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6)>
자고산
자고산은 왜관의 배산(背山)이다. 왜관철교 아래 낙동강에 발을 딛고 멀리 아곡리까지 미끈하게 벋어 나가면서 병풍처럼 아늑하게 왜관의 뒤쪽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자고산이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유학산에서 솟아오른 정기가 자고산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낙동강물과 마주쳐서 머물게 되는 땅이 왜관리이다. 안산(案山)인 달오산이 이 정기를 가두어 왜관리에 고이게 하는 지형이 왜관리인 것이다. 따라서 왜관은 새로운 정기가 끊임없이 흘러들어 머무는 곳이 된다. 생기가 넘치는 곳이 된다.
자고산에는 한국현대사의 깊은 상흔이 서려 있다. 자고산은 비극적인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다. 1950년 8월 3일 왜관읍 주민들에게 소개령이 내려지고 북한군 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왜관 철교를 폭파함으로써 시작된 자고산전투는 실로 격렬하였다.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낙동강방어선(워크라인)의 최전선이었던 이곳엔 전후 60년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 군데군데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다. ‘호국의 다리’라고 불리는 길이 469m의 다리 난간 곳곳에는 탄환자국과 포격의 흔적들이 남아있고 자고산 군데군데에는 진지를 구축했던 자취들이 남아있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 사이에 초ㆍ중등학교에서는 사방사업에 쓰일 풀씨 모으기 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과제로 부과하여 주로 다년생 나무의 씨앗을 모았다. 싸리나무 씨앗을 채취하러 그즈음 어린 나이로 자고산에 올라보면 쉽게 탄피를 주을 수 있었다. 까마득히 고압전선을 매단 철탑 근처에서는 탈색한 해골도 더러 발견되었다. 1950년대 후반까지 자고산 북편 반계천에는 지뢰와 불발의 박격포탄이 널려 있었다. 지뢰를 밟거나 포탄을 잘못 만져서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왜관의 병원으로 소달구지를 타고 실려 오기도 했다. 전후의 황량한 자고산 주변의 풍경이었다.
2009년 현재의 자고산 정상의 바로 아래로는 KTX 터널이 뚫려 있다. 낙동강에 맞닿은 서쪽 발치로는 일제 강점기에 뚫어놓은 경부선 철로의 터널이 개미굴처럼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왜관의 배산(背山)으로서 시가지에 생기를 불어넣고 지켜주는 고마운 산인 자고산이 역사의 길목마다 수난을 겪어왔고 지금도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고산에 애정을 보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자고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또한 많지 않다. 칠곡군청 홈페이지의 관광명소 소개란에도 자고산은 소개되어 있지 않다. 해발 303m의 낮은 산이라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다. 높이만을 중시하는 풍조 때문이다. 왜관을 지켜주는 보배로운 산일뿐만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질곡에서 허덕인 애처로운 산이면서도 지금은 저렇게 소외되어 있다.
제대로 대접도 받지 못하는 자고산이지만 봄이 지금 이만큼 와 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지만 자고산은 스스로 봄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산수유 꽃이 피었고 진달래가 막 피어나고 있다. 자고산의 진달래꽃은 유난히도 선연한 핏빛이다. 땅으로 스며든 붉은 피들을 자아올리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파르르 진달래꽃잎이 떨리고 있다. 이곳에서 꽃잎처럼 떨어져간 젊은 영령들의 영혼이 환생하기 때문이다. 자고산은 그 살 속 깊이 머금고 있는 피와 지기(地氣)를 뽑아 올리며 말없이 왜관을 지키고 있다.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영원한 평화를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칠곡문협 회장을 역임한 이광수 시인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는 자고산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면서 이 산으로 오고 있는 봄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등성이마다
봄빛 피어나고
뙈기밭 자락
쪼만한 이랑
살뜰히 봄 애정이
솟아난다
전후 50년
산뜰엔
솔숲 우거지고 다시
흘러가는 한 세기
뒤돌아보면
설움에 겨웠지만
힘겨웠던
인내 한 자락에
꿈이 영근
산
자고산은 이름 없는
영령들의 수호산
낙동강과 짝하여
하늘을 이고
긴 세월 하루같이
지내오며
다시 또
파란 새싹을,
새 순이 돋는 봄의 환희를
일구는
뿌리 깊은 산
자고산 속에는
왜관의
깊은 숨결이 있다
― 이광수, <자고산> 전문
이광수 시인은 자고산에 대하여 누구보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봄빛이 등성이마다 피어나고 “뙈기밭 자락”이든 “쪼만한 이랑”이든 “살뜰히 봄 애정이/솟아난다”고 한다. 황폐했던 자고산에 지금은 솔숲이 우거져 있는데 세월은 강물같이 흘러간다고 한다. 설움이 겨웠고 힘겨웠지만 자고산은 인내함으로써 꿈을 영글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꿈’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평화와 번영이다. 그가 지켜야 할 왜관 땅의 풍요이다.
시인은 자고산의 고유한 성격을 규정한다. “자고산은 이름 없는/영령들의 수호산”이다.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을 지키는 산이면서 또한 그 영혼들이 왜관을 지켜주는 산이라는 말이다.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자고산은 낙동강과 짝하여 지킨다. 산수가 이와 같이 맞닿은 곳은 그리 흔하지 않다. 산이 강에 발을 담그고 함께 짝을 이루고 있는 곳은 드물다. 그래서 왜관은 조화의 땅이다. 화합의 땅이다.
자고산은 “봄의 환희를/일구는/뿌리 깊은 산”이다. 빙산처럼 땅 위에 솟아있는 정상은 높지 않지만 땅 아래 내리고 있는 뿌리는 깊고 거대하다. 물론 여기서 뿌리가 상징하는 것은 역사이며 의미이다. 비극적 한국 근ㆍ현대사의 역사적 질곡을 그의 품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해마다 “다시 또/파란 새싹을,/새순”을 일구어내는 것이다. 뿌리 깊은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이 그 아픔을 딛고 새 마음 새 각오로 다시 우뚝 일어서는 일보다 더 장한 일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자고산의 영원한 생명력은 바로 그런 것이다. 고통이 아무리 많고 크더라도 때마다 다시 봄의 환희와 희망으로 나서는 위대한 산이 바로 자고산이다. 왜관 또한 그러하다. “자고산 속에는/왜관의/깊은 숨결이 있다”고 시인은 시를 마무리한다. 자고산이 왜관을 지키면서 왜관의 생명력을 품고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바로 보고 바로 아는 사람이다. 그가 살아가는 땅을 사랑하고 그 땅에 생기를 불어넣는 산과 강의 고마움을 아는 자가 시인이다. 민감한 감성으로 숨은 것의 가치를 찾아내어 스스로 감동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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