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8)>
꽃 지는 날
봄꽃이 피고 있다. 풀과 나무가 흙살 아래서 자아올린 처녀수와 땅기운이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산수유가 피고 목련이 피고 만개한 벚꽃이 환한 얼굴을 밝히고 있다. 바야흐로 봄이 절정을 향해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봄꽃들은 머지않아 떨어질 것이다. 얼어서 거멓게 멍이 든 목련 큰 꽃송이가 툭툭 떨어지고 산수유와 생강나무는 작은 꽃잎들을 흔적도 없이 떠나보낼 것이다. 개나리는 꽃보다 늦게 나오는 푸른 잎이 곧 무성해 질 것이다. 상사화 진녹색 잎은 시들어 말라버릴 것이다. 남쪽에서 상륙한 화신이 빠른 속도로 북상하면서 꽃 지는 슬픔을 그림자로 끌면서 사라질 것이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바람 속에서 이루어진다. 바람이 간질여 주어야 꽃송이는 터지고 바람이 흔들어 주어야 만개한 꽃은 꽃잎을 흩날릴 수 있다. 가슴을 적시며 흩날리는 꽃비는 바람의 작품이다. 바람은 강물처럼 흐르며 정체가 아닌 변화를 이끌어 온다. 그러나 바람 그 자신은 무상하다. 흐름과 변화를 주도하면서도 그 자신은 형체도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저리 감미로운 봄바람 또한 마찬가지이다. 봄바람은 만물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약동하게 하지만 봄을 끝내야 하는 스스로의 소임을 마치고 나면 어디론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꽃이 지는 날, 쓸쓸이 끝나버리는 것이 봄바람의 운명이다.
무릇 지는 것은 슬프다. 사라지는 것은 애처롭다. 지는 꽃은 해(日)이면서 달(月)이고, 미물이든 사람이든 그 숙연한 생명이며 사랑이다. 꽃이 지듯 사라지는 사랑에 아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꽃이 지듯 이승을 떠난 이를 추모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달이 지면 해가 뜨듯이 지지 않고 뜨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상사화 마른 잎 자리에서 긴 꽃대가 솟아올라 봄이 끝나는 날 가슴 저리게 연한 분홍빛 꽃을 피워내는 것은 슬픔이면서 기쁨인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그 꽃 또한 마침내는 시들어서 떨어지고 만다. 지는 것이 슬픔이라면 뜨는 것은 기쁨이다. 슬픔과 기쁨은 이와 같이 꿰어놓은 구슬처럼 이어져 있다. 슬픔과 기쁨, 애처로움과 대견함은 크게 보면 하나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 어느 한쪽 측면만을 바라본다.
낙동문학회 김점례 시인은 꽃잎 떨어지는 봄날, 꽃그늘 아래서 떠난 인연과 남은 인연을 생각한다.
만개한 꽃송이가
바람 따라 흩어집니다.
그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저도 어찌할 수 없어요.
예쁜 꽃잎이 살짝 어깨에 내리면
저는 기억 속의 인연을 찾아 헤매요
꽃잎 되어 날리던 아련함이
저를 자꾸 설레이게 해요
꽃송이는 허전함으로 씨앗을 만들고
저는 그리움으로 소중한 인연들을 엮어요.
화창한 어느 봄날
오고 가는 이 포근히 비추어 주던
노란 아기별 훌렁 벗어 던지고
나무가 꿈을 꿔요
흩어진 꽃잎을 만나는
그 꽃나무 아래에서
붉게 타오르는 가슴을 감추고
저는 기다려요
하늘 따라 간 인연을
그리고
남아 있는 소중한 인연을
― 김점례, <인연> 전문
김점례 시인의 이 시의 제목은 ‘인연’이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씨앗으로 영그는 것도, 그리움이나 기다림도 모두 인연의 끈에 묶여있는 하나의 현상들이라고 시인은 보고 있다.
꽃잎은 꽃송이로 옹기종기 붙어 있었다. 그러나 만개한 꽃송이는 이제 흩어질 일만 남았다. 바람이 불면 꽃잎들은 떨어져 날린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 육신이 쇠할 때까지 정처 없이 흘러간다. 꽃의 종말을 보면서 화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어쩌지 못한다.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서 화자는 “기억 속의 인연을 찾아” 헤맨다. 지나간 인연은 날리는 꽃잎처럼 아련하게 화자를 “자꾸 설레이게” 한다.
흩어지고 떠나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꽃송이는 어쩌면 허전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화자는 그 막연한 허전함 때문에 꽃송이가 씨앗을 만든다고 한다. 씨앗은 인연의 결실이면서 새로운 출발의 내재성이다.
씨앗 속에 담긴 그리움이 사람에게로 날아가면 인연으로 엮어진다. 그리움의 씨앗이 인연을 만드는 것이다. 예정된 인연을 내재한 씨앗은 그리움으로 현현한다. “화창한 어느 봄날/오고 가는 이 포근히 비추어 주던” 개나리꽃들이 모두 떨어져 버리면 개나리 나무는 꿈을 꾼다. 꽃 진 날의 기억이 아쉬움으로 꿈속에 머물고 이제 돋아날 푸른 잎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꿈속에 젖어든다.
“흩어진 꽃잎을 만나는/그 꽃나무 아래에서” 화자는 “붉게 타오르는 가슴을 감추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화자가 기다리는 것은 작열하는 여름날의 태양일 수도 있고 봄의 끝자락에 서 있을 자신의 실존일 수도 있다. 이승을 떠난 소중한 사람에 대한 가슴 저미는 기억일 수도 있고 아직 이승에 남아 화자를 감싸주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일 수도 있다. 시인은 그것을 ‘인연’이라고 한다.
인연은 씨앗이 새싹으로 꽃으로 다시 씨앗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하나의 줄이며 끈이다. 날실과 씨실이 얽혀서 짜이는 하나의 교직이다. 매듭지으면서 이어지는 모든 것이 인연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도 인연이고 만남과 이별도 인연이다. 먼저 간 자와 남아있는 자 사이에 오가는 그리움과 기다림도 인연의 현상이며 풍경이다. 시인은 꽃이 지는 날, 인연을 본다. 자연 현상에서 삶의 근원적인 이치를 보는 자가 곧 시인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눈은 예리한 투시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슬픔에 젖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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