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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재원고] 성과 사랑 - 하나이면서 둘인 삶의 원천[김주완]

김주완 2011. 2. 28. 14:39

Ⅰ. 성과 사랑 ― 하나이면서 둘인 삶의 원천

                                                                                                                                         김 주 완

1.1 성과 사랑, 그 연관성과 무관성


  1.1.1 그리움으로 어느 날 문득 다가오는 성과 사랑


성과 사랑, 모두가 알면서 끝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말 중의 하나가 그것이다. 우리들 존재의 시원은 거기이며, 그것들에 따라 우리의 삶은 지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묘한 것은 그러한 사정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어떠한 지장도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그것으로부터 태어나 그것 속에 묻혀서 우리는 잘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고, 우리가 그러하고 마찬가지로 우리의 후손들도 그러할 것이라는 것, 그것만이 우리에게는 자명하다.

궁극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하여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러한 것일수록 오히려 말할 것이 더욱 많을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말해버림으로써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어지고 말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이렇게도 말할 수 있고 저렇게도 말할 수 있는 것 ― 바로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많은 말하기(담론)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말하고 또 말해도 말할 것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 것들 중의 하나, 그러니까 참으로 말할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드러내 놓고 말해오지 못한 것 중의 하나가 성과 사랑의 문제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성과 사랑에 대한 담론이 더 이상 금기시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담론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내놓고 비난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페미니즘의 대두에 따른 외적인 사정의 변화일 뿐, 내적으로는 아직도 성과 사랑에 대한 담론은 점잖지 못한 것이라는 전통적 의식의 잔재가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목적이 된다.

사랑을 <인간에 대하여 무의식적으로 생기는 좋은 감정>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무의식적인 낯익음>으로서 이미 태아기부터 생겨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태아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미 어머니의 정서를 공유한다고 한다. 임신한 모체가 즐겁거나 행복하거나 슬프거나 우울한 감정을 가지게 되면 뱃속의 태아도 동일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조되는 것이 태교이다. 모체가 바른 생각과 안정된 기분을 가짐으로써 태아에게 교육적 효과를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태교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태교의 이론에 따르면, 모체와 태아가 생명적으로 하나의 동일체로 공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하나의 동일체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의 일심동체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본다면 모체가 좋아하는 사람을 태아가 좋아하게 되고 모체가 싫어하는 일을 태아도 싫어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태아는 모체를 통해서 사랑과 미움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배우게 되고, 사랑과 미움의 대상으로서 모체 이외의 사람들의 존재를 터득하고 성적으로 구별하게 되는 것이다.

태아는 분만을 통하여 모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영아가 되고 유아로 자라면서, 이제 생명적으로는 어머니와 분리되어 한 몸이 아니라 두 몸으로 된다. 그러나 아직 정서적으로는 어머니와 가장 가까이 있다. 탯줄을 통한 연결은 끊어졌지만, 수유라는 연결고리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연결고리를 바꾸면 유아는 생모가 아닌 타자를 생모로 알 수 있다. 유모가 키우는 아이나 어린 시절 입양된 아이들은 생모가 아닌 수유자에게 곧바로 적응하고 그들에게 낯익어 버린다. 영아는 수유자의 냄새와 손길과 품에 안정감을 느끼고 낯익어 가면서 적응한다. 낯선 냄새와 손길과 품에는 본능적으로 불안감을 느끼며 거부한다. 그 시기에 다시 수유자를 바꾸는 경우 처음 한동안은 불안감을 보이겠지만 머지 않아 또 거기에 익숙해진다. 이렇게 보았을 때, 낯익음은 본질적으로 기억의 산물이고 기억은 시간적인 제약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시간적인 제약 속에서 기억이 일찍 사라지거나 오래 가거나 하는 것은 지능에 의거한다. 영아기(嬰兒期)나 유아기의 지능은 아주 낮은 지능이다. 그리하여 대개의 경우 성장하고 나면 유아기의 기억은 까마득히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아기, 영아기, 유아기의 경험들은 설사 기억 속에서는 그것들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정서의 밑바탕에는 잠재될 수 있다. 그래야만 거기서 인간적인 성과 사랑의 성립근거를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청소년기로 이행하면서 인간은 성과 사랑에 눈을 뜬다. 여기서 <눈뜬다는 것>은 <의식>을 의미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적 특징들이 먼저 몸으로 나타난다. 성기가 커지고 음모가 돋아나고 여성의 경우 유방과 둔부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사춘기라고 하는 시기가 이 때이다. 몸으로 나타나는 성적 특징의 발달은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먼저 의식하게 된다. 거기에 수반하여 이제 독립된 하나의 개체(인격적 개체)로서 자아의식이 형성되며, 자아를 인정받기 위하여 자아에 대한 부정적 요소들에 대하여 저항하게 된다. 그래서 사춘기를 반항기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때 비로소 막연하나마 이성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게 된다.

<그리움>의 사전적 의미는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보고 싶은 대상을 마음이라는 캔버스에 그리게 되는 것이 그리움이다. 따라서 그리움은 어원적으로 그림에서 온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사춘기의 남녀는 잠재의식 속에 남아있는 어렴풋한 이성에 대한 기억과 선호에 따라 막연한 이성상을 자기의 마음에 그리게 되고 그렇게 그려진 모습(像)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가까이 있는 특정한 사람, 사촌이거나 동네의 오빠나 누나 혹은 동생이거나 또는 학교의 선생님을 상대로 하여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이상적인 이성상을 투영하고 그 또는 그녀를 혼자서 좋아하고 그리워하게 된다. 추상적 대상이 구체적 대상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가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라도 눈치 채이게 되면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게 된다.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아직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남에게 보이게 되었을 때 나에게 나타나는 감정이 부끄러움이다. 그러므로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란 내 마음의 못물에 잡혀있는 살얼음이다. 아직 어떤 형체로 굳어진 것은 아니지만 어떤 형체를 향해 나아가는 단계가 살얼음이다. 남에게 보이게 된다는 것은 빛 속에 드러냄이다. 그리움이라는 살얼음이 빛 속에 설핏하게 드러나면서, 프리즘을 통과한 빛살처럼 영롱한 색깔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하는 것이 부끄러움이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이란 순수의 표출이자 순수 그 자체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무심히 눈길만 마주쳐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소녀의 수줍음이 부끄러움이며, 먼길을 다녀 온 신랑 앞에서 옷고름을 살며시 깨물며 살풋이 고개를 숙이는 새색시의 수줍음도 부끄러움이다. 좋아하는 나의 마음이 드러났다면 어쩌지 하는 염려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며, 애타게 기다린 나의 마음이 눈치 채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오는 부끄러움이다. 만약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숨기고 싶어하는 몸 동작이 고개 숙임이다. 부끄러움은 눈길의 마주침에서 온다. 눈은 마음의 창이기에 내 마음이 너에게로 드러나는 것은 눈길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눈길의 마주침을 통해서 내 마음을 상대편에게 들키게 되고, 또한 내 마음을 숨기기 위해서는 눈길을 피하여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리움은 사랑의 전초기지이다. 그리움은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마주 앉아 한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발전한다. 나를 그에게 알리고 싶고 그에 대하여 깊이 알고 싶어진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에게 해주고 싶어진다. 이러한 욕구는 시간의 진전에 따라 하나하나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는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 채 그리움이란 병만 더 심해지기도 한다. 이 경우, 한 편에서 느끼는 것이 사랑의 희열이라면 다른 편에서 느끼는 것은 짝사랑의 비애이다. 얼핏 생각하면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짝사랑은 사랑의 다른 반쪽이며,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보다 순수한 사랑이다. 대개의 경우 사춘기에 경험하는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아직 상호간에 충분히 사랑할만한 여건이나 정신적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단계가 사춘기이므로 그러하다. 이 때까지는 아직 성적 욕구가 발생하는 단계가 아니다. 성욕이 끓어오르는 것은 사랑이 충분히 진전되었을 때의 일이다.

성욕과 사랑은 일정한 나이(자연적 연령층)에 이르면 공통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극히 개별적으로 찾아온다. 사람에 따라서 조금 일찍 오기도 하고 조금 늦게 오기도 한다. 지극히 실존적 문제로서 개개인 각자에게 가장 큰 문제로, 가장 절실하면서도 내밀하게 찾아오는 성욕과 사랑은 하나로 합쳐져서 오는 것은 아니다. 양자는 따로따로 오면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온다. 어느 것이 먼저 오고 어느 것이 뒤따라오는 순서가 반드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성욕이 먼저 오고 사랑이 뒤따라오는 수도 있고, 사랑이 먼저 오고 성욕이 뒤따라오는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단계(사춘기)에서 성욕과 사랑이 합쳐져서 한 사람의 특정한 대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성적 특징이 발달하게 된 몸은 이미 성숙 할 만큼 성숙한 단계이므로 강하게 솟구치는 성욕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설사 상대방에 대하여 성욕이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이 단계에서는 아직 그것을 숨기고 싶어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이 요구하는 성욕은 자위라는 방법으로 스스로 해결하게 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성과 사랑에 대한 인간의 눈뜸은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다. ‘인간은 성에 대하여는 몸으로 먼저 눈을 뜨고, 사랑에 대하여는 마음으로 먼저 눈을 뜬다’고 말이다. 이와 같이, 올 때는 서로 다르게 오더라도 두 가지(성과 사랑)는 마침내 하나로 합쳐질 수밖에 없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 진전하면서 두 사람은 더 오래, 더 가까이 있고 싶어진다. 그리고 하나가 되고 싶어진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그리하여 둘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가 되어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진다. 두 몸이 더 가까이 되고 마침내 하나가 되는 방법이 포옹이고 키스이고 섹스이다. 이것이 ‘사랑이 있는 섹스’(sex with love)1)이다. 그리움에서 출발하여 하나로 합쳐지는 섹스에 이르는 이 단계에 왔을 때 두 사람의 희열과 성취감은 가장 높게 고조된다. 삶이 활력으로 넘치게 되며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움으로부터 다가오는 사랑이나 성은 삶의 원천이며 원동력이다. 그것들 없이는 삶이 출발할 수도 유지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종적 유지와 전승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끊임없이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남녀간의 사랑은 섹스를 지향한다. 사랑과 섹스의 산물로서 나온 자식이 자라서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쳐 부모가 되는 것이다.


1.1.2 사랑 있는 섹스, 사랑 없는 섹스, 섹스 없는 사랑


사랑과 섹스는 이와 같이 긴밀한 상호연관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서로 무관할 수 있다. ‘사랑이 있는 섹스’, ‘사랑이 없는 섹스’, ‘섹스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위에서 살펴본 ‘사랑이 있는 섹스’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입장이다. <사랑한다면 성관계를 가져도 좋다>는 것이 이 주장의 요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혼한 부부간에만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전통적 도덕률이나 한국적 실정법과는 상반된 입장이 된다. 양해림이 “사랑이 있는 섹스란 누구에게나 승인될 수 있는 아주 상식적인 성윤리의 관점이다”2)라고 한 것은 서구의 윤리관, 또는 자연주의적 윤리관에 입각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이 있는 섹스’라는 말이 ‘사랑이 없는 섹스’나 ‘섹스 없는 사랑’이라는 말과 유비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합의를 도출한 것도 아니며, 특히 한국적 현실에서는 실정법과의 관계가 상반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누구에게나 승인될 수 있는 상식적인 성윤리의 관점’이라고는 결코 할 수가 없겠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적 현실에서 상당히 많은 젊은이들이 성 개방의 풍조에 따라 <사랑한다면 성 관계를 가져도 좋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나중에 중매 결혼을 하게 되고 자기의 아내나 남편이 혼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성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을 쉽사리 용납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성 관계는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용납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직도 성 관계는 결혼을 통해서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전통적 윤리의 힘이 상당히 강하게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성의 문제에 있어서, 적어도 나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상대방에는 엄격한 이기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것이다. 혹은 또, 성적 현실은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데 성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아직도 이만큼 뒤떨어져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에 대한 이중적 구조의 문제이다. 이면적으로는 성 개방이 상당하게 확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아직도 성적 순결을 높은 가치로 인정하면서 요구하고 있는 현실적 구조가 바로 이중적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이중 구조는 인격적 이중 구조를 형성한다.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들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성적 가치관의 이중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섹스’는 광의로 보았을 때, 우선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도 있을 수 있다. 권태기에 접어든 부부나 매너리즘에 빠져든 부부, 혹은 처음부터 사랑이 없으면서도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였거나 자녀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부부들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사랑은 없더라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끈끈한 정’이나 ‘미운 정, 고운정’이 뒤썩인 감정으로 성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사랑이 없는 섹스’라고는 하기가 힘든다. ‘사랑 없는 섹스’의 전통적인 예는, 맞선조차 보지 않고 혼례를 치르던 전통적인 결혼에서의 첫날밤의 성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섹스’의 주종은 역시 성의 상품화 시대라는 현대의 특성에 따른 성관계이다.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성을 강탈하는 행위인 강간이 ‘사랑 없는 섹스’임은 말할 것도 없다. 상대방과의 합의에 의한 매춘과 매음, 원조 교제, 성적 자유주의자들의 성관계 등도 ‘사랑 없는 섹스’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계약동거 중의 성관계도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사랑이 없는 섹스’도 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사랑의 감정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섹스’는 본래적으로 “감정을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섹스”3)이다. 다른 일체의 감정적이거나 도덕적인 부담 없이 섹스의 쾌락만을 추구하겠다는 입장과 쾌락의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성관계에 부수될 수 있는 어떠한 책임감도 벗어나겠다는 입장이 ‘사랑 없는 섹스’의 전제가 된다. “이러한 섹스는 애정밖에 있는 성관계(혼외정사)를 옹호한다.”4) 이러한 성관계는 이성간이나 동성간에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사랑이 없는 섹스’라고 하여 정말로 아무 감정도 없는 것은 아니다. 양해림은 이러한 섹스를 다음과 같이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섹스(사랑 없는 섹스)는 깊이 들여다 보면 내 몸에 대한 강한 애착이 남아있다. 남의 감정, 남에 대한 내 감정은 무시하더라도 내 몸에 대한 내 감정은 포기하지 않는다. 내 몸에 대한 자기 도취적 사랑,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narcissism)이 ‘사랑 없는 섹스’의 정체이다. 왜 현대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사랑 없는 섹스’는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요구하는 것일까?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allrd)는 현대의 소비사회에서 몸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유재산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개인은 자기 몸을 재산으로 관리하고 조작하고 투자한다. 또한 몸은 심리적인 면에서 사회의 지위를 표시하는 중요한 기호이기 때문에 자기 도취의 숭배 대상이다. ‘사랑 없는 섹스’ 곧 내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만 있는 섹스는 몸을 가장 아름다운 기호로 소비하는 사회를 요구한다.5)


‘섹스 없는 사랑’은 성적 장애인이나 성적 미성숙자의 사랑이거나, 아니면 성적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어떤 사정이나 이유 또는 신념에 의하여 성관계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의 사랑을 의미한다. 짝사랑 중의 일부도 ‘섹스 없는 사랑’에 속한다.

성적 장애인이나 성적 미성숙자는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그리고 성적 욕구를 가지더라도 성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성관계를 가질 수가 없다. 어떤 사정이나 이유 또는 신념에 의하여 성관계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의 사랑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혼전 순결 가치를 추구하는 연인들은 실제로 사랑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신념에 의하여 결혼할 때까지 성관계를 가지지 않으려고 할 것이며, 그러한 경우 그들은 결혼 전까지 ‘섹스 없는 사랑’을 하게 될 수 있다. 성직자들은 종교적 교리에 따라 만인을 사랑하면서도 어느 누구와도 성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물론 이 때의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에 대한 사랑’ 혹은 ‘이웃 사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형제자매간의 사랑이나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나 친척간의 사랑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그것이 금기의 선을 넘어서서 ‘섹스 있는 사랑’이 될 때 종교적 파계의 계기가 되거나 근친상간이 될 수 있다. 혹은 또 성인의 경우에도 직장 동료이거나 이웃사람이거나 학교 동창생이거나 간에 우리가 흔히들 ‘플라토닉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러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없으란 법은 없고, 그러한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곧 ‘섹스 업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신파의 주인공들처럼 절실하고 간절하게 사랑하면서도 상대방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하고, 결혼 전이나 결혼 후에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성관계를 일체 가지지 않으면서 사랑을 지속해 나가는, 우리가 소위 ‘비련의 사랑’이라고 하는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들 또한 ‘섹스 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남녀간에 있어서 한편이 다른 편 보다 나이가 월등하게 많거나, 도덕적으로 성숙해 있는 경우 ‘섹스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사춘기의 학생이 선생님을 사랑하는 경우, 나이가 많고 도덕적으로 성숙해있는 교사가 자기통제에 의하여 성적인 욕구를 억제하면서 학생에 대한 사랑을 한다면 ‘섹스 없는 사랑’이 성립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춘기의 남녀는 첫사랑의 대상으로서 대개 주변의 사람을 선택하기가 쉽고, 그 중에서 가까이에 있는 선생님에 대한 사랑을 하기가 쉬우므로 이러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첫사랑은 ‘섹스 없는 사랑’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짝사랑 중의 일부도 ‘섹스 없는 사랑’에 속한다는 어떤 이유에서인가? ‘짝사랑’이란 ‘자기를 마음에 두지 않는 이성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일방에서는 타방을 향해서 사랑을 주지만 타방에서는 그것을 받지 않는 사랑이 짝사랑이다. 짝사랑을 하는 쪽에서는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것을 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수 있다. 상대편이 원하다면 섹스까지 허용하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짝사랑을 받는 자는 그것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섹스 없는 사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짝사랑이 ‘섹스 없는 사랑’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받는 쪽에서는 ‘사랑 없는 섹스’로 상대방의 짝사랑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그는 사랑을 받지 않는 것이지 섹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게 된다. 예컨대 짝사랑을 하는 쪽에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를 원할 수 있다. 그러나 받는 쪽에서는 그것을 일시적 쾌락이나 또 다른 어떤 것을 얻기 위하여 받는 경우가 그러한 것이다. 이 경우 짝사랑을 하는 쪽에서는 ‘사랑 있는 섹스’가 되고 짝사랑을 받는 쪽에서는 ‘사랑 없는 섹스’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 기준은 섹스가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 이후의 진전은 여러 갈래가 될 수 있는 것이므로 설사 출발은 이러했다고 하더라도 쌍방간에 모두가 ‘사랑 있는 섹스’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섹스 없는 사랑’으로 되돌아갈 길은 막혀 버린다.


1.1.3 성과 사랑의 주고받는 관계


프롬(Erich Fromm)에 따르면 “사랑은 본질적으로 주는 것이다.”6) 사랑하게 되면 두 사람이 하나가 되고 싶어지며, 그와 같이 하나로 합일하는 방법이 섹스이다. 성행위에 있어서 여성은 남성을 향해 자기를 열어줌으로써 남성이 자기에게 들어와 하나가 되도록 해 주며, 남성은 여성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하나가 된다. 남성은 사정을 통하여 자기자신을 여성에게 건네주고, 여성은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결국 자신의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다.7)

이러한 프롬의 설명은 성과 사랑의 주고받는 관계 전체를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부터 살펴보자. 사랑은 우선 소리 없이 찾아올 수가 있다. 직장이든 학교든 혹은 사회단체이든 간에 같은 집단, 같은 공간에서 오래 동안 같이 생활하다 보면 어느새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생겨 있을 수 있다. 공동생활 속에서의 신뢰와 협조와 존중이 사랑으로 이행하는 경우이다. 단잠을 자고 난 겨울 아침에 뜻밖에도 하얗게 눈이 내려있는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그 풍경에 신선한 충격과 상쾌한 기분을 느끼듯이, 어느 날 문득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소리 없이 찾아오는 사랑>의 특징이다. 이와는 달리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첫눈에 반해 버리는 사랑이 있다. 상대방을 보는 순간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은 두근거리고 온 몸이 얼어붙어 경직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넋을 잃어버리는 그런 사랑이 있다. ‘첫눈에 반해 버렸다’라고 흔히들 말하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소리내며 찾아오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운명적 만남’이니 ‘천생연분’이니 하는 사랑이 그러한 사랑이다.

소리 없이 찾아오는 사랑이든 소리내며 찾아오는 사랑이든 간에, 그리고 서로간에 시간차가 있든 없든 간에 상대방도 이 편과 똑 같이 사랑이 생겨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사랑하는데 다른 편에서는 사랑하지 않는다면 여기에 바로 짝사랑의 비애가 자리하게 된다. 그러나 짝사랑은 일방이 타방을 향해서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순수한 사랑이다. 상대방이 받지 않는다고 줄 수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사랑이란 내가 받고 싶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내가 받고 싶어도 상대방이 주지 않는다면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주고받는 관계에 대하여, <주는 사랑은 받는 사랑을 조건으로 하지 않지만, 받는 사랑은 주는 사랑을 조건으로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성을 주고받는 방식은 사랑을 주고받는 방식과는 다르다. ‘사랑 있는 섹스’나 ‘사랑 없는 섹스’ 모두가 섹스를 주고받는 방식이 사랑을 주고받는 방식과는 다소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사랑 있는 섹스’의 경우,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섹스를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며, 설사 자기 쪽에서는 성적 욕구가 없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요구가 있으면 자기노력에 의하여 자기의 성적 욕구를 발동시켜 상대방의 요구에 자기 자신을 맞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쌍방간의 섹스에 돌입하게 될 것이며 같이 오르가즘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주는 섹스는 받는 섹스를 조건으로 하고, 받는 섹스도 주는 섹스를 조건으로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상대편의 조건을 충족시켜 주고자 하는 욕구를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그러나 ‘사랑 없는 섹스’의 경우, 상대방의 의사 여부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매춘이나 매음처럼 합의에 의한 섹스의 경우는 합의의 전제가 곧 섹스라는 조건이 되므로 더 이상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경우는 <주는 섹스는 거래를 조건으로 하고, 받는 섹스도 거래를 조건으로 한다. 그리고 거래는 관행과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강간의 경우는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섹스를 강탈하는 것이므로 <주는 섹스는 받는 섹스를 조건으로 하지 않고, 받는 섹스는 스스로 받는 것이 아니므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계약동거자의 섹스는 ‘사랑 있는 섹스’의 경우와 유사하다. 계약동거 그 자체가 이미 합의에 의한 것이므로 섹스도 합의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주는 섹스나 받는 섹스 모두가 합의를 조건으로 한다>고 하여야 하겠다.

이상과 같이 보았을 때, 사랑과 섹스는 한 편으로는 상호 규정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일방적 규정성을 가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 있는 섹스’나 ‘사랑 없는 섹스’의 경우는, 사랑이 섹스를 규정하고 섹스가 사랑을 규정하는 관계로 파악될 수 있으므로 상호 규정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섹스 없는 사랑’의 경우는, 없는(존재하지 않는) 섹스가 있는(존재하는) 사랑을 규정할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섹스를 규정할 수는 있을 것이기에 ‘사랑이 섹스를 규정한다’는 일방적 규정성만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2 성의 개념들


한자어에서 성(性)은 심(忄)과 생(生)이 합쳐진 말이다. 심(忄)은 ‘심(心)’이 변으로 쓰일 때의 자형이다. 심(心)의 상형은 ‘사람의 심장의 모양’을 본 뜬 그림이 발전하여 이루어진 글자이다. 그리고 생(生)의 상형은 ‘초목이 나고, 차츰 자라서 땅 위에 나온 모양’을 본 뜬 글자이다. 따라서 생(生)은 ‘태어남’, ‘삶’, ‘새로움’, ‘자람’, ‘발생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성(性)은 ‘심장이 만들어짐’, ‘심장이 태어남’, ‘심장이 새롭게 뜀’, ‘심장이 살아있음’ 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심장은 어떻게 만들어지며, 심장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심장은 난자와 정자의 결합으로 잉태되고 만들어진다. 심장의 박동 개시는 삶의 시작이며, 심장의 박동 중단은 삶의 종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장은 곧 생명의 원천이며, 생명은 성교를 통하여 잉태된다. 자원(字源)을 통해서 본다면, 이와 같이 성은 곧 성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유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의 사전적 의미에는 성교라는 뜻이 없다.

성(性)의 자전적(字典的) 의미는 ‘성품’, ‘타고난 사람의 천성’, ‘사물의 본질’, ‘생명’, ‘생활’, ‘만유의 원인’, ‘남녀, 자웅의 구별’ 등이다. 성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도 이와 같다. 즉 성은 ‘사람이나 사물의 본 바탕’, ‘사람이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소질’, ‘남녀 및 암수의 구별’ 등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가(佛家)에서는 ‘만유(萬有)의 본체’를 성이라고 한다.

성의 자원(字源)으로 보면 성(性)이 성교(性交)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 후 의미가 고정화되는 과정에서 ‘남녀 및 암수의 구별’을 뜻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말에는 ‘성교’나 ‘교접’이나 ‘교미’라는 말이 따로 있기에 굳이 성이 성교를 함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다시 성이 보다 다의적으로 쓰여져서, 경우에 따라서는 성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 영어의 섹스(Sex)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성(性)으로 옮긴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 번역어를 찾을 때, 영어의 섹스(Sex)가 가진 의미 중에서 ‘남녀 및 암수의 구별’이라는 뜻에 초점을 맞추어 성(性)에 대응 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섹스(Sex)는 ‘남녀 및 암수의 구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교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섹스(Sex)와 성(性)이 대응어가 되면서부터 성(性)은 ‘남녀 및 암수의 구별’을 의미하기도 하고 ‘성교’를 의미하기도 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성에 관련된 개념들로써 영어권에서는 섹스(Sex)와 젠더(Gender)와 섹슈얼리티(Sexuality)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1.2.1 섹스(Sex) ; 생물학적 성


섹스는 우선 생물학적으로 양성(남성/여성 ; 수컷/암컷 ; Male/Female)을 구별짓는 개념이다. 사람에게 쓰여질 때는, 남자와 여자를 생물학적으로 구분할 때 쓰여지는 용어가 섹스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는 남자로서의 섹스가 남성이고 여자로서의 섹스가 여성이 된다. “서구에서 섹슈얼리티의 뿌리가 되는 섹스란 말은, 라틴어의 Sexus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19세기 이전까지 이 말은 어원 그대로 ‘Section'의 의미인 Seco(자른다, 나눈다: cut)란 동사의 파생어였으며, 라틴어의 섹스툼(Sextum)에서 나온 것으로 ‘나누어진 것, 구별된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8) “구약성서 창세기에서는 남자의 분신으로 나뉘어 여자가 된 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류를 자(雌), 웅(雄)으로 구분하는 남․여의 두 가지 부류로 나누는 것으로 쓰였다. 즉 양성(남녀)의 구별이야말로 성 개념 그 자체를 성립시키는 필요조건이다.”9)

우리는 직관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고 있지만 양성의 구별은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생물학자들은 성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대략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를 제시한다.

  ① 성염섹체의 XX와 XY로 구분

  ② 성호르몬

  ③ 생식세포인 정자와 난자를 생산하는 기관

  ④ 내부 생식기

  ⑤ 외부 생식기

  ⑥ 남자의 수염이나 여자의 젖가슴 등과 같은 2차 성징

이러한 기준은 한 개체가 여성인지 남성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특성에 근거한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한 개체에서 에스트로겐 호르몬이 더 많이 검출되고, 신체 구조적으로 자궁, 난자, 난소 등을 가지고 있으며, 크로모좀 배열이 XX일 경우, 생물학적으로 여성으로 본다. 이와 달리 한 개체에서 안드로겐이 활성화되어 있고, 신체 구조적으로 정자, 소낭, 음경, 음낭 등이 있으며, 크로모좀 배열이 XY일 경우, 그 개체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다.10) 섹스에 대한 이러한 구분은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성은 생물학적 기초에서 출발된 것이므로 다른 요인에 의해서보다 생물학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다음으로 섹스는 성행위라는 특정한 신체적 행위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섹스는 일상용어에서 성행위(sex act)를 뜻한다. 성행위에는 삽입, 구강․항문성교가 포함된다.”11) 우리가 보통 ‘섹스를 한다’거나 ‘섹스를 하고 싶다’, ‘섹스를 했다’라고 표현할 때의 섹스가 여기에 해당한다.

섹스라는 용어는 16세기 초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때는 남성집단과 여성집단 간의 엄정한 분할(성별적 차이)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이래 섹스라는 말이 담고 있는 지배적 의미가 양성간의 육체적 관계, 즉 ‘성관계를 맺는 것과 연관된다. 19세기 말 이후로 성은 성과학의 대상으로 자리매김된다.12) 성의 에로틱한 의미가 강조되면서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 매매될 수 있는 상품으로서, 그리고 개인이 가진 경제적 재산으로서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이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1.2.2 젠더(Gender) ; 사회․문화적 성


젠더(Gender)라는 말은 원래 ‘인류’ 또는 ‘인간 일반’을 의미했다.13) 물론 이 말은 일찍부터 문법적인 의미에서 명사의 성별을 구분하는 개념이었는데, 이것이 문법세계를 넘어서 현실에서의 성별구별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시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젠더는 사회적, 문화적으로 부여받게 되는 성역할로서 남녀의 성적 정체성을 말한다. ‘그 는 남성답다’거나 ‘그녀는 여성스럽다’라고 말해지는 그 때, 남성으로서의 그의 성과 여성으로서의 그녀의 성이 젠더인 것이다. 이전의 사람들은 생물학적인 성이 젠더(사회․문화적 성)를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환언하면 남성을 남성답게, 여성을 여성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생물학적인 성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 젠더라는 개념의 새로운 사용법이다.

젠더라는 개념의 새로운 사용법은, 남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환경과 조건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회․문화적 환경과 조건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주도권을 행사해 온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보고 이에 도전하는 입장이 제2기 여성주의의 입장이다14). 따라서 젠더 개념도 분화된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 젠더 개념과 현대적 젠더 개념이 그것이다. 전통적 젠더 개념은 제1기 여성주의의 입장이고 현대적 젠더 개념은 제2기 여성주의의 입장이다. 현대적 젠더 개념은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15)라고 하는 보부아르의 유명한 명제가 개념의 이해를 위해서 가장 적절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제2기 여성주의자들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를 여성 억압의 주된 원인으로 본다. “젠더의 성 역할이란 남성이 여성의 통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고안해낸 사회체제이며 습득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주장이다.”16) 남성은 합리적, 논리적인데 반해서 여성은 비합리적, 감정적이라고 하는 구분이나, 남성은 용감해야 하고 여성은 온순해야 한다는 등의 사회적 요구가 생물학적인 성 역할의 자연스러운 분화가 아니라, 사회적, 제도적으로 구성된 성 역할이며 그것은 여성통제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제도적인 강제에 의하여 이원적 젠더 체제에 길들여진다. 그리하여 남성은 사회가 요구하는 그러한 남성이 되고, 여성은 사회가 요구하는 그러한 여성이 됨으로써 남성의 여성통제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제2기 여성주의의 젠더 개념은 전통적 젠더 개념을 비판, 극복하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젠더란, 사회적 요구로서의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이라는 성별(성적 구별)이라고 할 수 있다. 환언하면, 어떤 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대우받는 성이 젠더인 것이다.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할 때, 그는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젠더(사회․문화적 성)로서는 여성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2001년 한국에서는 수술 및 호르몬 요법 등을 통하여 성전환(sex change / sex transformation)을 하고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신하여 연예계에 등장한 하리수가 폭발적인 인기로 돌풍을 일으킴으로써 트란스젠더(transgender)라는 말이 보편화되기도 하였다. 이 때, 하리수는 젖가슴의 성형과 성기성형 수술로써 여성의 외모와 성기를 갖추었으며 남자 친구(섹스 파트너?)도 앞으로 가지겠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물학적으로 정상적인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성교와 동일한 성교를 하리수와 앞으로 생길 그의 남자친구가 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인간의 성행위에는 삽입, 구강성교, 항문성교 등이 모두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생물학적으로나 혹은 법률적으로 하리수를 앞으로 남성으로 인정할 것인지, 여성으로 인정할 것인지의 문제는 잠시간의 뜨거운 논란을 일으켰을 뿐 아직까지도 여전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아 있다.


1.2.3 섹슈얼리티(Sexuality) ; 총체적 성


섹슈얼리티란 대략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등장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생물체는 성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생물학적인 의미의 섹스와 유사한 개념으로 쓰였다. 섹슈얼리티라는 개념은 이미 1800년대에 생물학과 동물학에서 기술적인 용어로 존재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섹슈얼리티는 19세기 말경에 처음으로 등장하였고, 『옥스퍼드』사전은 ‘성적인 것 혹은 성을 갖는 것의 성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17)

섹슈얼리티는 섹스 보다 그 의미하는 범위가 더 넓다. 섹스가 생물학적인 성의 구별이나 직접적인 성교를 의미하는데 비하여, 섹슈얼리티는 ‘성적인 것의 전체’를 의미한다. 성욕과 그 구체적인 충족방법이나 수단, 성의 정체성, 성적 이데올로기, 성과 관련된 사회적 제도나 관습 등의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섹슈얼리티의 외연이다.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성적 자기의식도 섹슈얼리티에 포함된다. 그러나 섹스도 그것이 인간의 섹스인 한에 있어서 단순하게 동물적 본능에 그치는 섹스는 결코 아니다. 인간의 섹스는 어쨌든 문화적이고, 사회화 된 섹스이며, 그 속에 감정과 의식과 정신이 내포된 섹스이다. 그런 의미에서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조주현은 이러한 맥락에서 성이라는 말로써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모두 포함하여 사용하고 있다.18) 섹스와 섹슈얼리티의 구분은 그러니까 편의상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섹슈얼리티를 규정하는 것은 역사적 구성물이다. “섹슈얼리티는 우리의 성적 느낌과 관계들, 우리가 자신을 규정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우리가 타인에 의해 성적으로 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는 방식들을 포함하고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지닌다.”19) 섹슈얼리티는 섹스에 관한 생각들, 의미들, 그리고 사회적 관행들을 말한다. 조주현은 이것을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정리하고 있다.20)

  ① 일부일처제, 일부다처제, 독신제도와 같은 성적행위와 관련된 사회적 관행들

  ②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로 자신을 규정하게 하는 성적 경향성 또는 정체성

  ③ 성적 욕망

  ④ 성적 관계, 또는 성의 정치성

섹슈얼리티는 개인의 욕망을 창조하고 조직화하고 표현하며, 특정방향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결국 사회적 존재로서의 남성과 여성, 즉 젠더를 창조한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가 사회를 구성한다. 섹슈얼리티는 우리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영역이며, 그에 기반해 성별 관계가 결정되는 영역이며, 끊임없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새로운 구성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영역이다.21) 남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억압받고 차별화 되어온 쪽은 언제나 여성측이었기에 섹슈얼리티의 정치성은 페미니즘의 주요한 이슈가 된다.

여성과 남성에게 차별적인 기준을 요구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성윤리와 성문화를 새로이 구성하기 위한 섹슈얼리티의 정치성은 현재 크게 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22) 첫째,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남성의 소유물로서 여성이 파손되는 것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몸에 가해진 폭력에 대해서 제재를 가하는 것으로 시각을 바꾸는 것이다. 둘째, 여성의 주체성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성의 문제에 있어서 여성은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선택되고 수용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제 여성이 보다 적극적, 공격적으로 선택하는 입장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여성의 주체성 강조이다. 말하자면 위계적 이분법을 뒤집는 것인데, 여서의 섹슈얼리티가 수동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결국 여성의 쾌락, 여성의 욕망에 대한 논쟁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려는 시도는 계속 모색될 것으로 보인다. 셋째, 섹슈얼리티의 전개를 막는 것이다. 이것은 성폭력의 경우, 성폭력의 특수성을 없애 버리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성폭력을 섹슈얼리티로 이해하지 말고 마치 얼굴을 맞은 것처럼 일반 폭력과 똑 같이 구분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성 가해자와 여성 피해자라는 이분법이 사라지게 되며 섹슈얼리티의 회로도 차단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에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성별의 권력관계가 해소된 상황이어야 한다.


1.3 사랑의 개념들


「사랑」이라는 말 ─ 누군가가 우리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막상 무어라고 해야 할지 망설여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사랑을 하도록 되어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벌써 사랑을 해 보았거나, 혹은 지금 하고 있거나 앞으로 하게 될 것이다. 사랑,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인간은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요한네스 로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갖가지 양식으로 사랑을 체험하고 나름대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개인들이 알고 있는 사랑이란 것이 늘 끝까지 완전히는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으로 머무르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또한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체험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깊은 체험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가 비록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 사랑을 외적으로 표현하며 그것이 내면의 깊이에까지 영향을 미쳐 마음을 설레게 하고 아름답게 비추기는 하지만, 사랑의 본연의 본질은 우리의 파악 능력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아무리 해도 결코 완전히는 규명할 수 없는 감추어진 신비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런 사랑의 실체 앞에서 우리의 언표(言表)들은 항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단지 머뭇거리며 말할 수 있을 뿐이다.23)


요한네스 로쯔의 지적처럼, 우리 모두는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이성을 사랑하고 부모형제를 사랑한다. 강아지와 인형, 자동차와 신발, 옷과 액세서리, 기이한 돌과 개결한 난초를 사랑한다. 바라보면 가슴 저릿한 저녁노을과 멀리 은가루처럼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으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득함과 끝없이 허전한 가슴으로 이는 찬바람의 냉기를 앓아야 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더 많이 아파야 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냈을 때 가장 큰 아픔을 맛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우리들 삶을 송두리째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랑의 주종은 역시 남녀간의 사랑이다. 아기는 부모가 나눈 사랑의 결실로서 탄생하여 부모의 사랑 속에서 성장하며, 소년이 되어 사춘기에 접어들면 이성을 사랑하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을 가지게 되고 동시에 이성으로부터 진실한 사랑을 받고 싶어진다. 이 때 사랑에 대한 희구는 가히 삶의 전부일 수 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다른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다는 각오가 생긴다.

성인이 되고 나면 사랑으로서 결혼을 하고 사랑으로서 가정을 꾸려 가며 자녀를 출산하여 양육한다. 그렇다고 사랑과 결혼이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간혹 보고 있다. 결혼 이전이거나 이후이거나 간에, 또는 한번이거나 여러 번이거나 간에 인간은 운명적으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할 때마다 <이 한번의 사랑이 가장 절실하고 진지하면서도 영원한 사랑이기를> 소망한다. 그러기에 책임감이 강하고 자의식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사랑에 목숨을 건다.

이별은 질병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오고 죽음보다 더 큰 슬픔을 몰고 온다. 웃으면서 이별할 수 있는 자, 담담하게 연인을 떠나보낼 수 있는 자 ― 그들의 사랑은 설사 그들이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실하고 절실한 사랑일수록 사랑의 상실은 곧 인생의 상실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삶을 이어가는 근원적 바탕이며 힘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단계 구분과 유형을 살펴본 뒤에 사랑의 분류법을 개관하고 사랑의 삼원성으로서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1.3.1 사랑의 현상적 단계와 유형


리스(Reiss)는 사랑의 현상적 단계를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24)

제1단계는 두 파트너가 함께 있을 때 아주 편안함을 느끼며 더 깊은 관계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는 단계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문화적 배경, 교육, 종교, 가정환경에 따라 자신들의 욕망을 촉진시키거나 저해할 수 있다.

제2단계는 서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고 나눔으로써 두 사람의 단계가 더욱 밀접하게 된다. 자기의 표현을 통해 상호신뢰의 사랑한다는 강한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

제3단계는 점점 더 사랑의 농도가 진해져 ‘서로 의존하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는 단계이다. 상대방과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을 갖게 된다.

제4단계는 두 사람 각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를 사랑을 통해 충족시키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갖게 되는 단계이다.

리스의 이와 같은 단계 구분은 사랑의 발아와 진행경과와 발전과정을 분절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 사랑에 있어서는 이러한 단계가 시간적인 순서로 반드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제1단계의 편안함이 없이, 오히려 불편함과 조심스러움이 있는 가운데서도 제2단계의 신뢰가 생길 수 있고 그러면서도 사랑을 전달하지는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인 사랑에 있어서는 이러한 단계가 더 많이 분화되어 늘어날 수도 있고, 또는 그와는 달리 단계가 줄어들거나 몇 단계가 복합되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스타일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경우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유형화할 수는 있다. 심리학자 아스웰(Lassewell)과 로브센츠(Lobsenz)는 다음과 같이 사랑의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25)

□ 가장 가까운 친구 같은 사랑 : 이 유형은 두 사람이 오랜 기간 동안 친구로 지내오다가 사랑으로 발전된 스타일이다. 이와 같은 사랑은 형제애와 같은 것이어서 서로가 상호의존적이며 서로에 충실한다. 결혼 후에도 이혼율이 낮으며, 이혼하게 될 경우에도 가까운 친구로 관계를 유지한다.

□ 게임 플레이 같은 사랑 : 사랑을 게임을 하듯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두고 상대방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한다. 안정되고 지속적인 사랑을 피하며 상대방에게 정서적으로 조바심을 갖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유형은 대체로 자신감이 있고, 자기중심적이며 상대방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도 않는다.

□ 논리적인 사랑 :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가치에 중점을 둔다. 자기가 이상적인 배우자의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과는 절대로 사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배우자의 특징을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삶이 나타날 때까지 끈기를 갖고 기다린다. 헤어질 때도 논리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끈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소유적 사랑 : 상대방을 완전히 소유하고 또 자신도 상대에게 완전히 소유 당하고자 하는 유형의 사랑이다. 항상 상대방을 잃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상대방에게 과대하게 의존하고 또한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상대방의 사랑을 잃을까 항상 과민한 신경을 쓰게 된다. 따라서 상대방에게 큰 부담감을 갖게 해 주고, 사랑의 관계가 끝나도 분노를 갖게 되며 다시는 서로를 보지 않는 관계에 이른다.

□ 낭만적인 사랑 : 상대방과 완벽하게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관계를 갖기를 갈망한다. 상대뿐만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에 푹 빠지는 경향이 있다.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많으며 정서적인 극치감을 계속해서 만끽하려고 노력하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신체적인 매력에 손쉽게 좌우되는 특성을 보인다. 초기에 경험하는 강력한 정열과 매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이 식게 되면 현실을 환상으로 바꾸어 버리거나 또 다른 사랑의 짝을 찾게 된다.

□ 이타적인 사랑 : 상대방을 무조건 돌보아 주고 지지해 주며 조건 없이 용서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형태의 사랑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사랑은 실제로 서로가 실제로 서로가 사랑에 빠져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 만족감이나 상대에게 인정을 받음으로써 사랑의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현실적으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 성적인 사랑 : 상대방을 성행위의 대상으로 취급하여 인간의 본능에 호소한다. 이러한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라는 정신적인 사랑보다 프로이트적인 육체적 사랑을 강조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에 그 초점을 둔다. 현대에 들어 와서 이러한 사랑은 ‘사랑이 있는 사랑’이기 보다 ‘사랑이 없는 사랑’이 더 많다. 육체적인 쾌락을 중요시하기에 상대방이 육체적인 매력을 상실하거나 싫증나면 또 다른 성적인 쾌락을 위해 따라가는 유형이다.

아스웰과 로브센츠의 이와 같은 사랑의 유형 구분은 언뜻 보아 흥미롭다. 읽는 사람 누구나 ‘나는 어느 유형에 속할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일별하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내가 하는 사랑의 경우에 딱 맞는 유형이 하나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르게 보면 모든 유형이 부분적으로는 내가 하는 사랑에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어떤 구분이 의미 있는 것이기 위해서는 구분의 기준이 하나여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구분기준은 여러 가지이며, 그것들을 나열해 놓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현실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는 실존적 사랑은 바로 실존적이라는 그 이유로서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서 아스웰과 로브센츠가 제시한 사랑의 유형은 남녀간의 사랑을 단순화한 것인데, 사랑에는 남녀간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만 하더라도 우리들이 하고 있는 현실적인 사랑은 복합적인 것이기 때문에 위의 유형들 모두와 조금씩의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3.2 사랑의 분류법


사랑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나의 인생 전부를 걸 수 있는 연애로부터 부모․자식․형제간의 사랑과 이웃사랑은 물론 돌 한 덩이 풀 한 포기에 대한 사랑까지 모두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의 종류는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면, 거기에 따라서 사랑의 종류가 어떻게 나누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흔히들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하여 사랑을 분류한다. 이것은 통속적인 분류법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사랑하는 것(대상)이 정신인가, 물질인가에 따라 정신적 사랑과 물질적 사랑으로 먼저 나눌 수 있고, 물질적 사랑은 다시 사랑하는 물질이 무엇인가에 따라 금전(재물)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육체적 사랑이란 성적(性的), 관능적 사랑을 의미한다. 


혹은 사랑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그가 추구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하여 플라토닉한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정신적 사랑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에로스적 사랑은 육체적, 성적 사랑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혹은 사랑 받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자기사랑과 남 사랑으로 나누기도 한다.


사랑하는 자의 마음 가짐에 따라 참사랑과 거짓사랑, 진실한 사랑과 성실한 사랑으로 나눌 수도 있다.


    진실한 사랑 : 더도 덜도 아니고 마음에 있는 사랑 그 만큼만을 표현하는 사랑.

                 아무 것도 숨기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과장하지 않는 사랑.

                 왜냐하면 <진실>이란 생각과 말의 일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실한 사랑 : 말한 것을 어기지 않고 말한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사랑.

                 성실한 사랑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않으며,

                 한번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게 된다.

                 왜냐하면 <성실>이란 말과 행위의 일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기준으로 하여 남남간의 사랑, 부모⇌자식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사제간의 사랑, 친구간의 사랑 등으로 나누기도 하고, 사랑하는 구체적 대상을 기준으로 하여 자연에 대한 사랑, 동물에 대한 사랑, 식물에 대한 사랑, 조국 사랑, 학교 사랑, 고향 사랑, 신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학구열)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전통적인 분류법 :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남녀간의 사랑)이 성(性)과 결합하여 결혼이라는 제도와 연결되면서 법률적․도덕적 기준에 따라 사랑을 분류하고 있다.

 

      합법적․도덕적 사랑 : 결혼으로 이어지는 사랑

                          결혼을 통해 상호독점하는 성애(性愛)

                          미혼자나 독신자끼리의 사랑

       불법적․비도덕적 사랑 : 혼인 외의 사랑과 성애(性愛)

                             간음, 간통, 매매춘 등


이와 같이 구분의 기준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사랑의 구분지는 수 없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사랑의 대상이 아닌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음은 물론, 세계 안의 모든 것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1.3.3 사랑의 삼원성


서양의 전통에서는 다음과 같이 아가페, 필리아, 에로스로 사랑을 구분한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서양어 전체에서 사랑을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어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말이 ‘사랑’(Liebe)이라는 말 한 가지밖에 없지만, 그리스어에는 세 가지 구별되는 말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에로스(Eros,감각-본능적 사랑) 필리아(Philia,정신-이성적 사랑/학문적 사랑/진리에 대한 사랑) 아가페(Agape,신적-은총적 사랑/종교적 사랑)이다.

<에로스>라는 말은 플라톤이 처음 계발하였고, <필리아>라는 말은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쓰기 시작한 말이며, <아가페>란 말은 크리스트교가 고대의 유산을 수용하면서 전혀 새로운 단어로서 첨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가페>란 말은 신약성서의 핵심단어가 된다.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는 사랑의 3원성으로서, 에로스는 필리아를 통해서 정화되고 필리아는 다시 아가페를 통해서 고양(高揚)될 때에 비로소 온전한 사랑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삼원성은 모두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삼원성들은 상호간의 삼투작용(滲透作用) 속에서 그들 각기의 고유한 양식으로 하나로서의 사랑 전체에 기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리아 없는 에로스나, 아가페 없는 에로스나 필리아는 불완전하며 위축되거나 타락하게 된다. 반대로 아가페 역시 에로스나 필리아 없이 계발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사랑의 삼원성 중에서 중간 항은 필리아가 된다. 인간으로부터 하느님께로 상승하는 사랑이 에로스와 필리아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하강하는 사랑이 아가페인데 이들은 서로 마주 향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26)


                          Agape   =   신(神)

                            ↑            ⇊

  온전한 사랑     Philia          ⇊

                            ⇕     =  인간(人間)

                          Eros        


(1) 에로스

에로스는 <감각-본능적 사랑>이다. 그것은 인간 속에서 홀연히 정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불가항력적인 운명으로 인간을 엄습한다. 에로스는 감각기관을 매개로 하여 성취되며 생명의 단계에 속하는 본능적 사랑이므로 인간의 의지로 조종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에로스는 아름다움(美)에 이끌리며, 그것이 남성과 남성 사이에서 이루어질 때 남색(男色, Päderastie)에까지 발전할 수 있다. 실제로 그리스인들은 미성년자에 대한 사랑을 하였다고 하며, 그것은 미성년자가 성숙한 남자의 성적 연인이 되기에 이르렀으며, 스승과 제자 사이의 육체적 표현을 추구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에는 남색이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에로스의 의미는, ‘성관계’ 또는 ‘가장 강력한 생명력’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에로스의 의미가 성관계이든, 가장 강력한 생명력이든 간에 에로스는 위험에 처해질 수 있으며, 에로스로 말미암은 위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① 지배당할 위험 : 에로스만이 강조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에로스에만 지배당하여 파멸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쥴리엣>(Romeo und Julia)에서 주인공 로미오와 줄리엣의 운명이 불가항력적인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것은 이것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② 무절제의 위험 : 인간에게는 성이 짐승에게서처럼 자연적으로 정해진 일정한 척도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짐승에게는 발정기 또는 배란기라는 일정한 주기에 따라 성욕이 발생하고 성행위가 이루어지며 그것도 수태를 위해서만 성행위가 이루어지지만, 인간에게는 그러한 주기와 목적 종속적인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은 무절제한 쾌락의 추구로 탐닉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③  성적이 아니었던 인간관계가 성적 관계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 : 에로스가 성애(性愛)로만 빠져들어 갔을 때, 본래 성적인 관계가 아니었던 에로스의 형태(사제지간/친구관계 등)가 성적 관계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인들과 같이 미성년자에 대한 사랑에 빠진다든지, 동성연애나 레즈비안적 사랑27)으로 변질되는 것이 이것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에로스는 인간 속에도 동물 속에도 있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에로스와 동물의 에로스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특성은 중심성에 있고 인간의 특성은 탈중심성에 있기 때문이다. 동물은 본능이라는 중심성으로부터 이탈할 수 없지만 인간은 그 중심성으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동물은 본능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지배받고 있지만 인간은 한 편으로는 본능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본능을 억제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인간의 에로스는 그것이 ‘성 관계’이든 ‘가장 강력한 생명력’이든 간에 에로스 속에 이미 심리적․정신적인 것이 가미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동물적(생명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심리적․정신적 존재로서 복합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성 관계에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미(美)’와 ‘선(善)’이라는 가치추구가 언제나 뒤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아무리 흉악한 강간범이라고 하더라도 팔순의 노파를 강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팔순의 노파는 젊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강간욕구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팔순 노파를 강간하는 강간범이 있다면 그는 강간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정신병적 증세로 말미암아 강간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보아야 온당할 것이다.


(2) 필리아

필리아는 ‘필로스’(Philos, 친구)와 관계된다. 그러므로 필리아는 ‘우애’나 ‘우정;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필리아는 <지성적인 사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요한네스 로쯔는 <정신-인격적 사랑>이라고 하고 있으며,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인격적 우애>라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성적(性的)인 것인데 반해서 필리아는 지적(知的)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필리아는 자의식과 자유의 심층에서 발해지기 때문에 자연적 필연성(본능성)에 종속되지 않지만, 에로스는 자유로부터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적 필연성에 종속되어 있다. 필리아는 선(善)을 더 많이 지향하지만, 에로스는 미(美)를 더 많이 지향한다. 에로스는 자신을 수동적으로 드러내지만, 필리아는 자신을 능동적으로 드러낸다. 에로스는 사랑하는 상대방을 그것(Es)으로 대하여 사물화하지만, 필리아는 사랑하는 상대방을 그(Er)로 대하여 인격화한다. 그러므로 에로스 속에서는 나와 너의 내면적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필리아 속에서는 나와 너의 내면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표피화되고 사물화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인간의 비인간화 현상이 심각하게 지적되고 있다. 특히 에로스적 성(性)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그 좋은 예들을 볼 수 있다. 만일 두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육체적인 접촉과 일치에로 도피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일시적으로 도취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으로 결코 인격적 만남을 대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육체적인 접촉과 일치에의 탐닉은 상대방을 인격으로서 보지 않고 사물화 함으로써 흔히 권태와 소외로 변질되기가 쉬운 것이다.

에로스는 비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을 인격체로 만날 수 없다. 따라서 에로스만으로는 인격적이거나 또는 본연의 인간적 만남에 도달하지 못한다. 에로스가 필리아에 의해 제어되고 규정될 때 에로스는 이러한 그러한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필리아는 에로스로 하여금 그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게 함으로써 두 인격체가 내면적 자아 속에서 서로 만나도록 만든다. 여기서 에로스에 대한 필리아의 우위성이 나타난다.

에로스에서는 자아에 사로잡힌 사랑이 주로 나타나고, 필리아에서는 자아로부터 해방된 사랑이 주로 나타난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랑은 ‘나를 위한 사랑’이고 자아로부터 해방된 사랑은 ‘너를 위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랑은 자기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방과 관계를 맺는다. 자신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며 상대방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만이 관건이 된다. 이 사랑은 이기주의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한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랑은 자아에 구속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하는 상대방을 자기 자신의 자아에 얽매어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더 이상 자아의 계발이나 실현이 불가능해지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종속되어 버림으로써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자아로부터 해방된 사랑은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라 너를 위한 사랑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선사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넘어서 사랑하는 상대방의 존재에로 건너가거나 자신을 상대방과 일치시키기 때문에 상대방이 스스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적절하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아로부터 해방된 사랑은 주는 것에로 향하여 있다. 아무리 주어도 결코 충분하게 주었다고 생각되지 않는 헌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주는 것의 최고의 절정은 자아를 선사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을 사용하여 성장하게 하고, 사랑하는 상대방이 곧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하는 헌신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아로부터 해방된 사랑은 상대편을 자기 쪽으로 끌어와 자기 아래 종속시키지 않고, 상대편의 독자적인 입장에 그대로 머물도록 한다. 사랑 받는 자를 사랑하는 자의 자아로부터 분리시켜 그 자체 안에 존재하도록 만든다. 상대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편의 고유한 존재 그대로를 포용하기 때문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계발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 상대방을 자기 자신의 존재 안에 그대로 머물도록 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여금 바로 그 자신이 되게 하며, 그의 고유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 이리하여 상대방의 사회적 관계는 계속하여 확장하게 되고, 상대방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계속하여 발전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을 더욱 더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필리아의 완성된 형태는 나-그의 관계가 아니라 나-너의 관계가 된다. 나-그의 관계는 표피적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관계이다. 여기서 그는 우연하고 잠정적으로 ‘나’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필리아(인격적 우애)가 작용할 때 ‘그’는 ‘너’로 바뀌게 된다. 나-너의 관계에서 ‘너’는 나에게 다른 어느 누구와도 대치될 수 없으며 지속적이고 깊이 유대 되어 있는 존재이다. 나-너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사랑하는 상대방인 ‘너’에 대한 ‘나’의 개방을 전제로 한다. 반대로 ‘나’에 대한 ‘너’의 개방을 아울러 포함한다. 그러므로 나-너의 관계는 자발적이며 상호적인 교환관계이다. 나-너의 관계는 필리아의 완성된 형태이다. 왜냐하면 필리아는 ‘나’의 자아로부터 출발해서 ‘너’의 자아 안으로 들어가, 이로 말미암아 ‘너’의 자아가 움직이고 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너의 관계의 대표적인 예로서 부부와 우정을 들 수 있다.

부부에게는 유일무이하게 제3자에 대한 배타성과 부부 사이의 내밀성이 이루어진다. 남편과 아내는 어떤 제3자도 동일한 차원에서 결코 개입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밀접하게 속해 있다. 부부 합일 속에서 에로스와 필리아의 완전한 삼투작용이 실현된다. 부부간의 에로스와 성(性)이 보장하는 합일이 최종적인 내밀성을 얻기 위해서는 필리아를 통한 심화의 능력에 힘입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고 성 능력이 감소된 후에도 필리아는 자신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것이기에 부부간의 인간관계는 변함없이 지속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부부간의 나-너 관계에서 필리아가 결핍되어 있다면, 나이가 들어 성과 에로스가 감퇴하게 되었을 때 그 부부는 상대방에 대한 환멸과 실망을 안고 파탄을 맞게 될 것이고, 마침내 나-그의 관계로 환원되고 말게 될 것이다.

우정은 필리아의 완성된 형태로서 교환적인 나-너의 관계의 또 다른 형태이다. 우정 속에서는 육신적인 구성 요소들이 후퇴한다. 우정은 성과 상관하지 않기 때문에 부부처럼 육체적인 합일을 지향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지성을 바탕으로 한 마음의 합일, 영혼의 합일이 그 자리에 대체된다. 우정이 육체적인 것과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즉시 우정은 성애(性愛)로 이탈하게 되고 따라서 변질될 위험이 자리한다. 나-너의 관계로서 우정이 가지는 제3자에 대한 배타성은 우정 그 자체의 고유한 배타성에서 기인한다. 물론 우정은 여러 인간들에게로 폭을 넓힐 수 있지만, 결코 만인을 다 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인의 친구는 어느 누구의 친구도 아니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설파하고 있다.

필리아는 에로스를 제어하고 고양한다. 에로스와 필리아가 각기 다른 형태로 서로 보완하고 삼투하는 가운데 인간의 사랑이 완성된 모습으로 성숙하게 된다. 에로스는 아름다움의 직관적 매력 때문에 그 약동적 힘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인격의 가장 깊은 데까지 미치지 못한다. 필리아는 그 힘이 에로스보다 약하기는 하지만 인격의 심층부까지 미친다. 필리아는 에로스의 약동적 힘에 참여하고, 에로스는 필리아의 도움으로 인격의 심층에로 수용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관계는 위에서 언급한 에로스의 3가지 본질면모에서 살펴볼 수 있다.


  ① 에로스는 인간에게 흔히 불가항력적인 운명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필리아가 관여하게 되면 에로스가 제어되고 정복되는 가운데 운명의 극복이 가능해진다.

  ② 에로스는 무절제에 빠질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리아는 고결한 제어를 통해서 에로스를 질식시키거나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에로스를 온전히 계발케 하는 길을 마련한다. 에로스가 필리아의 고결한 제어를 통할 때 비로소 최고의 행복능력에 이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③ 에로스는 그 특유한 결핍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추구를 하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냉혹한 고립화에 빠져들게 되며 고착되고 위축되어 마침내 파멸할 수 있다. 그러나 필리아를 통한 헌신을 통해서 성숙하게 되고 풍요하게 되며 전적으로 그 자신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아에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① 교묘한 자기 추구 : 필리아의 특성인 다른 사람에 대한 헌신이 결국은 자기 완성이라는 목표의 수단으로 바뀔 수 있다. 자기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그 착각 속에서 자기만족을 얻는 나르시즘적인 자기우상화가 바로 그것이다. 사이비 사회사업가가 그것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② 그릇된 자기양도 : 필리아는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자기 자신을 가급적이면 아낌없이 다 건네주려고 한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융합되고자 하며 그 사람 안에서 사라지고자 하며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려고 한다. 그러다가 끝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의 신(神)으로 만든다. 상대방을 우상화하여 자기 자신을 거기에 내 맡기는 것이다.


(3) 아가페

신약성서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기조 단어인 아가페는 <신적-은총적 사랑>이라는 점에서 다른 두 가지의 사랑(에로스, 필리아)과 구별된다. 아가페는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려오는 사랑이다. 아가페는 인간 본성의 사랑의 능력과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인간 안으로 주입되어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작용을 통해서만 계발되는 선물로 주어진다.

에로스와 필리아가 미(美)와 선(善, 知性)과 상관하고 있는 데 비해서 아가페는 성스러움, 즉 성스러운 하느님과 성(聖)화된 인간을 향하고 있다. 아가페는 에로스와 필리아를 전제로 하고 이들 없이는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수 있는 지반을 발견할 수 없다. 동시에 아가페는 인간적 사랑을 신적 사랑에 참여토록 하는 가운데 에로스와 필리아로 하여금 그들 고유한 가능성을 넘어서게 하면서 이들을 완성시킨다.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은 언제나 인간적 사랑(에로스, 필리아)을 선행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에게 마주 오는 사랑을 통해서 불붙는 <대상에 대한 사랑(Gegen-liebe)>가 아니라, 다른 여하한 사랑도 전제하지 않으며 그 자발성과 자유로부터 발해지는 절대적 <원초적 사랑(Ur-liebe)>으로 꽃핀다.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은 체험을 통해서 지탱되고 확인된다. 하느님의 사랑(아가페)은 흘러 넘치는 사랑으로서 친구뿐만 아니라 원수들마저 포괄하며, 하느님을 증오하고 경원시하는 사람들마저 포용한다. 위로부터 인간을 향해 내려오는 하느님 사랑에 힘입어 밑으로부터 하느님을 향해서 위로 오르는 인간의 사랑이 꽃피게 된다.

아가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28)로 요약된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에는 이웃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마치 하나의 계명처럼 등장하기 때문이다. <누가 이웃인가?> 단지 인종이나 피, 에로스와 필리아, 열정이나 우정을 통해서 나와 유대된 사람뿐만 아니라, 나에게 낯설고 나에게 매력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곤궁과 타락 속에서 버림받은 사람마저도 이웃이다. 이웃사랑은 말과 느낌으로서 만족하지 않고 행동에로 나아간다. 이 사랑은 어중간한 자세를 탈피하고 이웃이 감사를 모르고 돕는 사람을 실망시킬 때에도 의기소침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투신한다. 이 사랑은 이웃 사람을 위해 구체적 정황 속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이 사랑은 이 목표를 위해 능력에 미치는 모든 수단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적용한다.

은총의 선물은 그리스어로 <카리스마(Charisma)>이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는 은총의 선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선물들 중에는 지혜를 말하는 선물, 예언과 신앙능력의 선물, 기적을 행하는 능력, 질병을 치유하는 능력의 선물들이 있다. 은총의 선물들에 대해서 열거한 뒤 사도 바울은 경고한다. “여러분은 더 큰 은총의 선물(카리스마)을 간절히 구하십시오”29) 바울이 말하는 더 큰 카리스마(은총의 선물)가 바로 이웃사랑이다. 다른 모든 것은 하느님의 공동체와 인간을 위해 하느님 앞에서 없어도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만은 결코 없어서는 안 된다. 사랑 없이 다른 모든 것은 모두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만사를 활성화시키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성령의 선물들은 세상의 완성이 도래하면서 끝나게 될 것이다. 이들은 단지 부분적인 역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세상의 완성 시에 더 이상 설자리를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사랑은 가실 줄을 모른다”30) 사랑은 잠정적인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에 속하며 부분적인 역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에 속한다. ‘사랑은 완성되지 않은 것 안으로 들어가 빛나는 완성 자체인 것이다.’


(4) 세 가지 사랑의 연관성과 사랑의 삼각

아가페로부터 필리아를 바라보면 아가페 속에는 항상 이미 그리고 본질적으로 필리아가 포함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아가페는 인간을 인간 그 자신 때문에 사랑하며 내적으로 인격적 면모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필리아의 세밀한 연마는 아가페의 충만한 인간적 발전에 기여하며 따라서 불가결하다. 아가페는 필리아의 교묘한 자기 추구를 극복하도록 도움으로써 자체적으로 구원을 필요로 하는 필리아의 정화에 나름대로 기여한다. 이리하여 필리아를 매체로 해서 아가페로부터 에로스에 이르는 가교가 구축된다. 아가페는 에로스를 그 고유한 위험으로부터 이끌어내어 그것의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에로 나아가게 하여 은밀한 비약을 이룩하게 함으로써 에로스를 정화시킨다.

하나의 사랑이 에로스, 필리아 그리고 아가페의 세 가지 양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이렇게 해서만 오로지 사랑의 본질이 포용하고 있는 모든 가능성이 충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아래 그림(사랑의 삼각, Dreieck der Liebe)의 중심부로부터 외곽으로 향하는 세 화살표를 통해서 시사된다. 


에로스, 필리아 그리고 아가페의 세 양식들은 하나의 사랑 안으로 삼투한다. 이 삼투를 통해서 사랑이 비로소 계발된 전체로서 드러나고 이 전체 속에서 오직 사랑이, 온전한 사랑 자체가 된다. 이것은 위 그림에서 외각으로부터 중심으로 지향하는 세 화살표로 시사된다.

한 사람이 삼각 속에서 직관화되는 사랑의 충만 속에서 깊이 생활하면 할수록 그는 사랑이 절대적 증여(absolutes Geben)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수혜(absolutes Empfangen)이며, 절대적 제어이자 동시에 절대적 자유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절대적 곤궁이자 동시에 부활의 절대적 기쁨이라는 것을 더 확신 있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위대하게 사랑하는 인간으로 성장한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들이 오로지 사랑의 고유한 저 이해 안에서 해결될 것이다.


1.4 에로스적 통합

우리가 살펴본 에로스-필리아-아가페의 개념과 그 연관성은, 20세기 중반에 명성을 떨쳤던 독일의 가톨릭 철학자 요한네스 로쯔의 입장에 의거해서이다. 우리가 텍스트로 삼은 그의 저서 『사랑의 세 단계』―에로스, 필리아, 아가페―는 크리스트교 철학 사상을 정립하기 위한 의도에서 쓰여진 것으로서 사랑의 신학적 체계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의 성격을 지나치게 성서, 계시적 성격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경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요한네스 로쯔의 입장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성과 사랑이 통합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에로스의 영역이라는 것을 밝혀볼 것이다. 에로스야말로 인간적 삶의 원천이 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가설적 전제가 된다.

에로스는 열정이다. 열정은 약동하는 생명의 원천이며, 열정이 식어 가는 것은 생명이 식어 가는 것이다. 실제로 ‘삶’이란 ‘사람이 살아감’을 의미한다. ‘사람’이란 말은 ‘사룸’에서 온 말이며 ‘사룸’은 ‘(불) 사루다’의 명사형이다. ‘불을 사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열(熱)로써 열을 내며 또한 열로써 열을 삭혀 가는 것이다. 곧 ‘불사룸’은 ‘열정’이며 ‘정열’이다. 그래서 우리는 청춘기를 정열의 시기라고 하고 노년기를 정열이 사그러드는 시기하고 한다. 따라서 청춘은 ‘왕성한 삶’을 살고, 노년은 ‘쇠잔한 삶’을 산다. 실제로 니체는 ‘삶을 불꽃에 비유’하였으며, 이 때의 ‘불꽃’은 ‘정열’이며 ‘살아있는 움직임’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로스는 곧 삶이며, 인간의 생명의 원천으로써 정열이고 열정이다.


1.4.1 신화와 고전, 정신분석학에서의 에로스


에로스의 개념은 신화에서 출발하여 고전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신화 속의 에로스도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신화와 고전, 그리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의 에로스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신화에 나타나는 에로스

에로스에 대한 가장 오래된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나타난다.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31)가 그의 작품『신통기』(神統記, 테오고니)에서 신들의 기원을 노래하는 가운데 에로스가 등장하는 것이 처음이다. 태초에 카오스(Chaos, 混沌)가 가장 먼저 태어났고, 그 다음에 가이아가 태어났다. 가이아는 흔히 지모신(地母神)이라 불린다.32) 에로스의 탄생에 대해서는 ‘카오스가 낳은 아이’라는 것과 ‘뉵스(밥)의 알(卵)에서 생겨났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카오스는 원래 하늘과 땅 사이의 간격을 의미하였다. 카오스는 형태가 없는 모습이라기 보다는 텅 빈 상태의 함축이었다. 그러나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오늘날의 의미, 무질서라는 의미를 얻게 되었다.33) 카오스(혼돈)․가이아(땅)․에로스(사랑)의 삼위일체에서 우주적 원리가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는 에로스가 ‘신을 낳는 원동력으로서의 신’의 지위를 획득한다. 그러니까 “신이나 인간까지도 똑 같이 지배하는 위대한 신이며, 혼돈 중에서 질서를 낳는 원동력”34)이 에로스이다.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서는 또한 에로스가 ‘아프로디테(Aphrodite)와 즐거운 연애를 하는 사랑의 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맺어 새로운 세대를 낳게 하는 힘”35)이 에로스이다. 이와 같이 이중의 의미를 가지던 에로스의 개념이 다시 여러 갈래로 발전하다가 그 중에서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라는 것이 널리 인정”36)되었다.

다시 인간의 전 생명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으로서의 에로스는 프시케(Psyche, 영혼)와 맺어 헬레니즘 시대에는 ‘혼’을 괴롭히는 ‘애욕의 힘’의 관념이 생겼다. 이 시대의 에로스는 궁시(弓矢, 활과 화살)를 가진 방자한 연애의 신으로 생각되어, 그 황금의 화살에 찔린 자는 열렬한 연애를 느끼고, 연(鉛, 납)의 화살에 찔린 자는 연애를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한다. 어느 때 에로스는 어머니인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산 아름다운 프시케를 괴롭히려 가서 잘못하여 금의 화살로 자기자신을 쏘아, 결국 프시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2) 고전에 나타나는 에로스

플라톤 장년의 저작 『심포지엄』(Symposium, 향연, 잔치)은 부제가 ‘사랑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으며, “철학적인 가치문제를 에로스 개념과 결부시켜 해명하고 있다.”37)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자의 필요에 따라 이 책이 가지는 중요성의 초점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은 비극시인 아가톤의 집에서 벌어진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몇몇의 사람들이 초청되어 사랑에 관하여 대화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요한네스 로쯔는 이 책을 에로스를 찬미하는 책이라고 다음과 말한다.


‘향연(饗宴)’이라는 말을 지니는 대화는 ‘이 태고적이고 엄청난 신’ 에로스를 찬미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향연의 모든 참석자들은 이(에로스;필자)에 대해서 한 가지 담화를 발표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여섯 개의 담화가 이루어진다. 이들 중 첫 다섯 담화들은 준비 유형의 담화인데 비해 여섯 번째 담화는 주제의 핵심에로 파고든다.38)


여섯 개의 담화 중 네 번째의 담화가 희극시인인 아리스토파네스(Sristophanes)의 담화이다. 그는 인간들을 사로잡는 에로스의 매력에 대하여 한 신화를 통해 부연한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한 신화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맨 처음의 인간은 현재와 같지 않았다. 태초에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성외에 두 성을 한 몸에 가지고 있는 제3의 혼성 또는 남녀성( anthrogunos/Mannweibliches Geschlecht)39)이 있었다. 이에 따라 사람의 모습도 지금과는 달랐다. 원래 사람의 외양은 아주 둥글었는데, 지금의 인간의 모습은 그 둥근 몸을 딱 반으로 잘라놓은 형태라는 것이다. 사람의 본래 모습은 등과 옆구리가 둥그렇게 빙 둘러 있는 둥근 형체였다. 그리고 팔이 넷, 다리가 넷이 있었고, 둥근 목 위에 머리는 하나였으며, 거기에 똑 같이 생긴 얼굴이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둘이 있었고, 귀가 넷, 성기가 둘 달려 있었다. 남성은 그 성기가 모두 남성의 것이고 여성은 모두 여성의 것이었으나 제3의 성을 가진 사람은 남성과 여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처럼 똑 바로 서서 걸었으며, 어느 방향으로든지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었다. 빨리 뛰고 싶을 때, 그들은 그들이 가진 여덟 개의 손발로 땅을 짚어가면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굴러갈 수가 있었다. 거기에다가 그들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고 야심도 대단하여서 마침내 저들은 신들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제우스와 다른 신들은 회의를 열어 인간들의 난폭한 행동을 막을 방도를 강구하게 되었다. 인류를 전멸시켜버리면 해결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신들에게 바치던 제물도 예배도 없어질 것이므로 그것은 해결방법이 아니었다. 제우스는 마침내 인간을 그대로 생존하게 하면서 그들의 힘을 지금보다 약하게 하여 난폭한 짓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해결책을 생각해낸다. 모든 사람을 두 동강으로 쪼개어 힘을 약화시키고 그 수는 배로 하는 것이 일거양득의 해결책이었다. 결국 인간은 신에 대한 불경죄로 하나하나 제우스에 의해 한 가운데서 두 조각으로 쪼개어졌다. 그 쪼개진 쪽으로 반 조각의 머리를 돌려놓고 갈라진 살 조각을 모아서 꿰매고 그 상처를 보게 하였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배와 배꼽이다. 이러한 분할로 인하여 인간은 한 개의 얼굴에 두 개의 귀와 두 개의 팔다리를 갖게 되었다.

한 몸에서 두 조각으로 나뉘어진 인간들은 그 반쪽이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여 다시 한 몸이 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꼭 부등켜안고 붙어 있으려 하였으며 하나가 되려고 하였다. 또 서로를 떠나서는 아무 일도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배가 고프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탓으로 죽고 만다. 두 반쪽 중 하나가 죽고 다른 하나가 남게 되는 경우에는, 남게 된 반쪽은 다른 또 하나의 반쪽을 계속 찾아 헤매었고, 찾으면 끌어안았다. 이런 경우 그는 본래 전적으로 여자였던 사람의 반쪽―이것을 우리가 지금 여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을 만나는 수도 있었고, 혹은 본래 전적으로 남자였던 사람의 반쪽을 만나는 수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비참하게 망할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형국을 제우스가 가엽게 여겨 한 가지 다른 방안을 생각해 내었다. 즉 그는 그들의 생식기를 앞에다 옮겨주고 다른 반쪽을 찾게 되면 서로 교접할 수 있게 함으로써 안정을 되찾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면 서로 포옹함으로써 자식을 낳아 자손이 계속될 수 있게 하였고, 남자와 남자가 만나면 서로 만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여 욕망을 진정시켜 일하는 데 정신을 쓰며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듯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먼 옛날부터 그들 속에 깃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의 몸뚱이의 부분을 다시 한데 모아, 둘이서 하나가 되게 하여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 혼자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고 결여되었으며 그래서 외롭다고 느껴 끊임없이 자신의 반쪽인 삶의 반려자를, 사랑의 상대자를 찾는 인간의 본성적인 모습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와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 까닭은 그것이 인간의 본래 모습이며 그래야만 인간이 하나의 온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옛날의 본래적 모습, 즉 온전한 것에 대한 욕망과 그것에 대한 추구가 곧 에로스라고 아리스토파네스는 설명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인간이 이와 같은 감성적 차원에서의 사랑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차원을 극복하여 보다 높은 경지로 승화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에로스란 절대적 선을 영구히 소유하려는 충동적인 생명력이다. 멸실 되는 것은 될 수 있는 한 무궁 불사(不死)일 것을 본성적으로 원하지만, 그것은 생식에 의해 낡은 것 대신에 새로운 것을 남기는 일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이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의 소유로 향하는 사랑을, 모든 육체의 미, 심령상의 미, 작업이나 제도의 미, 다시 교육이나 예술, 철학상의 미에의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중에 미 그 자체인 이데아의 영역의 인식에 이르는 곳에 에로스의 참뜻이 있다고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에로스를 갈구하는 것은 아직 소유하지 못하였거나 결핍되어 있는 무엇인가에 대한 사랑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대상을 욕구 하는 것이고 욕구 한다는 것은 지금 그 대상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을 욕구 하는 것이고 이는 지금 나에게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40)

‘결핍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에로스의 본질이라는 것은, 여섯 번째의 담화인 디오티마의 담화에서 이야기하는 신화가 의미하는 바의 것이다. 로쯔의 지적처럼 『향연』에서 나누어지는 대화의 핵심에 해당하는 여섯 번째의 담화는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Diotima)가 나누는 담화의 형식을 띄고 있으며, 에로스의 기원을 매개로 해서 에로스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아프로디테(Aphrodite)의 탄생을 계기로 여러 신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인다. 그 잔치가 끝날 무렵에 궁핍의 신인 페니아(Penia)가 연회 장소에 와서, 이미 신주(神酒) 넥타를 마시고 취해버린 풍요의 신 폴로스(Poros)와 동침을 하여 에로스를 출산하였다.41)


에로스가 풍요의 신과 궁핍의 신 사이에서 태어난 신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는 것과 모자라는 것의 중간에서 그것들을 서로 주고받도록 하는 것이 곧 에로스라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의 해석은 이것과 다르다.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특별히 지혜와 무지 사이에서 중간 위치를 유지하면서 ‘일생에 걸쳐서 지혜를 추구한다’고 본다. 지혜가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하고 에로스는 ‘모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에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지혜의 탐구자’인 것이다. 그래야만 감성적 차원에서의 에로스가 그 차원을 극복하여 보다 높은 경지로 승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해석보다는, 사람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하였거나 결핍되어 있는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것이 에로스라고 보는 소크라테스적 견해가 보다 더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3) 프로이트의 에로스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9~1939)는 1920년 정신분석의 용어로서 처음으로 에로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에로스는 하나의 에너지와 같은 것이며, 그 목적은 생명을 보존하고 추진시키는 본능이다. 그것이 성의 본능에 부여된 경우는 리비도(Libido)이며, 자기 보존의 경우는 자아 리비도로 나타난다. 에로스를 한쪽의 극으로 하면 그 반대의 극은 죽음의 본능이다.42)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이다. 에로스는 삶의 충동이고, 사랑과 충동은 이 충동의 대표적인 표현방식이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무의식, 전(前)의식, 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식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을 가리키며, 전의식은 조금만 신경을 쓰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무의식은 원시적 충동과 의식 속에 있었으나 억압으로 인해서 기억에 사라진 기억이나 관념의 덩어리를 가리킨다. 곧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에로스이자 쾌감원칙의 본능이다. 무의식을 구성하는 힘으로서의 성욕이 이드이다. 이드는 개별적인 유기체가 살아가는 삶의 진정한 목적을 표현한다. 인간은 능동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지배를 받아 수동적으로 삶을 영위한다.43)

한편 타나토스는 죽음의 충동이며 자살뿐만 아니라 폭력․살인 등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타나토스는 증오와 파괴력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유익한 목적을 위해서 통제하고 조작하는 힘으로 승화시키는 개념이다. 그리고 극도에 이르는 삶의 충동은 죽음의 충동과 다르지 않다. 섹스의 막바지에 느끼는 오르가즘은 프랑스 말로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다. 한국어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환희나 희열의 순간에 한국 사람들은 ‘와! 죽겠다’하고 하거나 ‘그것 참 죽여준다’라는 표현을 쓴다.

삶의 본능(에로스)과 죽음의 본능(타나토스), 이들 양자의 충동이 융합하여 문명의 역사를 이룬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강조한다. 에로스의 목적은 개인과 가족, 그리고 종족과 민족, 국가를 결합시켜 궁극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단위의 인류를 만드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생각했다. 이러한 집단들은 필요성이나 이익만으로는 결속시킬 수 없고 인간의 원초적인 성적 충동인 리비도를 통해서 바로 서로 묶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비도는 성본능이자 삶의 본능으로서, 대립되는 죽음의 본능으로 발전되어 점차 반복의 충동을 낳는다. 우리가 말하는 완벽한 충족이란 죽음이다. 이 죽음의 본능과 맞서 싸우는 에로스는 반복을 통해 삶을 길게 연장하는 삶의 본능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에게 인류의 문명은 ‘에로스와 죽음, 생명본능과 죽음본능 사이의 투쟁’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다. 결국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대립은 에로스의 해방이 아니라 억압을 의미하였다고 할 수 있다.44)


1.4.2 에로스의 어원과 본질


에로스는 그리스어의 동사 ‘에란’(eran)을 어원으로 한다. 에란은 ‘열광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서 타자를 구한다’는 뜻이다.45) 에란에서 온 명사인 에로스는 ‘원하다’, ‘부족하다’, ‘염원하다’, ‘없는 것을 욕망하다’, ‘사랑을 요구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46)

양해림은 고전적인 에로스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모든 신들 가운데 첫 번째, 아프로디테의 아들, 건강한 젊음과 신비의 신, 사랑과 번식의 우주적 힘, 사랑에 대한 자신의 관점에 있어서 최고 자아의 상징, 영합을 지향한 사물들을 모음, 카오스로부터 질서와 조화를 가져옴, 우주의 창조적 행위 등”47)을 의미하는 것이 에로스이다.

오늘날 실제로 에로스의 의미는, ① ‘성관계’라는 의미로 국한시키는 입장과 ② ‘가장 강력한 생명력’의 의미로 쓰는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성관계’라는 의미로 에로스가 쓰여지는 경우는 ‘에로틱한’(erotisch)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바이기도 하다. 성(性) 또는 성애(性愛)는 남성과 여성의 고유성으로부터 나오는 특수한 에로스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남성은 여성의 특별한 아름다움에 의해, 여성은 남성의 특별한 아름다움에 의해 이끌리고 매혹된다. 에로스의 열정적인 형태는 성(性) 안에서 최고의 절정에 이르고, 그 때 당사자인 남성과 여성은 가장 깊은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에로스를 성(性)의 형태로 완성시키고, 그 결실인 자신의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존속케 하려고 애쓴다. ‘에로스는 성욕 자체의 의미의 확장이며, 성욕의 양적이고 질적인 확장이다’라고 하는 프로이드의 명제가 이 입장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가장 강력한 생명력’의 의미로 쓰여지는 경우는, 사람들의 만남 속에서 에로스가 할 수 있는 기능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가 스승을 통해 풍요롭게 되는 것은 에로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제자와 스승의 만남 속에서 학문적 토론과 인간적 교감으로 에로스는 불꽃을 튀기게 하며 이 에로스 없이 제자와 스승의 관계는 있을 수 없다. 힘있게 작용하는 교수의 강의와 청중을 움직이는 강연 역시 교수 또는 강사로부터 발해지는 에로스 없이는 불가능하다. 청중을 사로잡는 연극과 음악 연주에서도 같은 원리가 해당된다. 예술가의 창조적 활동에도 그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에로스가 작용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가장 강력한 생명력’이라는 의미로 쓰여지는 경우의 에로스는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힘’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도 할 수 있다.


1.4.3 에로스 ; 성과 사랑의 통합 특구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에로스를 박탈당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을 띄게 될까? 이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보다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 중에서 가장 활기찬 모습과 가장 무기력한 모습들을 제시하고 그것이 모두 에로스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대답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리운 그, 또는 그리운 그녀에 대한 열망이 어떠한 느낌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피셔는 그 열렬한 감정을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행복감과 그 괴로움, 잠 못 이루는 수많은 밤과 안절부절 하는 나날, 사랑의 포로가 된 남녀 연인들은 황홀감에 혹은 불안감에 휩싸인 채 강의실이나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서 백일몽을 꾸는가 하면, 코트를 깜빡 잊거나 차를 몰다 뒤에서 울려대는 클랙슨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거나, 전화기 옆에 죽치고 앉아 무슨 말을 할까 하고 궁리하기도 한다. ― 이 모두가 ‘그 남자’ 혹은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은 갈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시 만났을 때는, 그 남자의 하찮은 몸짓 하나에도 숨이 막히고, 그 여자의 환한 미소에 그만 현기증이 난다. 그리고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바보 같은 모험을 하거나 어리석은 말을 내뱉고, 지나치게 큰 소리로 웃는가 하면 자기도 모르게 비밀을 털어놓기도 한다. 더러는 또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이른 새벽에 산책을 하기도 하며 더러는 서로 껴안고 키스를 나눈다. 이처럼 한번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숨막히는 열병과도 같은 환희와 축복에 마취된 채 여타의 세상일은 모조리 잊어버린다.48)


미국인 피셔가 묘사하는 이러한 모습이 우리 한국인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사랑에 빠진 자의 모습은 동서고금을 통해서 서로 다르지 않으며, 그것은 곧 사랑의 감정 또한 서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밤과 낮 시간의 85퍼센트에서 100퍼센트까지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생각하면서 보낸다고 한다.49) 불행이나 역경 앞에서 남녀간의 열정은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사랑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어진다. 사업이나 가족이나 친구들을 버리더라도 자기의 사랑을 이루고자 한다. “사랑에 홀린 사람을 지배하는 또 다른 감정으로는 수줍음, 퇴짜맞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반신반의하는 기대감, 호혜성에 대한 갈망 등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력감이라는 것이 있다.”50) 사랑의 기대감으로  인한 활기이며,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오는 무기력이다. 사랑의 이러한 위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우리말에 ‘첫눈에 반해 버린다’는 표현이 있다. 상대방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반해 버린다는 게 어떻게 하여 가능한 것인가? 피셔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 ― 만나자마자 상대를 흠모하는 이 인간의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51)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암컷 다람쥐는 번식기에 접어들면 새끼를 낳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고슴도치와 교미하는 것이 유리할 리는 없다. 그러나 건강한 수컷 다람쥐를 만났을 경우, 암컷 다람쥐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다. (번식기나 발정기는 일정한 기간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필자 주) 암컷은 그 수컷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수컷의 외모가 마음에 들 경우에는 교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 아마도 짝짓기를 서두르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동물들에게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세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 후에 암수 동물 세계의 이러한 상호 끌림이 우리의 조상들 사이에서 남녀간의 매혹으로 발전했을 것이다.52)


남녀간의 홀림은 심리적인 현상일 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현상이라고 피셔는 주장한다.53) 신체의 작용들은 진화를 통해서 발달된다. 뇌의 감성핵심부인 변연계54)는 파충류 동물에서는 덜 발달되어 있으나 모든 포유류 동물에서는 잘 발달되어 있다. 여기서 일어나는 전기, 화학적 물질의 작용으로 사랑의 감정은 기복을 탄다. 우리의 첫 조상들이 처음에는 암수 동물이 시간에 쫓겨 즉각적으로 서로 끌리는 원시적인 감정을 이어받은 다음, 그들이 약 4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의 대초원에서의 전혀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면서부터 남녀가 서로 깊이 빠져드는 홀림의 감정을 발전시켰다는 것이 피셔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사랑의 열정적 감정에서 생겨 나오는 욕구 ― ‘보고 싶음’, ‘같이 있고 싶음’, ‘마주보며 이야기하고 싶음’이라는 이러한 욕구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한 마디로 해서 그것은 <눈 맞추기>이다. 우리말의 표현에 있어서 ‘눈이 맞았다’라는 말은 ‘남녀가 정분이 생겨 통정을 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눈 맞추기는 눈길의 오고 감이며 그것은 곧 응시이다. 피셔는 “상대방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응시야말로 아마 가장 두드러진 인간의 구애 행위일 것”55)이라고 한다. 응시는 눈으로 주고받는 남녀간의 대화이며 섹스의 출발점이 된다.


남녀 사이의 눈의 접촉이 허용된 서구문화권에서 남성과 여성은 흔히 서로의 눈동자가 제각기 팽창할 대로 팽창해져서 대략 2, 3초 동안 서로의 잠재적인 배우자를 격렬한 눈길로 바라본다 ― 이것은 최대의 관심을 표현하는 하나의 신호이다. 그런 다음, 두 남녀는 각기 눈꺼풀을 내리깔며 먼 곳으로 눈길을 돌린다.

이로 미루어, 아주 많은 문화권에서 베일을 쓰는 관습이 채택되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눈의 접촉은 즉각적인 효력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응시는 두뇌 속의 원시적인 부위를 자극함으로써 두 가지의 기본적인 정서 ― 접근과 후퇴 ― 중의 하나를 이끌어낸다.56)


남녀간에 이루어지는 이 뜨거운 응시는 교접의 응시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인류의 진화과정을 통해 우리의 정신 속에 깊이 새겨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피셔의 관점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난쟁이 침팬지들은 교미를 하기 전에 눈길을 서로 교환한다. 이들 중의 몇 마리가 현재 샌디에이고 동물원에 살고 있으며, 그곳에서 수컷과 암컷은 정기적으로 교미를 한다. 그러나 교미를 하기 전에 수컷과 암컷은 잠깐 동안 서로 상대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비비 원숭이도 구애하는 동안에 상대를 응시한다. 비비들을 연구하고 있는 스마츠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어느 날 저녁에 암컷 비비인 탈리아가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수컷 비비 알렉스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들은 15피트 가량 떨어져 있었다. 서로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알렉스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자 탈리아는 그가 자기를 다시 바라볼 때까지 계속 상대를 주시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발끝으로 격렬하게 땅바닥을 긁어댔다. 이런 행동을 계속하며 상대를 주시했으나, 알렉스는 못 본 척하며 딴청만 부렸다. 한참 후에야 그는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탈리아의 눈길과 다시 마주쳤다 ― 응답의 눈길이었다.

알렉스는 즉시 양쪽 귀를 머리에 착 달라 붙인 채 눈꺼풀을 좁히며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비비의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최고의 호의 표시였다. 순간, 탈리아는 몸이 얼어붙은 듯이 꼼짝도 안 했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상대의 눈동자를 은근히 바라보았다. 이처럼 눈길의 접촉이 있은 다음에야, 알렉스는 상대에게 다가갔으며, 그와 동시에 탈리아가 그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57)


비비 원숭이 탈리아와 알렉스에서 보듯이, 응시는 곧 교접을 갈망하는 눈길이며 교접하고 싶음의 의사 표시이며 교접의 발단이다. 물론 모든 응시가 교접을 갈망하는 눈길은 아니다. 증오의 눈길도 있고 저주의 눈길도 있으며 투쟁의 눈길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담긴 눈길만이 교접을 갈망하는 눈길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사랑에 빠진 자가 가지는 감정 ― <보고 싶음>의 정체는 <눈 맞추고 싶음>이며, 눈 맞추고 싶음은 <교접하고 싶음>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 영역이 바로 사랑과 성이 통합되는 영역으로서 에로스라는 특별한 구역이 된다. 에로스를 ‘성관계’라고 보든지 혹은  ‘가장 강력한 생명력’이라고 보든지 간에, 이 특구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가장 강력한 생명력과 성관계가 하나로 통합되고 성과 사랑이 하나로 통합된다.

환언하여, 만약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에게서 에로스를 빼앗아 가 버린다면, 인간은 사랑할 이유를 잃어버릴 것이고 교접을 갈망하는 눈길도 잃어버릴 것이며 식물인간처럼 삶의 의욕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성과 사랑은 에로스라는 특별구역에서 통합되어 그 막강한 힘으로써 인간이 그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며, 역사가 지속되게 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영원으로 이어지게 한다. 플라톤이 에로스에서 ‘성적인 의미’나 ‘성교’라는 의미를 사상(捨象)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성과 사랑이 만나 에로스적으로 통합되는 힘이 영원을 지향하게 한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 된다.

플라톤의 에로스의 본질적 의미는 불사(不死)에 관여함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 서로 포옹함으로써 자식을 낳아 자손이 계속될 수 있게 하는 것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죽음을 넘어서서 존속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것은 모든 동물에 공통하는 일이다. 동물은 생식에 의하여 자기의 종(種)을 보존한다. 자식에 대한 배려, 자식을 위해서는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 인간의 능력은 동물의 개체생명이 종(種)의 장래생명(將來生命)에 깊이 관계하고 있음의 상징이다. 이것은 <죽는 존재로서 죽지 않음>이다.

인간은 육체적 생식 외에 정신적 생식도 한다. 인간의 정신적 산물은 그가 죽은 후에까지 남아서 전달된다. 역사와 문화, 과학과 예술, 모든 정신적 재(財)의 전승이 그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그 <불사의 덕(不死의 德)>에 의하여 <영원에 관여>한다.

이와 같이 보았을 때, 플라톤의 에로스는 미래를 위해 현실을 버림이다. 타자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시킴이다. 에로스의 힘은 인간에 있어서의 특수한 힘이다. 원대한 발아력, 생식력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에로스를 <임신, 생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신과 생식으로서의 에로스는 현재의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후대인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미래의 후대인은 현재의 나보다 더 나은 자이어야 한다. 에로스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자를 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로스의 원동력은 이데아이며, 에로스는 전망적으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장래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에로스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장래로 향하게 된다는 이 점에서 플라톤의 에로스는 원인애와 연결되는 개념인 것이다.

 

                                                                              

1) ‘사랑 있는 섹스’와 ‘사랑 없는 섹스’에 대해서는 다음 (2)항에서 다루어진다.

2) 양해림․유성선․김철운 지음,『성과 사랑의 철학』, 서울;철학과 현실사, 2001,(이하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으로 약기함) 105쪽.

3)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106쪽.

4) 같은 책, 107쪽.

5) 같은 책, 107-108쪽.

6) 같은 책, 108쪽에서 재인용.

7) 같은 책, 109쪽. 참조.

8) 윤혜준, 「발설의 윤리와 성스펙트럼」,『성과 사회』, 서울:나남출판, 1998, 18쪽.(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21쪽에서 재인용)

9)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21쪽.

10) 허란주, 「여성성과 남성성의 극복을 위한 소고」,『감성의 철학』, 서울:민음사, 1996, 178쪽.(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22쪽에서 재인용)

11) 조주현, 「섹슈얼리티를 통해 본 한국의 근대성과 여성 주체의 성격」, 한국성폭력상담소 엮음,『섹슈얼리티 강의』, 서울:도서출판 동녘, 1999, (이하 조주현, 「섹슈얼리티를 통해 본 한국의 근대성과 여성 주체의 성격」으로 약기함.), 44쪽.

12) 양해림은, 욕망의 과학으로서 성과학의 전통이 형성된 것이 19세기말이라고 하면서 성과학의 형성계기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크래프트 에빙(Kraft Ebing), 하브록 엘리스(Havelok Ellis), 아우구스 포렐(Augus Forel), 마그누스 히르쉬펠트(Magnus Hirschfeld),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를 위시하여 여러 성과학자들이 성의 다양한 외피를 벗겨냄으로써 성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내려고 노력해 왔다.”(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24쪽.)

13)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24쪽.

14)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 차이로 인하여 서로 다른 성 역할을 하게 된다’고 보는 기존관념에 대하여 근본적인 도전을 시도하지 않은 입장을 제1기 여성주의라고 하고, 이를 비판하고 도전하는 입장을 제2기 여성주의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구분법이다.

15) S. d. Beauvoir, Le Deuxieme Sexe, 조홍식 옮김,『제2의 성』, 서울:을유문화사, 392쪽.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이 명제는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가 1949년에 펴낸 『제2의 성』을 대표하는 명제이다.『제2의 성』은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페미니즘 이론가들에게 광범한 영향을 미쳤으며, 1천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지금도 여성문제를 다루는 최고의 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은 발간 1주일만에 2만 부 이상 팔려 나가는 등 반향이 컸지만 그것이 곧 프랑스 여성운동이나 이론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27쪽, 참조.)

16)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28쪽.

17)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30쪽.

18) 조주현, 「섹슈얼리티를 통해 본 한국의 근대성과 여성 주체의 성격」, 44쪽, 참조.

19)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29쪽.

20) 조주현, 「섹슈얼리티를 통해 본 한국의 근대성과 여성 주체의 성격」, 44쪽.

21) 같은 책, 48쪽.

22) 같은 책, 72~74쪽, 참조.

23) J. 로쯔 지음, 심상태 옮김,『사랑의 세 단계』―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5판, 서울:서광사, 1991, 19-20쪽.(이하 J. 로쯔 지음, 심상태 옮김,『사랑의 세 단계』로 약기함)

24)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92-93쪽에서 재인용.

25) 같은 책, 93-95쪽에서 재인용.

26) 이 부문에 대해서는, 요한네스 로쯔 지음, 심상태 옮김,『사랑의 세 단계』를 주로 참고하였다.

27) 여기서는 동성연애나 레즈비안적 사랑을 부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접근과 분석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현대에 와서는 이들의 자기 목소리 내기가 활발해지고 있으며 사회적 이해의 폭도 차츰 넓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8) 루가 10, 27 / 마르 12, 31.

29) 고린도 전서 12, 31.

30) 고린도 전서 13, 8.

31) 헤시오도스(Hesiodos, B.C. 700년경)는 그리스 교훈시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신들의 전설을 다룬 『신통기』(Theony)와 시골생활을 묘사한 『노동과 나날』(Work and Days) 등이 있다.(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78쪽.)

32) 램프 에이브러햄, 김중순 역, 『카오스, 가이아, 에로스』, 두산동아, 1997, 241쪽.

33)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79쪽.

34) 교육서관,『세계백과대사전』, 13권, 1986, 378쪽.

35) 같은 책, 같은 쪽.

36) 같은 책, 같은 쪽.

37) 요한네스 힐쉬베르그 지음, 강성위 옮김,『서양철학사』상권 4판, 서울:이문출판사, 1987, 124쪽.

38) 요한네스 로쯔 지음, 심상태 옮김,『사랑의 세 단계』, 137쪽.

39) 여기서 남녀성의 ‘안드로구노스’라는 말은 ‘아네르(남성)’와 ‘구네(여성)’의 복합어이다.

40)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88쪽.

41) 요한네스 로쯔 지음, 심상태 옮김,『사랑의 세 단계』, 142쪽.

42) 교육서관,『세계백과대사전』, 13권, 1986, 378쪽.

43)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60쪽.

44) 같은 책, 62-63쪽.

45) 교육서관,『세계백과대사전』, 13권, 1986, 378쪽.

46) 랠프 에이브러햄, 김중순 역, 『카오스, 가이아, 에로스』, 서울:두산동아, 1997. 244쪽.

47) 양해림․유성선․김철운,『성과 사랑의 철학』, 89쪽.

48) 헬렌 E. 피셔 지음, 김남경 옮김,『사랑의 해부학』, 서울:하서출판사, 1994,(이하 헬렌 E. 피셔 지음, 김남경 옮김,『사랑의 해부학』으로 약기함) 40쪽.

49) 같은 책, 42쪽.

50) 같은 책 43쪽.

51) 같은 책, 58쪽.

52) 같은 책, 같은 쪽.

53) 같은 책, 64쪽.

54) 1970년대에 신경과학자 폴 맥클린은 가정하기를, 인간의 뇌는 세 개의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했다. 물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으나, 맥클린의 견해가 아직은 하나의 개관으로서 통용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구획은 척수의 끝에 있는 마지막 골수를 감싸고 있다. 이 부위는 ‘파충류의 뇌’라는 명성에 걸맞게 공격, 영토권, 의식, 그리고 사회적 계급의 확립과 같은 본능적인 행동을 관장한다.

    파충류의 뇌의 위쪽과 그 주변에는, 뇌의 중앙에 해당하는 곳으로 총체적으로 ‘변연계’라고 불리는 일단의 신경조직체가 있다. 변연계는 대뇌와 소뇌 사이를 연결하는 하얀 물질의 두꺼운 층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여기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인 공포, 분노, 기쁨, 슬픔, 혐오, 사랑 따위를 관장한다. 우리가 행복에 겹겨나, 공포로 몸이 굳거나 할 때는 전기나 화학적인 방해물질을 발산하는 이 변연계의 역할 때문이다. 걷잡을 수 없는 남녀간의 열정의 신체적 기점이 바로 이곳임은 거의 틀림이 없다.

    변연계의 위쪽에는 외피질이 덮고 있는데, 이것은 스펀지 같은 물질로 둘둘 말린 회색의 껍질이며 바로 그 위쪽이 두개골이다. 이 외피질에서는 보기, 듣기, 말하기, 그리고 수학적인 능력과 음악적인 능력을 가공 처리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외피질에서 사고와 감정을 통합한다는 점이다.(헬렌 E. 피셔 지음, 김남경 옮김,『사랑의 해부학』, 59쪽.)

55) 같은 책, 17쪽.

56) 같은 책, 같은 쪽.

57) 같은 책, 18-19쪽.

 

출처 :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글쓴이 : 양수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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