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철학연구 제64집, 대한철학회, 1998.02.03, 21~46쪽.에 수록되었음.
하기락과 자유*
경산대학교 김주완
우리가 한 사람의 일생을 조망하고 규정한다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그것도 짧거나 평균적인 생애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장수라고 보는 생애이며, 더욱이 그러한 생애를 참으로 열심히 살아서 방대한 업적과 남다른 행적을 남긴 하기락(1912-1997)과 같은 사람의 경우, 그보다 훨씬 짧은 인생의 노정에 서서 그의 생애 일부분에서만 그와의 연분을 가진 필자와 같은 사람1)이 그러한 일을 시도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이 글의 근원적 한계이다.
여기에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한계는 이 글이 필자의 “원근법에 의한 도식화요 생략”2)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기락 속에 반영된 필자의 기호를 발견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으며, 하기락에 있어서의 중요한 여러 가지를 필자의 관견(管見)이 놓치고 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현대 철학의 제1세대 학자군에서 대표적 인물로 공인되고 있는 하기락의 일주기 추모 논문 중의 한 편으로 쓰여지는 이 글은 하기락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평가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학문성만을 떼어냈을 때 그것은 본래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고 필자는 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기락은 철학자이면서 아나키스트였다. 그에게 있어 철학과 사회운동은 하나였으며 그것은 곧 그의 삶의 전부였던 것이다. 이론과 실천과 생활인으로서의 삶이 각각 유리(遊離)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 관계 속에서 상호포괄하는 하나였던 것이다.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 압축하면 자유의 추구와 실현을 위한 구도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철학과 사회운동과 생활이 하나로 뭉뚱그려진 하기락의 삶 그 자체를 물론 우리는 하기락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기락의 철학을 찾기 위하여 하기락의 철학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하기락의 철학을 추적하기 위해서 제 2차적인 것, 주변적인 것 즉, 그의 말과 행위, 삶의 태도와 가치관, 그가 걸어간 행로 등을 살펴봄으로써 전체로서는 결코 우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하기락의 철학의 면모를 어렴풋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하기락의 만년 10여 년간에 걸친 삶의 수행 갈피에서 이미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린 단편들을 기억의 두레박으로 건져 올려 나름대로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다. 필자는 결코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이론을 그리고 서양 근·현대 아나키즘 이론을 하기락의 것인 양 잡다하고 지루하게 나열함으로써 이 글의 독자를 괴롭히려고 하지는 않겠다. 오히려 하기락에게서 보여졌던 일상적 모습의 단편을 서술하고 그때그때 받은 인상을 진솔하게 소개함으로써 하르트만의 철학과 아나키즘 이론이 어떻게 하기락의 삶에 녹아들었는가, 그것은 어떻게 하나로 융합하여 자유를 찾아가는 하기락의 삶을 만들어내었는가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구명하는 우회로를 걸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어쩌면 정밀한 논문이 아니라 잡문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언제가 누군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는 하기락에 대한 총체적 연구의 자료로서 작게나마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자유의 추구와 실현에 일생을 건 하기락 만년의 철학적 삶을 조명하기 위하여 이 글은 다음 다섯 개의 길잡이 말을 취한다.
1. “자기자신에게 맡겨져 있음이 사람의 자유이다.” -니콜라이 하르트만-3)
2. “참으로 위대하고 감격적인 것은 인간의 순수함에서 나타난다.” -니콜라이 하르트만-4)
3. “자유는 결정이 되어있지 않다는 것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개방되어 있는 것에 의존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한 층 더 높은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 -니콜라이 하르트만-5)
4. “존재로부터의 부름을 듣는 데서만 인간은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6)
5. “「인간의 해방」또는 「실존의 자유」, 이것이 나의 철학적 테마요, 또 목표였다.” -하기락-7)
1.
‘자기 자신에게 맡겨져 있음이 사람의 자유이다’라는 N. 하르트만의 명제는 ‘스스로(自)에서 말미암음(由)’이라는 자유가 가진 우리말의 뜻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람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것, 스스로에서 말미암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황이나 타인에게 얽매여 있지 않을 수 있는 천부적인 것이다. 상황에 구속되어 오로지 종(種)의 법칙에만 따르는 것은 동물의 삶이며 타인에게 종속되어 명령과 조종에만 따르는 것은 노예의 삶이다. 인간은 동물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상황을 극복해 나가고 노예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자기 스스로에게 명령하는 자율적 존재이다. 인간도 어쩔 수 없이 상황과 맞닥뜨려야 하고 남에게 지배받을 수 있다. 상황을 극복하는 여러 방법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에게 맡겨진 선택의 문제이고, 지배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하는 것 또한 선택의 문제이다. 이 때의 선택이란 골라잡음이며 그것은 결단과 결정의 결과물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결단과 결정의 자유는 결정하거나 결정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자유가 아니라,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해도 좋은 그러한 자유인 것이다. 그러니까 결단은 강제되어 있지만 결단의 방향과 내용은 해방되어 있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이다.
대구권의 N. 하르트만 학도들은 외적 강제에 의해서가 내적 자기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모여 자유로이 독회를 시작했다. 1988년에서 1992년에 이르기까지 5년여 동안 하기락을 스승으로 모시고 조욱연(효가대), 김태양(김산전문대), 성홍기(계명대), 필자 등이 일주일에 세 차례 (방학중에는 주 6회) 모여 N. 하르트만의 저서와 관련 논문들을 읽었다. 우리는 모두 늦깎이 내제자(內弟子)였고 생활에 쫓겨 할당된 분량의 번역을 해오지 못하는 때가 자주 있었지만 그럴 때는 으례 하기락이 읽어 나갔고 우리는 따라 갔다. 하기락이 언짢아한 기억은 없지만 호된 꾸중은 자주 들었다. 잘못된 번역을 했을 때의 나무람은 단호했고 그 질책은 주변 분위기를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태만에 대한 꾸중이었지 무능에 대한 책망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 꾸중을 달게 받았고 아무도 감정의 상처는 입지 않았다. 나중에 양우석(계명대)이 동참하여 구성원이 늘었고 적은 금액이긴 하지만 대우학술재단의 지원금을 받으면서 독회는 더욱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장소는 대구시 봉산동 소재 형설출판사 2층 응접실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뒤늦게는 종교문제연구소(동대구역 부근)와 한국의원(대구시 덕산동 소재) 2층의 사용하지 않는 물리치료실도 간혹 이용하였고 조욱연의 연구실도 몇 번 사용하였다. 이 때 우리가 주의 깊게 읽고 진지하게 토론한 것은 『정신적 존재의 문제』(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 제 3편 ‘객체화한 정신’과 하르트만 탄생 100주년 기념 논문집 『니콜라이 하르트만 1882-1982』(Nicolai Hartmann 1882-1982)8)이었다. 그것은 미학 쪽으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필자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마지막쯤엔 『자연철학』(Philosophie der Natur)을 읽었다. 독해도 독해려니와 동서를 넘나드는 하기락의 해박한 철학적 지식과 명쾌한 비교·분석을 통한 개념풀이는 늦깎이 공부에 나선 필자의 경우에 있어서 철학의 기초 다지기에 참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정확한 번역과 명료한 서술은 하기락의 정확성과 엄밀성의 표징으로서 독일어와 우리말의 경계를 깡그리 지워버리는 것이었고, 곧장 그것은 삶의 성실성으로 이어져 있었다. 배우는 입장의 우리들 중 거의 모두가 독회 시작 시간을 넘기고 늦게 참석하는 경우가 번갈아 가며 더러 있었지만, 하기락은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고 언제나 10-20분전에 먼저 도착하여 우리들이 모일 때까지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독회에서 뿐만이 아니고 다른 일로 만날 때에 있어서도 하기락이 약속시간에 늦는 경우를 필자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9) 하기락의 자유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유가 아니라 약속을 꼭 지키는 자유였으며, 그것도 시간에 겨우 맞추거나 늦는 자유가 아니라 앞당겨 당도하여 기다리는 자유였다.
독회가 끝나면 거의 언제나 우리는 인근에 있는 염매시장 죽집이나 덕산빌딩 맞은편 골목 칼국수집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하거나 뉴욕 피자호프에 앉아 차를 마시며 독회에서 이어지는 여러 가지 주제로 담론을 나누었다. 한 달에 한 두 번쯤은 염소탕집이나 보신탕집 혹은 곰탕집으로 몰려가 영양을 보충하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서는 대개 일이 많은 조욱연이 먼저 나갔고 다음으로 김태양이나 성홍기가 나갔으며 필자는 끝까지 남아 있다가 하기락을 댁까지 모셨다. 1991년 이후에는 필자도 어줍잖은 본부보직을 한답시고 그러한 소임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가 독회를 시작한 것이 1988년 1월 11일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꼭 그 시기에 시작했는가 하는 것을 돌이켜 보면 사회·정치적 혼란기였던 1987년이 지나가고 그나마 표면적으로는 안정을 찾아갔던 때가 그 때 쯤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1987년은 6월 민주항쟁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 해 였으며 동년 9월 26일 국민운동 본부가 주최한 집회에서 연설을 하던 하기락이 쓰러져 협심증으로 병원치료를 받았던 해이다. 하기락은 강인한 정신력으로 일주일만에 병석에서 일어나 『하기락 논문집 제 4권』의 교정과 한국자주인연맹의 기관지 「자유연합」의 편집 그리고 다음해 10월로 예정된 세계아나키스트 대회 서울 유치를 위한 준비에 진력하였다. 뒤이어 1987년 10월 27일에는 대통령 직선제를 내용으로 하는 9차 개헌에 대한 국민 투표가 있었고, 개정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같은 해 12월 17일 실시되었다. 비록 각색된 허상이기는 하였지만 국민대중은 무지갯빛 민주화의 꿈에 부풀어 있었고 사회·정치적 이슈가 점차 가라앉으면서 올림픽 서울유치의 해인 1988년은 그렇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기락의 눈에는 그러한 사회·정치적 변화가 그리 만족스럽게 비추어지지 않았다. 참된 자유를 바라보고 추구하는 노철학자의 눈에 얄팍한 술수로 분장한 현실정치의 실체가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대중음식점은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기에 뉴욕피자호프에서 피자로 식사를 때우는 그런 경우에는 으례 한나절 이상의 시간을 우리는 각종 사회현실과 국가의 실체, 자유의 본질 등에 대하여 열변을 뿜어내는 하기락의 살아있는 강의를 들어야 했다. 더러 원로시인 석우 이윤수(石牛 李閏守; 1914-1997) 선생이 우연히 합석하여 40년 지기의 우정과 정심(正心)으로 동조하며 분위기를 가열시키기도 했고 그럴 때의 하기락과 이윤수는 주변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날의 그들로 돌아가 자못 가열찬 주장과 현실 비판을 서슴없이 해대곤 했다. 두 분 모두 순정이 강했던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하기락은 자주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곤 하였다. 속눈썹이 수정체를 향해 솟아나는 현상10) 때문에 그렇기도 했겠지만 노안으로 몇시간씩 독회를 하느라 작은 활자의 원서를 들여다본 직후에 담배연기가 자욱한 호프집에 앉아 다시 몇시간을 보내느라 더욱 그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래 앉아 있기가 민망하여 필자는 몇 번씩 커피를 다시 시켜 마신 기억도 있다. 그럴 때 하기락과 이윤수는 커피대신에 생맥주를 시켰다. 술자리에선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술을 마시는 주류파로서 김태양이 원로 철학자와 원로시인의 술시중을 들며 대작하는 큰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김태양은 특유의 호인 웃음을 자주 웃으며 하기락과 이윤수의 주장에 장단을 맞추기도 했다. 그래서 하기락은 우리 중에서 특히 김태양을 총애했던 것 같다. 차분히 무르익는 술자리에서 하기락의 눈가로 자주 스쳐 지나가는 우수의 그림자를 필자는 읽곤 하였다. 하기락의 우울과 눈물은 어쩌면 시대와 역사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필자는 문득문득 하곤 하였다. 이 때의 정경을 그린 필자의 다음과 같은 졸시가 있다.
겨울 장마11) / 김주완
-老哲學者 虛有 河岐洛 先生-
겨울 저녁비 내리고
젖은 도시의
거리는 추상의 옷을 입는다.
변형의 계절에 앉아
뼈 추리는 작업 깊은
노안의 철학자는 힘이 들까,
더러 눈물 나고
눈꺼풀 찌르는 속눈썹 아픈
가슴의 비소리
잠시 머물다 지나간 사람들의
부서진 숨결들이 되살아나는
토요일 오후 네 시,
봉산동 지선도로변 뉴욕 피자호프의
구석자리 이방에서 일던 안개숲 속
앓는 공화국의 우울한 침묵이
비에 젖는다, 아득히
먼저 떠난 아나키스트
맑고 맑은 이국의 동지들과 마주앉아
커피값으로 마시는 생맥주잔 너머
역사가 빨아낸 자유의 빛깔은
당신의 눈 속에 흐리고 흐리다,
외계의 장마비 칼질하는 저녁 때.
2.
‘참으로 위대하고 감격적인 것은 인간의 순수함에서 나타난다.’ 순수한 것은 인간 이외의 존재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순수는 다른 모든 존재자의 순수를 능가한다. 왜냐하면 순수의 가치를 조망할 수 있는 자도 인간이고, 인간의 순수함에서 감격적이고 위대한 것의 현상(Erscheinung)12)을 성립시키는 존재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순수를 바라보며 그것을 현상시킴으로써 또 다른 새로운 존재(현상존재)를 만들어낼 뿐 아니라 거기서 감격 받는 존재이다. 순수는 번다함과 가득참과 잡됨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선다. 순수는 자신 속에 없음 이외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으로서 번다함과 가득참과 잡됨을 굴복시킨다. 이러한 순수의 힘은 가장 힘없음으로서의 힘있음이다.
하기락은 순수하였다. 삶도 학문도 실천도 순수하였다. 그의 삶은 개결하였으며 학문은 명료하였고 실천은 사심이 없었다. 이러한 하기락의 순수성은 출생과 작고의 단적인 대비에서도 드러난다.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소재지 도랑옆 네칸 초가집에서 태어난 하기락13)은 대구시 동구 만촌동 2군사령부 서편 18평짜리 국민주택에서 작고함으로써 86년의 생애를 마감하였다. 네칸은 평수로 환산하였을 때 5.5-9평 정도가 되는 집의 면적이다. 그러니까 하기락이 출생한 초가집의 면적은 최대한으로 잡더라도 9평 남짓하다고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장 전통적이고 서민적인 옛 농촌마을의 집을 흔히 ‘초가 삼간’이라고 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네칸 초가집에서 태어난 하기락이 출생할 당시의 집안 형편은 그리 부유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작고 당시의 집도 그러하다. 18평 짜리 국민주택이 1997년 당시의 최하 주거 형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대학 교수로 정년퇴직한 노학자가 연구와 저술에 힘쓰면서 보낸 만년의 가옥이 18평에 불과한 국민주택이었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최하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기락은 한 번도 주거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을 말한 적이 없다.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나 청빈한 일생을 살면서 거기에 만족한 하기락은 어쩌면 물욕을 벗어난 삶이 체질화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것은 거꾸로 설명될 수도 있다. 하기락의 소년기와 청년기는 유족 하였으며 그러한 가세에 힘입어 서울과 일본 유학까지 하였고 부족함이 없는 젊은 날을 보냈기 때문에 해볼 것을 다해 본 사람의 초연한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노년의 청빈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하기락의 진술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이 된다. 어린 시절 윗동네로 이사를 갔으며 그 집은 몸채와 사랑채가 있는 꽤 큰집이었고, 하기락의 부친은 어린 하기락에게 계속하여 한약을 달여 먹였으며, 소년 하기락은 ‘형을 따라 냇물 건너 5리(2㎞)쯤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한 외딴 오둑막집 서당을 다녔다’고 한다.14) 이로 미루어 보면 하기락의 출생당시의 집안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였지만 하기락의 소년기 이후 그러니까 윗동네로 이사한 이후의 집안형편은 상당히 넉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언젠가 안의에서 전주로 통하는 육십령 고개를 넘으면서 하기락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하기락이 아직 소년이었을 때 그의 부친은 유기(鍮器)공장을 하였다고 했다. 놋그릇도 만들고 꽹과리나 징 같은 것도 만들어 여러 명의 인부들에게 등짐을 지우고 소년 하기락의 부친은 육십령 고개를 넘어 전국의 소매상에게 날라다 주고 돌아오고는 했다는 것이다. 1910-1920년대에 이미 이정도 규모의 공장을 경영하였다면 그 재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랬기에 1930년대의 서울 유학과 동경유학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출생 당시의 빈한함과 작고 당시의 청빈함은 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와 같은 하기락의 개결한 삶은 그가 추구했던 바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기락의 아호 허유(虛有)의 상징성이 이것과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허유란 ‘비어(虛) 있음(有)’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없음으로서의 있음이다. 있기는 있되 아무 것도 미리 가진 것이 없이 살고자 한 것이 하기락의 삶이라는 것이다. 물욕도 벗어 놓고 명예욕도 벗어 놓고 빈 몸, 빈 마음으로 살고자 한 것이 하기락의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나 도가에서 권유하는 삶의 이상적 양태와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기락이 불가적 삶이나 도가적 삶과는 다른 실천적 삶을 살아간 것은 뒤(3.4. 5)에 밝혀질 ‘인간의 해방’이라는 이상적인 목표를 그의 일생의 과제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기락의 순수성은 그의 정서에서도 나타난다. 하기락이 일곱 살 되던 때 시집온 형수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다. 잠들기 전이면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형수를 졸랐고 아침 설거지가 끝나면 양지바른 마루 끝에서 형수는 소년 하기락의 머리를 빗겨 땋아 주었다. 하기락은 그 시절의 형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형수의 모습은 잘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15) 기억의 단절성과 지속성은 정서적 각인의 정도에 의존한다고 보았을 때, 하기락 내면의 거울엔 형수의 이미지가 자상함과 친근함과 포근함의 이미지로 깊이 인각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런 조건이나 의도 없이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좋아하고 따르며 그 기억이 60년 이상이나 지속된다면 이것이 곧 순수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기락의 순수성은 만년의 학자적 삶 구석구석에서도 나타난다. 하기락의 서재는 세 평 남짓하였으며 사방의 벽에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남은 공간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정도였다. 몇몇이 어울려 신년인사라도 갈라치면 으례 몇 사람은 방밖의 마루에 앉아야만 했다. 하기락은 거기서 연구하고 집필하며 기거하였다. 군용으로 나온 카키색의 등산용 침낭이 하기락의 방석이자 침구로 쓰여졌다. 먼 산행을 할 때면 하기락은 이 침낭을 둘둘 말아 배낭에 넣고 나서곤 하였다. 워낙 협소한 공간이라 책상을 놓을 자리가 없었고, 머리맡에 작은 밥상을 놓고 책상대용으로 쓰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재떨이와 담배와 일회용 라이터가 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 커피포트와 인스턴트 커피병, 인삼차와 녹차 봉지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책상으로서의 작은 밥상 위에는 언제나 책이 펼쳐져 있었고 집필중의 원고지가 놓여 있었다. 이 밥상이 바로 하기락 만년의 역저들 특히 역작이라 할 수 있는 『조선철학사』의 방대한 원고를 써 낸 책상이다. 집필에 있어서 하기락은 주로 400자 원고지를 사용하였으며 필기구로는 튜브가 녹아 없어진 오래된 파카 만년필에 잉크를 찍어서 썼다. 여름철이 되면 하기락의 이 서재는 한증막이 되었다. 하기락은 더위를 피해 책상인 밥상을 들고 한 뼘 남짓한 마당의 철대문 옆의 그늘이나 블록 담벼락 옆에 붙어 서있는 감나무 그늘로 옮겨가 짧은 파자마 차림으로 집필에 몰두하곤 하였다.16) 이러한 하기락의 형편과 모습은 꾀죄죄하거나 초라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꾀죄죄함이나 초라함이란 무엇인가? 부유함과 풍족함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입장에서 바라본 부족함이나 보잘 것 없음이 꾀죄죄함이나 초라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순수이다. 가진 것이 없이도 스스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그러한 삶이 곧 순수한 삶이다. 필자도 처음 하기락의 서재를 방문하였을 때는 여간 실망하지 않았다. 큰 학자의 서재가 이럴 수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에 물든 눈으로 보았을 때의 평가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서재와 거기서 잡념없이 연구에 매진하는 하기락의 학자적 모습에 경건한 마음으로 필자는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화려함의 추구는 허장성세로 흐르기 쉽고, 초라함의 추구는 자칫 위선에서 연유하기가 쉽다. 그러나 초라함을 의식하지 않는 초라함은 곧 순수로 이어지며 그것은 위대하고 감격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로 하여금 경건함 속에 젖어들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만년의 하기락 주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많은 제자들을 길렀지만 자립할 때가 된 제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떠나가고 대학 강단으로 진출한 제자들은 제각각 다시 자기의 제자들을 길러내느라 은사 곁으로 되돌아올 여유가 없었다. 남아있는 제자들이라고는 대개의 경우 아직 자립하지 못하였거나 아니면 아직도 하기락으로부터 얻어낼 것(배울 것)을 다 얻어내지 못한 필자와 같은 늦깎이 제자들이었다. 하기락은 외로웠다. 물론 대학에서 정년퇴임한 채수한 교수, 유명종 교수 그리고 하기락과 더불어 일생을 사회운동에 몸바친 남서순 선생 등이 하기락이 작고할 때까지 가까이서 만나면서 제자로서의 소임을 다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어쨌든 하기락의 주변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그는 외로웠다. 여기서 하기락이 외로웠다는 것은 필자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것을 의미할 뿐, 하기락 자신이 외로워하는 것을 본 기억은 없다.
만년의 하기락의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괴팍하고 독단적이라는 일부의 악평과도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기락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오해라는 것을 필자는 말하고 싶다. 하기락의 괴팍성과 독단성은 그의 순수성을 오판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상에 불과하다. “순수는 하나의 가치에 저촉하는 모든 것을 배척하며”17) “순수는 불순한 사람에 대해서 살아서 보행하는 양심”18)이며 “순수는 목적활동이 아니라 그 자신이 경고이다”19)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기락에 대한 그러한 악평은 더 이상 성립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은 하기락의 순수에서 배척 당한 자신의 불순을 공개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순수하고자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기락은 순수하였기에 무엇이든 숨기기를 싫어했으며, 자기에게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항상 자기의 참뜻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물론 의례적인 세속적 예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독단과 괴팍으로 비추어질 수 있음은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해의 사실’과 ‘오해의 사실’은 같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기락은 똑바로 행하고 책략이 없었으며 표리부동하지 않았으므로 그 행위가 순수하였고, 애매함이 없는 말과 비꼬임이나 은폐함이 없는 말을 함으로써 그 언어가 순수하였고, 똑바로 생각하고 숨은 동기나 저의가 없음으로써 그 사상이 순수하였고, 감정을 솔직히 표현함으로써 정조가 순수하였고, 의지작용에 있어 온 마음을 기울였기에 의지가 순수하였다.20) 하기락의 순수는 순정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진심과 진정으로 이어졌다고 아니할 수 없다.21)
3.
‘자유는 결정이 되어있지 않다는 것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개방되어 있는 것에 의존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한 층 더 높은 결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이 명제는 존재학의 토대 위에서 건설되는 윤리학의 기본적인 화두라 할 수 있다.
자유의 의존처인 한층 더 높은 결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술(1)한 바와 같아 사람에게는 결단하거나 결단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은 자유로운 결단으로만 강제되어 있다.”22) 이 때 자유로운 결단은 주어진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자유로이 선택하는 결단이다. 그런데 선택하는 결단은 자유이지만 이 자유는 자기가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 선택하는 결단을 내린다. 그러니까 자유는 지향되는 것에 제한 받고 그것으로부터 향도되는 것이다. 자유를 제한하고 자유를 인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보다 높은 가치이다. 인간의 삶의 상황은 갈등의 연속이며 그것은 가치와 반가치의 갈등이 아니라23) 가치와 가치의 갈등이다. 이 때 하나의 가치를 선택하면 다른 가치를 포기하여야 한다. 특정 가치의 선택과 다른 가치의 포기가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자유이며 그것은 보다 더 높은 자기결정에 의존하는 것이다. 더 높은 자기 결정은 각자가 가진 각자 나름대로의 가치안이 바라보는 보다 더 높은 가치에 의거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가치갈등 상황에서 종내는 자기가 더 높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가치의 높낮이 판정은 가치개관에서 가능하며 가치개관은 보다 높은 곳에서의 가치조망에서 이루어진다.
하기락은 산을 좋아했다. 전문적인 산악인은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등산지식과 경험 그리고 지구력을 갖추었으며, 산에 대한 사랑은 맹목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산에 대한 맹목적 사랑은 앞(2)에서 말한 그의 순수성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수한 사랑은 맹목성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하기락을 이야기하면서 산을 빼놓는다면 이미 그 이야기는 하기락으로부터 많이 멀어져 버린 것일 수밖에 없다. 하기락은 왜 그처럼 산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는가? 산은 그 자체 시원의 침묵으로서 거기 있음으로서 도시와 세속으로부터 탈출한 인간에게 마음껏 해방공간을 제공하고 천부의 자유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도상에서의 사색과 가장 높은 곳에서의 개관을 허용한다. 힘들여 올라야 한다는 노고를 요구하지만 건강이라는 선물로 그것을 되돌려 준다. 하기락이 산을 좋아한 이유는 해방과 자유 그리고 사색과 개관이라는 산이 주는 선물에서 연유했던 것 같다. 건강은 보너스로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구 인근의 산행을 당일 코스로 나서기를 규칙적으로 하였고, 한 달에 한 두 차례씩은 고향인 안의의 용추계곡과 기백산을 찾거나, 지금 그의 묘소가 있는 거창군 마리면 늘밭을 찾았다. 그리고 일년에 몇 차례씩은 몇 사람이 어울려 며칠씩이나 소요되는 큰 산행을 하였다. 그 어느 산행에서나 하기락은 젊은 사람들이 따라 내지 못할 만큼의 속도로 앞서서 산을 올랐고, 동행한 젊은 후학들은 언제나 기가 죽었다.
필자의 기억에 남는 산행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마등령 등정이다. 1987년 7월 25일 하기락, 이윤수(원로시인), 임종찬(영송여고), 필자 등 네 사람은 동부정류장에서 속초행 첫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그날 오후 우리는 속초 영랑정에서 열린 한국자유시인협회의 문학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원로 시인 구상(1919- )24)이 주제 발표를 했고 그날 밤 우리는 영광호반에 있는 콘도에서 잠을 잤다. 밤에, 멋쟁이 원로시인 이윤수는 중년의 여류 시인들에게 끌려나가 밤을 새웠고 하기락은 T.V를 보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임종찬과 필자는 장기를 두어 번 둔 후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인 7월 26일 아침, 자유시인협회 회원들과 작별한 후 우리는 곧장 마등령 등정에 나섰다. 설악산 입구에서 건강이 약한 임종찬은 망설이다가 결국 산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하기락과 이윤수와 필자 세 사람은 금강굴을 옆으로 하며 본격적인 등산로에 들어섰다. 하기락과 이윤수는 얼마나 빨리 오르는지 그들보다 삼십수년 수하인 필자는 부끄럽게도 허겁지겁 뒤따르느라 혼이 났다. 하기락은 본래 산을 잘 타기로 소문이 나있었던 터이지만 이윤수도 얼마나 빠르던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사실은 이윤수도 합기도 공인 사단의 실력에 매일 아침 앞산 순환도로 조깅으로 단련된 몸이라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두 노인의 산타는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아예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간 임종찬의 현명함이 부러우면서도 얄미웠다. 얼마 뒤 한숨쉬어 가는 자리에서 우리는 우연히 서울에서 온 아가씨 두명과 만나게 되었다. 노학자와 노시인의 멋진 베레모와 은은한 은발머리, 특히 귀밑까지 내려오는 이윤수의 은발의 장발에 아가씨들은 현혹된 것 같았다. 두 아가씨는 학교 동창으로서 대학 졸업 후 한 사람은 외국인 회사에 나머지 한 사람은 모 대사관에 근무하는데 휴가기간을 서로 맞추어 설악산에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금강굴만 구경하려고 했다는데 믿음직한 할아버지인 이윤수의 권유에 따라 우리와 같이 마등령을 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녀들은 서울여성 특유의 명랑함과 애교스러움 그리고 20대 중반의 발랄함으로 곧 하기락과 이윤수와 가까워졌다. 어울려 산을 오르는 가운데 두 아가씨와 두 노인은 어느새 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몸집이 약간 있는 아가씨는 하기락의 파트너로, 날씬했지만 키가 좀 작은아가씨는 이윤수의 파트너로 자연스럽게 굳어지면서 가파른 능선을 오를 때나 작은 바위틈을 건너 뛸 때 두 노인네는 각각의 파트너를 도와주며 챙겼다. 이때부터 필자는 느긋하게 뒤따를 수 있었다. 여성과 보조를 맞추느라 하기락과 이윤수가 이전처럼 빨리 오를 수가 없었고, 또한 필자가 옆에 달라붙어 두 노인의 말벗이 되어야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멀찌감치 뒤따라 오르면서 사이사이에 담배도 피워 가면서 여유를 즐겼다. 가파른 고갯마루를 올라 미끈하게 뻗은 마등령 능선을 밟아 나갈 때 우리는 모두 절경에 매료되고 있었다. 산아래 우뚝 우뚝 솟은 명산의 봉우리들을 내려다 보며 걷는 평평한 마등령 능선엔 가녀린 꽃대 끝에서 애잔하게 핀 산나리 꽃이 자욱했고 꽃잎에 점점이 박혀 있는 검정 반점이 눈물겨웠다. 그 사이로 노철학자와 노시인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여성 두 명이 그들 옆에 짝짝이 붙어 다정하게 걷는 모습은 그대로 선경이었다. 노소동행의 살아있는 한 폭 그림이었다.
우리는 백담사 쪽으로 하산했다. 장마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기인지라 내려오는 길은 군데군데 굴파되어 더욱 험악했고 계곡의 다리가 끊어진 곳도 있었다. 저물기 전에 산아래 닿기 위하여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지만 중간에 비를 만났고 변변치 못한 우의를 뒤집어 쓴 채 더욱 서둘렀다. 배낭이 무거웠던 필자를 안쓰럽게 본 이윤수가 몇 번씩이나 뒤쳐진 필자를 기다려 주었고 끊어진 다리를 건널 땐 도움을 주었다. 어두워 진 후에 우리는 백담사에 도착했고, 대충 저녁을 때운 후 그녀들은 요사채에서 하기락과 이윤수와 필자는 선방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굵고 세찬 빗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잠이 들어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잤다.
다음 날인 7월 28일 아침, 우리는 부슬비를 맞으며 용대리로 하산했고 인제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들어왔으며 서울역에서 밤 10시 30분에 출발하는 통일호 열차를 타고 대구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다음날 새벽 4시였다. 그 후 그녀들과의 연락은 한 번도 없었지만 필자는 지금까지도 그녀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 후에도 하기락과 이윤수를 중심으로 한 산행은 지리산과 가야산, 기백산과 팔공산 등 여러 차례 있었으며 그때마다 잊지 못할 기억들이 만들어지고는 하였다.
4.
‘존재로부터의 부름을 듣는 데서만 인간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M. 하이데거의 이 명제는 다분(多分)히 상징적이다. 물론 하이데거의 문맥에서 존재는 현존재이며 그것은 인간의 실존을 의미한다는 것을 전제했을 때 어떤 형태로든 실존은 실존을 부를 수 있으며 그 때 실존적 자유의 획득이 가능할 것이라는 논리에는 수긍이 간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이 명제에 있어서 존재를 존재일반이라고 한다면 존재일반으로서의 존재 그 자체는 의식과 의사결정의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존재 그 자체는 언제나 침묵한다. 인간이 존재 그 자체를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존재자체는 말없이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아주지 않더라도 존재자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보아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전혀 보지 못하던 존재가 어느 날 문득 우리 앞에 보여지는 예가 허다하지 않은가? 인류지성의 발달사는 존재발견의 발달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존재의 출현이라 하든 존재의 개시라 하든 존재의 부름이라 하든 그것은 존재 자체의 작용이 아니라 실존의 작용이다. 존재의 거처는 내면의 실존세계가 아니라 결국은 외부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존재로부터의 부름’이란 상징적인 개념이며 어떤 점에서는 문학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존재로부터의 부름을 듣는다. 그 청취가능한 범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청취의 방향 또한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어쨌든 인간은 존재의 부름을 듣는다. 자칫 신비주의나 지나친 주관주의로 흐를 염려도 없지 않지만 모든 사람은 존재의 부름을 들으며 산다. 극단적인 예는 신에 접한 무당이 영의 세계를 넘나드는 일이나 창작에 몰두한 예술가의 신열과 대상에의 몰입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의 영역은 계속 발전하고 확장하여 나가는 것인 바, 현 단계의 과학적 지식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 또한 조심스러운 일인 것이다.
하기락이 과연 자유를 획득하였는가 하는 것은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을 걸어갔다는 것은 인정하여야 한다. 그의 삶과 철학의 행로가 이것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기락을 일깨운 존재의 부름이란 무엇인가? 하기락은 존재의 어떤 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격동하는 한국의 20세기를 그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살다 간 최고의 지성이 들은 존재가 부르는 소리는 무엇일까? 최고의 지성이 듣는 소리라고 해서 범인이 듣는 소리와 다를 수는 없다. 최고의 지성이 최고의 청력 소유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많은 사람이 듣는 동일한 소리를 듣더라도 그 의미 이해와 본질 파악이 평범한 대중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존재가 부르는 소리에 대한 가청 범위가 다르다는 것은 이해 가능한 범위와 방향이 다르며 그것을 계기로 하여 어떤 길을 선택하여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기락이 존재의 부름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그의 나이 여덟살 때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덟살 때 봄이었다. 장터에서 때아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서당에서 글을 읽다가 달려가 봤다. 헌병과 보조군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짓밟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 함성이 나면 그 쪽으로 뛰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이 쪽에서 또 함성을 올렸다.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지만, 나도 가슴을 조이며 덩달아 <만세>를 불렀다. 나라 잃은 백성의 아들로 태어난 나의 유년기는 이렇게 지나갔다.25)
하기락의 이 언급은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기미독립운동(삼일운동)에 대한 증언이다. 모르긴 해도 독립만세운동이 안의마을까지 퍼져간 것은 그러니까 그해 3월말이나 4월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기락은 때를 봄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나이로 여덟살이지만 만으로는 일곱 살인 어린 소년이 무슨 사상이나 주의를 가졌을 리가 없음은 당연한 일이고 그래서 하기락 자신도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문도 모른 채 가슴을 조이며 덩달아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이다. 이 때 이미 어린 하기락의 눈에는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과 군대의 총칼 앞에서 맨몸으로 부딪쳐 자주독립을 되찾고자 하는 민중의 함성 소리가 깊이깊이 인각 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계기가 뒷날 하기락으로 하여금 인간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삼고 이를 억압하는 정부 등의 권력조직과 군사조직, 그 밖의 종교적 사회적 구속을 부정하는 사상인 아나키즘으로 빠져들게 한 것으로 보인다.
격동하는 역사의 구비마다 되풀이하여 들려오는 존재의 부름을 하기락은 계속하여 들었을 것이다. 노도와 같은 4. 19의 젊은 함성, 지축을 울리던 5. 16의 탱크소리, 10. 26 심야의 권총소리, 12. 12의 군화소리, 창공을 치솟던 5. 18 광주의 한맺힌 절규, 존재의 소리는 처절하였거나 또는 무자비하였고, 그 때마다 하기락의 아나키즘은 더욱 강화되어 갔을 것이다.
1987년 6월 26일 화요일 오후, 하기락은 금호커피숍에서 재야인사 몇 사람과의 면담을 끝낸 뒤 반월당 네거리에 있는 덕산빌딩 2층의 덕산커피숍으로 옮겨앉았다. 훗날 6월 항쟁으로 불리워지는 대규모 민중시위가 이즈음 연일 계속되고 있었다. 이때 당시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고문으로 있었던 하기락은 때때로 불려나가 대중연설을 하였다. 이 날은 연설이 없었던 것 같았다. 덕산커피숍의 남쪽 통유리 창 옆에 자리 잡은 하기락은 커피가 식어 가는 것도 잊은 채 하염없이 앞산 그리메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반월당 네거리 동서남북 각 방향에서 차도를 가득히 메운 시위 군중이 교차로를 향해 노도처럼 몰려들었다. 전투경찰이 쏘는 최루탄과 시위군중이 앞세운 대형 깃발이 밀고 밀리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 자유와 민주를 되찾기 위한 민중의 함성을 하기락은 가슴으로 듣고 있었다. 이때 하기락과 같이 자리하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인 필자는 아무말도 건네지 못한 채 공방전이 계속되는 반월당 네거리를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밀폐된 통유리창 이었지만 어디로 새어들어 오는지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어느새 커피숍 안을 채웠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떴지만 하기락은 간혹 눈물을 닦아내며 앉아 있었고 필자 또한 그렇게 끝까지 앉아서 존재로부터의 부름을 듣는 하기락의 모습을 목도하였다.
여덟살 소년에서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존재의 부름을 듣고 얻은 하기락의 자유는 무엇인가? 정(正)과 반(反)이 대립·갈등하여 지양될 때 어느 요소가 종합 속에 더 많이 남는가 하는 것은 결국 힘의 원리에 의거하는 것이며 대개의 경우 사회적 주목은 보다 강한 쪽으로 쏠리게 마련이어서 강한 자는 늘 승리자가 된다. “사람의 수는 단결에 의하여 통일되고 지식에 의하여 인도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의미가 있다”26)고 설파함으로써 일찍이 대중이 갖추어야 할 힘의 원리를 강조한 칼 마르크스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며 여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은 가열되던 민중의 힘이 번번이 와해되고 단절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힘은 역사의 구비마다 결집되었지만 지식에 의하여 인도되지 못함으로서 결집된 힘의 의미는 의미 없음 또는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의미로 축소되고 말았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기락의 과제가 설정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지식에 의하여(노동자와 가지지 못한자를 각성시키고; 필자주) 인도하는 일’ 그것이 하기락 필생의 과업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기락이 들은 존재의 부름은 곧 ‘지식에 의하여 인도하는 일’ 그것이라고 보았을 때, 하기락과 하르트만 그리고 하이데거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기락은 하이데거의 명제와 같이 존재의 부름을 들었지만, 거기서 바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고 존재 그 자체의 해명을 통하여 자유를 얻는 길을 찾고자 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서 하기락의 연구분야가 하이데거에서 하르트만으로 바뀌어진 배경이 설명된다. 자유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향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르트만이라는 토대 위에서 자유는 증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겨 가지는 것이며, 시혜 받는 것이 아니라 각성의 결과물로서 되찾는 것이 된다.
해방과 자유의 실현이라는 존재의 부름을 계속하여 들으면서 하기락은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아나키스트로서의 그가 해야 할 일, 지식에 의하여 민중을 각성시키고 인도하는 일을 위하여 그는 철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지식에 의하여 민중을 인도하는 자유를 얻었기에 그는 투쟁의 전면에 서는 운동가가 아니라 원리와 이념을 캐내고 해명하는 사상가의 입장에 섰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게는 철학이 먼저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하기락은 철학자로서 아나키스트였지, 아나키스트로서 철학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5.
‘「인간의 해방」또는 「실존의 자유」, 이것이 나의 철학적 테마요, 또 목표였다’는 하기락의 언명은 철학자로서 아나키스트였던 그의 입장을 극명하게 나타낸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철학과 아나키즘을 따로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굳이 구분하여 본다면, 개인의 절대적 자유가 구현되는 아나키 사회의 실현이 그의 삶의 목표였다면, 그러한 목표달성을 위하여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업이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락의 자기과업으로서의 철학적 업적은 방대한 분량과 넓고 깊은 내용의 연구실적이 이를 입증하고 있으며, 삶의 목표로서의 아나키 사회 건설을 위한 그의 헌신은 민중을 각성시키고자 하는 계몽의 노력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기락이 실천적 사회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 가담에서 시작하여, 1939년 12월 와세다대학 오오구마회관에서 식민지정책 비판과 일경검속 및 옥고, 뒤이어 와세다대학과 동경대학에서 벌인 아나키즘 선전활동, 1945. 9. 29. <자유사회건설자연맹(약칭 自聯, F.S.B.F.)> 결성대회(서울 종로) 참여, 1946. 2. 21 - 2. 22 <경남북 아나키스트대회>개최(부산금강사), 1946. 4. 20 - 4. 23 <전국 아나키스트대회>개최 (경남 안의 용추사), 1952. 10. 3 <독립노농당 경북특위 위원장>취임, 1972. 2 <민주통일당>결성 및 정책위 의장 피선, 1987. 경북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 고문역임 1987. 8. 21 - 8. 22 <한국자주인연맹 제 4차 대표자회의>개최(대구 계명대 강당), 1988. 10. 28 - 10. 31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회의> 개최(서울 세종회관 강당>, 동년 10. 31 <국제평화협회>발기, 1990. 4. 6 <사회주의정당>창당 준비 위원장 역임 (서울 YWCA 강당에서 발기인 대회 거행), 1993. 4. 17 <대구 아나키즘 연구회>출범 등27) 사이사이 공백은 있었지만 일생에 걸쳐 실천적 사회운동에 참여해 왔다.
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로서 가진 하기락의 국제적 명성과 각종 국제대회 참석과 연설 또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1984. 9. 24 - 9. 29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세계아나키스트대회 참석과 영문판 『한국 아나키스트운동 약사』배부, 1989. 6. 22 샌프란시스코 아나키스트대회 참석과 연설(주제: 국가의 실체와 군사력의 해소), 1990. 1. 22 - 1. 28 소비에트 사이언스 아카데미초청 방소강연(주제: 한소관계의 과거와 현재), 1990. 11. 1 - 11. 14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스웨덴 신디칼리스트(노동조합운동)회의 참석과 발표(주제: 정경유착의 실례와 그 구조적 개혁 방법)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각종 연설과 각종 회의 취지문에서 나타나는 하기락의 주장 중 1990. 3. 1 사회주의 정당 결성을 위한 취지문에서 하기락이 남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는 것은 탁견 중의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한은 대재벌과 결탁한 비민주적 정권이 …… 사회를 돌이킬 수 없는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지금 필요한 것은 단호한 정치 경제의 민주화에 있으며 이 상황은 잠시도 수수방관을 불허하는 위험수위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의 민주화는 경제의 민주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28)
이 때 당시 하기락의 이러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로부터 만 7년이 지난 지금(1998. 1) 하기락의 이러한 진단은 IMF한파라는 현실로 무섭게 실증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기락의 실천적 삶에 있어서 중점은 역시 계몽에 주어져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기락은 한국자주인연맹 기관지인 「자유연합」(FAK BULLETIN) 편집자로서 1946. 4. 1자 제1호를 필두로 하여 1989. 5. 1자 제6호까지 제작·배포하였으며, 국제평화협회 기관지 「平協」(INTERNATIONAL PEACE ASSOCIATION)의 편집인으로서 1990. 3. 1자 제1호로부터 1990. 12. 12자 제3호까지 제작·배포하였다. 두 종류의 신문 모두 그 이후 발행분이 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87년에서 1990년에 이르는 사이 발행된 신문의 제작 과정은 필자가 가까이에서 목격하였다. 하기락은 손수 원고를 작성하고 편집하였으며 자비로 출판하여 직접 배포하였다. 제자들이나 수하들이 넣어드리는 용돈은 전액이 신문출판비로 충당되었으며, 노안의 치료를 받아가며 도수 높은 돋보기를 쓰고 간이출판사 썰렁한 사무실에서 한자한자 교정을 하였다. 인쇄가 끝나고 제본이 되어 나오는 신문을 애지중지 작은 묶음으로 나누어 경로우대증으로 타는 시내 버스에 싣고 남산동에서 만촌동 자택까지 운반하였다. 노인의 쇠진한 기력으로 버스정류장에서 집에까지 신문을 옮기는 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기락은 집에 카트(cart)를 준비해 두고 그것으로 정류장에서 집까지 신문을 날랐다. 몇 번은 필자의 승용차로 운반한 적도 있다. 그럴 때도 소방도로에서 짐을 내려 집까지 옮기는 일이 힘이 들어 카트를 이용해야만 했다. 배포는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등산용 배낭에 신문 20-30부를 넣어 짊어지고는 울산공단, 창원공단, 구로공단, 구미공단 등으로 직접 나가 배포하였으며, 신문이 한 호 나오면 이와 같은 배포에 한 두달 이상이 소요되었다. 간혹 외국 아나키스트 동지나, 사회운동가, 젊은 학자들의 원고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했다. 필자도 세 편의 시 원고로써 하기락을 도왔다.29)
요구하는 자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기락은 왜 이와 같이 어려운 일을 자청하여 해내었는가? 여기에 대한 단정적인 답변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단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유를 찾아가는 순수한 하기락의 열정적 의욕이 그의 마지막 삶의 불꽃까지 그렇게 태웠을 것이라는 것이다. 가능한 설명 중의 하나로서 이것은 또 이러한 시각화도 가능하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된 바와 같이 사회운동의 개념규정을 몸으로 부딪치는 실천적 투쟁에 둔다면 하기락은 사회운동가라기 보다 사회사상가에 가깝다. 물론 이 장(5) 앞부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기락에게도 실천적 사회운동의 측면이 없지 않다. 국내외의 각종 아나키스트 대회에 참가하거나 주관하고, 사회운동단체의 행사에 나가서 연설을 한 일들이 그러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운동 그 자체는 자칫 맹목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사회운동에 관성이 붙으면 목표의식을 상실할 수 있고, 과정보다 결과에 집착하게 될 수가 있다. 그러나 앞(2)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순수한 이상주의적 성향을 가진 하기락은 사회운동의 근원적 원리를 연구하고, 투쟁의 이념을 제시하는 일, 한마디로 하여 계몽적 역할이 그에게는 더욱 어울리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사회사상가로서이든 사회운동가로서이든 하기락이 보여준 정열과 헌신과 외로운 투쟁은 늘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던 것 같다. 실제로 만년의 하기락이 사정당국의 취조나 박해를 표면적으로 받은 적은 없다. 어쩌면 이것은 대정권투쟁의 일선에 몸으로 부딪치며 나서는 지도자들과 민중들의 저항운동을 봉쇄하기에 급급했던 사정당국이 크게 세력화 되지 않은 아나키스트연맹을 외롭게 이끌고 가는 하기락까지 단속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으며, 아니면 북한은 물론 공산 사회주의 정치 체제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비판하는 노선에 서 있는 하기락을 검거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도 아니면 새로운 희생양을 내어 영웅으로 만들어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염려 때문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1987년을 전후하여 하기락의 주변인들은 끊임없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음식점이나 찻집에 앉을 때에는 필자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주변을 살펴보곤 하는 버릇이 생겨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만년의 하기락이 사정당국의 리스트에 올라있지 않았던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기락과 같이 한국 현대철학의 제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가 학술원 회원이 되지 못하였으며 대통령 훈장이나 포장은 고사하고 기타의 상도 상같은 상을 수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하기락이 그러한 것에 연연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기락의 학문적 성과나 사회운동의 실적을 긍정적으로만 보고 싶어하지는 않을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들을 문제 삼으려고 할 때는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만큼 열심히 살았고 그만큼 뜨겁게 살았으며 그만큼 순수하게 살았던 사람이 하기락 외에 또 얼마나 더 있겠는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메스나 면도칼은 날카롭다. 그리고 수술용 메스를 갖다대는 일은 일정한 수련 및 전문과정을 거치 외과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면도칼이나 메스로 칠척장검을 동강내려 한다면 그것은 넌센스이며 무모함이다. 하기락의 철학이론이나 아나키즘 이론에 대한 갑론을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 아마 저승에서 고인도 그것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철학의 발전이 있을 것이고 사회의 발전이 있을 것이며 자유를 찾아가는 길이 넓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계 하고자 하는 것은 섣부른 인격적 폄하나 모독이다.
하기락은 갔다. 그의 철학과 삶은 그와 더불어 사라지고 마는가? 아나키즘은 시대적으로 퇴조하고 있으며 철학 또한 경제 제일주의와 과학의 발전 논리에 밀려 사양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철학과 아나키즘이 생산해낸 문제적출과 그 해법이 지난 시대의 유물로 영원히 화석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자와 아나키스트는 언제나 현시대적 문제 위치에서 출발하며 거기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아나키스트의 현재와 미래는 다음 인용문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노력은 기껏해야 사색의 역사적 연쇄 가운데서 한 항(項)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진행의 다음 일보에 의하여 곧 추월될 것을 알고, 의식적으로 자기 시대의 문제 위치에서 출발하여 그 시대를 위하여 연구하는 사람 ???? 그는 바로 후속 세대의 광장에서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창조해낼 전망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30)
영원한 자유인 하기락은 가고 하기락이 그처럼 간구(干求)했던 「인간의 해방」과 「실존의 자유」는 이제 후세대의 과제로 남겨졌다. 20세기가 끝나 가는 지금 우리가 사는 한국이라는 벌판에는 아직 바람이 잠들지 못하고 있다. 필자의 졸시 한 편으로 이 글을 맺는다.
벌판에는 바람이31) / 김주완
벌판에는 바람이 불어요.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뜬 구름이 몰려다니고 있어요.
소리의 물줄기가 어지러이 흐르고
몸과 몸을 부딪혀 맹목의 수목들이
사생결단을 하고 있어요.
바람의 칼날에 넋은 넘어지고 있어요.
갈대밭에서 나온 미풍이 숨죽여 자진하고
부서지는 흙들의 노래가
산을 옮겨가고 있어요.
쓰러지는 풀들은 쓰러지는 슬기로
바람을 피하고
온전한 뿌리를 지키고 있어요.
벌판에는 바람이 불어요.
바람의 방향을 따라서
번뜩이는 눈물이 공중을 떠 다녀요.
자꾸 서두르고 있어요.
바다인 듯한 바다가 정작은
바다가 아니어요.
---------------------------------------------------------------------------
* 필자는 하기락 선생의 門下에 內弟子로 거둠을 받아 선생의 만년 15년간을 가까이 모시고 공부한 사람으로서 선생에 대한 존경의 念은 결코 남에게 뒤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서술의 중립성을 견지하기 위하여 본문에서는 하기락 선생에 대한 ‘선생’ 혹은 ‘선생님’이라는 존칭은 생략하기로 한다.
1) 필자가 하기락 선생과 맺은 인연은 하기락 선생의 부자간으로 이어진다. 하기락 선생은 필자의 대학원(계명대) 은사이시고, 하기락 선생의 장남 하영석 선생은 필자의 학부(경북대) 은사이시다.
1) 하기락 저, 『니이체論』, 형설출판사, 1971, 9쪽.
2)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하기락 역, 『존재학원론』, 형성출판사, 1983, 37쪽.
3) Nicolai Hartman, Ästhetik, (1953), 2Aufl. Berlin 1966, S.368.)
4)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하기락 역, 『철학입문』, 계명대출판부, 1984, 189-190쪽.
5) 하기락 저, 『하기락 논문집』 제4권, 자유인연맹, 1987, 130쪽.
니콜라이 하르트만 연구가인 하기락의 철학을 살펴보기 위한 길잡이 말로서 어떻게 하여 마르틴 하이데거가 등장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이유는 두 가지로 제시된다. 하나는 하기락이 하이데거 연구에서 출발해서 하르트만으로 연구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의 와세다 대학 졸업논문은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공간성과 시간성의 문제」이고 박사학위논문은 「N. 하르트만에 있어서의 범주체계의 문제」였다. 이에 대한 하기락 자신의 언급은 “내면의 실존에서 외부세계의 존재에로 관심의 방향을 돌린 셈”(「나의 수업시대」, 『하기락 논문집』 제4권, 자주인 연맹, 1987, 6쪽.)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M. 하이데거와 N. 하르트만의 학문적 관계성이다. 두 사람은 다 같이 “1970년대 초반에 마르부르그 대학의 철학과에서 존재론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동료간”(Robert Heiß, "Nicolai Hartmann", Nicolai Hartmann Der Denker und sein Werk, Fünfzehn Abbandlungen mit einer Bibliographie herausgegeben von Heinz Heimsoeth und Robert Heiß, Gö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52, S.18.)이었으며, 하이데거는 하르트만의 초청으로 마르부르그대학의 사강사(私講師)로 초청되어 저녁마다 만나 진지한 토론을 나눈 사이인 바, 로츠는 두 사람을 비교하여, 하르트만은 밤에 주로 연구한 예리한 분석가인데 반해 하이데거는 주로 낮시간에 연구를 한 명상적 종합가로 특징화하고 하르트만의 철학을 ‘새로운 비판적 존재론’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을 ‘기본존재론’으로 규정하고 있다(J. B. Lotz, "Zweiwege der ontologie" -Nicolai Hartmann und Martin Heidegger- Nicolai Hartmann 1882-1982, herausgegeben von Alois Joh. Buch, Bonn 1982, S.208. 참조) 두 사람은 함께 새로운 존재론의 재건을 시도한 자로서 하이데거가 존재의 의미문제에 천착했다면 하르트만은 자체존재의 해명에 주력한 자이다. (이에 대해서는 하기락저, 『하르트만 연구』, 형설출판사, 1971, 33-54쪽 및 Josef Stallmach, Ansichsein und Seinsverstehen, Bonn 1987을 참조할 것.) 하르트만과 하이데거의 이와 같은 학문적 관계성과 하기락이 하이데거 연구에서 하르트만연구로 방향을 바꾼 것을 감안할 때 하기락을 해명하기 위하여 하르트만은 통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이데거를 통하는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6) 하기락 저, 같은 논문집, 6쪽.
7) 이 논문집은 1982년 Bonn에서 발행된 것으로서 니콜라이 하르트만 철학의 각 부분영역을 주제로 한 Josef Stallmach(Mainz)/ Lewis White Beck(Rochester, USA)/ Jasper Blystone(Los Angeles, USA) Otto Friedrich Bollnow(Tübingen)/ Gerda von Bredow(Münster)/ Hans-Georg Gadamer(Heidelberg)/ Michael Landmann(Haifa, Israel)/ Johannes B. Lotz(München, Rom)/ Ricardo Maliandi(Buenos Aires, Argentinien)/ Hermann Wein(München)등 23명이 쓴 23편의 논문이 실려있다.
8) 작고 일주일 전인 1997년 1월 27일 대전시 유성구 경회루 식당에서 열린 대한철학회 97 국제학술대회 발표자 예비모임에 본 대회 기조연설을 맡았던 하기락 선생은 회의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허겁지겁 시간에 대어 들어서는 우리에게 노안의 환한 미소를 보내 주셨다. 중요안건 처리가 끝날 때쯤 하기락 선생은 서울행 열차표를 예매해 둔 사정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이윤복(경북대)과 필자가 큰 길 까지 모시고 나와 사양하시는 선생님의 속주머니에 약간의 용돈을 넣어 드리면서 택시를 태워드린 것이 필자가 뵌 하기락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1997년 2월 3일 10:00시경 선생은 자택에서 출타준비를 하던 중 쓰러져 타계하셨다. 그 후 대한철학회 97 국제학술대회(주제: 통일시대의 철학) 기조연설은 대한철학회 회장 김위성(부산대) 교수가 대신 맡아서 같은 해 5월 31일에서 6월 1일까지 부산대학교 본부동에서 치루어졌다.
9) 하기락 선생은 속눈썹이 자라나 수정체를 찌르는 고통 때문에 일주일에 한차례 이상 병원에 나가 속눈썹을 뽑아내는 치료를 받아야 했다. 성형외과에서 이에 대한 근본치료로서 쌍꺼풀 수술을 시술한 적이 있었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하였으며, 운명할 때까지 이 고통과 번거로움은 계속되었다.
10) 김주완 시집, 『엘리베이터안의 20초』, 도서출판 한줄기, 1994, 83쪽./ 하기락 편집, 「자유연합」제6호, 한국자주인연맹, 1989. 5. 1, 8쪽.
11) 現象과 成層理論은 N. 하르트만 미학의 중심축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주완 저, 『미와 예술』, 형설출판사 1994를 참조할 것.
12) 하기락, 「나의 수업시대」, 『하기락 논문집』 제4권, 자주인연맹 1987, 1쪽 참조.
13) 하기락, 같은 글, 같은 책, 2쪽 참조.
14) 하기락, 같은 글, 같은 책, 2쪽 참조.
15) 하기락 선생의 노후 생활을 보다 안락하고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자제분들이 다른 거처를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하기락 선생 당신께서는 이것이 가장 편한 생활이라고 하면서 극구 거부하신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특히 장남인 하영석 선생의 부인께서는 하기락 선생의 맏며느리로서 시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효심이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하기락 역, 『윤리학』, 형설출판사, 1983, 271쪽 참조.
17)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하기락 역, 같은 책, 273쪽.
18) 니콜라이 하르트만저, 하기락역, 같은 책, 같은 쪽.
19)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하기락 역, 같은 책, 274쪽 참조.
20) 생전의 하기락 선생이 필자의 집을 방문한 것은 세차례였다. 마지막 방문인 1996년 11월 16일은 다음날로 예정된 필자의 큰 딸아이 결혼식 축의금을 전달하러 오신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방문에 필자는 무척 놀랐는데, 이 때 하기락 선생의 사모님이 경북대 병원에서 심장수술을 받고 입원 가료중이었으며 그 병구완에 매달려 식장 참석이 불가능하므로 미리 들렸다는 선생의 말씀에 필자는 몸둘 바를 몰랐다. 다음 날의 혼사 준비로 집안이 어수선하여 차대접도 변변히 못해 올렸는데, 하기락 선생은 필자의 거실에 놓여있는 목검과 죽도 그리고 진검을 둘러 보시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김교수는 이제 문무를 겸하려고 하는구먼”이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지금도 그 말씀이 귀에 선하다. 두고 가신 축의금 봉투를 뒤에 열어보니 그 안에는 일금 10만원이 들어 있었다. 이 당시 통상적인 축의금 기준은 3만원이나 5만원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하기락 선생의 형편에 거금이라 아니할 수 없는 축의금을 쾌척하신 것은 필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의 표현으로 보여지지만 필자로서는 엄청난 부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돌이켜 보았을 때 하기락 선생의 그 날 방문은 작고 70여일 전이었기에 어쩌면 선생이 방문한 제자 집으로서는 필자의 집이 마지막이 된 것 같아 이는 필자에게 있어 더할 수 없는 영광이면서, 또한 축의금의 다과를 떠나 하기락 선생이 주신 봉투는 참으로 맑은 순정과 진심의 표징으로서 필자에게 남긴 마지막 정분이 아닌가 싶어 더욱 고개가 숙여진다.
21)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하기락 역, 『존재학원론』, 형설출판사, 1983년, 37쪽.
22) 가치와 반가치의 갈등은 근원적으로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치를 취하고 반가치를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갈등이란 어느 것도 버리기 힘들 때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갈등상황은 언제나 가치와 가치와의 갈등인 것이다.
23) 시인 구상 선생은 문단에 있어서 필자의 은사이시다. 필자는 구상 선생의 추천으로 1984년 『현대시학』을 통하여 등단하였으며 그 후 지금까지 선생을 사사하고 있다. 구상 선생과 하기락 선생은 1987년 이때 당시 이미 35년 지기(知己)였다. 1953년 구상 선생이 영남일보사 주필로 취임하고 동년 하기락 선생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주임교수로 부임하면서 두 분의 교분이 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당시 하기락 선생은 아나키스트 단체가 중심이 되어 설립(1946. 7. 7)된 독립노농당 경북특위 위원장으로 활약하고 있었고, 구상 선생은 이승만 정권의 전횡에 대한 저항으로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을 펴내었다. 이후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가 6년 후인 1959년에 이르러 구상 선생은 옥고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대구지역에서 같이 활동하면서 다 같이 비판적 입장에 섰던 두분이 가까워졌던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구상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당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고 아나키즘에 반드시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기락 선생이 주관하는 아나키즘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하였으며, 하기락 선생의 고향인 용추계곡에서 같이 어울려 술추렴도 하였다고 한다. 언젠가 대구 동인호텔 부근에서 두 분이 함께 하신 술좌석에 필자가 배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두 분은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무척 재미있어 하셨다. 구상 선생은 하기락 선생을 허유 형이라 호칭하고 하기락 선생은 구상 선생의 호인 운성(暈城, 구상 선생의 호는 잘 불려지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본명이 常浚이며 常은 필명인데, 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이라 불렀으며, 말씨는 상호간에 편한 높임말을 썼다. 두분의 이야기 내용은 이러하다. 삼십수년 전 경남 안의 용추계곡에서 여럿이 어울린 술자리가 벌어졌는데 한창 흥이 고조되었을 때 남자끼리만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고 하여 같이 어울릴 여성을 동원해 오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이 일을 해 낼 것인가 였으며 바로 여기에 선발된 자가 좌중에서 외모가 가장 준수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하기락 선생과 구상 선생이었던 모양이다. 두 분은 무거운 임무를 띄고 산 아래로 내려갔는데, 구상 선생은 소득없이 돌아왔고 잠시후 하기락 선생은 한복을 시원하게 차려입은 여성을 대동하고 점잖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성은 그날 그 자리에 참석 예정으로 있었던 어느 분이었다고 했던 것 같다. 아무튼 40대 전반과 30대 후반의 하기락 선생과 구상 선생의 호기는 대단했던 것 같다.
* 자유시인협회의 심포지엄이 있은 1997년 7월 25일, 이 날로부터 한 달로 안되는 같은 해 8월 21일 대구 계명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한국자주인 연맹(Federation of Anarchists in Korea) 제 4차 대표자 회의에서 구상 선생은 초청강연을 하게 되는데, 아마 속초에서의 이 만남에서 하기락 선생이 초청하고 구상 선생이 수락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24) 하기락, 「나의 수업시대」, 『하기락 논문집』제 4권, 자주인연맹, 1987, 3쪽.
25) 이 명제는 칼·마르크스가 기초한 국제노동자협회(l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창립(1864. 9. 28. 런던의 센트·마틴즈·홀에서 공개집회로 개최) 선언문에서 인용한 것임/ 하기락 편집, 『平協』 Vol.1 No.1, 국제평화협회, 1990. 3. 1. 6쪽.
26)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도서출판 신명, 1993, 261-409쪽. 참조.
27) 하기락 편집, 『平協』 Vol. 1 No. 1, 국제평화협회, 1990. 3. 1, 7쪽.
28) 「자유연합」제6호(89. 5. 1)에 재미화가인 강신석*(전 동아대 미술과장)의 작품 「山火」에 곁들여 4. 19 기념시로서 「불의 깃발 오르면」이라는 제목의 졸시를 김진이란 필명으로 실었으며, 「平協」제3호(90. 3. 1)에 역시 고 강신석 화백(이 때 이미 강신석 화백은 작고한 뒤임)의 유작 「지리산」에 곁들어 「벌판에는 바람이」라는 제목의 졸시를 필자 본명으로 실었고 같은 신문 다른 면(7면)에 앞(1)에서 소개한 졸시 「겨울장마」를 김진이란 필명으로 실었다.
* 강신석(姜信碩) 화백은 하기락 선생의 죽마고우로 미국에서 살았으며,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회의(88. 서울대회)> 경비 염출을 위해, 평생의 수작들을 내어놓고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생졸연대를 필자가 조사하지는 못하였지만 이 전시회가 끝나고 1-2년 후에 이국땅 미국에서 하기락 선생 보다 7년 정도 먼저 타계한 것으로 알고 있다.
29) 니콜라이 하르트만 원저, 하기락 편술, 『자연철학』, 도서출판 신명, 1993, 42쪽.
30) 김주완 시집, 『엘리베이터안의 20초』, 도서출판 한줄기, 1994, 45쪽./ 하기락 편집, 「平協」 Vol.1 No.1, 국제평화협회, 1990. 3. 1, 8쪽.
'학술 논문 > 문학 논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문] 니콜라이 하르트만 철학에서 정신과 언어 / 김주완 (0) | 2004.05.31 |
---|---|
[논문] 박곤걸 시의 존재론 / 김주완 (0) | 2002.10.01 |
[논문] 문인수의 시 「간통」에 대한 미학적·가치론적 고찰 / 김주완 (0) | 2001.01.02 |
[논문] 시와 언어 : M.하이데거와 N.하르트만의 존재론적 해명 / 김주완 (0) | 2001.01.01 |
[詩論] 시, 객체화한 정신 / 김주완 (0) | 2001.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