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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원고] 현대인의 삶과 윤리적 과제 / 김주완

김주완 2011. 2. 28. 15:46

 

이 글은 『민족정신의 원류와 전개』, 경산대학교 출판부, 1999.02.26. 311~324.쪽에 수록되어 있음.


[교재원고]

현대인의 삶과 윤리적 과제

김주완


1. 현대의 특성

  

  현대1)란 어떤 시대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단적인 대답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가 그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자기 시대의 전체 상(象)을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 찾기를 포기할 수도 없다. 현대란 어떤 시대인가를 알아야만 그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이 누구인가를 얘기할 수 있겠고, 그런 연후에라야만 현대인의 윤리적 좌표를 탐색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답할 수도,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 문제, ‘현대가 어떤 시대인가’ 하는 바로 이 문제의 해답은 따라서 어떠한 경우이든 제한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보기에 따라서는 자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우리는 현대를 다음과 같이 특징 지우고자 한다.


  무엇보다 먼저, 현대는 <속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속도는 속도를 지향한다. 속도의 세계에서는 ‘보다 더 빠른 속도’가 언제나 가치 지향점이 된다. 최고 시속 200Km의 자동차 생산기술은 300Km의 생산기술을 남보다 먼저 개발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인다. 남보다 한 걸음 뒤떨어지면 한 걸음만큼 패배한 것이 되며, 그만큼의 이권을 내어 주어야만 한다. 속도를 느끼는 감각은 내성(耐性)이라는 속성을 그 속에 가지고 있다. 익숙해진 속도는 이미 속도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속도가 아니고 정지이며 정체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답답한 거기,정지한 속도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스스로 살아있음을 실감하기 위하여, 쉬임없이 발전하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더 빠른 속도를 추구하고 개발한다. 그러나 끝내는 속도의 한계 극점에서 속도로부터 소외되거나 이탈하고 만다. 그것은 곧 속도의 파산으로서의 인격파탄이거나 아니면 죽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폭주족의 전성시대이다. ‘빨리 빨리 문화’로 지적되고 있는 한국적 풍토에 있어서의 현대인은 더욱 그러하다. 빠른 템포의 대중가요, 빨리 취하기 위하여 술좌석에서 돌리는 폭탄주, 상품을 빨리 처분하기 위한 왕창 세일과 창고대방출, 법안을 빨리 처리하기 위한 국회의 날치기 통과, 표를 빨리 사기 위한 새치기, 돈을 빨리 벌기 위한 부정부패와 사기 치기, 빠른 쾌락을 얻기 위한 마약복용 …… 등 속도지향주의는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뿌리는 이제 교육부문에까지 뻗어 나와 조기교육, 조기입학, 조기졸업 등 현재가 아닌 미래마저 독촉함으로써 삶의 연소(燃燒)를 가속시키고 삶의 지각을 원천적으로 뒤엎고 있다.


  다음으로 현대는 <생략의 시대>라는 특성을 가진다. 그것은 속도지향주의가 가져온 필연적 귀결이다. 보다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듬성듬성 건너뛰어야 한다. 그것은 징검다리의 돌을 하나하나 밟고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사이사이의 돌을 건너 뛰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건너뜀의 사이에 있는 것이 생략이다. 생략의 풍조 또한 사회 전반에 만연하여 있다. 생략은 언어의 생략으로부터 출발한다. 빨리 말하고 빨리 알아듣기 위하여 언어는 생략된다. 전대협(전국대학생협의회), 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경실련(경제정의실천연합회),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 총학(총학생회), 총대(총대의원회의), 복과(보건과학과), 생자(생명자원공학전공) …… 등 단체나 기관의 이름은 물론 왕따(집단 따돌림), 새터(새내기 새로 배움터), 예대(예비대학), 보강(보충강의), 추시(추가시험), 입시(입학시험), 국시(국가고시), 공채(공개채용), 보수(보증수표), 야자(야간자율학습)…… 등 한국어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생략의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예는 OT(Orientation), LT(Leadership Training), PC(Personal Computer), 알바(Arbeit), CC(Campus Couple), PCS(Personal Communication System), OB(Old Boy) …… 등 외국어에서와 섹터주의(Sect 주의, 파당주의), 소개팅(소개 + ting), 소야(소세지 야채뽁음), 롱 치마(Long Skirt), 롱 다리(긴 다리), …… 등 한국어와 외국어의 신종 합성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언어의 생략으로부터 출발하는 생략의 풍조는 현대생활의 전체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과정과 절차의 생략은 현대의 미덕이다. 절차와 순서를 갖춘 식생활은 외면되고 인스턴트 식품이 판을 친다. ‘먹는다’는 결과의 획득, 오로지 그것에만 의미가 주어진다. 이성간의 교제도 마찬가지이다. 이해와 사랑을 통한 인격 대 인격의 점진적 접근은 무시되고 빨리 잠자리에 들어가는 결과의 성취, 그것에 집착하다가 서로간에 부담이 되기 전에 빨리 헤어지기 위하여 서두른다.


  어떤 이유로 생략은 이와 같이 선호되고 있는가? 그것은 곧 효율성의 추구에 있다. 효율성은 본래 경제학적 용어이다. 보다 적은 투자로 보다 많은 효과를 산출하는 것이 곧 효율성의 목적이 된다. 그러므로 높은 속도가 목표라면 생략은 그 방법이 된다. 보다 높은 속도를 얻기 위해서는 보다 많이 생략하여야 하고, 많은 생략은 높은 속도를 보장한다. 속도와 생략은 상호 상승작용을 하는 관계 속에 있다. 따라서 속도와 생략은 그 이면에 효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속도와 생략은 경제학적 의미로 환원되고 효율성은 돈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현대는 <돈의 시대>라는 특성으로 정리된다. 현대는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된다. 목소리도 돈이고 얼굴도 돈이며, 지식과 정보, 권력과 명성, 자원과 기술과 자격도 돈이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모두가 돈이다. 간과 콩팥과 같은 장기도 돈이고, 잘 발달된 근육도 돈이며 날씬한 몸매도 돈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베푸는 배려도 돈이고, 그가 내게 보내는 격려도 돈이며 기쁨과 슬픔도 돈이다. 경쟁력과 경쟁심도 돈이다. 인격이나 예술, 말(言)이나 판단, 태도 역시 돈이다. 창의력, 분석력, 추진력은 물론 이미지마저도 돈이다. 돈 냄새가 나는 곳이면 사람들은 으레 파리 떼처럼 떼거리로 달려든다. 돈은 집중과 증식의 속성을 자기자신 속에 가지고 있다. 돈은 그것이 가진 속성에 따라 자기분열과 이합집산을 되풀이함으로써 집중되고 증식된다. 그러므로 돈의 방향은 언제나 부익부 빈익빈으로 향하게 된다. 돈은 음지에 있으면서 그것이 가진 막강한 힘으로 양지를 조정하고 지배한다. 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인격도 신앙도 사랑도 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돈이라는 괴물은 이제 신의 위치로 격상된다. ‘돈은 신이다’라는 맘몬교의 제1계명을 믿으라고 현시대는 사람들에게 집요하게 강요한다.2) 돈은 자기 성장과 자기 증식을 위하여 허구와 환상을 만들어낸다. 유행과 ‘신세대’라는 개념이 바로 소비를 증대시키기 위해서 돈이 만들어낸 산물들이라 할 수 있다.


  <속도>와 <생략>과 <돈>이 서로서로 부추기고 경쟁하며 상호상승 작용을 하는 가운데, 이러한 시대 속에 매몰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의식은 마비되고 인간성은 소실되어, 끝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상실하고 나도 남도 아닌 허상의 바람(風)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제 인간을 위한 속도와 생략과 돈이 아니라 속도와 생략과 돈을 위한 인간이 된다. 목적과 수단의 위치가 전도되고 만 것이다. 마침내 인간은 없고 속도와 생략과 돈만이 있다.


2. 현대인의 삶


  현대인3)은 공허하고 삭막하다. 고요한 명상이나 깊은 사색 대신에 그들은 딱딱한 계산만을 하고 있다. 정확하고 신속한 고성능 계산기가 되어 모든 것을 이해관계로만 저울질하고 있다. 나의 이해를 벗어난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런 것에 마음 쓰고 관여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출근 버스 속에서 매일 아침 만나는 사람이지만, 낯익은 얼굴들이지만 목례조차 나누는 법이 없다. 그러나 권력이든 돈이든 육체이든 간에 그가 가진 것이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가 가진 것이 탐나는 것이며 그것이 내가 꼭 가지고 싶은 것이라면 사람들은 끈질기게 공략한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의 관심을 끌어내고 호감을 얻어내려 한다. 그것은 그에게서 목적한 것을 얻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는 아니다’라고 느끼거나 ‘더는 소용없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사람들은 차갑게 웃으면서 돌아선다. “별 것도 아닌 것이…” 상대방을 폄하하거나 얻고자 했던 것을 평가절하 하면서, 한번의 냉소로 그 동안 기울인 자신의 노력을 미련 없이 자진해체해 버린다. 그리고는 곧 망각한다. 간혹 미련이 남거나 후회하는 자도 있지만 그런 자는 으레 자조의 가시밭길을 힘들게 우회한 뒤 결국은 망각의 늪으로 과거를 던져버리고 만다. 소중한 것을 가슴에 묻어두는 것은 낭만주의의 유물에 불과하다. 현대인은 깊이 고민하는 법이 없다. 깊은 사색의 기능이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색기능의 마비는 컴퓨터 기능의 증대와 영상문화의 확대가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사색기능이 마비된 껍질뿐인 현대인은 상실 이전의 자기를 그리워하며, 그것을 남으로부터 확인 받고 싶어한다. 남이라는 거울을 통한 자기확인의 소망 ― 이것은 현대인의 무의식, 그 심층에서 꿈틀거리는 회귀본능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은 누구나 자기를 남에게 보이고 싶어한다. 그들의 소망과 노력은 눈물겹도록 가상하다. 정성 들여 가꾸고 다듬은 외모와 세련된 매너를 남 앞에 끊임없이 과시한다. 자기가 멋있고 아름다움을, 야성적이고 터프 함을, 교양 있고 중후함을, 많은 돈과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그의 지위가 높음을 누군가 보아주기를 그들은 매 순간순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현대인은 이러한 것들이 자기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하며, 남이라는 거울을 통해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기를 보여주고 싶은(남이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추고 싶은) 그들의 마음은 조급하다. 그러나 남이라는 거울은 언제나 흐린 거울이다. 흐린 거울에는 아무것도 비추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보이고 싶은 우리의 모습을 보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고 무시함으로써 그보다 자기가 위에 서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자 한다. 상대방을 인정하게 되면 그것이 곧 자기의 부정이 된다는 믿음을 사람들은 은연중에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상호적이다. 모두가 자기를 보이고 싶어하지만 아무도 상대방을 보아주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편안하고 무심하게 외면하면서 스쳐 지나간다.


  못보고 지나감은 현대인의 특성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4) 현대생활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숱한 사람들과 만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참으로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반대로 또 ‘참으로 우리를 보아준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는 서로 겉과 겉으로 스쳐갈 뿐, 외롭게 헤어지고 만다.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본래의 자기가 아니라 분장된 자기이며, 보지 않고자 하는 것은 위장된 상대방의 껍질이 아니라 상대방의 진실이다. 우리는 몇 십년간이나 함께 살고 외면적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마음은 피차 닫혀져 있는 것이다. 피차 보여지기를 동경하면서도,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는 것이 현대인의 운명이다. 서로간에 닫혀져 있는, 얼음처럼 차갑고 납처럼 무거운 마음의 벽을 병풍처럼 치고 사는 것이 현대인의 숙명이다.


  삶은 본래 만들어 가는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인간의 예견 능력으로부터 ‘내일 나는 무엇을 이루겠다’는 목표가 설정되고, 거기에 의지결단과 노력이 가미되어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인간은 조물주가 된다. 내 삶을 내가 만들어 가는 조물주로서의 인간의 삶은 우리가 우리들 삶의 주인이 되는 주체적 삶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삶은 이미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현대를 살아가는 누구도 자기의 삶을 자기 뜻대로 만들어 갈 수가 없다. 문화적 유행, 물질 중심주의의 사회적 구조, 효율성과 실용성을 축으로 하는 경제 논리가 판을 치는 사회․국가적 분위기에 의해서 현대인의 삶은 만들어지고 있다. 누구도 이것들로부터 해방될 수가 없다. 인간은 이제 자기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의사와 물(物)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지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인의 삶은 더 이상 주체적인 삶일 수가 없다. 주어진 환경과 구조에 종속되어, 가는 방향도 모르면서 빠른 속도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삶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끌려가는 종속적 삶으로 요약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허겁지겁 끌려가는 현대인의 삶에는 따라서 안정과 정관(靜觀)이 없다.5) 초조하고 휴식이 없는 생활이다. 목표도 자각도 없이 그저 서로 경합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무한경쟁이라는 괴물에 끝없이 끌려가고 있다. 한 순간이라도 정지하면, 다음 순간에는 뒤지고 만다. 속도와 생략과 돈에 매달린 현대인은 부단히 새로운 것을 취한다. 새로운 것 중에서도 가장 새로운 것이 판을 치고, 바로 그 앞의 것은 이해는커녕 옳게 보기도 전에 잊어버린다. 현대인은 자극에서 자극으로 옮겨간다. 자극을 뒤쫓아 다니는 동안에, 현대인의 통찰력은 약화되고 가치감은 마비된다. 가치감이 마비된 인간의 삶은 이미 인간의 삶이 아니고, 그것은 곧 윤리의 완전해체로 이어진다.


3.  윤리적 해체


  윤리6)적 해체가 자기합리화의 방편으로 몰고 온 유용성의 산물이 바로 <상대주의>라는 사조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상대주의란 절대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이다. 고결과 긍지는 오만이나 교만으로 이어지고, 겸손이나 절제는 비굴이나 궁색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선일 수도 악일 수도 있다고 본다.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현대인이 기댈 절대적인 것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설사 기댈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기댈 자기자신이 없는 현대인이 어떻게 기댈 수 있겠는가. 기댈 주체(자기자신)도 없고, 기댈 대상(곳)도 없으니 현대인은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며 살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 한 켠에는 설사 그것이 곰팡내 나는 먼지투성이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선을 당위로 요청하는 도덕적 이데올로기가 살아서 남아 있다. 여기서 <윤리적 현실의 이중구조>가 형성된다.


  모범생이며 효자로 알려져 있는 착한 학생이 하교 후 뒷골목에선 불량학생이 된다. 사회적 존경을 받는 성직자가 남 모르게 축재(蓄財)를 하는 경우도 있다. 평등과 민주를 부르짖는 사회운동가가 가정 내에서 실제로는 폭군이며, 청렴하기로 소문난 공무원이 은밀하게 비리나 부정을 완전범죄로 저지른다. 교통경찰관이 교통법규 위반을 하고, 전통 윤리를 가르치며 지조와 청빈과 이웃 사촌의 정분을 강조하는 교수가, 다른 교수와 반목하고 자기 사람을 교수로 불러오기 위하여 권력에 빌붙어 권모술수를 행하며, 때로는 거액을 챙기기도 한다. 강간범을 잡아야 할 강력반 형사가 밤늦은 시간 보는 자가 없는 밀실에서 다방 여종업원을 강간한다. 착실한 가정주부와 성실한 샐러리맨들이 순간의 쾌락을 쫓아 ‘묻지마 관광’을 떠난다. 신문 사회면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이러한 예가 현대사회의 윤리적 이중구조의 한 단층이 된다. 이중성은 영악한 인간의 현명성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필요에 따라 이것을 내밀었다가 저것을 내밀었다가 함으로써 남의 공격을 피해갈 수 있는,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잠재울 수 있는 자기합리화의 편리하기 짝이 없는 도구이다. 두 개의 얼굴 사이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것이 ‘속 드러내지 않기’이다. 그러므로 이중성은 은폐성을 함의한다. 완벽한 이중성과 완벽한 은폐성은 상호 규정적 관계에 있다.


  탄로 나지 않는 완벽한 이중성을 지키기 위하여 선호되는 것이 <일회주의>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오래된 교훈을 극단적으로 현실에 적용한 것이 일회주의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누구도 모르게 해치우는 것이 일회주의의 방법이다. 이름도 신분도 모르는 남녀가 하루만의 향락을 위해 떠나는 ‘묻지마 관광’이 그것의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일회주의가 돈과의 연관선상에서 나타났을 때 그것은 한탕주의가 된다. 속이든, 강탈하든,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든, 살인하든 간에 단 한번의 은밀한 결행으로 미래의 편안함을 보장받고자 하는 것이 한탕주의인 것이다. 따라서 한탕주의는 난폭성과 과격성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난폭함은 스트레스의 해소와 카타르시스를 보장하고, 과격함은 목표의 성취를 앞당기는 효과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생활화된 일회주의의 일상적 예로는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한 잔의 커피를 들 수 있다. ‘커피를 마신다’는 결과를 획득한 후, 다음을 예비하여 잔을 씻고 보관하는 번거로움도 없이 쓰레기통에 종이 컵을 던져 버리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는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 오히려 편리함과 부담 없는 개운함만이 있다. 부담 없음은 짊어지지 않음으로서의 생략이고 개운함은 최상의 컨디션이므로, 그것들은 곧 돈을 향해 달려가는 빠른 속도를 보장한다. 이러한 일회주의의 팽배는 인간관계마저 효용가치로만 유지하고자 하는 풍조를 만연시키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말초적 쾌락의 추구로 이어지게 된다. 인간이 가진 외적․물적 가치만이 추구 대상이 되는 비인간적인 세태가 그리하여 형성되고 고착된다.


  상대주의와 이중성과 일회주의의 창궐은 현대 한국의 경우, 근원적으로 <정치권의 타락>이 몰고 온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정치에는 절대적 기준이 없다. ‘국민을 위해서’라는 주장은 구호에 불과하다. 그들의 관심은 당파적 이익과 개인의 영달에 집중되어 있으며 목표는 재선출과 권력의 유지뿐이다.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 정치인의 주장과 논리는 유연한 방향전환성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신속히 말을 바꿀 줄 알아야 하고, 지역감정이나 매카시 선풍도 망설임 없이 일으킬 줄 알아야 한다. 상대편과는 계획적으로 대립하고 적당한 선에서 전략적으로 타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 있어 유권자는 선거 때만 현혹하여 표를 긁어모으는 무지한 군중에 불과하다. 유권자 앞에서 짓는 그들의 온화하고 근엄한 얼굴 뒤에는 언제나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기 위한 욕심이 도사리고 있다. 한국에 있어서는 어린아이도 정치인을 믿지 않는다. 간혹 비판적 사고를 가진 진보주의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대개 선거에 불참하고 임시공휴일의 행락길에 나섬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 냉소주의를 만족시킨다.


  정치적 폐해로서 또 하나 심각한 것이 <섹터주의>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섹터주의는 ‘두레’와 같은 협력적 공동작업을 위한 모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절정은 정치정당에서 이루어진다. 한국의 정당에는 이념적 색깔이 없다. 진보도 보수도 그들의 지향점이 아니다. 출신지역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면서 유권자인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정치인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 비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섹터주의는 언뜻 보면 인간적인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 또는 취미와 친목 등을 도모하기 위하여 뭉친 사람들의 집단은 슬픔과 기쁨을 나누며 힘을 합쳐 역경을 헤쳐나가고 그들의 취미를 충족시켜감으로써 결속력과 친화력을 강화한다. 동창회, 친목회, 각종 직장의 퇴직자 모임, 종친회, 화수계 등은 물론, 조기 축구회, 동인회 등의 운동이나 취미 모임들이 그것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공동체 의식의 표출로 보이기조차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섹터는 각자의 이익추구를 위한 한시적 연합체에 불과하다. ‘지금 이 일에 있어서 누가 내 편을 들어주는가’, ‘내가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기준에서 출발하는 일회적이고 제한적인 파당에 불과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되고,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형제와 동급생과 직장의 동료가 제일차적인 나의 경쟁상대자가 된다. 무한경쟁을 요구받고 있는 풍토에서 이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차라리 생존의 적들로 된다. 그가 살면 내가 죽어야 하고, 그가 승진하면 내가 탈락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섹터주의의 표면적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그 이면에는 심각한 부정성이 공존한다. 우리 모두 차가운 웃음을 흘리면서 시기하고 경쟁하면서 이기고 살아 남아야겠다는 전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섹터주의는 결과적으로 불타는 적개심과 끓어 오르는 적대감을 본질적으로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가 도덕 군자인 양 행세한다. 상대주의와 이중성과 일회주의, 그리고 섹터주의가 그 생명력을 나날이 키워 가는 만큼 해체된 윤리의 살점들은 자꾸 썪어가고, 그것들의 봉합과 복원은 더욱 멀고 멀어진다.


4. 윤리적 새 판 짜기


  현대인의 삶의 위기상황과 가치전도 현상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도 없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완전한 해답이나 대안을 내어놓은 자가 없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완전한 해답이나 대안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성급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굳이 그것을 일시에 내어놓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독단에 그치고 말 것이다.


  지금까지 제시되어 온 대안들 중 일부는 “전통사상의 창조적 계승”7)이라는 측면에서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현대문명의 폐해를 극복하는 사상적 처방이 다름 아닌 새로운 인본․인존정신과 인도 및 자연애호정신인 것”8)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새로운 인본․인존정신과 인도 및 자연애호정신’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하여 전통사상의 창조적 계승이 되는지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어떤 방법으로 실현할 수 있고, 그 실현이 또한 어떻게 현대문명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게 되는가 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고 있다. 한 마디로 해서 이러한 주장은 추상적일 뿐만 아니라 공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국수주의적 입장에서는 한국인의 도덕적 정체성을 전통사상에 두고, 전통사상의 복원이야말로 현대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강조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전통사상이 과연 온전히 우리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선결문제로 대두하며, 백 번 양보하여 그것의 복원으로 설사 현대적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러한 ‘되돌아 감(복원)’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시간이나 시대는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본질은 미래라는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으로서 그것은 되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대와 시대정신 또한 마찬가지이다. 시대란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간의 역사적 구분으로서의 한 토막에 다름 아니며, 시대정신이란 그러한 시대적 토양 위에서 생성되어 나온 것으로서 시대의 진전에 따라 변해 가는 것이며 나름대로의 일정한 수명을 살고는 죽어버리는 것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더 이상 어리석지도, 순진하지도 않으며 소박하지도 않은 현대인에게 공허한 도덕적 규범의 당위적 요청이 언제까지나 먹혀들 수는 없다. 차라리 이미 죽어버린 도덕적 이데올로기의 사슬에서 모든 사람을 풀어놓고 그들에게 반도덕적으로 살기를 허용하는 것이 더욱 실질적이지 않겠는가. 그런 연후에 게임의 공정한 룰을 요구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아니 그러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왜냐 하면, 이중성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정서법(情緖法)에 그것이 수용될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정한 룰 또한 요구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문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 인식의 공감대 형성이다. 현대적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 정서적 호소를 현대인 모두를 향해 보내는 일이다. 지난날의 사람들이 뿌린 씨를 오늘의 우리가 거두어들이듯이, 미래의 후손들은 오늘 우리가 뿌린 씨를 거두어들이게 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주지시킴으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문제로서 보다 심각하게 알도록 하는 것이다. 이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안다는 것은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이미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언하여 문제 인식은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후에 충분한 논의와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부분적인 대안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고, 그것들이 다시 극복․종합되었을 때 우리는 비록 불완전할 망정 하나의 대안과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듯이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윤리가 나와야 한다. 윤리적 새 판이 짜여져야 한다. 거기에는 전통의 윤리적 덕목들과, 거기에 반하는 성해방이나 남녀평등과 소득의 재분배 등 새로운 요구들이 동등한 요소적 가치로서의 자격만 가지고 부분적으로 용해될 수도, 제외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인고와 산고를 거쳐 새로운 윤리가 정립될 수 있다면, 그 때에는 사람들이 무엇에 대해서나 빈정대기를 삼갈 수 있을 것이고 지친 듯이 비웃는 것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현대인은, 놀라움, 감격, 외경의 임포탠스에서 벗어나 내일을 예비하는 건강한 삶을 경건하고 진지하게 싹 틔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할 것이 철학이고 인문학이다. 철학은 비록 현실적으로 돈이 되는 학문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근원적 문제들)의 정당성과 방향성을 묻고 대답을 찾는 논의의 학문이고, 인문학은 물질이 아닌 정신을 문제 삼는 인간존중의 근원적 토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의 부흥과 인문학 살려내기 ― 윤리적 새 판 짜기의 제일보는 바로 이것이라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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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기서 「현대」란 이 글이 쓰여지고 있는 1999년 1월, 그러니까 20세기말에서 21세기로 건너가는 과도기적 시기로서의 현시대를 의미한다.


2) 문성학, 『철학, 삶 그리고 윤리』, 형설출판사, 1996, 350쪽 참조.


3) <현대인>이란 주 1)의 현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현대인>은 <현대 세계인>이라는 뜻의 보편성으로 이해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글은 대한민국의 『민족정신의 원류와 전개』라는 유목적적 출판원고의 한 부분으로 쓰여지는 것이므로 <현대인>이 <현대 한국인>을 뜻하는 제한적 의미로 쓰여져야 한다는 요구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의 <현대인>의 의미는 보편성과 제한성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왜냐 하면 세계는 이미 하나의 세계로 범세계화되어 있으며, 생활 문화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현대는 개별국가나 민족의 변별성이 거의 사라진 시대라고 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4)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하기락 역, 『윤리학』, 형설출판사, 1983, 33쪽 참조.


5) 니콜라이 하르트만 저, 하기락 역, 『윤리학』, 형설출판사, 1983, 34쪽 참조.


6) 윤리는 도덕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했을 때 도덕과 윤리는 서로 다르다. 도덕은 역사적으로 성립한 것으로서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달라진다. 현대와 고대의 도덕이 다르고 동양의 도덕과 서양의 도덕이 다르다. 따라서 도덕이 전제하는 선(善)이라는 것은 그 표준이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이와 같은 도덕의 다양성과 모순을 극복하고 통일하고자 하는 요구가 윤리의 과제이다. 그러므로 윤리는 도덕의 일반적 보편성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덕을 살아 움직이는 어떤 것이라고 한다면, 윤리는 도덕이 인간의 마음속에 확고한 자리를 잡고 인간에게 절대적 최고선의 방향을 정해주는 일종의 적극적 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대는 현대 나름대로의 도덕은 있겠으나, 방향을 정해주는 힘으로서의 윤리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 인륜, 윤리의 개념 구분에 대해서는 김주완, 『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 형설출판사, 1998, 51-52쪽을 참조할 것.)


7) 경산대학교 출판부, 『민족정기론』, 1995, 485-499쪽. (윤사순, 「전통사상의 창조적 계승」)


8) 같은 책, 498쪽. (윤사순, 같은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