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3)>
그리움을 접으며
연말이다. 지나온 모든 것을 접는 시기이다. 접는다는 것은 일단의 마무리를 의미한다. 작은 마무리도 있고 큰 마무리도 있다. 자의적인 마무리도 있으며 타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마무리도 있다. 살아온 시간도 마무리 되고 삶도 정리된다. 접은 편지지를 봉투에 넣듯이 우리는 생의 한 단락을 그렇게 접어서 기억 속에 챙겨 넣는다. 삶의 현장은 복잡다단하고 치열했지만, 때로는 둘러가거나 헤매기도 하였지만 접는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난다. 한 장의 편지를 쓰면서 쏟나내듯이 한꺼번에 내려 쓸 수도 있지만, 지웠다가 썼다가를 되풀이 할 수도 있다. 끝내 봉투에 접어 넣지 못하고 구겨서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편지도 있다.
접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단락을 짓는 것은 폐기처분이 아니다. 삶도 그리움도 마찬가지이다. 접는 것은 챙기는 것이며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일이다. 누가 될지도 모르는 다음 사람은 이전 사람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을 혼자서 해내거나 또는 마무리 짓지 못하고 또 다른 다음 사람에게 넘길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접는 것은 접는 것으로 연쇄적으로 이어진다. 삶도 그리움도 그러하다. 이것을 우리는 전승이라고 하거나 유전이라고 한다.
접은 구김살은 흐릿할 수도 있고 칼같이 날카로울 수도 있다. 어떤 구김살이든 세월이 흘러가면서 희미해지면서 마침내는 퇴색하고 마멸될 수 있다. 그러나 변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지나간 어느 시간에 그것을 접었다는 것과 그 당시에는 구김살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사라진 구김살이라고 해서 아예 구김살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한다.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세계적이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긴 긴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시나루 동인 이인숙 시인은 한숨을 토해내듯이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다음 시를 보자.
그대 멀고 먼
그 곳에 이제 도착 했는가
한 주름, 한 주름
나는 여태
그리움을 접고 있는데
봄 강을 건너온
초롱 눈빛 새 한 마리
말없이 빈 가지에 앉네
눈뜬 채
한 천년
그렇게 앉아 있을 것 같네
그러나
가지마다 흐르는
죽음의 수액
저 깜깜한 망각의 징후를
나, 어찌해야 하는가
못내 겨운 슬픔을
날마다 몸 흔들어 떨치며
선 자리에
발 묶여 걸어 나가지 못하는
속이 빈
나무 한 그루
― 이인숙, <그리움을 접으며> 전문
떠나간 누군가에 대하여 “한 주름, 한 주름/나는 여태/그리움을 접고 있는데”, “그대 멀고 먼/그 곳에 이제 도착 했는가”라고 하면서 시인은 안타까워한다. 그대가 가고 있는 멀고 먼 그곳은 어디일까? 지구의 저쪽일 수도 있고 생의 저편일 수도 있다. 애태우는 나의 염려에 그대는 무심하다. 나는 오랜 시간 그대의 안위에 마음 쓰고 있는데 먼 길을 나선 그대는 말이 없다.
시인은 이때 “초록 눈빛 새 한 마리”가 되고 만다. 그대가 떠난 빈자리에 앉아 한 천년을 눈뜬 채 앉아 있을 것 같은 처연한 모습이 된다. 그러나 시인이 앉은 자리는 죽음의 수액이 흐르는 가지들이다. 죽음의 수액 속에는 망각의 징후가 흐르고 있다. 시인의 예지력은 그러한 징후를 예감하면서 절망한다. 간 자는 가고 남는 자는 남는다. 죽음은 망각의 강이다. 살아있는 남은 자는 마침내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다. 시인은 그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나,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한탄한다.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한탄을 가진 자, 그가 곧 시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이 연말에도 떠나는 사람이 있다. “선 자리에/발 묶여 걸어 나가지 못하는/속이 빈/ 나무 한 그루”로 남아서 그리워하는 사람이 저리 애절하게 남아 있는데도 무심히 떠나는 사람이 있다. 세월도 그와 같이 무심하다. 남은 일과 미련과 애틋함이 저리도 남아 있는데 무책임하게 시간은 저와 같이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시간의 본질은 무심함에 있고 책임지우거나 책임지는 일을 넘어선 영역에 있다. 강물처럼 그는 그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나무처럼 서 있는 시인의 속은 비어 있다. 그대가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망각의 강을 예감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슴은 풍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빈곤함에 있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 그이 이름이 곧 시인이다.
'시 · 시 해설 > 시 해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5] 새해-구상 시인[칠곡인터넷뉴스] (0) | 2009.01.03 |
---|---|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4] 숲-김 효임골롬바 수녀[칠곡인터넷뉴스] (0) | 2008.12.27 |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2] 러닝머신-정은희 시인[칠곡인터넷뉴스] (0) | 2008.12.13 |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1]유년의 겨울바람-윤영학 시인[칠곡인터넷뉴스] (0) | 2008.12.06 |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19] 전생-최옥이 시인[칠곡인터넷뉴스] (0) | 2008.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