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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박곤걸 시의 존재론 / 김주완

김주완 2002. 10. 1. 14:35

 

이 논문은 철학논총, 제30집, 새한철학회, 2002.10.01. 223~247쪽에 수록되었음

 

 

 

박곤걸 시의 존재론

― 박곤걸 제6시집『화천리 무지개』를 중심으로―

 


                                                                                                     김 주 완(경산대)



 

[한글요약] 


이 소론은 시인 박곤걸의 작품세계를 존재론적으로 해명함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 있어서 텍스트는 박곤걸의 제6시집『화천리 무지개』로 하고, 우리의 이해지평에 차용되는 입장은 N. 하르트만과 M.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한다. 텍스트를 이와 같이 취하는 이유는 발아에서 출시에 이르기까지 무려 14년이 걸린 연작시집『화천리 무지개』야말로 박곤걸 시 세계의 역작이자 결정판이 될 가능성을 그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화천리 무지개』에 나타나는 박곤걸의 시적 사고는 이원론적이다. 현실 속에서 파괴되고 피폐해 가는 화천리와 그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완전하면서도 순수한 본래적 화천리라는 두 개의 화천리가 견결한 시의 두 축을 이루고 있다. 화천리는 꽃이 냇물로 흐르는 동네이다. 그것이 실재하는 공간이든, 시인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비실재적 공간이든 간에 시인에게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인의 시적 삶은 늘 화천리를 보면서 화천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詩作은 저 땅과 이 땅이 하나로 만나게 하는 특정구역이다. 시인의 삶은 특구 속에서의 삶이며, 그가 생산해낸 작품을 통하여 일상인의 삶을 특구 속으로 이끌어들이는 삶이다. 그리하여 화천리 지향의 시정신으로 압축할 수 있는 박곤걸의 시집 『화천리 무지개』는 박곤걸의 것인 동시에 만인의 것이 된다. 그러나 저 땅에 눈 떠 있으며, 저 땅에 대한 꿈과 소망과 목표를 가진 만인만이 더운 피로 생동하며 살아있는 만인이 될 수 있다.


주제분야 : 존재론, 예술철학, 시학

주 제 어 : 화천리, 시작詩作, 시정신, 시적 사고, 시적 삶




1.


이 소론은 시인 박곤걸1)과의 만남을 목적으로 한다. 시인과의 만남은 곧 그의 시와의 만남이며 그만의 고유한 시정신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만남은 대화를 전제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소론에서 시인 박곤걸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가 쓴(말한) 시를 우리가 읽는다는 것(듣는다는 것)이 곧 대화일 것이며 그의 시정신을 우리가 읽어내는 것 또한 대화이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박곤걸과의 대화는 곧 그의 시와의 대화이며 그의 시정신과의 대화에 다름 아니다. 이제 우리의 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박곤걸이 말하는 것, 즉 그의 시의 본질에 우리는 도달하게 될 것이다.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보듯이 시 읽기는 근원적 대화이며, 훌륭한 대화에 있어서는 말한 내용과 들은 내용은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듣는 것’ ―이것은 전달하는 것과 듣는 것이 대화의 구성요소를 이룬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가? 그러면 대화란 이 양자의 합성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지는가?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이 근원적인 대화를 전개하고, 그렇게 전개하는 것 바로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근원적 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 대화는 [시인을 통하여] 보내어진 것[즉 존재]이 말없는 가운데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며, 인사의 소리 없는 소리다. 그리고 이 소리 없는 소리에서 소리를 통하여 지시되게 되어 있는 일자一者가 미리 앞질러서 심정 가운데 지니어야만 하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요구 가운데 서 있다는 것이 곧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언표의 본질근거를 제공한다. 이러한 진정한 언표가 근원적으로 듣는 것이다.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들은 것을 근원적으로 되받아서 말하는 것(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들은 것에 대하여 응답으로서 말하는 것)과 같다. 다만 신체의 기관인 입과 귀가 외관상 서로 다르고 신체의 다른 부분에 배치되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을 두 개의 능력으로 분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본래는 상호연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양자의 근원적 일치를 간과하는 것이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은 본질을 같이 하며 근원적 대화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대화에 있어서는 말한 내용과 들은 내용은 같은 것이다.2)


여기에 있어서 텍스트는 박곤걸의 제6시집『화천리 무지개』3)로 하고4), 우리의 이해지평에 차용되는 입장은 N. 하르트만과 M. 하이데거의 존재론으로 한다. 물론 필요에 따라서는 또 다른 시학자의 이론이나 명제가 인용될 수 있다. 이러한 우리의 작업은 바로 박곤걸의 시정신을 존재론적으로 탐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박곤걸의 시정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시정신詩精神이 없이는 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5)이기 때문이다.6) “오직 필요한 일은 냉정하게 사유하면서 그의 시가 언표한 것 속에서 언표되지 않은 것을 경험하는 것이리라.”7)


2.


박곤걸의 제6시집『화천리 무지개』는 2001년 말에 상재된 연작시집이다. 이 시집에 실린 77편의 연작시는 대부분이 1994년 후반부터 1996년 후반까지 집중적으로 쓰여진 시들이다. 물론 이보다 훨씬 앞선 1988년 말에 발표된 한 편(「화천리․25」)이 있고, 1992년과 1994년 전반에 발표된 두 편(「화천리․26」, 「화천리․5」)이 있으며, 1997년 이후에 쓰여진 시도 십 수 편에 달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연작시집 『화천리 무지개』는 1988년에 발아되었고 그 후 5년여에 걸친 잉태기를 거친 후, 1994년 말부터 2년여에 걸쳐 집중적으로 생산되었으며, 다시 그 다음 2~3년에 걸쳐 마무리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발아에서 출시에 이르기까지 무려 14년이 걸린 『화천리 무지개』는 그러므로 박곤걸 시 세계의 역작이자 결정판이 될 가능성을 그 속에 가지고 있다. 꼼꼼히 읽어내는 독자를 만나기만 한다면 말이다.


3.


화천리花川里는 어디 있는가? 화천리는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가? 지리적으로 화천리의 행정주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이다. “광명리光明里 지나서 화천리는 시작하고 / 화천리가 끝나면서 학동리鶴洞里다.”(「화천리․1」) ‘광명리’는 ‘햇빛 밝은 마을’이며 ‘학동리’는 ‘학이 사는 마을’이다. 화천리는 햇빛 밝은 마을을 지나서 있고 학이 사는 마을에 잇대어 있다. 박곤걸의 연작시 「화천리 무지개」77편의 도입부인 「화천리․1」에서 시인 자신이 밝히는 화천리의 위치가 그러하다.


화천리는 어떤 곳인가? 시인은 화천기花川記라는 부제를 부친 「화천리․75」에서 화천의 지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신라의 옛땅에

선도산仙挑山, 벽도산碧桃山이 있어

천도화天桃花가 피면 꽃 가운데 신선이라

꽃빛이 물에 번져 도화수桃花水가 흐르고


벽도산碧桃山, 화도산花桃山, 매사산梅査山이라는

세 봉우리를 향하여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접령산蝶嶺山이라는 한 봉우리가

나르는 나비 되어 꽃을 찾는 형상이니

조물의 솜씨로 산이 둘러싸여

흐르는 물에 지는 꽃잎이 띄워지고

꽃으로 이름한 냇물이 흘러 화천花川이라


                ―「화천리․75」일부


화천리는 지형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천년 사직의 신라의 옛땅이며, 거기에 신선이 노니는 선도산이 있고 천도화가 핀다. 벽도산, 화도산, 매사산 세 봉우리는 푸른 복숭아, 꽃복숭아, 매화꽃의 형상으로 앉아있고 나비의 형상을 한 접령산 봉우리가 세 개의 꽃봉우리를 향하여 날아든다. 꽃밭 속으로 나비가 날아드는 산세이다. 그 아래로 꽃빛이 물에 번져 흐르면 도화수가 되고, 지는 꽃잎이 흐르는 물에 띄워지면 화천이 된다. 그대로 한 폭의 동양화이자 한 편의 전설이며 무릉도원이다. 햇빛 밝은 마을과 학이 사는 마을 사이의 마을인 화천리가 그러하다.


“뒷들에서 윗동, 일 번지에서 끝 번지까지 / 마을마다 복사꽃 피고, 집집마다 살구꽃 피(며) // 철 따라 난초 꽃 이어서 싸리 꽃 피(는) /……// 산도라지 꽃, 산나리 꽃이 지천으로 피어 / 꽃이 온산을 덮(는)”(「화천리․1」) 마을이 화천리이다. 그 화천리에는 마을 가운데로나 앞으로 혹은 옆으로 개울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 개울이 바로 화천이다. 화천리는 글자 그대로 ‘꽃내(「화천리․74」)가 흐르는 마을’, 그러니까 ‘꽃내골’ 또는 ‘꽃내마을’(「화천리․46)이며 줄여서 ‘꽃골’(「화천리․7」)이라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꽃골 마을’(「화천리․23/「화천리․6)에 흐르는 ‘은하 같은 냇물’(「화천리․23)이 꽃내이다. 그러니까 ‘화천’이 우리말로는 ‘꽃내’가 된다. ‘꽃내’는 ‘꽃이 둥둥 떠가는 개천’이거나 ‘냇가로 꽃이 자욱하게 피는 개천’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꽃내가 흐르는 골짜기의 한 쪽, 또는 양쪽으로 마을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며, 바로 그 마을이 꽃골이자 꽃내마을이며 화천리이다.


이러한 자연상태로서의 화천리라면 그것은 한 폭의 산수화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람이 살아 왔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생생한 숨결로 이어지고 있으며, 지금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꽃골은 자연상태만으로서의 꽃골이 아니라 마음이 꽃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꽃내마을이다. 시인이 간절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리라.


4.


화천리의 지리적 위치는 행정주소로 밝혀지지만, 시적 위치는 지리적․실존적 위치로서 다해지는 것이 아니다. 시적 화천리는 실존적 화천리를 전제로 할 수 있지만, 그 관계가 필연인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 개천으로 꽃이 둥둥 떠가거나 그렇지 않거나 혹은 냇가에 꽃나무가 줄지어 서 있거나 아니거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시인의 가슴속에 그러한 화천리가 소재하고 있으며 시인이 그러한 화천리를 노래하고 있으면 그것으로서 시적 화천리는 족하게 된다.


실존적 화천리는 실존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역사성을 가지며 시간의 진전에 따라 자꾸만 변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적 화천리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영원하다. 그것은 역사성을 넘어서 있고 변화를 넘어서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적 화천리가 오히려 실존적 화천리의 전제가 되고 범주가 된다. 실존적 화천리가 시적 화천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적 화천리가 실존적 화천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8). 그러므로 시적 화천리는 실존적 화천리의 존재근원이며 범주적 범주이다.


본래의 지리적․실존적 화천리는 이제 사라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토지의 순결을 배가르듯 절개하고 / 녹색지도에 무차별 덧칠한 건설도면은 / 산수山水를 제거 수술하고 봉합하여 / 전철역이 들어앉고 신도시가 들어선다.”(「화천리․77」) 개발논리에 밀려 화천리는 이제 옛날의 그 본래적 모습을 더 이상 지니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박곤걸이 그의 시집 『화천리 무지개』로서 화천리를 노래함으로써 화천리의 존재는 영원화 된다. 시인의 가슴속으로 화천리가 영원화 될 뿐만 아니라, 시집 『화천리 무지개』를 접하는 독자의 가슴속으로도 화천리가 영원화되는 것이다. “그냥 두면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미 까마득한 망각의 늪에 묻혀 버렸을 그것들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으써 근본 문제로서 우리 앞에 현현시켜 제출하고 설명과 해석을 독자에게 위임하는 하나의 세계를 확립하여 지속하게 한다. 이것은 곧 새로운 세계가 건설됨을 의미한다.”9)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위대함과 시작의 영험성을 확인하게 된다. 애당초 화천리의 실존은 변해가는 가운데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화천리의 역사적 본질이다. 역사의 순간순간마다 어제의 화천리는 오늘의 화천리가 아니었고, 오늘의 화천리는 내일의 화천리가 아니었다. 김유신과 관창이 거쳐갔고 근대에 와서는 일제 강점기를 겪어내었으며 육사(이원록,이활)와 고암(박곤복)과 심산(김창숙)이 거쳐갔다. 그들이 거쳐간 화천리는 동일한 화천리가 아니라 자연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조금씩 달라진 서로 다른 화천리였다. 화천리가 변하지 않고 동일한 화천리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시작이라는 작업의 영험성과 그러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시인의 위대성에서 연유한다. 근원적으로 화천리가 본래의 화천리로서 처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시작詩作에 의해서이다. “시는 언어에 의한 존재의 건설이다”10)라는 하이데거의 명제가 이에 해당한다. 이와는 또 다른 맥락이지만, “한 인간에게 스쳐지나가는 것은 당연히 그 스스로를 표현되어지게 하려 한다”11)는 앙리 슈하미의 언급도 이에 연결된다.


5.


화천리는 꽃의 천지이다. 곳곳이 꽃이고 사람마다 꽃이다. 『화천리 무지개』에 등장하는 꽃의 종류는 한국의 산과 들에서 피는 거의 모든 꽃들이다. 난초꽃, 산난초꽃, 도라지꽃, 산도라지꽃, 개나리꽃, 산나리꽃, 패랭이꽃, 오랑캐꽃, 민들레꽃, 개망초꽃, 족도리꽃, 베게꽃, 초롱꽃, 달맞이꽃, 접시꽃, 무궁화, 찔레꽃, 엉겅퀴꽃, 칡꽃, 다래꽃, 할미꽃, 보리꽃, 해바라기꽃, 박꽃, 연꽃, 수박꽃, 복숭아꽃, 진달래꽃, 싸리꽃 등 계절마다의 꽃이 총 망라되고 있다. 이들 중에서 화천리의 주종을 이루는 꽃은 역시 도화(복숭아꽃)와 천도화이다. 이러한 꽃의 노래는 「화천리․63」에서 절정을 이룬다.


화전花煎놀이 화수회花樹會때 산가야창山歌野唱하고

도화 꽃같이 피어 고운 얼굴들이

뉘 눈에 들었다고 꺾이랴.

일가 승상의 따슨 정이

온 산에 진달래꽃, 온 들에 개망초꽃,

꽃은 붉은 속살, 흰 속살 헤시고

연모의 정이 숯불로 이글거리며

백의 빛깔을 하고 천의 얼굴로 피어

고와서 꺾이지 못할 바엔

조석 없이 일일홍一日紅으로 피고 진다.


뒷들에 화천댁花川宅은 도라지 꽃

뒷골에 화촌댁花村宅은 엉겅퀴 꽃

쑥골에 화곡댁花谷宅은 패랭이 꽃

등밑 새각단 화실댁花室宅은 칡 꽃

적지미기 화국댁花國宅은 다래 꽃

잔두미기 화지댁花池宅은 할미 꽃

원산태 화계댁花溪宅은 달맞이 꽃

외실에 화산댁花山宅은 족두리 꽃

수박골에 화전댁花田宅은 제비 꽃

새밭마을 화봉댁花峰宅은 초롱 꽃

새터에 화동댁花洞宅은 베개 꽃

태봉에 화방댁花芳宅은 달개비 꽃

울구불에 화강댁花江宅은 싸리 꽃

윗동에 화성댁花城宅은 민들레 꽃


              ―「화천리․63」일부12)


이 시는 사는 곳과 택호와 꽃이름을 유비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들의 연계 의미와 상징성은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꽃이 되고 꽃이 사람이 되는 경지라는 것은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붉은 속살, 흰 속살 헤시고’ 백의 빛깔, 천의 얼굴로 피어난 꽃들은 고와서 꺾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끊임없이 피고 진다. 그러한 가운데 꽃들은 자기의 빛깔을 만들고 자기의 이름을 얻으며 그 이름으로 불린다. 뒷들 화천댁과 연결된 도라지꽃에서 윗동 화성댁과 연결되는 민들레꽃까지의 이름이 바로 그러하다. 꽃이 된 사람들이 꽃잎을 붙이어 지진 부꾸미를 먹으며 노는 놀이를 한다. 그것이 바로 화전花煎놀이이다. 집성촌의 일가끼리 모여 산과 들의 노래를 부르며 논다. 그 축복과 감격이 땅에서 하늘까지 미친다.


꽃으로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된 화천리에는 물새와 산새가 우는 소리로 가득하다. 일반적으로 울음의 색조 중에서 밝음과 어둠, 그리고 그 가운데의 고요를 모두 갖춘 것이 새의 울음소리이다. 새의 울음소리는 기쁨과 슬픔, 명랑과 처량함, 번잡함과 적막함을 모두 함의하고 있다. “시는 저울질할 수 없는 심령적인 것을 이에 못지 않게 저울질할 수 없는 감성적인 것을 통하여 제공하는 것이다.”13) 화천리의 땅과 하늘의 새 울음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땅에까지 별빛이 내려와

축복의 이슬을 받아 모아

그 별빛을 밝히면

물새는 새벽마다

강 깊이 만한 물소리를 만들며 운다.


하늘에까지 풀잎이 일어서

감격의 별빛을 받아 모아

그 풀꽃을 피우면

산새는 새벽마다

산 높이 만한 산바람을 만들며 운다.


           ―「화천리․16」전문


이 시에서는 땅-하늘, 별빛-풀잎, 이슬-별빛, 별빛-풀꽃, 물새-산새, 강-산, 물소리-산바람이 전연前聯 후연後聯에 있어서 서로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땅으로는 별빛이 내려오고 하늘로는 풀잎이 일어선다. 축복의 이슬을 받아 모아 땅의 별빛을 밝히고 감격의 별빛을 받아 모아 하늘의 풀꽃을 피운다. 이러한 일들이 모두 화천리에서 일어난다. 물새는 새벽마다 땅에서 강 깊이 만한 물소리를 만들며 울고 산새는 새벽마다 하늘에서 산 높이 만한 산바람을 만들며 운다. 땅에서 우는 물새의 울음과 하늘에서 우는 산새의 울음은 각각 물소리와 산바람을 만드는 시인 박곤걸의 시(노래)에 다름 아니다. 그랬을 때 화천리를 가슴에 안고 사는 시인은 곧 물새이자 산새가 되고, 땅과 하늘, 별빛과 풀잎과 이슬과 풀꽃, 강과 산은 모두 시인의 가슴에 소재하는 화천리의 정경이 된다. “시인은 아무 것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등장 인물의 입을 통해서 그의 의식과 심리와 행위의 추이를 따라서, 비약과 상징과 메타포가 적절히 배합된 시인 자신의 치밀한 설계를 쫓아서 간접적으로 상황을 제시하고 사건의 전개를 이끌어 낸다.”14) “시인은 언어를 관습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오리지널하게 파악된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형상으로서 작용시키는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한다. 이리하여 시인은 높은 구체성에 도달하고, 그것이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을 그 속에서 언표言表한다.”15) 여기서 우리는 이제 박곤걸의 시정신을 찾을 수가 있다.


6.


박곤걸의 시정신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화천리 지향의 시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스스로 자기자신을 화천리의 잡초에 견주고 있다.


화천리는 그저 거기 버려져 있다.

회억하며 돌아보는

어제의 내가 끊임없이 위협 당하고

그 모진 아픔하며 다시 찾는

오늘의 내가 끊임없이 해체 당한다.


이러면서 저러면서

나는 거기 잡초 말고 더 될 것이 없다.


꽃이 그저 거기 저절로 피어 있다.

잡초가 꽃피었다 시들 듯이

내 시가 꽃피었다 시들고

씨앗이 영글기까지 지체 못하고

나는 일년초一年草, 허리를 휘청거리며

황사바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돌아선다.

                  

                ―「화천리․42」전문


시인의 가슴 속 ‘거기 그대로 버려져 있는’ 화천리를 시인은 끊임없이 지향한다. ‘그저 거기 저절로 피어 있는’ 꽃을 시인은 사모한다. 시인은 운명적으로 화천리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은 사랑 받는 자의 본질을 발견하고 그 본질 속에 확고하게 머물러 있으려는 의지이다.”16) 시인이 사랑하는  ‘화천리’와 ‘꽃’을 시의 이상향이라고 했을 때, 완전함으로서의 시의 본질은 거기 그대로 버려져서 존재하며, 그저 거기 저절로 피어 있는 것이 된다. 시의 이상향으로서의 화천리에 시인은 머물고 싶다. 그러나 시인이 거기에 접근할 때마다 그것은 시인을 위협하고 해체한다.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시인이며 그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은 ‘나는 거기 잡초 말고 더 될 것이 없다’고 탄식한다. ‘씨앗이 영글기까지 지체 못하(는)’ 일년초처럼 시인 자신의 시가 ‘꽃 피었다 시들고’ 마는 처지를 안타까워한다. 시인의 처절한 자기인식이다.


그러나 시인은 ‘허리를 휘청거리며 / 황사바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돌아선다.’ 처절한 자기인식 다음에 오는 체념이자 초월이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작품에 만족할 수 없으며, 더구나 일단 독자 앞으로 내보낸 작품은 이미 시인의 손을 떠나 버린 것이어서 시인으로서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시작품은 이제 시인을 떠나 독자적 생명으로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17) 화천리 지향의 박곤걸의 시정신은 계속하여 성장과 변화를 되풀이하겠지만, 1990년대 중반에 집중적으로 지향된 화천리의 시정신은 이제 시집 『화천리 무지개』로서 고정화되어 독자의 것으로 이양된다.


7.


시집 『화천리 무지개』의 핵심어는 꽃내이다. 꽃내는 시인의 가슴속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꽃내 위에 떨어지거나 얹혀져 흘러가는 모든 것은 꽃이 된다. 물론 거기에는 실존적 꽃내의 역사적 실존인물들도 시적 존재로 치환된다. ‘칼을 내리쳐 바위를 잘랐던’(「화천리․2」) 단석산의 젊은 김유신 장군도, 신라 화랑 정신의 표상이었던 ‘어린 관창’(「화천리․2」)도 꽃내를 따라 흘러간 꽃잎들이다. 화랑花郞이란 말이 곧 ‘꽃 같은 젊은 사나이’를 의미하는 것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박곤걸의 시정신은 꽃내를 따라 살다간 사람들의 역사를 증거한다.18) 그 역사에는 곧 박곤걸 자신의 가계의 계보사도 포함된다. 화천리는 곧 박곤걸 일가의 대대손손 거주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도암 할범 충정으로 살으시어 / 우매한 후손들까지 청렴히 처신하고”(「화천리․55」) “도암공의 11세손”(「화천리․60」) 고암(박곤복)은 “몸가짐을 준엄히 운신하며”(「화천리․60」) “도암 할범의 행적을 귀감 삼아 / 어려서 호학하여 /……/ 가문의 어둠을 밝히었다.”(「화천리․61」) 고암은 “회당(한학자 장석영) 선생의 학통을 받아 /……/ 백양사에 휴양중인 심산(김창숙)옹을 찾아 우국을 논하시”(「화천리․76」)고 “계성학당에서 후학에게 신학을 가르치니”(「화천리․61」) “선비의 뜻이 겨레에 닿아 있음”(「화천리․76」)이라 “물같이 맑게 살고 가신 분”(「화천리․53」)이라고 시인은 추모한다. 고암은 박곤걸 시정신의 또 하나의 축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고암을 다음 시와 같이 흠모하고 그를 닮고자 스스로의 키를 치켜올린다.


망국의 한을 암흑 속에 내어다 보며

아무도 오르지 못하는 높이에서 젖은 이마를 구름 자락에 씻고

세상의 넓이를 헤아리셨던

그를 다만 태산처럼 흠모했다.

푸른 산에 눈 우러르며

산수山水에 묻혀 푸른 나무의 귀를 열고

준엄한 산, 키 큰 고목의 허리에까지

나의 키를 치켜 올렸다.


                ―「화천리․76」일부


고암은 도암공의 11세손으로 조선조 말의 유학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지사였으며, 일제의 침략에 “울분을 머금고 비굴을 깨물고”(「화천리․59」) “벽도산碧桃山을 데불고 따라 울었”(「화천리․59」)으며 “산막山幕을 치고 은거하며 / 어둔 땅에 불을 켜냈던 이”(「화천리․59」)로서 “새벽을 여는 말씀을 별빛으로 키우”(「화천리․59」)신 분으로 시인은 묘사하고 있다. 박곤걸과 고암(박곤복)은 동항同行이다. 그러나 고암 보다 40년이나 나이가 적은 박곤걸이 철 들었을 때엔 “이미 그를 찾아 뵐 수가 없었다.”(「화천리․76」)고 시인은 안타까워한다. 그러니까 박곤걸 시정신의 지주는 11대조인 도암공과 동항인 고암 선생이 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박곤걸 시정신을 건설하는 또 하나의 지주는 그의 부친이다. 부친 산소의 묘석 앞에서 시인은 ‘말씀’과 ‘소리’의 이치를 다음 시와 같이 깨치고 있다.


아버님 산소의 묘석은

그냥 돌이 아니고 말씀이다.

그 말씀 못 알아 깨치는

내 귀 씻는 세찬 파도소리다.

몇 세손 흘러가서도

불출한 손자 놈 마음 깨우는 바람소리다.

그 파도소리로 바람소리로

나를 채우고 나를 비운다.


             ―「화천리․47」일부


8.


시인은 그의 일가와 역사적 위인들에게만 시선을 보내는 자가 아니다. “시인은 일상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존재를 밝음 속으로 현현顯現시킨다. 그것은 존재의 은폐성을 빛 속으로 개시하는 것이다.”19) 시인의 눈은 부드럽고 그의 가슴은 따뜻하기 때문이다. 화천리도 박곤걸의 조상과 일가, 그리고 역사적 위인들만의 화천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화천리에는 누가 사는가? 시인은 “화천리에는 화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화천리․74」)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 데나 씨뿌려 거두며 / 흙을 기리는 마음들이 여태 때묻지 않은”(「화천리․74」) 사람들이며 “청빈을 즐기며 사는”(「화천리․74」) 사람들이다. “윗마을에 이씨 김씨, 아랫마을에 전씨, 최씨”(「화천리․51」)가 “학덕을 숭상하고 살아”(「화천리․51」)가며 “할매 어매 이어온 행적을 / 며느리 딸이 이어가고 / 이뻐서 이쁜가 인사人事 닦고 행실 닦고 / 인정 줄 줄 알아 사랑 받는”(「화천리․52」) 삶을 살아간다.


화천리 사람들의 삶의 전범은 유교적 규범이다. 그것의 징표는 지조와 정절이다. 그러나 그 심층에는 정념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은 징표와의 갈등과 화해를 이룬다. 시인은 이러한 화천리 사람들의 삶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산바람에 몰려오는 머루 향기 같은 부슬비가 오고

곳내 사람 베적삼 다 젓는다.

꽃빛을 한 화천 처녀

물빛을 한 순결한 마음이

불빛을 한 뜨거운 정념을 활활 태운다.


응어리진 지조가 뿌리내린

꼿꼿하고 싯푸른 대밭에 함박눈이 내린다.

오로지 한 님을 따르는 홀로도 여자를 지키는

그 정절貞節이 대나무로 휘어져도

밖으로 열어놓지 못하고 닫아 걸은 사랑.


나의 안에 나를 새처럼 풀어 날리고

눈 같은 것, 비 같은 것, 심하게 오는 날

「내 마음 평화롭습니다」

「내 살림 풍요롭습니다」

갓 잠깬 대나무가 대신 기지개를 켠다.


          ―「화천리․57」전문


여기서 대나무는 정절을 상징하고 함박눈은 은폐를 의미한다. 지조는 인고의 결정체이다. 지조는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응어리진 지조’라고 표현한다. 지조와 정절은 동위개념이다. 남성의 외적 활동가치로서 지조를, 여성의 내적 성적가치로서 정절을 같은 위치에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조와 정절이라는 사회적 규범의 엄중함을 울창한 대밭으로 시인은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엄중함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밖으로 열어놓지 못하고 닫아 걸’어야 한다. 그러나 지조와 정절의 엄중함은 표면적일 뿐이다. 삶의 현실에서는 대밭 아래서 대나무 뿌리가 얼키고 설키듯 ‘뜨거운 정념’들이 활활 불타고 있다. 이러한 표리부동한 이중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대밭에 함박눈이 내린다.’ 함박눈의 무게로 휘어지는 대나무는 또한 지조와 정절의 본래성으로서의 회귀를 향한 붕괴를 의미한다. 그러나 댓잎에 얹힌 눈이 다 떨어지고 나면 대나무는 다시 ‘기지개를 켜며’ 잠에서 깨어난다. 다시 표면적 규범의 엄정성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면으로만 내면으로만 파고든다. ‘나의 안에 나를 새처럼 풀어 날리고 / 눈 같은 것, 비 같은 것, 심하게 오는 날 /「내 마음 평화롭습니다」’라고 자기위안을 삼으며 자기최면을 건다. ‘규범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음, 그러한 소망과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곧 인간의 도덕성의 전제’20)라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화천리 사람들은 생동하는 삶을 살고 있고, 시인은 거기에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낸다. 화냥기가 발동한 불륜의 아씨가 불러들이는 외간 사내를 대밭에 사는 신라시대의 도깨비로 형용하면서 처용처럼 초연한 관용의 미소를 보낸다. 이러한 시인의 시각은 다음의 시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별채 안뜨락에 앵두가 물들 무렵

뒷간 울밖에 우거진

구기자 잎을 흔드는 바람 더욱 청량한데

우물가 향나무 앞에 바람끼의 운세를 빌고

사랑채 할범의 근엄하신 기침소리에도

아씨 코고무신 뒷문 나들이가 잣더니

안채를 나드는 짚신 발자국 소리.

화천리 대밭에는

신라시대의 도깨비가 산다지.

그대 처용무를 추며

내 창가에 와서 피리 불어 주게나.


       ―「화천리․67」전문


이와 같이 생동하는 삶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시인은 나아가 한 입으로 두 말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 신도 동물도 아닌 인간이기에 사정과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자기가 한 말을 자기가 어기고 또 그러한 어김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쓰여진 다음의 시는 니체의 ‘인간적인, 참으로 인간적인’이라는 명제를 떠올리게 한다.


홍씨 부인은

늘 굽힐 수 없었던 자존을

보란 듯이 내보이고

일구이언하고 웃음 주다 눈이 맞아

정절 못 지킨 청상과부,

마음 미쳐 못 바꾼 홍씨 부인이

마음 안에 사람 하나 기르지 못했네.


아낙들 속 생활이

가을 하늘보다 더 튀는 올 가을

마음에 드는 유행색 옥색 치마에

저 달과 팔을 끼고

어디메로 가을 밤 길 떠났네.

일기예보는

하루에도 몇 번을 일구이언하고.


    ―「화천리․68」전문


그러나 이러한 화천리는 시인의 가슴속에만 있는 옛 화천리일 뿐이다. 지금의 화천리는 산업화에 따른 이농 현상으로 사람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고 노인들만 있는 마을에 간혹 들어와 사는 사람이 있어도 이제 옛날의 인정이나 풍속은 온 데 간 데 없다. “산너머 아득히 노을 사라져 가듯 / 선대先代도 가고 후대後代도 가고 / 족보族譜도 조상祖上도 다 파 가지고 갔는지 // 시대는 바뀌고 떠난 이는 영영 아니 오는데 / 낯선 인정은 외면하고 / 하늘은 돌아가라 하는데 // 저 강 건너 / 세월도 돌아서는데 / 오듯이 가을은 가고 겨울”(「화천리․27」)이 되어버린 것이 지금의 화천리이다. “헐고 세운 양옥에 / 들어온 이가 주인 되어 사는데 / 토박이가 세 들어 살고 / 수수떡 해서 인정을 쥐어주던 / 그 사람 같은 사람은 하나 아니 보이”(「화천리․21」)는 곳이 지금의 화천리이다. 그러나 시인은 “옛 살던 마을을 찾아가 / 사람 없는 묵은 집에 부서진 세월을 주워 모으며 / 다시는 찾아 올 것 같지 않는 / 떠난 사람들의 이름을 찾아 챙긴다.”(「화천리․6」) 그러므로 화천리에는 “그제도 떠나가고 / 그 그제도 떠나가고 / 옛 살던 사람은 없어도 / 풀잎이거나 꽃잎이거나 그 이름되어 피어 있다.”(「화천리․6」)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도 시인에 의하여 그들은 이제 풀잎이나 꽃잎이 되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에 의한다’는 것은 ‘시인의 시에 의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곧 ‘시인의 시적 언어에 의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언어가 존재Sein하고 있는 것을 처음으로 현존Anwesen하도록 하고, 존재자로서의 어떤 것이 나타나도록 하기”21) 때문이며, “언어는 ‘현존하고 있는 것’Anwesende을 처음으로 그것이 현전Anwesen하도록 하기”22) 때문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화천이 시인의 가슴으로 흐르는 꽃내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9.


꽃내를 그의 가슴속에 품고 사는 시인 박곤걸은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규정되는가? 시인 박곤걸의 가슴은 꽃내를 품고 있는 마을이고 동네이다. 그리하여 박곤걸은 화천리이고 화천리는 박곤걸이 된다. 시인으로서의 박곤걸이 자연인으로서의 박곤걸과 본래의 화천리를 하나로 합일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합일의 위력은 바로 시인의 본질에서 나오며 그것은 곧 시인이 받은 소명이 된다.


시인의 가슴으로 영원한 꽃내가 흐르고 그 꽃내가 흐르는 마을에 무지개가 뜬다. 그것도 ‘꽃무지개 빛깔’(「화천리․28」)로 뜬다. 꽃내마을에 뜨는 무지개이기에 꽃무지개일 수밖에 없다.


눈감으면 고향의 산자락에서

수꿩이 울어온다.

비온 후 무지개 띄워 놓고

없어도 있는 듯이 복덕福德을 나누고

안 가져도 가진 듯이 부귀富貴를 누리는가.


몇십 년 다시 몇십 년을 보내며

울밑에 접시꽃을 새아씨처럼 피우고

덕담德談을 나누며 수복壽福을 누리는가.

사람 사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으랴

동구 밖 앞 냇가에 미루나무가 고개를 내젓는다.


갈 수 있을지 볼 수 있을지

고향을 모르고 고향을 못 배우고

세상 사는데 무슨 일이 그리 많으랴.

하늘을 이고 지고

적막강산 굴참나무가 홀로 서서 기다린다.


                   ―「화천리․70」전문


위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래의 고향 화천리는 시적 존재이므로 찾아가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적 존재는 가슴속에 있으며 그것은 눈을 감아야 만날 수 있게 된다. 수꿩이 우는 화천리에 시인은 비온 후에 무지개를 띄워 놓는다. 여기서 무지개는 존재이면서 비존재이다. 사시사철 뜨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시간대에 시인에 의해 잠시 떴다가 사라지는 것이 꽃내마을의 무지개이기 때문이다. 복덕과 부귀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사람 사는데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삶에서의 많은 말은 하이데거의 ‘헛말’23)에 해당한다. 그것은 본래성으로서의 귀환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는데 생겨나는 많은 일들은 모두 헛일에 해당한다. 그것은 고향으로의 귀환을 필요로 한다. 고향으로의 귀환은 곧 귀향이다. 그래서 시인은 ‘하늘을 이고 지고 / 적막강산 굴참나무’가 되어 홀로 서서 기다린다. 사람들이 모두 꽃내라는 말의 본래성과 화천리라는 각자의 고향으로 귀환하기를 말이다.


따라서 꽃내마을의 무지개는 시인 박곤걸의 마음에 이는 무지개이다. 박곤걸에게 있어서 무지개는 언제 뜨고 언제 질까? 아니 지금까지 무지개가 몇 번이나 떴을까? 무지개는 몇 가지 빛깔을 가지고 있을까?

박곤걸은 화천리의 무지개를 일곱 빛깔로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시집 『화천리 무지개』가 77편으로 작시되어 있다는 데서 유추될 수 있다. 여기서 77이 의미하는 것은 일곱 빛깔을 가지는 두 개의 무지개, 즉 쌍무지개라고 볼 수도 있다. 편 편의 시들에서 실제로 빛깔의 종류들이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색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빛깔들뿐만 아니라 시에 등장하는 꽃이 가진 빛깔들도 포함된다. 박곤걸이 무지개를 일곱 빛깔로 보고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서양 중심적 미감에 젖어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동양적 사고에서는 다섯 가지 빛깔(파랑․노랑․빨강․하양․검정)이라야 한다. 오색찬란이나, 오색영롱이라는 말이 모두 다섯 가지 색깔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작시 『화천리 무지개』는 전편에 걸쳐서 동양적 색조와 한국적 정서가 보다 크게 표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를 않는다. 시인과 독자, 그 어느 누구도 동양적 사고나 서양적 사고의 한 측면만으로 그의 패러다임이 형성되어 있는 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시인 박곤걸에게 있어서 무지개는 언제 뜨고 언제 질까, 아니 지금까지 무지개가 몇 번이나 떴을까라는 문제이다. 위의「화천리․70」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지개는 시인이 눈을 감을 때 뜬다. 시인이 눈을 감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시인 자신의 시적 경지로 침잠한다는 것을 뜻한다. 시인은 눈을 감음으로써 그의 일상적 삶을 떠나 시인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며, 거기서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그리움과 아쉬움, 사랑과 이별을 만나며, 그것을 시인의 무지개로 띄운다. 이 때의 무지개가 언어적 표현 과정을 거쳐서 시로 탄생한다. 따라서 시인 박곤걸에게 있어서 무지개는 그의 시작詩作에서 뜨고 시의 완성에서 진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눈을 감음으로써 “빈 손으로 꽃골 마을에”(「화천리․7」) 온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꽃냇물에 손을 씻고 마음을 씻고 / 빈 손 빈 마음을”(「화천리․7」) 할 수 있게 된다. “도암 할범 기리는 도천정사桃川精舍(「화천리․63」) 그 “안뜨락 / 도화꽃 필 적에 숨어 나눈 사랑”(「화천리․13」)을 되살려내고, “산풀내 물씬 나던 산사투리 그 순정을 / 꽃잎새에 숨어 울던, 하마 잊었으면 잊을 일을”(「화천리․29」) 아직 못 잊어하게 된다. “물려받은 것이라곤 내 유년의 그리움”(「화천리․58」) 밖에 없는 시인이 눈을 감고 그의 무지개를 띄워야만 “숲에 앉은 바람이 뜬 구름을 매어 두고 / 이 세월이 저 세월이 아니라”(「화천리․46」)고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포플러에서 우는 매미 소리가/초록 물감을 내뿜”24)(「화천리․41」)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10.


이제 우리는, 시인이 그의 눈을 감고 자기 자신의 무지개를 띄움으로써 마주하게 되는 그만의 정경으로 빚은 가장 감각적인 시 한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마을에 환한 달이 뜬다.

보름달로 차오르기까지

가슴 태우며

네 감춘 몸에 옷 가린 만큼 살내 나는

구석구석 숨긴 꽃향내가 나는

네 잠근 방을 방문하고 싶다.


다시 그믐달로 이지러지기까지

마음 두근거리며

네 손에 쥐어지고 싶다.

손닿은 자리마다 꽃이 벙그는 황홀

숨가쁜 맥박으로

그 마을에 내가 남아 있고 싶다.


                ―「화천리․10」전문


이 시를 성기조25)는 시집 『화천리 무지개』의 해설에서 ‘사랑을 읊은 시’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이 시는:필자) 사랑을 읊은 시다.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와 내용을 기막히게 은유로 포장해내고 있다. 황폐하고 보잘 것 없는 동네가 된 화천리에서도 이런 살맛나는 사랑이 꽃필 수 있다. ‘환한 달’로 상징되는 여성상, 그뿐인가 달의 주술적인 생산력마저 행간에 깔고 있는, 이 시는 ‘다시 그믐달로 이즈러지기까지 / 마음 두근거리며 / 네 손에 쥐어지고 싶다’고 토로한다. ‘그믐달’은 복합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인생의 노경을 나타내는가 하면 남녀음양에 따른 포태와 생산도 상징하고 있다. ‘마음 두근거리며 / 네 손에 쥐어지고 싶다’는 대목은 사랑의 절정이다. 그 때마다 꽃이 영그는 황홀은 애정행위의 극치, 이런 사랑 때문에 숨가쁜 맥박이 뛰고 ‘살내나는 / 구석구석 숨긴 꽃향내’가 풍겨나게 된다. 철저하게 은유로 감춰진 사랑행위는 뜨거운 열정으로 솟아나지만 ‘숨긴 꽃향기’, ‘잠근 방’, ‘그믐달’, ‘꽃이 영그는 황홀’, 따위의 말로 숨겨져 있기 때문에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풍만하고 탐스런 육체를 가진 여인은 철저하게 ‘잠근 방’에 숨고 ‘숨긴 꽃향기’나 ‘그믐달’만 전면에 나와 있다. 사랑도 이만하면 마치 신선의 도에 들었다고나 할까. 박곤걸은 이런 사랑을 하면서 화천리에 ‘남아 있고 싶다’고 설파하고 있다.26)


탁월한 해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성기조에 따르면, 이 시에서의 ‘그 마을’을 ‘화천리’로 보고 있으며, ‘너’를 ‘풍만하고 탐스런 육체를 가진 여인’으로, 그리고 ‘달’을 ‘여성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 두근거리며 / 네 손에 쥐어지고 싶다’는 대목을 사랑의 절정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박곤걸은 이런 사랑을 하면서 화천리에 ‘남아 있고 싶다’고 설파하고 있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성기조와는 달리 ‘그 마을’과 ‘너’를 다 같은 ‘화천리’로 보고, ‘달’을 ‘은은한 빛’으로 보고자 한다. 그랬을 때 이 시는 전혀 다른 의미내용을 가지는 것으로 된다.


눈을 감고 무지개를 띄움으로써 시인 박곤걸의 시적 심상에는 화천리가 은은하게 떠오른다. ‘환한 달이’ 화천리를 밝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은은하게 비추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밝게 비출 수 있는 것은 강렬한 빛을 가진 태양이다. 태양빛은 사물의 겉모양을 세세하게 비출 수는 있지만 반면에 사물이 가지고 있는 미세한 내면은 더욱더 숨어들게 한다. 그러나 달은 해가 아니다. 아무리 환하게 비춘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달이 비추는 빛이지 해가 비추는 빛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을에 뜨는 환한 달은 아무리 그것이 보름달이라고 하더라도 그 마을(화천리) 은은하게 비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처음의 희미한 그믐달에서 은은한 ‘보름달로 차오르기까지’ 시인은 가슴을 태울 수밖에 없다. 그의 심상에 희미하게 보이는 화천리를 보다 밝게 보고 싶어하는 시인의 열망이 간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은은한 빛 아래로 ‘네(화천리)’가 나타나면 시인은 살내 나고 꽃향내가 나는 너에게로 가고 싶어진다. 시의 표면에서 보았을 때, 시인의 시적 기교로 화천리를 성기조가 말하는 ‘풍만하고 탐스런 육체를 가진 여인’으로 의인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화천리라는 시인의 절절한 애정의 대상을 시인은 그의 시에서 ‘여인이 몸’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그믐달로 이지러지기까지’는 다시 화천리의 모습이 희미해질 때까지로 볼 수 있고, 그랬을 때 거기에 대한 아쉬움으로 시인은 ‘마음 두근거리며’ 희미해져 가는 화천리 속에 붙들려 있고 싶어짐을 ‘네 손에 쥐어지고 싶다’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화천리에 대한 지극한 간절함이 시인 속에 있기에 시인이 살펴보는 화천리의 곳곳마다 ‘꽃이 영그는 황홀’이 생길 수 있고, 시인의 맥박은 숨가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마침내 화천리라는 ‘그 마을에 내가 남아 있고 싶다’고 진술한다. 앞에서 말한 화천리 지향의 박곤걸 시정신이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11.


화천리는 시인 박곤걸에게 있어서 그러므로 존재론적 고향이며, 이데아이며, 유토피아이다. 고향을 떠나와 “도시의 멀미”(「화천리․15」)를 앓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언제나 시인의 마음은 화천리에 닿아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본래의 화천리는 완전한 곳이며 낙원이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은 끊임없이 화천리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 화천리에서 떠나온 시인의 삶은 화천리로 돌아가는 고행의 노정이다. 그러나 그 고행은 힘들망정 즐거운 고행이 된다. 박곤걸의 『화천리 무지개』연작 전편에서 우리는 횔더린의 시 「귀향」27)을 연상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고 긴 길이 양자의 공통된 색조이다. 그래서 화천리는 만년의 시인에게 연작의 대상이 되고, 화천리로 향하는 시인의 마음은 『화천리 무지개』연작시 77편을 풀어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의 원천이 된다. 화천리는 시집 『화천리 무지개』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유토피아와 이데아의 표상이 된다. 다시 말해서 화천리가 우리에게 유토피아와 이데아로 건설되는 것은 시인 박곤걸의 시작품집 『화천리 무지개』에 의해서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박곤걸 시 세계에서 『화천리 무지개』의 존재론적 지위를 해명할 수 있다. 『화천리 무지개』에 나타나는 박곤걸의 시적 사고는 이원론적이다. 현실 속에서 개발논리에 따라 파괴되고 피폐해 가는 화천리와 그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완전하면서도 순수한 본래적 화천리라는 두 개의 화천리가 견결한 시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원론은 플라톤이래 우리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는 기본적인 사고 패턴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세계는 즉물적이고 일회적이며 변화무쌍하여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 현실계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완전한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을 잣대로 하여 견주어 보았을 때 불완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한 그 무엇의 세계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이데아의 세계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항존불멸하며 완전한 세계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어떤 결함이나 장애나 황폐가 있을 수 없고 원형 그대로의 완전한 진․선․미가 존재한다. 현실계에서는 이데아계를 어렴풋이 바라볼 수만 있고, 이데아계를 사모할 수만 있으며 흐린 상으로 본 이데아를 모방하고 흉내낼 수만 있다. 흐린 상으로 어렴풋하게만 볼 수 있기에 그것은 현실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사정을 박곤걸은 책머리에서 “우리 모두가 본 듯한 화천리는 이 땅 위에 있을 것도 같고 이미 없을 것도 같다”28)고 술회하고 있다. 이 땅 위에 있을 것 같은 화천리나 없을 것 같은 화천리는 모두가 이데아계의 화천리이다. 환언하면 화천리의 이데아이다. 그것은 시인의 시적 영혼 속에 거주하고 있는 이상향Utopia이다.


유토피아의 그리스어 어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없는 것Ou’과 ‘장소Topos’의 합성어이며, 다른 하나는 ‘완전한 것Eu’과 ‘장소Topos’의 합성어이다. 그러니까 이상향은 ‘없는 곳’과 ‘완전한 곳’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완전한 곳은 없다’와 ‘없는 것만이 완전하다’는 역설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 이상향이다. 이상향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에 동경의 대상이 되고 삶의 목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이미 목표가 아니듯이, 이상향도 현실화되고 나면 더 이상 이상향이 아니다. 이와 같이 이상향은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더욱 간절하고 절실한 요구로써 존재하게 된다.


박곤걸은 두 개의 땅 위에 살고 있다. 현실적 삶은 이 땅 위에서 수행하고 있고, 시적 삶은 저 땅 위에서 이어가고 있다. 이 땅 위에서 수행하는 삶이 일상적 삶이라면, 저 땅 위에서 이어가는 삶은 시적 삶이다. 시적 삶은 이데아와 유토피아로 연결되는 삶이기에 일상적 삶은 시적 삶을 사모하여 완전을 추구한다. 그것이 바로 이 땅 위에 있을 것도 같고 없을 것도 같은 화천리이다. 본래적 화천리는 이 땅이 아닌 저 땅에 있다. 박곤걸에게 있어서 이 땅이 아닌 저 땅이 바로 화천리이다. 따라서 시집 『화천리 무지개』는 지난 시절의 이상향일 뿐만 아니라 지금의 이상향이며 앞으로의 이상향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화천리는 시인 박곤걸의 출발지이면서 종착지이다. 시인은 화천리에서 태어나 화천리를 가슴에 간직하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고, 온전한 화천리로 귀환하기 위하여 시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리하여 시인의 시적 삶은 그의 일상적 삶보다 언제나 앞서 있다. 하이데거의 “시인의 시적 삶은 인간의 시민적 삶에 선행한다”29)는 명제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앙리 슈하미가 “시인은 자기 속에 살고있는 개인이 아닌 시에 봉사한다”30)고 말한 명제는 이에 우회적으로 연결된다.


화천리는 꽃이 냇물로 흐르는 동네이다. 그것이 실재하는 공간이든, 시인의 정신 속에 존재하는 비실재적 공간이든 간에 시인에게는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인의 시적 삶은 늘 화천리를 보면서 화천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詩作은 저 땅과 이 땅이 하나로 만나게 하는 특정구역이다. 시인의 삶은 특구 속에서의 삶이며, 그가 생산해낸 작품을 통하여 일상인의 삶을 특구 속으로 이끌어들이는 삶이다. 이와 같이 “문학은 철학자가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을 말로 ― 물론 부분적이지만 ― 표현한다. 문학의 질료는 언어이다. 그리고 문학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언어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파악되지 않는 것이다.”31) 그러므로 “작가는 바로 우리가 일상생활 용어로 말할 줄 모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32) 그리하여 화천리 지향의 시정신으로 압축할 수 있는 박곤걸의 시집 『화천리 무지개』는 박곤걸의 것인 동시에 만인의 것이 된다. 그러나 저 땅에 눈 떠 있으며, 저 땅에 대한 꿈과 소망과 목표를 가진 만인만이 더운 피로 생동하며 살아있는 만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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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곤걸(1935~2008) : 매일신문 신춘문예(1964) / 현대시학 추천완료(1975) / 대성기계공고 교장 역임 / 국제펜클럽 대구지부 회장 역임 / 사)한국문협 부이사장 역임 / 시집『빛에게 어둠에게』外 / 금복문화예술상


2) M. Heidegger, EHD. 117. "Hölderlin und das Wesen der Dichtung".


   하이데거 저서의 쪽수는 초판쪽수로 표시함.

   Martin Heidegger의 저작들은 다음과 같이 약호로서 표기한다.


  EHD. 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1944), Gesamtausgabe 2:Vittorio Klostermann · Frankfurt a.M. 1977.

  Hw. Holzwege(1950), Gesamtausgabe 6:Vittorio Klostermann·Frankfurt a.M. 1950.

  SZ. Sein und Zeit(1927), Gesamtausgabe Vittorio Klostermann·Frankfurt a.M. 1977.

  US. Unterwegs zur Sprache(1959), Gesamtausgabe 12:Vittorio Klostermann·Frankfurt a.M. 1985.


3) 박곤걸 시집,『화천리 무지개』, 서울:혜화당, 2001.


4) 이 소론의 텍스트를 『화천리 무지개』로 하는 것은, 『화천리 무지개』는 이미 일흔이 가까운 시인 박곤걸이 가장 최근에 상재한 시집으로서, 급조하여 강호에 내어놓은 것이 아니라 충분한 준비를 한 연후에 출시한 시집이며 다년간의 조탁을 거친 역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C.D. 루이스 저, 허천택 역,『시와 인생』, 서울:박영사, 1983, 50쪽.


6) 정신과 시의 관계를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정신은 일체를 분석하면서, 일체를 사유하고 종합하면서, 일체에 관여하고있다. ‘정신’으로서의 그것은 영원히 ‘공동한 정신’이다.”(M. Heidegger, EHD. 60. "Wie wenn am Feiertage⋯".) “정신은 모든 현실적인 것에 부합되는 현실성을 사유한다.”(M. Heidegger, EHD. 89. "Andenken".) “정신은 근원에 대하여 알려는 의지이다. 정신은 일체에 편재하는 정신이다. ‘공동의 정신의 사상’은 현실적인 것에 앞서서 현실적인 것의 현실성을 사유한다. 현실성은 현실적인 것의 면에서 본다면 일종의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는 그것은 진리를 향하여 앞질러 기투企投되어서 진리 가운데 자기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를 확보하면서 현실적인 것의 비현실적 현실성은 비로소 시가 되는 것이다. ‘정신’이 언젠가 이 세상에 사는 인류 역사의 ‘정신’이 되고자 한다면, 정신의 시적詩的 사상思想은 시인의 영혼 가운데 모여지고 집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M. Heidegger, EHD. 90. "Andenken".)


7) M. Heidegger, Hw. 237. "Wozu Dichter?".


8) 이와 같은 시의 창조성은 “시poésie나 시학la poétique은 역사적․의미적으로 ‘창조하다’créer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동사 ‘ποιετν’에서 파생되었다”(앙리 슈하미 저, 김태영 역,『시학』, 서울:탐구당, 1990. 8쪽)는 데서도 입증된다.


9) 김주완,『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서울:형설출판사, 1998, 445쪽.


10) M. Heidegger, EHD. 38. "Hölderlin und das Wesen der Dichtung".


11) 앙리 슈하미 저, 김태영 역,『시학』, 서울:탐구당, 1990. 74쪽.


12) 이 시의 특징은 구두점의 부분적인 생략과 규칙적인 반복의 효과를 노리는 데 있다. 그 효과란 무엇인가? “구두점이 없는 텍스트의 각 행은 눈과 정신에 쾌락적인 어떤 것을 제공하고, 그런 행이 유발하는 혼동은 시적 암시성으로 대치되어 나타나진다”(앙리 슈하미 저, 김태영 역,『시학』, 121쪽.) 는 것과 “청각적인 되풀이 작용은 구문구조에서가 아니라 어휘측면에서 기능한다. 그것은 기호(언어기호)가 같은 음소집합체가 같은 의미를 지시하여 나타내는 기호의 일의적 영속성 법칙을 전도시키면서 기능하게 된다(앙리 슈하미 저, 김태영 역,『시학』, 121쪽.)는 것이다.


13) Nicolai Hartmann, PdgS. 443.

    Nicolai Hartmann의 저작들은 다음과 같이 약호로서 표기한다.

  Ä. Ästhetik(1953), 2. Aufl. Berlin, 1966.

  E. Ethik(1926), 4. Aufl. Berlin, 1962.

  PdgS. 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 Untersuchungen zur Grundlegung der  Geschichtsphilosoph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1933), 3. Aufl. Berlin, 1962.


14) 김주완,『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419쪽.


15) 김주완,『미와 예술』, 서울:형설출판사, 1994, 368쪽.


16) M. Heidegger, EHD. 118. "Andenken".


17) 시인을 떠나 독자적 생명으로 존속하게 되는 시작품의 운명은 객체화한 정신의 특성에서 연유한다. 이에 대해서는 N. Hartmann, PdgS.를 참조할 것.


18) 정신의 역사성에 대하여는 N. Hartmann, PdgS.를 참조할 것.


19) 김주완,『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446쪽.


20) 이에 대해서는 Nicolai Hartmann, E.를 참조할 것.


21) M. Heidegger, US. 227. "Das Wort".


22) M. Heidegger, US. 237. "Das Wort".


23) ‘헛말’에 대해서는 M. Heidegger, SZ.를 참조할 것.


24) 여기서 박곤걸은 음악과 미술의 절묘한 합일을 이루어내고 있다. 음악의 질료가 소리이고 미술의 질료가 물감(빛깔)이라고 했을 때, 기본적으로는 소리로써 빛깔을 표현할 수 없고 빛깔로써 소리를 표현할 수 없다. 음악과 미술이 엄연히 서로 다른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두 영역이라 할지라도 시에서는 하나로 합일 할 수 있다. 박곤걸이 보여주는 것이 그러하다. <매미 소리에서 초록 물감이 내뿜어져 나오는 일>은 시적 표현과 그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25) 성기조(1934~    ) : 시인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회장 / 한국교원대 교수 역임 / 시와 시론 주간 / 시집『달동네 사람』외 / 자유중국문학장, 동백예술상, 한성기문학상, 아주문학상, 충청문학상.


26) 박곤걸 시집,『화천리 무지개』, 132-133쪽.


27) 횔더린의 시「귀향」과 이 시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평은 M. Heidegger, EHD.를 참조할 것.


28) 박곤걸 시집,『화천리 무지개』, 책머리.


29) M. Heidegger, EHD. 91. "Andenken"


30) 앙리 슈하미 저, 김태영 역,『시학』, 37쪽.


31)  Nicolai Hartmann, Ä. 175.


32)  Nicolai Hartmann, 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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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김주완,『미와 예술』, 서울:형설출판사, 1994.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서울:형설출판사, 1998.

 

박곤걸 시집,『화천리 무지개』, 서울:혜화당, 2001.

 

앙리 슈하미 저, 김태영 역,『시학』, 서울:탐구당, 1990.

 

C. D. 루이스 저, 허천택 역,『시와 인생』, 서울:박영사, 1983.

 

Martin Heidegger, Erläuterungen zu Hölderlins Dichtung(1944), Gesamtausgabe 2:Vittorio Klostermann·Frankfurt a.M. 1977.

 

 , Holzwege(1950), Gesamtausgabe 6:Vittorio Klostermann·Frankfurt a.M. 1950.

 

 , Sein und Zeit, Gesamtausgabe Vittorio Klostermann․Frankfurt am Main, 1977.

 

 , Unterwegs zur Sprache(1959), Gesamtausgabe 12:Vittorio Klostermann·Frankfurt a.M. 1985.

Nicolai Hartmann, Ästhetik(1953). 2. Aufl. Berlin 1966.

 

, Das Problem des Geistigen Seins, Untersuchungen zur Grundlegung der Geschichtsphilosophie und der Geisteswissenschaften(1933), 3. Aufl. Berlin. 1962.

 

, Ethik(1926), 4. Aufl. Berlin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