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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4] 봄이 오는 기척-한희구 시인[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9. 3. 7. 15:47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4)>

 

 

봄이 오는 기척

 

 


바람기가 달라졌다. 떨쳐내지 못한 겨울 끝자락의 드문드문하던 가시가 사라졌다.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아사 차렵이불 지긋이 끌면서 어느 여인이 샤방샤방 들어서고 있는 것 같다. 겨울 겉옷과 내의가 무겁고 답답하다. 벌써 산기슭엔 산수유꽃이 피고 있다. 양지 바른 곳엔 개나리꽃이 피었다. 스멀스멀 살갗이 가려워진다. 기습인가? 아니면 이미 예고된 등장인가? 슬며시 들어서는 봄의 기척이 도처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경칩을 지나면서 이제 본격적인 봄이 시작된다. 경칩(驚蟄)의 자의(字義)는 ‘놀랄 경’, ‘숨을 칩’이다. 따라서 경칩은 ‘숨어있던 것들이 놀라서 깨어남’을 의미한다. 벌레와 개구리, 뱀이나 곰이 겨울잠에서 부스스 깨어난다. 땅이 풀리며 초목이 움트기 시작한다. 놀라서 깨어나는 것은 동물이나 식물만이 아니다. 따스한 햇살과 훈훈한 봄바람을 맞으면서 우리의 마음도 깨어난다. 괜스레 좀이 쑤시고 답답한 집을 벗어나 어디론가 휑하니 나가고 싶어진다. 누군가와 나란히 봄길을 걸으며 사랑을 나누고 싶어진다. 달력은 수동적으로 다만 한 장씩 뜯겨나갈 뿐이지만 몸은 능동적으로 봄이 오는 것을 먼저 알아차린다. 알아차릴 뿐만 아니라 은근히 반응한다. 문명화 되면서 퇴화한 자연적 본성이 우리의 몸 속 어딘가에 은밀히 살아남은 것이다.


봄을 맞으려면 강으로 나가야 한다. 수런거리는 강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파랗게 생명의 물을 빨아올리는 물버들을 보면서, 새 보금자리를 만들어 새끼낳이 차비를 서두르는 새들을 보면서, 보송보송 맺혀있는 들풀의 이슬을 보면서 경이로운 자연의 생기를 마셔야 한다. 달라진 물빛, 달라진 하늘빛, 원융무애하게 몸과 몸을 섞어 거대하게 흐르는 강물을 보아야 한다. 그렇다. 봄은 ‘보는 계절’이다. 새로워지는 모든 것을 새눈으로 새로이 보는 시기이다. 모든 것이 새로이 새 출발을 하는 봄은 그러므로 축복이고 은혜이다. 봄을 맞으면서 우리는 새 생(生)을 다시 시작한다. 풍요의 꿈과 희망을 가진다.


봄은 공평하다. 땅과 하늘, 초목과 짐승, 바람과 비와 햇살,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 ― 이들 모두에게 그의 기운을 골고루 나누어 준다. 나누어 주고 또 나누어 주어도 봄기운이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도처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분열하여 증식한다. 봄비라도 사근사근 내리는 날은 만물에 기름기가 자르르 돈다. 고목의 검은 가지 끝에도 고택의 대청마루에도 봄비가 몰고 오는 물기가 소리 없이 스며든다. 귀한 봄비가 묵은 가지를 간질이다가 마침내 두루두루 어루만진다. 촉촉하게 젖어들면서 굳은 껍질 안의 새싹을 자꾸 바깥으로 끌어낸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새싹은 봄비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조금씩 내민다.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여 하나가 되는 자연의 화합이다. 봄기운을 받으며 사람은 사람이 된다. 자연인이 된다. 과학과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이 설 자리는 자연 뿐이다.


시나루동인 한희구 시인은 늙은 아내에게 바치는 헌시에서 노년의 봄을 노래하고 있다.

 


자리에 누운

해맑은 얼굴을 볼 때

내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며


당신의 평생

타다 남은 검은 가슴에

내 찐하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소


여보,

만물이 소생하는

대지가 약동할 때

여기에

우리의 뜨거운 사랑의 힘을 얹어

꽃을 피웁시다

모두가 반기는 당신의 꽃을 피웁시다


내 남은 여생

당신에게 바치리라


        ― 한희구, <당신에게> 전문

 


봄은 청년의 특권도 전유물도 아니다. 오히려 노령에 맞는 봄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다. 의미가 더욱 새로울 수 있고 절실할 수 있다. 한희구 시인은 노부부가 맞는 봄의 정경과 다짐을 절절하게 진술하고 있다.


늙은 아내는 노환으로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다. 그러나 아내의 얼굴은 해맑기만 하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화자의 심정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진”다. 한 평생을 함께 해온 날들의 애환이 되살아나고 겪어야 했던 고난이 속으로 차곡차곡 쌓여져 있을 것임을 화자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를 슬프게 하는 것은 해맑음이다. 해맑음은 곧 창백함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극심한 고난과 애환을 초극한 창백함이다. 그러나 마음속마저 해맑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새카맣게 타버렸을 수가 있다. 그래서 아내의 “평생/타다 남은 검은 가슴에” 화자는 “찐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노부부 사이에 냇물처럼 흐르는 사랑의 교감이다.


어느 봄날, 화자는 아내에게 “여보,”라고 부르면서 다짐을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대지가 약동할 때/여기에/우리의 뜨거운 사랑의 힘을 얹어/꽃을 피웁시다”라고 나직하게 다짐하는 것이다. “여기”는 노부부가 지금 처하고 있는 자리이거나 위치일 수 있다. 그 자리에는 한 생(生)이 침전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는 굳건한 땅이며 토대가 된다. 그 위에 “우리의 뜨거운 사랑의 힘”을 얹자고 한다. 그것은 반석 위에 놓는 한 생의 열정이며 결실이다. 그리하여 ‘꽃을 피우자’고 한다. “꽃”은 아름다움의 상징이며 절정의 메타포이다. 병석에 누운 아내가 다시 털고 일어나 여생을 원(願) 없이 살아보기를 소망하는 시인의 간절한 심정이 순후하다. “모두가 반기는 당신의 꽃을 피”우자고 화자는 되풀이하여 기원한다. 노부부뿐만이 아닌 자손들과 나아가 먼저 가신 선조들까지도 반가워 할 일이 아내의 회복이며 노부부의 화평이다.


그래서 화자는 “내 남은 여생/당신에게 바치리라”고 마침내 선언한다. 그것은 준엄한 자기약속의 다른 표현이다. 시인은 병석에 누운 늙은 아내를 위해 “남은 여생”을 헌신하겠다고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다. 참으로 감동적인 다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당신의 꽃”은 늙은 아내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시인이 피우는 꽃이다. 생의 끝 지점을 향해서 아름다운 채로, 절정인 채로 가자는 것이다. 겨울로 들어서는 가을이 아니라 봄으로 가자는 시인의 자기다짐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로, 부부가 함께 피우는 꽃으로 여생을 걸어가자는 시인의 다짐은 작게는 화자 부부의 일이겠지만 크게는 모든 노인들이 희구하는 당위적 이상일 것이다. 묵은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고 꽃이 피듯이 사람들은 노년에 다시 젊은 날의 새 사랑으로 새록새록 되돌아간다. 봄이 오는 기척은 이와 같이 오래 묵은 것 속에서 더욱 살뜰하게 들려오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직되고 속박된 삶의 구속에서 봄날의 새로운 해방으로 나서는 노시인의 심경을 우리는 이 시에서 읽게 되는 것이다. 봄에 피는 꽃처럼 되살아나는 노경의 사랑은 순수하면서도 사뭇 진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