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시 해설/시 해설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40] 월곡리-전재욱 시인[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9. 4. 18. 16:04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40)>

 

월곡리

 


월곡리를 우리말로 바꾸면 ‘달빛 쏟아지는 골짜기 마을’ 쯤이 될 것이다. 농촌이 공동화 되어 가는 21세기 초입의 한국적 현실에서 이러한 꿈같은 농촌마을은 어쩌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일수록 더욱 절실한 법이다. 돌아갈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아련한 고향, 월곡리는 바로 그러한 존재이다. 월곡리는 달이 있고 골짜기가 있고 마을이 있는 곳이다.


달은 정숙하면서도 다소곳한 여인네와 닮았다. 인공의 불빛이 없거나 여릴 때라야 달은 그 빛을 드러낸다. 네온이 명멸하는 도시의 거리에는 달빛이 찾아오지 않는다. 푸른빛이 도는 어스름 속에서 달은 제대로의 빛을 낸다. 그럴 때 달은 썩 맑고 밝아진다. 그러한 달빛을 우리는 ‘교교하다’고 한다. 교교한 달빛 아래 산과 강은 은은하게 그 모습을 감추듯 나타낸다. 한마디로 운치가 있다. 보는 이의 마음이 서늘해지고 경건해지기도 한다. 달은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신비의 대상이다.


골짜기는 안온하고 윤습하다. 생명이 배태되는 곳이다. 내뿜는 곳이 아니라 모여드는 곳이다. 골짜기를 차지하면 산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 된다. 골짜기가 없는 산은 상상할 수도 성립할 수도 없다. 용솟음치는 산의 기상은 골짜기에서 발원된다. 산과 산이 합쳐지는 것은 골짜기에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짜기가 경시되는 것은 사물의 근본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맹목 때문이다. 그들이 살고 있으면서도 그 땅의 가치를 모르는 눈이 바로 보통 사람들이 가진 청맹과니이다. 요컨대 골짜기에서 생명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간다.


마을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혼자 살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정이 그리워서 사람들은 모여서 산다. 모여 살다 보면 문화가 생기고 역사가 만들어진다. 문화와 역사의 뿌리는 그러니까 삶이다. 문화에는 양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지도 있다. 낮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밤도 있다. 밤의 문화, 낮의 문화가 그것이다. 마을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 모여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과 여러 가지 문화를 버무리는 곳이 마을이다. 마을은 잠잘 때도 숨을 쉰다.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회원인 전재욱 시인의 다음 시를 보자. 현실 비판적이고 다소는 저항적이기도 한 전재욱 시인의 시풍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서정시가 바로 이 시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든 시심의 깊은 밑바닥에는 서정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이기도 하다.

 


사릿잎 헌 삽짝 틈으로 달빛이 밀려든다 슬며시, 들어서고 있다 홍수가 나던 날, 아무 소리 없이 마을 어귀부터 차오르던 범람한 강물과 흡사하다 갈색으로 변한 풀잎들이 입을 다물고 드러눕는다 숨을 멈춘 앞산과 들판이 축축한 달빛에 온몸을 담그고 있다 잠든 마을은 그래도 깨어나지 않는다 너울진 달빛이 마을의 초가지붕들을 밟으며 뒷산 대숲까지 점령해 나간다 그렇다, 숨죽여 다가오는 점령군의 진군이다 대규모 병력이다


배바위 쪽에서 발정한 살쾡이 울음소리가 화살처럼 날카롭게 문득 솟구친다 밀고 들어오던 달빛의 한 가운데가 찢어지면서 대열이 헝클어진다 숨죽이고 있던 개울물이 침묵을 벗고 졸~졸~졸~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개울가 수양버들 고목 아래 희끗희끗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잠시 보이는 듯 마는 듯 사라진다


물레방앗간, 투닥투닥 물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가녀린 여자의 소리가 들리는 듯 마는 듯 빠져 나온다 가을 달밤의 월곡 마을,


                                       ― 전재욱, <월곡리> 전문

 


월곡리는 현존하는 마을 이름일 수도 있고 시인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월곡리의 현존 여부와는 무관하게 전통적 서정이 깃들어 있고 우리의 정서가 끊임없이 지향하는 곳이 바로 월곡리이다.


담박한 수묵화를 그려내듯이 화자는 월곡리를 묘사하고 있다. 월곡리는 산을 등지고 있는 강마을인 것 같다. 밤의 월곡리에는 달빛이 밀려든다. 화자는 “사릿잎 헌 삽짝 틈으로 달빛이 밀려든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것도 “슬며시, 들어서고 있다”고 한다.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사립문의 싸릿대 틈새로 달빛이 슬그머니 들어선다는 것이다. 밀려드는 달빛을 보면서 화자는 “홍수가 나던 날”의 차오르는 강물을 연상한다. 홍수가 나던 지난 어느 날 강물은 “아무 소리 없이 마을 어귀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밀려든다는 점에서 홍수와  달빛은 유사성을 가진다. 그것들이 밀려들면 “갈색으로 변한 풀잎들이 입을 다물고 드러눕는다.” 조명으로 물든 무대처럼 색깔이 변한 풍경이 일시에 정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숨을 멈춘 앞산과 들판이 밀려드는 달빛에 온몸을 담그고 있다. 월곡리는 달빛으로 온통 축축이 젖어 있다. “잠든 마을은 그래도 깨어나지 않는다.” 달빛 아래 잠든 월곡리의 침묵은 곧 평화이다. 월곡리의 평온과 평화는 달빛으로 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달빛에 잠겨서 더욱 안온해진다. 강물처럼 “너울진 달빛이 마을의 초가지붕들을 밟으며 뒷산 대숲까지 점령해 나간다.” 대규모 병력의 진군처럼 월곡리를 통째로 뒤덮는 달빛을 시인은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밀려드는 달빛이 잠든 월곡리의 마을과 산과 강을 애무하는 것으로 보는 시인의 시각은 매우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면서도 그 스케일이 크다.


침묵만이 평화는 아니다. 침묵이 깨어지면서 생동하는 평화가 찾아온다. 월곡리의 뒷산 “배바위 쪽에서 발정한 살쾡이 울음소리가 화살처럼 날카롭게 문득 솟구친다.” 발정한 살쾡이 울음소리는 충일하는 생명의 소리이다. 그 소리로 교교히 흐르는 달빛 아래 잠든 월곡리의 침묵이 깨어진다. 그것은 곧 달빛의 파열로 이어진다. “달빛의 한 가운데가 찢어지면서” 달빛군단의 “대열이 헝클어진다.” 뿐만이 아니다. “숨죽이고 있던 개울물이 침묵을 벗고 졸~졸~졸~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살쾡이의 울음소리에 달빛이 찢어지면서 삼라만상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월곡리의 평화가 깨어진 것도 아니고 달밤의 정적이 깨어진 것도 아니다. 월곡리는 여전히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다만 사랑에 빠진 자들만 잠들지 못한 채 밀회를 나누고 있다. 화자는 “개울가 수양버들 고목 아래 희끗희끗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잠시 보이는 듯 마는 듯 사라진다”고 암시를 한다. 여기서 희끗희끗 움직이는 것은 바로 연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평화로운 가을 달밤의 월곡리에는 싱싱한 젊음과 사랑이 살아 있다. 화자는 물레방앗간을 대두 시킨다. 물레방아는 방아를 찧지 않을 때에도 돌아간다. 밤을 새워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러나 방앗간 안은 은밀하게 비어 있는 독립공간이다. 화자는 물레방아의 “투닥투닥 물 떨어지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가녀린 여자의 소리가 들리는 듯 마는 듯 빠져 나온다”고 한다. 여기서 ‘여자의 소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의 소리이며 생의 환희를 의미한다.


으스름 달빛 아래 살쾡이와 젊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가을 달밤의 월곡마을”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이 된다.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리운 그림이다. 독자는 누구나 그런 마을에 살면서 사랑을 나누는 젊은 남녀를 선망한다. 꼭 거기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 마을에 서 있는 자신의 실존을 상상하면서 즐거워진다. 이것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현대인의 꿈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사람들에게 꿈 하나씩을 선사하는 사람이다. 시는 독자에 대한 꿈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