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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7]나무,숲,별,하늘-장옥희 시인[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9. 3. 28. 15:52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7)>

 

나무, 숲, 별, 하늘

 


세상은 땅에도 있고 땅 위 높은 곳에도 있다. 땅의 세상이 나무와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땅위 높은 곳의 세상은 별과 하늘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를 별과 대비한다면 숲은 하늘이 되는 것인가? 대비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서 이들을 상징적 대비로 본다면 그 외연은 무한하게 확장된다.


나무는 숲을 이루지만 숲을 떠나서도 나무는 나무이다. 살아있는 나무도 나무이고 죽은 나무도 나무이다. 상징이나 비유로 보면 나무는 사람일 수도 있고 건물이나 빌딩일 수도 있으며 물고기일 수도 있다. 나무는 그 자체로 개체이다. 자력으로 일어서 있음이며 타력에 의해 쓰러질 수 있음이다. 나무는 침묵하지만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나무의 언어는 바람을 만나야만 소리로 발성된다. 나무의 울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는 늘 연약하다. 외롭기 때문이다. 더러는 처절한 소리로 울 때도 있다. 강에서 가속이 붙은 바람이 떼거리로 몰려올 때이다.


외롭고 처절하기에 나무들은 모이고 싶어 한다. 끼리끼리 모여서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풀이나 덩굴이 함께 하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우거진 것이 숲이다. 숲은 어울림이며 포용이다. 조화이며 모성이다. 숲은 새들과 뭇 짐승들을 품는다. 아늑한 안식처를 제공한다. 숲은 나무의 소중함을 안다. 나무 없이 숲은 존재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숲의 권능은 전적으로 나무들로부터 위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권능을 독선적으로 휘두르지 않는다. 숲에는 전횡이나 독재가 없다. 그러기에 숲은 늙지 않는다. 노욕도 없다.


별은 하늘에 떠서 흐르면서도 제 자리를 지킨다. 저 위에서 반짝이는 빛이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꿈과 희망을 가지게 한다. 태양 앞에선 그들의 빛을 스스로 거두어 들여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더 크고 밝고 강렬한 빛 앞에서 양보와 순종의 미덕을 갖출 줄을 아는 것이다. 밤이 오면 그들은 제각기의 빛깔과 밝기로 명멸한다. 작은 무리를 지어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큰 무리를 짓기도 한다. 은하를 이루어 강처럼 하늘 멀리 흐르기도 한다. 멀고 가까운 제각기의 별들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스스로 안다. 어쩌다 불길 하나 긴 꼬리로 달고 별똥별로 떨어질 줄도 안다. 아름답게 사라지는 법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투명한 무대막처럼 땅이나 바다 위에 펼쳐져 있다. 땅이나 바다가 아무리 넓다고 한들 어찌 하늘에 비하겠는가! 말 그대로 광대무변한 것이 하늘이다. 그래서 우리는 초자연적인 절대자가 하늘에 있다고 믿어 ‘하느님’이라고 부르며 믿고 섬긴다. 숲이 아무리 넓어도 땅을 다 덮을 수 없듯이 은하도 하늘을 모두 덮지는 못한다. 하늘은 숲 밖의 숲이고 세상 위의 세상이다. 사람의 세상은 땅 위에 있고 땅은 하늘에 안겨 있다.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은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볼 수밖에 없다. 하늘은 선택하지 않으며 편애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때로 하늘을 원망하는 수가 있지만 하늘은 그 원망마저도 침묵하면서 받아들인다. 하늘은 하늘이다.


난설독서회 장옥희 시인의 다음 시를 보자.

 


허공 한 자락

음악 같은 침묵 속에

향기 푸른 길 강물처럼 흐른다


무수한 비바람

이겨낸 그 자리

떡갈나무 한 그루 의연히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다


나뭇잎 사이로 올려다 본 하늘

보석으로 장식되고

웃음처럼 따뜻한 온기 피어난다


비 그친 숲을 거닐며

무풍지대를 지나

인고의 세월을 건너온

구릉 위의 그 나무 홀로 꿋꿋하다


        ― 장옥희, <별> 전문

 


장옥희 시인의 이 시는 ‘2006 제4회 전국문화가족 창작시 장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시인은 이 시의 서두에서 세상과 세상 사이, 그러니까 땅과 하늘 사이에 허공이 있다고 한다. 허공은 양자를 이어주는 공간이다. 그 크기의 서로 다름으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하늘과 땅의 완충공간이 허공이다. 땅은 허공을 통해서만 하늘에 이어진다. 허공은 침묵이다. 이어주면 그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기에 굳이 말이 필요 없다. 그러나 허공은 “향기 푸른 길”이다. 무릇 이어주는 것에서는 향기가 나는 법이다. 침묵 속에 푸른 향내가 나는 허공은 “강물처럼 흐른다.” 흐름은 생명이다. 생명이 생명을 이어준다.


허공에 “떡갈나무 한 그루 의연히” 서 있다. 떡갈나무는 땅에 뿌리 내리고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떡갈나무는 “무수한 비바람”을 이겨낸 존재이다. 난관과 역경을 이겨낸 자만이 굳건한 그의 자리를 가진다. 그리고 주어진 소임을 다할 수 있다. 물론 하늘이 무너질 리는 없겠지만 떡갈나무가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다”고 시인은 본다. 그러니까 여기서 떡갈나무는 무너지는 것에 대한 버팀목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나의 가정, 하나의 일터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떡갈나무 “나뭇잎 사이로 올려다 본 하늘”에는 별이 “보석으로 장식되”어 반짝이고 있다. 사람들은 힘이 들 때 그가 선 자리에서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삶이 고단할 때 뿐만이 아니다. 생래적으로 사람들은 위를 바라보며 산다. 머리가 신체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이것은 분명하다. 위를 본다는 것은 소망이나 희망을 가진다는 말이고 설정된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아직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루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우리는 즐거워진다. 그래서 희망이나 목적에서는 “웃음처럼 따뜻한 온기”가 피어나는 것이다.


“인고의 세월을 건너온” 떡갈나무는 “비 그친 숲”의 “구릉” 위에 꿋꿋하게 서 있다. 구릉은 우리가 살아가는 땅이며 세상이다. “하늘을 떠받치”는 나무는 엄청난 하늘의 무게에 끊임없이 중압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별 같은 소망과 목적이 그 하늘에 있는 것이기에 “인고의 세월을 건너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망이나 목적이 없는 삶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목적이 끌어가는 삶은 꿋꿋할 수 있다. 여기서 나무는 시인의 실존이면서 동시에 만인의 실존으로 보인다. 시인은 별을 바라보며 사는 자이다. 이 시의 제목 또한 다름 아닌 ‘별’이다. 나무, 숲, 별, 하늘은 연관선상에 있는 하나의 상징들이다. 구슬을 꿰듯이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내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시인의 위대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