그녀이므로 이녁이 누구보다 소중하고 귀하지만 먼저 온 예감은 남편에 대한 그녀의 애지중지를 소홀과 무시와 미움으로 환매(換買)시킨다. 아내는 남편을 가볍게 보고 낮추어 본다. 아내가 남편을 이녁이라고 이르고 있는 것이 단적으로 이를 입증한다. 이녁이란 어떤 말인가? 이녁이란 “하오 할 사람을 마주 대하여 공경하는 뜻이 없이 그이를 좀 대접하여 일컫는 말”8)이다. 이녁은 이인칭 단수형 대명사이다. 전통적으로 부부가 마주하여 대화할 때 남편이 아내를 지칭하면서 통상 쓰던 말이다. 이 때는 남편이 아내를 다소 대접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행에선 이녁이 이인칭 대명사로 쓰여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는 언술의 주체가 아내이고, 남편을 대하여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 그녀 혼자 말하는 독백이므로 남편을 지칭하는 이녁은 삼인칭 단수형 대명사로 쓰여지고 있다. 왜 시인은 이녁을 삼인칭 단수형 대명사로 쓰고 있는 것인가? 이야기되는 사람을 낮추어 이르기 위해서이다. 만약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존칭을 쓰고자 했다면 그녀는 아마 다같이 삼인칭 단수형 대명사이면서 존경의 뜻이 내포된 ‘당신’이란 말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그렇게 부르지 않고 ‘이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이녁’은 남편을 하대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낮추어 보는 만큼, 시행의 이면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남편도 아내를 더 이상 대접하고 있지 않다. 이미 그들 사이에는 공경이나 존경이 없다.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아직 혼인의 틀 속에 묶여 있지만, 그러나 각자의 방향에서 자신만을 위하여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공존의 관계가 아니라 독존의 위치에서 투쟁의 적대 관계로 변해 있음을 이 시행은 암시한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이 시행은 아내의 언술이라기 보다는 시의 전개를 위한 시인의 해설에 해당한다. 소문은 그 자체 내에 진리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소문과 사실의 일치 여부는 누구도 확증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소문은 예술 작품과 같은 자유의 여지를 가진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흐르는 가운데 확대될 수도 축소될 수도 있다. 전달자의 창조력과 창의력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서, 그리고 소문의 내용이 가지는 관심의 보편성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서 소문은 소문의 운명을 가지면서 소문의 일생을 살아간다. 그것의 생애가 길면 긴만큼 그것의 꼬리는 길어진다. 소문의 꼬리는 형성된 소문이 흘러가면서 남긴 흔적이면서 그것이 또한 소문의 일부를 이루어 소문의 수명을 좌우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문의 꼬리는 꼬리가 아니라, 소문의 진행 방향을 결정짓는 더듬이이며 키자루이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즐기면서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듯이 만들어진 소문을 접하는 사람들은 크든 작든 영향을 받게 된다. 소문의 당사자 즉 주인공은 누구보다 크게 영향받을 수밖에 없고 갑자기 부딪혀 오는 그 충격에 어쩌면 그의 인생 전체가 좌초하거나 망가질 수도 있다.
여기서의 소문은 염문이다. 염문에는 어떤 형태로든 사랑이 개입되어 있다. 그것은 무상관자에게는 호기심과 흥미거리로, 상관자에게는 희열과 성취와 뒤따르는 번민으로, 피해 당사자에게는 배신과 분노와 증오로 유동하는 용광로로 끌어가 삶을 뜨겁게 덥힌다. 소문의 꼬리가 길었다는 것은 소문이 이녁 아내에게까지 당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내가 접한 염문은 검은 윤기가 흐르는 소문이다. 윤기는 반짝임이며, 반짝임은 팽팽하게 가득참에서 나온다. 소문에 윤기가 난다는 것은 이제 그것이 익을 대로 익고 커질 대로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기가 흐르는 것은 소문만이 아니라 소문의 꼬리이다. 그것은 매끄럽고 쉽게 잡히지 않으면서 그러나 검은빛을 띠고 있다. 소문의 꼬리는 길지만 그러나 그것에는 검은 윤기가 흐르므로 손에 쉽게 잡히지를 않는다. 잡았는가 하면 어느새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그것은 안달하는 아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반짝반짝 검은빛을 질펀하게 흘리고 있다. “검은빛은 명확성을 다시 지양한다”9) 명확성을 그 속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가 가진 것은 명확성만이 아니며 아직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는 것이 검은빛이다. 검은빛은 곧 어둠이며 어둠은 밝음의 결여이다. 그러므로 분명하게 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만약 내 보인다면 그것이 무엇일지 누구도 모르는 것이기에 어둠은 무엇이라도 다 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있으며, 그런 한에 있어서 어둠은 충만이다. 어둠은 모든 것의 어머니이며, 밝음의 전제이며 근원이다. 윤기가 흐르는 어둠은 괴기하고 불길한 예감을 확대시킨다. 이녁의 아내는 검은 윤기가 흐르는 이녁의 염문에 고통받으면서도 아직 밝음 속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것에 대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이녁의 여인을 향해서는 질시와 증오와 전의를 북돋운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 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이 시행 또한 이 시에서 얼마 되지 않는 시인의 해설에 해당하지만, 이 시행을 통하여 느끼게 되는 평가는 양갈래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그 하나는 이 시의 독자가 선무당네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연민과 호감을 이끌어 내는 시인의 창작 의도라는 지반 위에서의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아내 또는 아내의 처지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선무당네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질시와 증오와 적대감을 바탕으로 한 평가이다. 물론 후자라고 해서 시인의 창작 의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시인은 두 가지 평가 모두를 독자에게 유보하고 있다. 그러나 시 전체의 이면에서 캐낼 수 있는 시인의 심성 가치는 약자인 선무당네로 향하고 있음을 꼼꼼하게 읽는 독자는 알게 된다.
선무당네는 이녁과 염문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선무당이란 익숙하지 못한 무당, 즉 서투른 무당을 일컬음이다. 여기서의 선무당은 세습무가 아닌 강신무로 추정된다. 왜냐 하면 그녀가 세습무였다면 충분한 전수를 받은 후에 입무(立巫)했을 것이며 그만큼 그녀는 무당일에 능숙했을 텐데 이와는 반대로 그녀는 무당의 구실에 서투른 덜 된 무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우연히 신이 내려 무당이 된 강신무로서 내림굿의 격식도 거치지 않은 채 큰무당이 없는 작은 마을에서 그럭저럭 무당의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자로 보여진다. 그녀를 동네 사람들은 선무당네라고 부른다. 여기서의 접미어 ‘~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네’는 사람의 이름이나 칭호 뒤에 붙어서 <집안>이나 <편>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접미어이다. ‘영숙이네’ ‘철수네’ ‘개똥이네’ 등에서의 ‘~네’가 <집안>을 일컫는 것이라면, ‘그네(그쪽 사람들)’ ‘당신네(하오할 자리의 상대되는 사람들)’ ‘우리네(자기와 관계되는 무리)’ 등의 ‘~네’는 <편>을 일컫는다. 여기서의 선무당네는 <집안>과 <편>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는 것으로 보여진다.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일컬어 부르는 선무당네에는 <집안>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지만,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선무당네는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지칭하는 보통의 의미이면서 동시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이상의 의미라는 것은, 이 시의 전체 구성상 아내와 대치 관계에 있는 자로서의 선무당네가 가지는 어느 한 <편>이라는 의미성 뿐만 아니라, ‘~네’라는 접미사가 공대어도 하대어도 아니지만 그러나 친근감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과 시행의 이면에서 읽혀지고 있는 선무당네에 대한 시인의 애정의 표현으로서의 의미성 또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의 등장 인물 세 사람중 아내는 부분적인 화자인 동시에 능동적 행위자이지만 구체적인 지칭어가 문면상에 나타나지 않고, 남편은 당신이라는 공대어가 아니라 이녁이라는 하대어로 아내로부터 지칭되고 있는데 반해 선무당네는 공대어도 하대어도 아닌 선무당네로 지칭되고 있다. 아내가 선무당네를 가리킬 때의 명칭으로는 시의 끝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여자를 하대하여 이르는 말인 ‘년’이라는 말이 구사되고 있다. 따라서 선무당네를 선무당네라고 부른 것은 아내가 아니라 시인이다. 하대어도 공대어도 아닌 선무당네라는 중립어를 시인이 구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등장 인물들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도적 입장에서 상황과 사건의 진전을 객관적으로 진술하겠다는 시인의 의지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보여짐에 불과하다. 등장 인물들의 삶의 태도나 사태 대응 방식을 묘사함에 있어서, 시행의 이행에 있어서 뒤에서도 밝혀지는 것이지만 선무당네는 단정하고 깔끔하면서도 가진 것이 없이 기죽은 채로 현실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시인은 형상화하고 있다. 바로 이것은 시인의 애정이 선무당네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시의 흐름이나 시행의 이면과 행간에서 읽혀지는 바로는, 표면적으로는 중도적 입장에 서 있는 시인이 실제로는 선무당네의 처지를 안스러워하고 그녀의 삶의 현실에 격려와 사랑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지지 못한 자와 약한 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자 하는 시인의 휴머니즘이며, 독자를 끌고 가는 휴머니즘의 위력이다.
선무당네는 젊고 건강하다. 그녀의 머리채가 삼단 같은 데서도 이는 확인된다. 숱한 그녀의 머리숱을 성(性)이나 성적 매력과 관련시키는 것은 옳을 것이다. 성은 신체적 건강과 젊음의 표징이다. 신체적 기능이 총체적으로 항진할 때 성적 기능과 그에 따른 성적 매력은 최고조에 달하고 그 때 머리채는 삼단같이 촘촘하면서도 쭉쭉 뻗어 내려 풍성하고 기운차게 된다. 머리채는 어쩌면 활엽수의 잎과 같다. 그것은 봄에 싹이 터서 여름에 무성해진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단풍이 져서 떨어지고 나무는 빈 몸으로 겨울로 들어선다. 그러므로 삼단 같은 머리채는 활엽수의 여름 잎과 같이 자연적 순환의 생명 과정에 있어서 최고의 정점을 의미한다. 선무당네의 젊음과 성적 기능은 자기 충만성에 의하여 지금 폭발 직전의 시점에 와 있다. 충만성의 이행은 대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버려두기’이고 다른 하나는 ‘가꾸기’이다. 충만한 것을 버려두면 언젠가는 마침내 터질 것이고 그 이후로 그것은 더 이상 충만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가꾸게 되면, 즉 관리하게 되면 충만은 보다 긴 시간 동안 지속하게 되고 충만의 자기 가치는 지속함으로써 상승하게 된다. 선무당네는 그녀의 젊음을 버려두는 자가 아니라 가꾸는 자이다. 그래서 그녀는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닌다. 쪽지어 동백기름을 바르는 것은 성과 젊음을 가꾸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절제하면서 감추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기 개시(開示)이면서 은폐이다. 왜냐하면 쪽지어 동백기름을 바른 머리는 검게 반짝임으로써 충일하는 젊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러나 풍성한 머리채를 극소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충일하는 성과 젊음을 가졌으면서도 스스로 자세를 낮추는 선무당네의 태도는 그녀의 겸손함과 부드러움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녀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쪽지다’는 이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맞춤법으로는 ‘쪽지다’가 아닌 ‘쪽찌다’가 옳은 표기이다. ‘쪽찌다’를 ‘쪽지다’라고 틀리게 표기하는 시인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된소리로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여진다. 시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선무당네는 결코 강한 자가 아닌 것이다. 그녀는 ‘눈 내리깔고’ 다님으로써 스스로 몸을 낮추어 겸손하며 자기를 은폐함으로써 남의 시선을 피하고 다툼을 피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이며 부드럽고 연한 자이다. 따라서 그녀의 머리털은 억세지 않으면서도 건강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한 머리채를 곱게 땋아 틀어 올리고 단정하게 비녀를 꽂은 그녀를 시인이 어떻게 된소리로 강하게 표기할 수 있겠는가? 아니 시인은 선무당네의 부드러움과 단정함과 겸손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경음화된 ‘쪽찌다’라는 표현 대신에 ‘쪽지다’라는 표현을 굳이 선택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닌’ 선무당네의 삶의 태도에서 한번 더 확인된다.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까는 것은 세상에 대한 정면도전이 아니며 자신만만함도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선은 강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아는 선무당네의 자세 낮춤이며 겸손이다. 어쩌면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공격 대상 부위를 최소화하기 위한 본능적인 웅크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눈 내리까는’ 선무당네의 태도는 외부적 힘에 대한 승복만이 아니다. 그것은 힘의 맹목성과 보유자의 속물성에 대한 저항이요 외면이며, 그러한 현실 원리에 대한 무시이고 거부이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니는’ 선무당네는 고귀하다. 선무당네는 그녀가 사는 마을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예외적 인물이며, 마을 사람들의 전체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 일반적 표준의 보편적 요구를 반대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스스로 가꾸면서 타협을 싫어한다. 그녀는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 식의 삶을 단호하게 고집하면서 그러나 겸손하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가치론적으로 곧장 ‘고결’의 본질 특징과 일치한다. 그녀는 마을의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기준을 보다 높은 곳에 두고 있기에 겸손할 수 있고, 스스로 높음을 추구하기에 일상인의 삶을 내려다 볼 수 있고, 높게 있고자 하기에 남들을 낮추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준을 높이 잡은 자, 현실적 속박의 몽매성을 벗어난 자의 이상을 보는 눈은 눈 내리깔고 현실을 눈 아래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일상적 삶에 매몰된 몽매자들에게는 오만으로 비추어진다. 특히 남편과의 염문의 상대자인 선무당네의 이러한 모습과 태도를 보는 이녁 아내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아내의 내면에 산출되는 선무당네의 현존은 질시와 증오의 대상으로 규정될 것이다. 왜냐하면 “심정은 기분의 원천이요 소재이며 이음매이자 소리인 것”10)인데, 아내의 기분은 지금 질투와 분노라는 기분으로 끓어오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에 대한 성적 독점권을 아내는 자기보존의 최고 원리로 삼고 있다. 남편에 대한 성적 독점이 유지될 때 아내는 만족할 수 있다. 그런데 “만족은 욕구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목표의 달성에 따르는 심리적 수반 현상에 불과한 것11)이라고 하였을 때, 남편에 대한 성적 독점권의 유지라는 목표의 달성이 이미 불가능해졌을 개연성이 높은 지금에 있어서 아내는 더 이상 만족감을 맛볼 수 없게 되고 선무당네에 대한 아내의 적대감정은 증대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내에게 비친 선무당네의 모습과 태도는 표리부동한 것으로 보이게 되고 그녀의 진면목은 사내들을 유혹하고 남의 가정을 파탄시키는 요물이 된다. 그러한 선무당네의 진면목을 바로 보지 못하는 남편이 바보처럼 보여 한심스럽고 원망스러울 뿐만 아니라 저주스럽게 된다. 그러나 아내는 아직 어떤 것도 확실하게 잡은 증거가 없다. 그래서 아내는 심증적 증거가 아닌 물적 증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살피고 있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이 시행부터는 거의가 아내의 언술로 이어진다. 물론 사이사이 시인의 진술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고, 이 시의 마지막 단락은 시인의 해설로만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 1행에 불과하다.
아내가 살피면서 지켜보고 있는 것을 남편이 눈치 챘는지 어떤지를 우리는 이 시속에서 알아낼 수 없다. 단지 남편이 샐녘에 들어왔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그것도 그러한 새벽 귀가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까지 말이다. 그리고 아내는 밤을 새워 남편을 기다렸다는 것 또한 시행의 이면에서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만약 아내가 밤새워 남편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남편이 샐녘에 들어온 것을 아내는 알리가 없고 그저 잠자고 있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어두워지거나 어두워진 저녁에 집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밤이 끝나가면서 곧 아침이 오려는 시간에 귀가한다. 저녁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고 밤은 제자리에서 쉬는 시간이다. 이것은 인간의 원초적 생활 패턴이다. 샐녘에 들어옴은, 제자리가 제자리의 구실을 못하거나 아니면 쉬는 시간과 공간이 옮겨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래의 제자리가 미약할망정 아직은 제자리로 남아 있기에 샐녘에나마 들어오는 것이다. 샐녘이란 날이 새려는 무렵을 말하는 것이다. 날이 밝아 오는 샐녘은 이미 밤이 끝났음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밤에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끝나 버리게 됨을 의미한다. 일상어에서의 ‘날샜다’라는 표현이 ‘끝났다’라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와 이녁이 부부로서 밤에 할 수 있는 일, 즉 성적 관계를 할 수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날샜다’라는 표현의 본래적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샐녘에 들어온 이녁은 샐녘이 되기까지 선무당네와 함께 어둠의 보호를 받으며 밤에 할 수 있는 그들의 일을 했을 것이다. 그것도 한정된 시간을 아쉬워하며 열정의 불꽃을 애절하면서도 절실하게 활활 태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기력은 소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샐녘에 들어온 이녁은 입은 채로 떨어져 코를 골수밖에 없다. 입은 채로 잠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만든 문화는 의상의 부문에서도 예외 없이 구분과 의미를 개입시킨다. 나갈 때 입는 옷과 잘 때 입는 옷은 다르다. 그것은 위생 관념과도 연결된다. 이 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이녁에게 잠옷이 따로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잠옷이 없는 경우 인간은 겉옷을 벗고 잔다.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이 집이고 방(침실)이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다. 이녁이 입은 채로 쓰러져 잔다는 것은 극도의 피로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녁에게는 그의 아내가 기다리는 집과 방이 이미 그의 안식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안식처를 잃어버린 이녁이기에 그것을 바깥에서 찾게 되고 거기에 선무당네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우리는 유추할 수 있다. 물론 입은 채로 잔다는 것은 잠자리에서의 아내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띄움으로써 아내의 접근을 미리 회피하거나 금지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입은 채로 잔다는 것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집과 방이 더 이상 쉴 곳이 아니라는 것과 아내와의 교접을 피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입은 채로 떨어져’에서 ‘떨어지다’의 의미 또한 이중적이다. 하나는 ‘방바닥에 쓰러지다’의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아내와 붙어 자는 것이 아니라 따로 따로 떨어져 자다’의 의미인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입은 채로’나 ‘떨어지더니’는 아내와의 교접을 거부하는 이녁의 태도를 나타내기 위한 이중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코를 골았다’는 것은 깊이 잠들었다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곧 의식의 잠듦을 뜻한다. 이러한 잠듦은 육체적인 기진맥진에서 기인한 것이겠지만, 그러한 기진맥진함에는 선무당네와의 사랑이 가지는 합도덕적이거나 합법적인 성취 불가능성에 대한 좌절이 작용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남편은 깊이 잠들어 있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 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밤을 새워 기다린 남편이 아니나 다를까 또 샐녘에 들어와 입은 채로 떨어져 깊이 잠든 것을 보면서, 아내는 생생하게 눈앞에 어른거리던 남편과 선무당네의 정사 장면에 밤새 시달린 피로도 잊고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그들의 밀회에 대한 물증을 잡기 위하여 밖으로 나간다. 그러나 남편이 잠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소리 죽여 나간다. 아내는 왜 남편을 배려하는가? 이것은 배려가 아니라 삼가함이며 그 삼가함은 겸손이 아니라 확인이라는 자기 목표 달성을 위한 조심성이다. 왜냐하면 아내는 기진맥진하여 잠든 이녁에 대한 측은함이나 동정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녁의 권위와 완력에 대한 공포를 가졌을 것이며, 이녁의 잠이 깨면 그러한 완력의 행사가 실행될 것이고 그랬을 때 확인해야겠다는 자신의 목표 달성은 처음부터 좌절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댓돌 위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는 검정 고무신과 그 고무신에서 쏟아졌을 흰내12)의 모래를 본다. 댓돌이란 “집채의 낙수물이 떨어지는 안쪽으로 돌려 가며 턱을 지워 놓은 돌”13)을 말한다. 그러니까 댓돌은 집의 벽과 처마 사이에 위치하는 바 대개의 경우 그 공간이 넓지 않다. 따라서 좁은 댓돌 위에 신발을 벗어 놓을 때는 조심성을 필요로 한다. 특히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신발을 엎어놓으면 재수가 없다거나 부정을 탄다는 등의 무속적인 미신이 남아 있고 이는 농어촌으로 갈수록 더욱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은 댓돌 위에 이녁의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이녁의 관심이 아내나 가정에서 떠나 있음을 의미하고, 선무당네와의 사랑에 몰입하여 이녁의 혼이 빠져 있음을 의미하며 현재의 사랑에 삶 전체를 걸고 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에 있어서 신발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 존재이지만, 문화적 척도가 된다는 점에서는 의상과 동일하다. 그러한 신발로서의 검정 고무신을 아무렇게나 엎어지게 벗어 놓는다는 것은 입은 채로 떨어져 잠드는 태도와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이녁은 지금 선무당네와의 사랑에 그의 삶 전부를 얹어도 저울이 바로 서지 않을 정도로 미쳐 있는 것이다.
엎어진 검정 고무신 주위로 쏟아져 있는 흰내의 모래가 달빛에 비쳐 달빛가루 같아 보인다는 표현은 물론 아내의 언술이 아니라 시인의 해설에 해당하면서 이 시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적 표현으로서의 가치를 확보하고 있다. 달빛 아래 검정 고무신이 흥건히 쏟아 놓은 달빛 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는 고요·평화·정결·풍요·자유 등의 이미지의 극치이다. 검정 고무신14)은 고호의 구두 그림15)을 연상케 하면서,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와 조화를 이루어 달빛 아래 마치 한 폭의 그림인양 그 속에 색깔 진한 삶이 담긴 한국적 농촌의 서경을 아낌없이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는 이 구절은 문인수의 맑은 감성과 높은 수준의 시적 형상화 능력이 만들어 낸 절창 중의 절창이라 아니할 수 없다. 모래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흥건히 쏟아져 있다’는 표현 또한 언어의 일상성과 폐쇄성에서 벗어난 문인수의 신선한 표현인 것이다. ‘수북이 쌓여 있는’ 모래는 일상적 표현이며 ‘흥건히 쏟아져 있는’ 모래는 시적 표현이다. 이와 같이 “시인은 언어를 관습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독창적으로 파악된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형성체로서 작용시키는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한다.”16) 이러한 시인의 능력에 따라 다르게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 그 속에서 말해지고 있는 바의 그러한 높은 수준의 구상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며, 일상인들이 보지 못하는 그것, 자칫하면 사라져 버리고 말 그것을 시인이 바라보고 명명함으로써 현실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의 눈에 비친 흰내의 모래는 미적 대상이 아니라 일상적 관심에 따른 사물적 대상일 뿐이다. 그것도 가장 혐오스러운 물적 대상일 수 있다. 아내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흰내가 선무당네의 벗고 누운 허연 알몸으로 보이고 흰내의 모래는 그들이 치룬 더러운 짓의 흔적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아내의 심정은 행간에 묻혀 있을 뿐이며, 시의 전개에 있어서는 댓돌 위에 쏟아진 흰내의 모래가 이녁과 선무당네의 밀회 장소를 암시한다. 아내가 댓돌 위에 있는 흰내의 모래를 보는 순간은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그들이 어디에서 만나고 있을까를 애태우며 찾고자 했던 아내의 고심이 해소되는 순간이다. 댓돌 위의 모래가 흰내의 모래라고 아내는 어떻게 하여 단정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인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에는 산지와 농지가 대부분이어서 흰내 이외에는 어디서도 모래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흰내의 모래로서 아내는 소문을 사실로 확인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예상의 적중에 불과할 뿐 그러나 아직은 확증이 아니다. 따라서 아내는 확증을 얻고자 선무당네로 달려간다.
무슨 일을 저지를 것처럼 허둥지둥 달려가는 아내의 뒤를 방올음산17)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온다. 방올음산 꼭대기란 어디이며 달은 어째서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려 있는가? 방올음산은 종의 형상을 하고 종의 소리를 내는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자연의 종이다. 종의 ‘꼭대기’는 종을 매다는 자리로서, 요령과 같은 작은 종의 경우 그것은 손잡이에 해당한다. 종이 매달린 곳에 있는 달은 종을 치기 위한 달이며 종칠 일이 언제 어디서 생기는가를 살피는 달이다. 그런 달이, 날이 샐녘에 선무당네로 달려가는 이녁의 아내를 허둥지둥 따라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그보다 먼저 달이 어떻게 이녁의 아내를 따라갈 수 있는가? 이녁의 아내는 ‘내친 김에 허둥지둥 선무당네로 달려갔다.’ 내친다는 것은 일종의 관성을 말하는 것이며 이미 일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고, 시작된 일은 시작할 당시의 자기 뜻을 벗어나 움직이는 일종의 자동적 운동성의 원리에 지배받음을 의미한다. 확증을 잡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내친걸음에 나선 길을 이녁의 아내는 모험 속으로 허둥지둥 달려가고, 달에 비추어진 그녀의 그림자 또한 그녀 앞에서 그녀를 끌고 앞질러 달려감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그림자를 향해 있는 달도 허둥지둥 뒤따라 이동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달이 그녀를 따라 허둥지둥 달려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칠 일이 발생할 것을 예상하여 따라가는 것이며 사태 발생의 현장을 목격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따라가는 것이다. 방올음산의 종을 흔들어 방올음의 종소리를 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말 그대로 경종(警鐘)이다. 위험을 알리기 위하여, 세상을 경계(警戒)하기 위하여 종은 울려지는 것이다. 울려지는 종의 소리, 방올음은 청각에 가서 닿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가서 닿는, 삶의 중심에 가서 닿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소리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소리는 삶의 징표이다. 무릇 생명이란 생명은 모두 소리를 낸다. 생명은 벌써 그 잉태에서부터 소리로 시작하며 그 연속 과정 또한 소리로 이어지며 생명의 종말 또한 소리로 마무리된다. 물론 그러한 소리는 청취 가능의 경계(境界)를 넘나든다. 따라서 달이 방올음산을 흔들어 내는 방올음 소리는 보통의 경종이 아니라 삶의 경종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삶을 저해하는 것들을 경계하고 그러한 위험을 알리기 위한 종소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달은 현실 도덕의 주재자가 아니다. 달은, 선무당네도 이녁도 이녁의 아내도 한결같이 그들의 살아 있음을 비추어 내려다보며 인도하고 삶의 저해 행위를 경계할 뿐 그 어느 한 편에 서지를 않는다. 달은 생명의 근원이며 바로 그러한 연유로서 소리의 근원이다. 달은 곧 자연의 본질이다. 따라서 달은 불가사의하게 널리 퍼져 모든 곳을 비추며, 자연으로서 그것은 일체를 창조하며 일체를 평등하게 하는 것이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 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따라오는 달을 뒤로하면서 아내의 내친걸음은 선무당네에 당도한다. 선무당네의 정문은 삽짝이다. ‘삽짝’은 ‘사립짝’의 준말로서 “나뭇가지나 대오리(가늘게 쪼갠 댓개비) 같은 것으로 결어서 만든 문짝”18)이다. ‘결어서’는 “대, 갈대, 싸리채 같은 빳빳한 물건의 여러 오리로 씨와 날이 서로 어긋매끼게 엮거나 짜다”19)라는 뜻의 ‘겯다’라는 타동사에서 불규칙 변화한 부사어이다. 그러니까 선무당네의 삽짝은 싸릿대(싸리의 줄기)로 엮은 것이다. 그것도 해묵은 것이다. 해묵었다는 것은 바꾸어 달지 못하고 한 해가 지났다는 뜻이다. 선무당네는 왜 한 해가 지나도록 싸릿대 삽짝을 바꿔 달지 못했을까? 싸릿대를 쪄다가 삽짝을 엮어 달아 줄 남정네가 집안에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마을의 다른 집에서 품앗이해 주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무당네는 남편이 없으며 마을에서 소외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은 이미 상당히 썩어 있을 것이며 지나친 힘이 가해지면 부서질 수 있다. 그래서 아내는 삽짝을 지긋이 민다. 물론 아내가 삽짝을 지긋이 미는 것은 삽짝이 부서질까봐 기울이는 조심성이라기 보다는 선무당네를 살펴보기 위하여 깊은 밤에 집주인 몰래 그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워낙 조심스럽게 삽짝을 열었기에 삽짝에 달린 요령이 두어 번 낮게 울리고는 그쳤다.
방올음산과 삽짝의 요령은 유사성과 상이성 및 상관성을 가진다. 방올음산은 삼각의 푸른 종이며 삽짝의 요령은 놋쇠로 된 작은 종이다. 두 종은 형태에 있어서 이와 같이 유사하지만 그 크기와 소리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다. 큰 종인 방올음산은 달(자연)이 치는 종이고 작은 종인 삽짝의 요령은 삶과 삶의 수행이 치는 종이다. 전자는 생명을 고양시키고 삶을 경계하도록 하고 후자는 삶을 수행하고 상호소통하도록 한다. 전자의 소리는 너무 크거나 아니면 작겠지만 후자의 소리는 일상인들이 근처에서 듣기에 알맞은 것이다. 따라서 요령은 작은 방올음산이고 요령 소리는 작은 방올음산의 소리이다.
소리란 무엇인가? 본래적으로 소리 그 자체는 어떤 의미 내용도 가지지 않는다. 소리의 전달이 가지는 특징은 그 직접성에 있다. 소리는 전달되기 위한 어떤 매개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소리는 생성자로부터 청취자에게로 바로 가서 닿는다. 소리의 크기에는 청취 가능한 범위가 있고, 청취자는 그 범위 내에서만 소리를 듣는다. 또한 소리는 우리의 감정구조에 알맞은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알맞은 소리는 우리를 유쾌하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소리는 우리를 불쾌하게 하거나 경악하게 한다. 예컨대 전자는 음악적 소리가 그에 해당하며 후자는 천둥소리나 비명 소리가 그에 해당한다. 물론 이 때의 소리는 하나의 요소적 소리라기 보다는 소리와 소리가 연결되어 나타나는 음형상들이다. 음형상의 본질은 소리의 형식 유동에 있다. 음악 예술에 있어서의 음형상은 이렇게든 저렇게든 연결시켜도 좋은 창작자의 자유로운 창작 의도에 의해 생성되는 자유로운 형식 유동이다. 이러한 소리에 특정한 의미 내용이 부여되는 것은 예술에 있어서는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이며, 예술 이외의 것에 있어서는 삶의 진행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종의 약속에 의해서이다. 후자의 경우는 예컨대 싸이렌의 경보음과 해제음이라든지 전화기의 통화중 신호음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일정한 의미 내용이 부여된 약속으로서의 소리는, 요컨대 언어화된 소리이다. 소리의 종류를 대별하면, 순수한 소리(자연의 소리), 음악적 소리, 일상적 약속의 소리, 잡음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순수한 자연의 소리에는 의미 내용이 없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시인의 부여한 의미 내용을 많은 사람이 그대로 받아들였을 때 일상적 의미 내용의 자연적 소리가 된다. 방올음산의 종소리가 순수한 소리라면 삽짝의 요령 소리는 일상적 약속의 소리이다. 방올음산의 종소리는 마음에 울리는 소리이고 삽짝의 요령 소리는 귀에 울리는 소리이다. 방올음산의 종은 “실제로 그 옛날엔 이른 새벽이거나 늦은 저녁이면 은은한 종소리가 온 고을에 울려 퍼졌다”20)고 하며 “그 종소리 울려 퍼져 널리 사람의 정신을 맑히고 지친 몸 한없이 추스리게”21) 했다고 하는 종이다. 그러니까 방올음산의 종소리는 시인의 섬세한 시적 감수성이 만들어낸 자연의 소리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것은 달이 치는 종이다. 그러나 삽짝의 요령은 누가 집앞에 왔다는 것을 알리는 종이다. 삽짝의 요령은 사람이 와서 흔들 수도 있지만 바람이 와서 흔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누가 거기에 왔다는 것을 알리는 종이다.
선무당네 삽짝의 요령 소리는 누가 와서 낸 소리인가? 삽짝은 아내가 밀었지만 요령은 아내가 울린 것이 아니다. 그녀는 오히려 요령이 울리는 것을 기피하고 싶었을 것이며 오히려 요령 소리에 놀랄 수밖에 없는 자 이기 때문이다. 해묵은 싸릿대 삽짝에 걸린 요령은 아내의 삶의 수행이 흔든 것이기는 하지만 요령 소리는 결국 허둥지둥 따라온 달이 울린 것이다. 달은 선무당네의 삶을 저해할 수 있는 일의 발생을 염려하면서, 또한 현실 도덕의 이념에 제약된 아내의 감정적 폭발이 스스로의 삶을 자포자기로 몰고 갈 모험적 사태의 발생을 염려하면서 방올음산의 종소리를 내듯이 삽짝의 요령 소리를 울리게 한 것이다. 그러나 달이 울리는 요령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잠든 선무당네는 깰 줄을 모르고 아내는 그의 행위를 진행시킨다.
아내는 뛰는 가슴 쓸어 내리며 선무당네 마당으로 들어선다. 아내의 가슴은 왜 뛰는가? 달이 울리는 삽짝의 요령 소리를 듣고 아내의 가슴이 뛰는 것이 아니라, 요령 소리에 선무당네의 잠이 깰까하여 아내의 가슴은 뛰는 것이다. 아내는 지금 확인해야겠다는 일념뿐이다. 그녀는 지금 질투심과 적개심으로 흥분하여 있고 소문이 사실로 확인될 순간을 향해 다가서며 분노와 전율로 긴장하고 있다. 마당으로 들어서는 아내보다 한 발 앞서 그녀의 그림자가 먼저 들어간다.
격앙된 아내의 눈에 댓돌 위의 고무신이 들어온다. 선무당네의 옥색 고무신이 댓돌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다. ‘반듯 누운 옥색 고무신’은 이중의 이미지를 가진다. 먼저, 아내의 눈에는 이것이 혐오스럽게 비칠 수 있다. 고무신마저 그 놓여진 반듯한 모습이 벗고 누운 선무당네의 미끈한 몸으로 다가오고 고무신의 옥색 빛깔마저 선무당네의 고운 피부로 다가와 아내는 피가 거꾸로 솟을 수 있다. 다음으로, 중립적 시야를 취하는 자에겐 이것이 선무당네의 단아하고 깔끔하며 분명한 성격과 생활태도로 다가 올 수 있다. 흰내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밤을 새운 선무당네는 몸이 극도로 피로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가장 편안한 집에 돌아와서조차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지 않고 반듯하게 벗어둔다. 이것은 곧 몸에 밴 단정함과 깔끔함의 징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신발은 보통의 여인네들이 신는 흰 고무신이 아니라 옥색 고무신이다. 그녀는 신발 하나에서조차도 자기를 가꾸고 다듬는 여인인 것이다.
간통의 당사자인 이녁과 선무당네의 삶의 방식은 극단적인 대비를 이룬다. 이녁의 검정 고무신과 선무당의 옥색 고무신의 대비,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는 이녁의 태도와 반듯하게 벗어 놓는 선무당네의 태도가 보여주는 대조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녁은 입은 채로 떨어져 코를 골며 잠을 자는데 선무당네의 잠자는 모습은 시의 표면에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이러한 대비를 근거로 하여 유추해 보면 아마 그녀는 옷을 벗거나 갈아입은 후 반듯하게 누워 조용히 잠잘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조를 이루는 두 극단이 상호 이동하여 합일하는 곳은 흰내이다. 두 사람이 각각의 방향에서 가지는 자기 결핍과 그러한 결핍을 상호보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합일은 이루어졌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사랑이다. 왜냐하면 남녀간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보충가치이기 때문이다.22) 서로가 서로를 요구하는 두 사람 사이의 결합의 시간이 지나고 샐녘이 되었을 때 그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각각 본래의 자리로 회귀한다. 결혼이라는 틀로써 이녁을 가두고 있는 현실 도덕의 힘에 궁극적으로는 굴복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선무당네와 이녁의 관계를 일상인들은 ‘불륜’이라고 단순화 해 버리지만 그러나 그들의 삶의 태도는 본질적으로 시적이면서 도덕적이기도 하다. “시적인 것은 유한한 것, 운명적인 것의 한계 속으로 순응하는 것이다.”23) 눈 내리깔고 다니는 선무당네나 샐녘에 들어오는 이녁의 태도는 일정한 도덕 규범과 제도에 대한 순응의 방식이다. 그들이 만약 거역하는 방식을 취한다면 선무당네는 당당히 눈을 부릅뜨고 다닐 것이며 이녁은 샐녘에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밀회는 유한한 시간 내에서의 운명적 만남이다. 그러나 그 만남은 둘만의 단순한 운명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각각의 처지와 여건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보다 큰 연관 속의 운명의 운명인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그들은 한계 속에 있고 따라서 그들의 만남은 한계의 접경에서 이루어지게 되며, 결코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서로가 서로 속에서 머물고자 하는 소망을 아쉬움으로만 가지는 이러한 그들의 삶의 방식이 ‘눈 내리깔고 다님’이며 ‘샐녘에 들어옴’이다.
격앙된 아내는 댓돌 위에 놓인 선무당네의 고무신을 달빛 아래 세밀하게 살펴본다. 거기에도 역시 흰내의 모래가 들어 있다. 그것도 조금이 아닌 ‘오지게도’ 들어 있다. ‘오지다’는 ‘오달지다’의 준말로서 조금도 허술한 데가 없이 속이 꼭 차 있다는 의미이다. 과연 선무당네의 옥색 고무신엔 흰내의 모래가 가득 차 있었을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모래가 가득 차 있었다면 신발을 신고 올 수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아내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래가 많이 들어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을 아내는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어 있다’고 본다. 아내의 눈에 이와 같이 모래의 분량이 확대되어서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흰내의 모래밭에서 발길질을 얼마나 해댔으면 모래가 이만큼이나 들어 있겠는가 라는 아내의 질투심과 분노를 나타낸다. 이제 아내는 소문의 확증을 잡았다. 밝음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이녁의 염문이 이제 확연하게 드러난 것이다. 아내는 이녁에게 다시 한번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배신이란 너에 대해 가졌던 나의 믿음의 붕괴이다. 신뢰는 언제나 타인에 대한 요구이므로 배신은 너에게 보낸 나의 요구가 거절당함이며, 가장 큰 배신은 약속의 위반에서 생겨난다. 이녁과 아내는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간에 혼인이라는 절차를 통하여 부부로서 성실하겠다는 서약을 한 사람들이다. 이 혼인 서약은 쌍방의 약속으로서 두 사람 각각 상대방에 대한 요구와 의무가 있다. 약속의 본질은 한 쪽에는 요구가 다른 쪽에는 의무가 생긴다는데 있는 것24)이기 때문이다. 선무당네와 이녁의 간통은 아내에 대하여 일종의 약속 위반이다. 그러나 쌍방의 약속이란 쌍방간에 지켜질 때 유효한 것이다. 아내가 먼저 약속 위반을 했다면 선무당네와 관계를 맺은 이녁의 약속 위반은 선행된 요인에 따른 결과로서 비난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론 아내는 모든 약속을 충실히 이행하여 왔는데 이녁이 먼저 선무당네와 관계를 맺음으로서 약속 위반을 했다면 잘못은 이녁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아내의 약속 이행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고 있다. 다만 이녁의 마음이 아내에게서 떠나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이녁의 검정 고무신에서 쏟아진 흰내의 모래와 선무당네의 옥색 고무신에 담긴 흰내의 모래로서 소문의 확증을 잡은 아내는 배심감과 분노와 질투심으로 감정이 폭발한다.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컼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선무당네의 옥색 고무신에 오지게 들어 있는 모래로 보건대 내 서방을 다 마셔 버린 것이 분명하다. ‘내 서방’이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독점 의지를 말한다. 이기주의에 유사한 이 독점의지는 물론 사랑 속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본래적 성질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강제될 수도 욕구될 수도 없는 것”25)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독점 의지는 사랑에서 연유한 것이라기 보다는 제도권 내의 가진 자로서 현행 도덕의 힘에 기댄 자기애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행 도덕은 완전한 최종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 과정 중에 있는 하나의 형태일 뿐인 것이다.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라는 시행에서 ‘마시다’의 의미는 육감적 표현이면서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선무당네는 이녁의 무엇을 모두 마셔버린 것인가?26) 표피적으로는 이녁이 가진 남성으로서의 모든 정력을 마셔 버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시행의 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의미는 남편의 마음과 의식은 물론 정신까지도 모두 빼앗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남편은 선무당네에게 혼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쨋든 이 시행이 가지는 이미지는 물의 이미지이며, 물기를 빼앗기는 것은 곧 삶의 고사로 이어지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아내에 대한 이녁의 사랑이 이반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남편은 샘이며, 그것도 퍼 올릴 수 있는 물이 한정된 샘이며 아내는 샘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수호자로, 그리고 선무당네는 샘을 빼앗은 약탈자로 묘사되고 있다. 아내와 선무당네는 물싸움을 하는 적대 관계에 있는 자들이다. 따라서 아내와 선무당네는 투쟁 관계에 설 수밖에 없고 아내는 제도와 현행 도덕의 힘을 그녀의 수중에 쥐고 있음으로써 유리한 입장이 된다. 그러나 그것도 이녁과 아내의 혼인 관계가 계속된다는 한계 내에서의 유리함일 뿐이다.
내 서방을 모두 마셔버린 선무당네는 나의 농사를 망치는 여인이다. 그래서 아내의 목소리는 ‘남의 농사 망칠 년이!’라는 욕설로 튀어나온다. 농사란 농민의 주업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의미가 전이되어 일상어에서도 ‘자식 농사’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의 ‘남의 농사’는 성적 행위와 쾌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혼인을 통해서 획득한 성교의 독점권은 아내가 두고두고 즐겨야 할 소중한 권리이다. 농사에서 씨 뿌리고 거름을 주면서 가꾼 만큼 결실이 나오듯이, 아내는 남편을 거두고 보살펴서 노력한 만큼 성의 즐거움을 결실로써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농사’는 성의 물적 소유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아내의 감정은 상할 대로 상했고 격앙될 대로 격앙되었다. 모든 원망과 분노는 선무당네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의 감정은 어디까지나 너에 대한 감정의 토대인 것”27)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순간적으로 복수와 응징의 결행에 나선다. 선무당네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는 아내는 이제는 결딴 내고 말겠다는 작정을 단단히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벌꺽의 거센말인 벌컥 이라는 부사어가 이미 이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자포자기와 공멸 의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내는 증오스러운 선무당네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챈다. 이 순간 아내를 지배하는 것은 광기와 파괴충동 뿐이다. 머리끄댕이를 잡아채는 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꼼짝 못하게 제압하는 방법이다. 흰내에서의 밤 새운 밀회로 피로해진 몸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을 선무당네는 이녁의 아내에게 잠결에 낚아 채여 밖으로 끌려나간다. 아내는 선무당네를 동네방네 몰고 다니며 샐녘의 새벽잠에 들어 있는 마을 사람들을 깨워 선무당네의 간통 사실을 알림으로서 그녀에게는 치욕적인 망신을 주고 자기 자신의 원한과 분노는 풀어낸다. ‘몰고 다닌다’ 라는 말은 짐승 따위를 자기가 바라는 대로 끌고 다닌다는 말이다. 따라서 ‘몰다’라는 말은 사람(인격)에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선무당네는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녁의 아내에게 짐승처럼 끌려 다니며 폭행과 망신을 당하고, 아내는 선무당네에게 형벌을 집행하고 마을 사람들은 이에 동조한다.
아내의 응징과 폭력 행사는 정당한 것인가? 법치국가에서의 형벌의 집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무당네가 가해자이고 아내가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선무당네에 대한 형벌의 집행은 아내의 소관도 권한도 아니다. 그러므로 법률적으로 아내의 폭력 행사는 정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탈법적으로 행사된 아내의 폭력이 처벌 대상이 된다. 그러나 도덕적인 관습의 측면에서 본다면 아내의 폭력 행사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아내가 지향하는 바는 이녁의 소유이며 독점이다. 소유욕과 독점욕이 밖으로 나타났을 때 선무당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아내의 행동이 된다. 전통사회에 있어서는 간통한 여인을 비난하고 폭행을 가하는 행동 형식이 바로 의례이며 관습이 된다. 왜냐하면 “그 시대 그 사회에 통용되는 행동형식을 의례라고 하고 관습이라고도 하는 것”28)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무당네에 대한 아내의 폭행은 마을 사람들의 심정적 동조를 얻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서양에서의 마녀 심판과 유사하게 된다. 선무당네에게 도덕적인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처벌을 능사로 삼는 처벌지상주의는 연대성에 있어서 전체의 책임을 간과하고 있다. 개인이 잘못을 하는 경우, 그것은 당자의 책임인 동시에 전체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녁과 선무당네의 간통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잘못이라면, 그것은 이녁과 선무당네의 책임이면서 동시에 아내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나 선무당네의 사과나 저항 혹은 반격은 이 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선무당네는 이녁 아내의 횡포와 폭력에 대항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니는’ 그녀의 태도와 동일선상에 있다. 선무당네는 잠시의 즐거움, 그 성스러운 탐닉과 헌신의 대가를 치욕과 고통의 감내로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무당네의 자세는 역시 고결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고결한 인물은 타협을 싫어하기29)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와 이녁 그리고 선무당네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시인은 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사랑과 소유의 갈등 관계에 있고 그러한 갈등은 뒤이어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윤리적 현실에 있어서 부단히 새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갈등인 것이다.”30) 그들의 갈등이 만들어낼 새로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 시의 독자 개개인에게 유보되어 있다고 하겠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으며, 알고 보니 그것은 한 줌 달빛이었다고 하면서 시인은 이 시를 끝내고 있다. 잡힌 것은 소문의 꼬리이다. 그것은 길었지만 검은 윤기가 흘러서 쉽사리 잡히지 않았는데 아내의 끈질긴 집념으로 마침내 잡히고 만 것이다. 소문의 몸통은 간통의 현장과 사실로서의 간통이 되겠는데 그것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소문의 꼬리는 간통의 정황적 증거로서 ‘흰내의 모래’ 였다. 그것은 물증은 물증이되 간접적 물증에 불과했으므로 정황적 증거인 것이다.
소문의 꼬리는 왜 달빛이며 그것도 어째서 한 줌의 달빛인가? 어쩌면 이것은 시인이 우리에게 던져준 하나의 새로운 화두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대한 해답 또한 독자의 몫이리라. 굳이 이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밝히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껏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문의 몸통으로서 이녁과 선무당네의 간통은 두 자유인의 자연적인 영적·육체적 결합이다. 그들이 자유인이라는 것은, 비록 그들이 도덕적 현실 규범과 제도가 가지는 구속성의 영역 안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의식과 행위는 그 경계를 초월하는 자연인이라는 의미에서이다. 그리고 염문의 꼬리가 한 줌 달빛인 것은, 밀회의 흔적으로 남은 것이 흰내의 모래이며 그것은 달빛 속에 흩어져 있는 달빛 가루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통은 결국 달빛이라는 유추가 가능해진다. 그랬을 때, 달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끊임없이 자기의 내부에서 넘쳐나는 생명의 힘을 빛으로 방출하는 바 그것이 곧 달빛이며, 방출하는 달빛은 곧 반사되는 햇빛에 다름 아니므로 동양적 사고에 의거했을 때 달빛은 음이면서 동시에 음과 양의 합일이라 할 수 있는 바, 그러한 달빛이 이녁과 선무당네의 속으로 들어와 내면화되었을 때 그들 상호간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절실한 요구가 생겨나고 그것은 달밤의 달빛 아래 상승작용을 일으켜 필연적으로 하나의 빛 속에 합일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달을 가리고 달빛을 차단하는 것으로서의 구름은 도덕적 현실 규범과 제도의 구속성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4.
우리는 이 한 편의 길지 않은 시를 읽어 오면서 사랑과 고난, 연민과 피로를 보았고 가꿈과 버려둠, 자유와 구속, 분노와 복수, 외면과 고결 그리고 자연의 성스러움을 보았다. 그러나 이 시속에 설레임은 없었던 것 같다. 잠든 선무당네의 집에 몰래 침입하는 아내의 뛰는 가슴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설레임이 아니라 놀람과 격앙된 흥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참으로 이 시에는 설레임이 없었는가? 아니다. 시행에서 시행으로 이어지던 우리의 관심과 긴장의 이면에 설레임은 끊임없이 있어 왔던 것이다. 시인 문인수가 만든 시적 장치에 의하면 설레임은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넘겨져 있다. 기대하고 소망하는 마음의 유동하는 감정이 곧 설레임일 것이기 때문이다.
문인수 시인은 유년을 회상한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의 고향 마을, 고향 생각 첫머리에 항상 솟아오르는 방올음산의 푸른 종소리와 그 아래 순박하게 이어지는 삶을 기억하며 형상화하는 그의 시작(詩作)은 그러므로 회상이다. 그것도 문인수의 삶과 시의 확고한 근원으로서 방올음산과 그 아래 엎드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냥 두면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미 까마득한 망각의 늪에 묻혀 버렸을 그것들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근본 문제로서 우리 앞에 현현시켜 제출하고 설명과 해석을 독자에게 위임하는 하나의 세계로 확립하여 지속하게 한다. 이것은 곧 새로운 세계가 건설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시작(詩作)은 회상이고 회상은 건설이다. 시인은 회상을 시작(詩作)하고 또 시작하면서 그 회상을 실현하는 것이다.31) 그러한 의미에서 “회상은 하나의 회상이기는 하지만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앞질러서 생각하는 그러한 사유이다.”32)
시인은 일상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존재를 밝음 속으로 현현(顯現)시킨다. 그것은 존재의 은폐성을 빛 속으로 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인은 다른 사람이 본체만체하는 것 속으로 침잠한다. 이리하여 시인의 눈은 숨은 보물로 쏠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눈이 발견하고 가르쳐 주는 이 보물은 언제든지 ‘일상의 파편’아래 숨어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의미에서 시는 세계를 개시하는 것이다.”33) 그렇다면 문인수의 이 시 「간통」에서 일상의 파편은 무엇이며 그 아래 숨어있는 보물은 무엇인가? 염문, 간통, 확인, 응징, 무저항 등이 일상의 파편이라면 간통에 대한 본원적이며 총체적인 이해와 그것이 가진 가치성질이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일상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끄집어내는 시인의 가치 시야는 광대하고 가치 감수능력은 풍부하며 미적(美的)인 미각(味覺)은 섬세 하다. 그러므로 문인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이녁과 선무당네의 밀회도, 아내의 분노와 복수도 그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 각자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한다. 그들은 모두 문인수와 등거리에 있는 이웃들이다. 이러한 그의 이웃 사랑은 인인애(隣人愛)이다. “인인애는 타인에 대한 마음의 지향이고, 더욱이 적극적·긍정적인 지향이다. 마음의 중심을 자기에서 타인에게로 옮김이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관심과 애정은 선무당네에게 더 많이 쏠리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더 많이 곤경에 빠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정이 아니다. 인인애의 핵심은 동정이 아니라 타인을 타인으로써 긍정하는 감정이요, 노력이기 때문이다.35) “참된 동정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지 동정에서 사랑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36) 삶에 있어서 모든 금지는 인생을 단순화시키고 빈약화시킨다. 이러한 금지의 울타리를 넘어나가 인생에 있어서의 모든 일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그 가치 있음을 알게 되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가치감이 넓음, 가치에 대한 감수 능력의 풍부함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문인수는 섬약하지만 시인으로서의 그의 가슴은 광활하며 충만하여 있다. 도덕적이거나 미적이거나 간에 마음이 좁고 생각이 얕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무가치하지만, 마음이 넓고 생각이 깊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인수의 이 시가 가지는 초예술적 의의가 있다. 그것은 한 편의 시이면서 시 이상이다. 문인수는 이 시 「간통」에서 결코 도덕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 실존과 실존적 삶의 치열한 갈등 상황을 투명하게 우리 앞에 개시하고 있으며, 인간의 원초적 문제로서의 간통을 본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인수의 이 시를 토대로 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이것은 곧, 성(性)을 금기시하고 간통을 죄악시 하게된 연원을 정신주의의 산물로 규정하면서 제기 할 수 있는 몇 가지 물음으로써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정신주의란 무엇인가? 물질과 육체가 경시되어 보잘 것 없는 것이 되고, 정신과 이념이 중시되어 소중한 것이 되는 그러한 사유나 주장을 정신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신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신플라톤학파와 중세의 철학 체계는 물론 헤겔에까지 유지되어 온 사상이다. 여기에 따르면 정신의 추구와 사회적 이념의 실현을 위해 인간의 육체적 욕구는 참고 극복해야 할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제도와 이념을 위해서 인간의 성(性)은 억제되고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과연 이것은 온당한가? 정신과 이념은 우위에 있고 물질과 생명은 하위에 있는 것인가? 사회적 제도와 이념은 중요하고 성은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물질과 성이 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이고 제도와 이념은 그러한 밑바탕 위에서 성립하는 이차적인 것이며,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개인의 행복 추구를 보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제도와 이념이지 않겠는가? 물론 인간은 성(性)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성을 떠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삶의 현장에 있는 우리가 현실적 삶의 원형질이면서 삶의 제도와 대척적 관계에 있는 간통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궁극적으로 선이라고 할 것인가, 악이라고 할 것인가? 그의 삶 전체가 간통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가 있는가, 있다면 그는 과연 누구인가? 문인수의 시 「간통」과 마주 섰을 때 우리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하여 할 말을 잃어버린다. 할 말을 잃어버린 바로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
--- “인간은 시 가운데서 정적에 이른다.”---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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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와 반시』, 1996-여름호(통권 제16호), 시와 반시사, 1996, 42쪽.
2) 문인수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시의 주인공인 선무당네는 마을에 온갖 염문을 뿌리며 산 실존 인물인데, 그것은 혼자 몸으로 7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 같았다고 하며, 60년대에 죽었는데 지금 살아 있다면 80대 초반의 나이일 것이라고 한다. 지금이 1990년대 후반임을 감안하여 계산하면 선무당네는 아마 1910년대 초반 출생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7남매를 출산하여 부양하였음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그녀의 나이 40세 전후의 시기인 1950년대 초반에 발생한 사건이 바로 이 시 「간통」의 내용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사건을 목격한 시인 문인수의 당시 나이는 그러니까 국민학교 입학 전후인 6살에서 9살 사이었던 것으로 계산된다. 선무당네의 이러한 삶은 문인수의 다른 시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오월 춘궁이 있었다.
몸 팔아 새끼들 먹인 선무당네가 있었다.
이 달빛 어디서나 방올음산 세우고
산 아래 척박한 땅
그 풀빛 비릿한 눈물맛 풍긴다.
---「매춘」후반부 ---
3) 일본, 독일, 미국에 있어서 간통의 개념과 범죄 성립 요건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경우, 지금은 간통죄가 폐지되었지만 개정(1947년)전 형법의 간통 규정을 보면, 간통죄는 ‘유부의 부(有夫의 婦)’에게만 적용되며 간통죄의 성립 요건은 먼저 법률적 혼인 관계가 성립되어 있어야 하고 사실혼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大場茂馬 『形法各論』 下卷, 嚴松當書店, 1913年, 474面 참조.) 혼인 관계가 필요하고 법률혼만이 이에 해당한다는 점은 현행 한국의 형법과 같고, 유부녀의 간통만이 처벌 대상이 되었다는 점은 한국 형법 제정(1953년) 전의 ‘조선 형사령’과 동일하다.
독일의 경우 역시, 지금은 간통죄가 폐지되었지만 개정(1969년)전 독일 형법에서는 간통죄의 구성 요건으로서 두 사람의 성행위가 있어야 하며 그 중 적어도 한 사람은 유효한 혼인 생활을 하고 있어야 한다. 유효한 혼인이 두 사람 모두에게 존재하는 경우에는 이중 간통이 성립하며, 혼인은 형식적으로만 유효하면 충분하다. 행위의 본질은 성행위를 실행함에 있으므로, 성행위 유사의 행위 또는 기타의 부정한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간통죄가 성립되지 아니한다.(Schonke/Schroder, Strafgesetzbuch, 12Aufl., C.H. Beck͵sche Verlag, S.172.: Maurach, Deutsches Strafrecht BT, 5.Aufl., S.413 참조.) 이처럼 폐지되기 전 독일의 간통죄 또한 현행 한국 형법 내용과 유사하다.
미국에서의 간통이라 함은 혼인한 사람이 타인의 남편 또는 부인과 자발적으로 성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는데, 대부분의 주에서는 간통죄가 폐지되고 10여개의 주에서만 간통죄의 규정이 남아 있다. 그러나 범죄 성립 요건은 각각 다르다. 혼인한 남성이 혼인하지 않은 여성과 가지는 성행위를 간통의 범위에 포함시키지 않는 주가 있는가 하면, 반면에 어느 일방의 당사자만 혼인을 하고 있으면 간통 또는 사통(주4) 참조)을 인정하는 주도 있다. 쌍방이 혼인한 경우에는 이중 간통, 일방만 혼인하고 있으면 단일 간통이라 하여 양자를 구별하고 있는 주도 있고, 공개적이고 악의적인 간통만을 범죄로 규정한 주도 있다. 공개적이고 악의적인 간통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당사자간에 혼인 관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공개적으로 동거하여야 하고, 그들이 그렇게 생활하는 것과 그들이 부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지역 사회에 알려져야 한다. (H. C. Black, Black͵s Law Dictionary, West Publishing Co., 1979 참조.)
4) 사통(私通; Fornication)이란 미국에서 주로 쓰여지는 개념으로서, 미혼자간의 불법적인 성관계를 말한다. 나아가 일방은 혼인한 자이고 타방은 혼인을 하지 않은 자이면, 혼인한 자에게는 간통이 성립하지만 혼인하지 않은 자에게는 사통이 성립한다. 여성이 혼인한 경우이면, 남성의 혼인 여부는 묻지 않고 모두 사통으로 규정한 주도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통죄가 미국에서 집행된 예는 별로 없다. (H. C. Black, Black͵s Law Dictionary, West Publishing Co., 1979 참조.)
5) 주3)에서 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는 1947년에 이미 간통죄에 대한 형법 규정이 폐지되었고, 독일은 1969년에 폐지되었다. 미국은 현재 10여개의 주에서만 간통죄의 규정이 남아 있는데 이들 주에서도 신빙할 만한 간통의 증거가 있더라도 행위자가 처벌되는 경우는 없다고 하므로 이에 관한 형사제정법은 사실상 사문화 되어 있는 형편이다. 또한 미국 모범 형법전에서는 간통죄의 폐지를 권고하고 있다. (차용석, 「간통죄에 대한 고찰」, 『고시계』 1987-3월호, 19쪽 참조.)
6) 그리이스어의 정조는 어원적으로 식(食)과 성(性)의 금욕을 의미하지만, 고대 그리이스인의 정조 관념은 식생활과 같이 성생활에 있어서의 적당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맺는 성교섭이 더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정조 관념은 오히려 후세에 이르러 형성된 종교적 윤리에 기인한 기독교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교육서관, 『세계 대 백과 사전』, 제17권, 1986, 59-60쪽 참조.)
7) 한국에서는 간통죄가 형법으로 자리잡기 이전에 ‘조선 형사령’에 의거하여 유부녀 간통만이 처벌 대상이 되었다. 형법상 간통죄 존폐에 대한 공방은 그 후 두 차례 있었다.
처음에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에 ‘법전 편찬 위원회’가 세계적 추세를 감안하여 간통죄 폐지안을 기초하였으나 이를 토대로 한 행정부의 형법 개정안에서는 간통죄를 존치시키되 남성도 처벌하는 쌍벌주의로 바뀌어졌고, 국회 법제 사법 위원회에서는 이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간통죄 폐지안을 마련하였다. 1953년 6월에 개회된 임시 국회에서 두 개정안(정부안과 국회안)에 대해 표결한 결과 1표 차로 정부안이 통과되어 형법에 간통죄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1985년 6월부터 가동된 ‘형사법 개정 특별 위원회’에서 간통죄 폐지를 의결하였고, 이에 대한 공청회가 1992년 4월 29-30일 개최되었는데 존치의 의견이 강했으며 언론 기관 및 여론 조사 기관의 조사 결과에서도 7 : 3으로 존치의 의견이 우세하여 마지막 확정 단계에서 폐지 방침이 철회되고 형을 낮추어 존치하게 되었다.
간통죄 존치론과 폐지론의 주장은 대개 다음과 같다.
<간통죄 존치론의 주장>
1. 간통 행위를 처벌하지 않으면 간통이 성행하게 될 것이고, 이로써 우리 사회의 성풍속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
2. 일부일처제의 혼인 제도를 보호하고 부부간의 성적 성실의무를 확보하기 위하여 간통죄는 존치해야 한다.
3. 간통죄는 사회적·경제적 약자인 여자가 남자 배우자의 부정을 제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간통죄 폐지론의 주장>
1. (위헌론) 간통은 성적 자기 결정에서 기인하는데, 성적 자기 결정권은 우리 헌법 제10조에 보장되어 있는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 추구권의 한 내용이며, 간통 행위가 타인의 권리나 공동체의 질서를 구체적으로 침해한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이를 제한하는 것은 위헌이다.
2. (역기능론, 본질론, 법논리론)
① 간통죄의 고소는 대개 고소인의 일시적 보복감에서 기인하는데, 이에 따라 선의의 자녀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며 고소인 자신도 나중에 후회하게 되고 생계 유지의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인격 파탄에도 이를 수 있다.
② 일시적인 탈선 후에 반성하고 다시 회복될 수 있는 부부 관계를 간통죄가 있으므로 해서 그러한 기회를 박탈하여 혼인을 파괴하게 된다. 간통죄는 법 규정이 의도하는 혼인 유지의 목적과는 반대로 가고 있다.
③ 배우자의 부정을 참고 용서하는 피해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복수심 많은 자만이 혜택을 받게 된다.
④ 특정인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고, 우연한 실수를 한 부녀에 대하여 계속적인 성적 침해와 재물 갈취의 수단으로 이행될 우려가 있다.
⑤ 간통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통이 줄어들지 않는 것은, 간통죄 규정이 간통 행위를 억제하는 실질적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⑥ 남녀간의 성행위는 인간성의 근본에 입각한 것인데 이를 형벌로 처벌한다는 것은 인간성을 유린하는 것이다.
⑦ 간통은 특수한 환경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형벌이 폐지된다고 하여 간통이 늘어날 것이라고 보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이다.
⑧ 간통이 발생하는 부부관계는 설사 그들이 법률혼의 관계에 있기는 하지만 이미 병들어 있는 관계이고, 간통을 행한 남녀의 관계는 민법상 사실혼으로 보호되는 성격의 것이어서 후자의 관계가 오히려 혼인의 본질에 더욱 적합한 것일 수도 있다.
8) 박용수 지음, 겨레말 갈래 큰 사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3, 90쪽.
9) Martin Heidegger, 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1944), Gesamtausgabe 2 : Vittorio Klostermann, Frankfurt a. M. 1977(이하 EHD로 약기함), S. 112.
10) EHD, 116 참조.
11) Nicolai Hartmann, Ethik(1926), 4Aufl. Berlin 1962(이하 E로 약기함), S. 73.
12) 흰내는 시인 문인수의 고향인 성주군 초전면의 십만리들 배다리들을 적시며 흐르는 하천이다. 행정 명칭은 백천(白川)이며, 방올음산에서 발원하여 성주군의 북부와 동남부 지역 일대의 젖줄로 흘러, 월항면과 초전면을 경계 지으면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13) 박용수 지음, 위의 사전, 462쪽.
14) 검정 고무신은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이지만, 그것이 굳이 흰 고무신이나 장화가 아닌 검정 고무신으로 이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1950년대 한국의 농촌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검정 고무신과 한국 문학의 근대성이 가지는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철학이 아니라 한국 문학 영역에서 행해져야 할 연구 과제이다.
15) 하이데거는 고호의 구두 그림을 예로 들어, 도구 존재의 용도성을 신뢰성으로 연결시키고 이러한 신뢰성에 입각함으로써 예술 작품의 존재가 비은폐성 가운데로 나타난다고 하며, 존재자의 비은폐성은 곧 예술작품 가운데로 자기정립된 진리로서 예술의 본질을 이룬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오병남·민형원 공역, 말틴 하이데거 저, 『예술작품의 근원』, 경문사, 1990, 97-102쪽을 참조할 것.)
16) Nicolai Hartmann, 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1933), 5 Aufl. Berlin 1965, S. 443.
17) 방올음산은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의 북쪽 머리맡을 오래 지키고 앉아 있습니다. 또 고향생각 첫 머리에도 항상 이 산이 솟고요,
해발 칠백팔십이미터인 이 산은 마치 삼각의 푸른 종 하나가 하늘 깊이 걸려 있는 그런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산은 懸鈴山 또는 鈴山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실제로 그 옛날엔 이른 새벽이거나 늦은 저녁이면 은은한 종소리가 온 고을에 울려 퍼졌다고 합니다. 그 종소리 울려 퍼져 널리 사람의 정신을 맑히고 지친 몸 한없이 추스리게 했대서, 그런 「방올音 나는 山이라 해서 方兀音山으로 적혀 있기도 합니다. 이 고장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이두식 표기를 좇아 그저 방올음산 바우람산 바아람산 등으로 편하게 부르고 있지요.
-- 문인수의 시 「방올음산 이야기」중 일부 --
18) 박용수 지음, 위의 사전, 482쪽 참조.
19) 박용수 지음, 같은 사전, 984쪽.
20) 주17) 문인수의 시「방올음산 이야기 」참조.
21) 주17) 문인수의 같은 시 참조.
22) 사람들은 흔히 “내가 하면 사랑이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는 말로써 인간의 자기 합리화 경향과 자기 중심적 사고의 모순성을 꼬집는다. 인간에게 자기 합리화의 경향과 자기 중심적 사고의 모순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러나 사랑과 불륜에 대한 이와 같은 명제는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불륜이란 보통 ‘인륜에 어긋남’ 또는 ‘도덕에 어긋남’을 뜻한다. 그런데 인륜을 ‘의식화 된 도덕’(도덕, 인륜, 윤리의 개념 구분에 관해서는 김주완, 『미와 예술』, 형설출판사, 1994, 85-86쪽을 참조할 것)이라고 하였을 때, 도덕이 가진 역사성으로 인하여 인륜 또한 시대적·지역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가치 그 자체는 이법적 존재로서 불변하는 것이고, 사랑의 실현으로서 현실적인 사랑은 실사적 존재로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사랑이 가지는 외연은 불륜을 포섭한다. 그러니까 사랑에는 ‘도덕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랑’도 있고 ‘비도덕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랑도 있는 것이다. 사랑은 도덕적 가치이기는 하지만 이 때의 도덕은 현실적인 도덕 규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간통에도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간통’과 ‘사랑없이 이루어지는 간통’이 있다. 후자의 예로는 매매춘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소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제인 중년 남녀의 간통은 분명히 불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23) EHD. 120.
24) E. 465 참조
25) E. 536.
26)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라는 이 표현을 주2)에서 언급한 문인수의 다른 시(「매춘」)와 관련시켜 보면 여기서의 간통은 매매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한 경우, 이 표현은 ‘선무당네가 이녁을 후려서 재물을 모두 편취하고 육신을 쇠약하게 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바로 이로부터 다시 많은 논의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 (「간통」) 만으로 보았을 때 매매춘이라고 볼만한 부분은 없는 것 같다. 설령 이녁이 선무당네에게 어떤 재화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이 시의 전체 흐름으로 보아 그것은 정표(情表)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들의 밀회가 매매춘적 성격의 것이었다면 계속적인 만남(“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는 시행은 이녁과 선무당네의 밀회가 계속적으로 반복되었음을 의미한다)이 가능하지 않고 굳이 깊은 밤에 그것도 인적이 없는 흰내에서 만나야 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27) E. 79.
28) E. 479.
29) E. 398 참조.
30) E. 310 참조.
31) EHD. 110, 143 참조.
32) EHD. 80.
33) Nicolai Hartmann, Ästhetik(1953), 2 Aufl. Berlin 1966, S. 294.
34) E. 450.
35) E. 454 참조.
36) E. 455.
37) EHD.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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