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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5] 새해-구상 시인[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9. 1. 3. 15:16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5)>

 

새해

 


새해가 밝았다. 깜깜한 어둠을 헤치고 동녘에서 떠오르는 새붉은 태양은 어제의 묵은 태양이 아니라 새로운 태양이다. 새롭다는 말은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은 산뜻하고 신선하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초여름 남새밭의 새벽 푸성귀처럼 싱싱하게 우리 앞에 문득 서 있는 것이 새로움이다. 처음이기에 설레고 기대가 부풀 수밖에 없다. 새로운 것 앞에서 사람들은 삼가하며 다가서는 조심성이 생긴다. 사뭇 경건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섣달 그믐날 뜬 태양과 새해 아침에 뜨는 태양이 서로 다른 태양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해 첫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새로운 태양으로 맞이한다. 새해 아침을 맞이하기 위하여 섣달 그믐날에는 목욕을 하고 깨끗하게 세탁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지난 달력을 떼어내고 새 달력을 내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 그렇게 한다. 묵은 것을 씻어내고 몸가짐을 가다듬는 생각과 마음을 가진다. 그래야 새해는 새해가 되는 것이다.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태양이 달라서가 아니라 새해 새날 아침의 태양을 새로운 태양으로 우리의 마음이 받아들임으로써 새해가 되는 것이다.


새해 새날 아침엔, 이곳 왜관에 그를 기리기 위한 문학관이 소재하고 있는 구상 시인의 시를 읽어봄 직하다.

 


내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워져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워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율조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은

이성理性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심호흡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충직과 일치하여

나의 줄기찬 노동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기도는 나의 일과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생애,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 구상, <새해> 전문

 


‘새해를 새해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구상 시인은 말한다. 내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씻어내야 한다. 지난해의 어두운 기억들, 잊고 싶은 일들을 마음속에서 깨끗이 털어내야 한다. 후회도 이제는 버려야 한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버릴 것은 버리고 홀가분하게 출발하는 것이다.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마음을 가난하게 해야 한다. 몸도 마음도 이와 같이 말끔히 씻어내고 비워야만 새해가 새해로 되는 것이다.


묵은 것을 씻어내는 일은 마음의 정화이다. 티 없이 순한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순한 마음은 순결한 마음이고 새로운 마음이다. 따라서 새로워진다는 것은 곧 순결해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순결은 미성숙이다. 순결은 텅 비어있음이다. 새해가 그러하다. 우리 앞에 다가온 새해를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어떤 것들로 채워갈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 새해는 하얀 종잇장과 같다. 무엇을 어떻게 써 나가든, 어떤 글자들로 채워 나가든 전적으로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구상 시인은 ‘내가 새로워지면 이웃도 새로워지고 거리도 새로워진다’고 한다. 그렇다.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모두가 새로울 수밖에 없고 새로운 마음으로 대하면 상대방이 새롭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상대적이다. 내가 호의를 가지고 대하면 상대방도 호의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고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면 상대방도 순수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것이 아니다. 거기에 붙들려 있게 되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쓰레기를 버리듯 버려야 한다. 물론 새해에도 기쁨과 슬픔이 새로이 생길 수 있겠지만 미리 두려워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의 율조일 따름이다.” 건강한 삶이란 기쁨과 슬픔이 없는 삶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되 극복해 가는 삶이다.


비움의 철학을 통찰한 “흰 눈같이 맑아진 내 의식은 / 이성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한 번의 심호흡을 하면서 새해 새날에 새로이 출발하는 우리의 가슴엔 이제 바야흐로 만물에 대한 사랑이 새롭게 용솟음친다. 새해의 축복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새해 새아침에는 새로워진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진다. 새 삶의 활력이 충일하면서 자신감이 생긴다. 희망이 부푼다.


희망은 곧 꿈이며 소망이다. 목표를 향한 노력이 줄기차게 이어지다 보면 나는 고독할 겨를이 없다. 그러면서 구상 시인은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기도는 신앙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구든 기도할 수 있다. 기도를 올리는 대상은 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기도의 본질은 간절함에 있다. 지극정성에 있다.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다보면 우리의 꿈과 소망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새로워진 우리가 망설이지 않고 맞는 새해는 생애 최고의 한 해가 되어야 한다. “최고의 성실로서 / 꽃피울 새해”라고 구상 시인은 결론짓는다. 성실은 말과 행위의 일치이다. 말은 마음에서 나온다. 새로이 마음먹은 일을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겨갈 때 새해는 비로소 성취하는 새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새해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우리 앞에 새로이 놓여 있는 것이다.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만드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들 각자가 새해에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