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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9] 머리를 빗으며-이슬비 시인[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9. 4. 11. 16:02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39)>

 

머리를 빗으며

 


사람들은 아침마다 머리를 빗는다.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후에는 으레 빗질을 한다. 빗질은 빗질 그 자체로 어쩌면 노동일 수 있다. 특히 긴 머리나 파마머리를 빗을 땐 정성 들여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웨이브를 살려내기 위해선 숙련된 테크닉도 필요하다. 그러나 빗질은 노동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빗질을 하는 아침 시간은 하루 몫의 노동이 시작되는 성스러운 순간이다. 머리를 빗고 집을 나서는 우리의 하루는 노동으로 이어져서 노동으로 끝이 난다. 설사 그가 실업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노동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노동은 직업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빗질은 간추림이다. 엉키고 흩어져 있는 것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다. 지난밤을 보낸 머리는 헝클어져 있다. 하루의 피로를 푸는 일은 녹녹치 않았다. 몸부림을 치거나 뒤채면서 자는 잠자리에선 누구도 머리카락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 밤새 머리카락은 버려져 있었고 그만큼 자유로웠다. 그러나 날이 밝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면 다시 우리의 마음은 긴장한다. 타인을 의식해야 하며 타인에게 나를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빗질을 한다.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나름대로의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 가장 깔끔하고 좋은 모습의 나를 타인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빗질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단호하게 살아갈 하루의 결의를 다진다. 그러나 빗질을 하다 보면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이 생기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한 올의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은 채 빗질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카락은 약 8만개에서 10만개라고 한다. 하루에 약 50개 정도가 빠진단다. 머리카락은 밤에는 좀처럼 자라지 않는다. 밤은 어쩌면 수명을 다한 머리카락이 사망하는 시간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침의 빗질에 머리카락이 가장 많이 빠지는 것이다. 머리카락은 하루에 0.2mm에서 0.3mm 정도 자란다. 특히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가장 잘 자란다. 허리까지 오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만드는 데는 장장 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머리카락의 수명은 여자는 6년에서 7년인데 비해 남자는 불과 3년에서 5년 정도라고 한다. 그 기간 동안 수명을 다한 머리카락은 빠지고 새 머리카락이 돋아난다.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이 꼭 수명을 다해서가 아닌 경우도 물론 있다. 질병이나 스트레스 또는 호르몬 변화나 노화에 의해서도 머리카락은 빠진다. 탈모증상으로 생기는 대머리도 있다. 그러나 두피에 결정적인 병인이 없는 한 새 머리카락은 자라난다.


사람들은 평생 똑 같은 머리카락을 빗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새로 돋아난 새 머리카락을 빗는다. 빗질은 죽은 머리카락을 걸러내고 새 머리카락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두피에 쌓인 먼지와 노폐물, 비듬 등을 제거해주며 혈액의 흐름을 촉진시킨다. 뿐만 아니라 피지 분비를 원활히 하여 윤기 있는 머릿결을 만들어 준다. 그러니까 모근을 튼튼히 해주고 머리카락에 싱싱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일이 빗질이다. 그러나 상투를 틀거나 묶음머리를 하면서 머리카락을 너무 세게 당기게 되면 오히려 그 수명은 짧아진다. 무엇이든 결을 결대로 곱게 다룰 때 천수를 누리게 되는 법이다.


빗질을 하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오늘 처리해야 할 일들의 순서와 내용들에 관해서 생각할 수도 있고 갑자기 늘어난 주름살이나 기미에 대하여 마음이 쓰일 수도 있으며 빗 끝으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수명을 다한 머리카락에 대하여 잠시 무상한 심경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아니면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하여 골똘하게 고민에 빠질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빗질이 오래 중단되지는 않는다. 곧 빗질은 계속되고 끝이 난다. 마찬가지로 그 고뇌나 고민 또한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빗질이 끝나면 이어서 그 다음의 행위로 넘어가야 하고 사람들의 생각 또한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시나루 동인 이슬비 시인의 다음 시는 빗질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삶의 순환과 우리가 갖추어야 할 근신과 겸허의 덕목을 깨우치고 있다.


엉켜있는 머리를 빗었다

끊어져서 빗에 걸려 나오는 머리카락들

꺾어져 약해진 것, 여러 갈래 갈라진 것

성한 것은 없고 온통 상한 머리 끝부분이다


이 녀석들도 일 년 전 오늘은

새로 나온 녀석들이겠지

그날 했던 생각들도 지금은 구석으로 밀려나

살짝 건드리면 내 것이 아니게 되어버릴까


그래도 잃어버렸다는 자각조차 없이

변함없이 머리는 자랄 테고

쉬지 않고 생각은 계속될 테고


떨어져 나가는 것들은 할 일을 다 한 것들

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갈 것들


다만,

혹시라도 실수로 소중한 부분을 잃지 않기를


        ― 이슬비, <머리를 빗으며> 전문


화자는 “엉켜있는 머리를” 빗는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시간대는 나타나 있지 않다. “빗에 걸려 나오는 머리카락들”은 상해 있다. “꺾어져 약해진 것, 여러 갈래 갈라진 것”들이다. 성한 것이 없다. 온전히 빠진 머리카락도 있겠지만 화자는 상해져 떨어져 나온 머리카락에 시선이 머문다. 떨어져 나온 머리카락도 상해져 있지만 남아 있는 머리카락도 그 끝부분이 상해 있다. 여기서 갈라져 상한 머리카락은 삶의 가닥들과 상통한다. 일상의 일들은 상처 받으면서 더러는 떨어져 나가고 더러는 상한 채로 남아 있다. 상한 채로 남아 있는 그 일들의 뿌리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준다. 상처 속에서 삶은 살아지는 것이다. 상처 없는 삶은 이미 삶이 아니다.


떨어져 나온 머리카락도 “일 년 전 오늘은/새로 나온 녀석들이겠지”라고 화자는 독백을 한다. 머리카락을 ‘녀석들’로 의인화한 여기서부터 시인이 가지고 있는 휴머니즘이 느껴진다. 시간의 흐름 위에서 지나온 저쪽에서 가진 생각과 지금 여기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같지 않다. 빗질에 떨어져 나오는 상한 머리카락처럼 화자가 지난 날 가진 생각들도 살짝 건드리면 부스스 부서져 버려 화자의 것이 아닌 것으로 될지도 모른다고 시인은 염려한다. 스스로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시인의 소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로 그 부분이 우리가 정체성(identity)이라고 부르는 바의 것이다. 시인은 상한 채로 남아 있는 머리카락에서 삶의 정체성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잃어버렸다는 자각조차 없이/변함없이 머리는 자랄 테고/쉬지 않고 생각은 계속될 테고” 시인이 진술하는 이 부분은 ‘무심한 흐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을 잊어버린다. 망각이라는 은혜이다. 상실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쉬워하고 애통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망각한다. 만약 인간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가지는 애석한 마음을 계속하여 가지고 살게 된다면 그의 삶은 피폐해지고 마침내 종말을 앞당겨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한다. 뇌의 자율 조절기능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망각은 은혜이다. 그러나 자각하지 못한다. 망각 그 자체도 자각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은혜라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자각하지 못함이 곧 무심함이다. 이 무심함을 토대로 하여 인간의 생각은 자꾸 새로운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그의 몸 일부가 상해서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이 무심하게 자라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인이 말하는 것은 머리카락이든 생각이든 삶이든 간에 ‘무심한 흐름’ 위에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제 달관한다. 순리에 따른다. 그래서 화자의 입을 통해서 “떨어져 나가는 것들은 할 일을 다 한 것들/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갈 것들”이라고 말한다. 떨어져 나가거나 빠지는 머리카락은 그들의 소임을 다한 것들이다.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떠나는 것이 순리이다. 그의 역할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리에 연연하는 것은 집착이다. 집착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황폐화시킨다. “할 일을 다 한 것들”은 떨어져 나가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것이 힘들면 빗질하는 흐름을 따라서 떨어져 나가면 된다. 그래야 그 자리는 새로운 것들이 채워 나갈 수 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염려한다. “다만,/혹시라도 실수로 소중한 부분을 잃지 않기를” 시인은 소망한다. 떨어져 나갈 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떨어져서는 안 될 것은 남아 있어야 한다. 남아 있어야 할 소중한 것이 실수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자연의 이치에 맡겨 두었을 때는 그렇게 된다. 그러나 잘못된 인위나 작위가 가해졌을 때 소중한 것이 떨어지게 된다. 늙어 소임을 다한 머리카락은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자라나야 할 머리카락은 떨어져서는 안 된다. 이것을 시인은 염려하고 소망한다. 쉼 없이 염려하고 소망하는 자, 그의 이름이 곧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