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6)>
사월탄의 석양노을
석양과 노을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석양은 저녁 해이며 노을은 햇빛이 비치는 하늘과 땅이다. 석양은 저녁때 하나만을 일컫지만 노을은 아침노을이나 저녁노을과 같이 두 가지 때를 일컫는다. 그러나 저녁때의 석양과 저녁노을은 둘일 수가 없다. 석양은 노을 속에 있고 노을은 석양을 받아서만 노을이 되기 때문이다.
둘이면서 하나가 되는 석양노을은 어쩌면 끔찍하게 아름답다. 붉고 뜨거운 꽃을 마지막으로 피우는 애절한 합금(合衾)이다. 짧고 미미한 꿈틀거림이 애잔하면서도 절박하다. 석양노을은 아침노을이 아니다. 아침노을은 서서히 밝아져 마침내 강렬한 햇빛만 남게 되지만 석양노을은 쓸쓸하게 자꾸 어두워져서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아침노을은 밝음에 점령당하고 저녁노을은 어둠에 점령당한다. 어둠을 향해 사라져가는 석양노을의 발걸음은 숙연하다 못해 차라리 장엄하다.
석양노을이 내려선 사월탄에 서서 세월의 섭리를 관조하는 노시인이 있다. 향토 사학자이자 칠곡문협 자문 위원을 맡고 있는 박호만 시인이다. 그의 다음 시를 보자.
저기 출렁이는 물결 따라
하얀 거품을 가슴에 품고
사월탄沙月灘으로 흐르는 세월,
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반짝거리며 밀려오는 저녁노을
저기 모래 무덤에 올라선 외다리 물새는
사월탄의 사연을 알고 있을까?
하루를 천 년같이 살며
천 년을 하루같이 살며
늘 같은 세월을 지켜온 아름다운 저녁노을
저기 붉게 물든 노을을 등지고
토실토실 잘 익은 사과 한 알이
또,
누군가의 마른 기침소리에 섞여
사월탄 건너 세월 속에 잠기고 있다
※ 사월탄沙月灘이란 왜관으로 흐르고 있는 낙동강의 별칭
― 박호만, <사월탄沙月灘의 석양노을> 전문
사월탄은 왜관 사람들이 부르는 낙동강의 별칭이다. 넓은 모래사장 옆으로 흐르는 여울에 달이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그림 같은 강이 사월탄이다. 왜관읍을 지나는 강줄기는 남북으로 곧게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바닥의 경사가 완만하여 유속이 느린 구간이 또한 여기이다. 따라서 왜관의 강바닥에는 자갈이 아닌 모래가 두텁게 깔려 있고 이러한 모래 퇴적층이 왜관의 지반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왜관의 흙은 모래흙이다. 이런 연유로 지금의 왜관 시장을 시작으로 하여 남쪽의 시가지 일대가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거의 대부분이 모래밭에 조성된 과수원 지대였다. 물론 이 과수원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성하여 경작하다가 두고 간 것으로 알고 있다. 모래가 많다는 이러한 특성을 살려낸 낙동강의 이름이 사월탄이다. 강변의 넓은 모래사장으로 사람들이 자주 놀러 나갔을 것이고 밤하늘의 달은 드넓게 강과 강모래를 비추었을 것이다. 참으로 그림 같은 정경이 사월탄에 펼쳐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낙동강으로만 알고 있었던 이름이 바로 사월탄이었다는 것을 찾아낸 사람이 박호만 시인인 것 같다. 향토사학자이기도 한 그의 남다른 고향사랑이 사라졌던 이름, 사월탄을 되찾아낸 것이다. 이러한 노시인의 공적은 아무리 치하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노시인 덕분에 왜관을 지나는 낙동강은 낙동강이 아니라 사월탄이 된 것이다. 사월탄, 부르면 부를수록 정겨운 이름이다. 강의 특색을 가장 잘 살려낸 이름이다.
사월탄은 어디에 있는가? 석양노을이 발 담그고 있는 사월탄을 바라보면서 노시인은 바로 “저기”라고 한다. 시 「사월탄의 석양노을」 3연이 모두 “저기”로 시작하고 있다. “저기”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저기가 아니다. “저기(Da)”는 눈앞에 있는 구체적이면서도 사물적인 현존재이다. 현존재의 거소가 바로 “저기”이다. 그러므로 저기에는 뼈아픈 우리들의 체험이 녹아들어 있고 잊지 못할 사연들이 현실적으로 묻혀 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경험적 역사가 “저기”에 있는 것이다. “저기” 사월탄에 저녁노을이 밀려오고 세월이 흐르고 있다.
그렇다. 세월은 사월탄으로 흐른다. 그냥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얀 거품을 가슴에 품고 세월이 흐른다. 세월의 거품은 치열한 삶의 흔적이다. 격동하는 근ㆍ현대사에 몸담고 살아온 왜관 사람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한국인의 역사는 요동치는 불안의 역사였다. 노시인은 이러한 삶의 흔적들을 세월의 “하얀 거품”이라고 한다.
사월탄으로 저녁노을이 “반짝거리며 밀려”온다. 그것도 “고개를 반쯤 숙인 채로” 밀려온다. 당당하고 힘차게 밀려오는 저녁노을이 아니다. 힘없이 기죽은 채로 조심스럽게 밀려오는 것이다. 사월탄이 안고 있는 사연들이 비장하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마 아니올 수는 없는 것이므로 저녁노을은 힘없이 오는 것이다. 힘없이 내려서는 저녁노을이긴 하지만 사월탄의 강물은 처절한 역사의 징표이므로 거기에 선연하게 반사되어 “반짝거리며” 저녁노을이 온다.
역사는 사연이고 강물이다. 사연이나 강물이나 하나같이 긴 흐름이다. 흐르고 흐르면서 묻히는 것이다. “저기 모래 무덤”에는 무엇이 묻혀있는 것일까? 누구의 아픈 사연들이 잠들어 있는 것일까? 모래 무덤 위에 외다리 물새가 서 있다. 고행하는 자세이다. 노시인은 묻는다. “물새는/사월탄의 사연을 알고 있을까?” 질문 속에는 언제나 해답이 들어 있다. 노시인은 이미 해답을 알고 있다. 선사시대 이전부터 이후까지,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월탄을 거쳐 간 수많은 사연들을 꿰뚫고 있다. 다만 내놓고 말하지 않을 뿐이다. 고행하는 물새는 노시인의 내면적 자아에 다름 아니다. 물새에 대한 질문은 노시인의 자기질문이며 대답이다. “사월탄의 사연”을 목격하고 체험한 노시인은 고행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 포용한다. 수많은 날들을 물들여 왔을 저녁노을은 그래서 노시인에게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천년과 하루가 동일화 되는 순간이다. 천년이 하루 속으로 들어오고 하루가 천년처럼 늘어날 수 있는 삶의 원형, 세월의 본질이 노시인의 시적 언술로 드러나고 있다.
“토실토실 잘 익은 사과 한 알이” “붉게 물든 노을을” 뒤로 하면서 서산을 넘어간다. 석양이 노을을 남겨두고 세월 속으로 잦아드는 것이다. 남겨진 노을은 금세 어둠에 묻힐 것이다. 한 토막의 세월이 역사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역사와 역사가 이어져 흐르는 접점쯤에서 “누군가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린다. 기침소리가 석양을 이끌고 “세월 속에 잠기고 있다.” 고향을 지키며 고향의 뿌리를 찾아 향토사학에 한 평생을 쏟아 부은 노시인, 박호만 원로시인은 지금 석양노을 속을 걸어가고 있다. 저 앞 어디쯤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마른 기침소리’를 듣고 있다. 기침소리는 삶의 소리이다. 그것도 허약자의 소리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허약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 허약은 소멸을 향한 허약이 아니라 회생을 향한 허약이다. 희망은 늘 허약자의 편에 있다. 노시인은 이것을 알고 있다. 지자(知者)의 완숙한 삶이 역사 속의 현장을 걸어가고 있다. 온화하면서도 힘찬 걸음이다. 신념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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