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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4] 숲-김 효임골롬바 수녀[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8. 12. 27. 15:13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4)>

 

 


숲은 세계이다. 숲 속에 숲이 있고 숲 밖에 숲이 있다. 풀숲에서부터 자작나무숲이나 삼나무숲까지 크고 작은 숲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은하계도 숲이고 우주도 숲이다. 대도시의 빌딩가도 숲이고 번화가의 군중도 숲이다. 이러한 사물적인 숲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숲도 있다. 화평의 숲도 있고 분노의 숲도 있으며 문학의 숲, 음악의 숲, 신앙의 숲도 있다.


숲은 발가락 사이사이에 물을 머금고 있다. 땅에 발 딛고 있는 숲은 그의 발아래 흙살을 붙들고 있다. 자꾸 씻겨 나가는 흙을 붙들고 머무르라 하고 있다. 태양계는 은하계에 붙들려 있으면서 그의 발아래 지구를 붙들고 있다. 은하계는 광대무변한 우주에 뿌리 내리고 있다. 문학의 숲은 시, 소설, 수필, 평론 등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예술세계에 근거하고 있다.


무릇 모든 숲은 생명을 품고 있다. 그 자신이 생명이면서 그의 안과 밖은 뭇 생명의 연쇄로 동시에 이어져 있다. 숲은 살아 있다. 설사 그 안에서 죽어가는 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가는 과정이다. 숲 전체가 불타버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숲이 거기에 서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숲 속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운동의 원리가 바로 윤회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겁회귀이다. 그런 의미에서 숲은 죽지 않는다. 숲은 영원하다.


숲은 기억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고고학적 성격을 가진다. 숲에는 이야기의 지층들이 있다. 이 지층에서 우리가 발굴해 낼 수 있는 것은 까마득한 선사시대에서부터 현대까지의 갖가지 이야기들이다. 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일들까지 같이 파묻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숲은 미래학적 성격도 가진다. 숲은 세계대백과사전이다. 그러나 숲은 그 스스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알아낼 만큼만 알아내라고 한다. 가져갈 만큼만 가져가라고 한다. 숲으로 바람이 찾아오는 날 우~우~ 소리 내는 숲의 말은 사람들의 무지를 질책하는 꾸지람 같다. 숲은 천근 침묵이면서 동시에 거대한 함성이다.


숲은 세월이고 시간이다. 세월과 시간은 자연을 인위적으로 나눈 단위이고 구분이지만 숲은 자연을 자연적으로 둔 단위이고 구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자는 다 같이 하나의 차원이 된다. 범주적 원리로서의 차원이 곧 숲이고 세월이다. 지금 우리는 2008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숲의 끝에서 다시 2009년이라는 이름의 숲으로 들어서려 하고 있다. 숲에서 숲으로 가는 것이 우리들 삶이다. 길을 찾아서 길을 내면서 깜깜한 숲속을 걸어가는 것이 삶인 것이다. 죽음은 숲의 끝이 아니라 다만 한 그루 나무가 이어온 삶의 끝일뿐이다.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회원인 김 효임골롬바 수녀 시인은 이러한 숲의 전모를 통찰하고 있다. 신앙적 명상에서 출발하는 시인의 혜안은 숲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숲,

너 거기 있음의 놀라움이여

무질서가 낳은 조화여

흠 없는 욕망이여

감미로운 음악이여

무언無言의 통달이여

빛과 어둠의 공존이여

하늘로 가는 길이여


나 여기,

이렇게 있으려 하네

숲을 이루는 한 그루의 나무

한 줌의 가시넝쿨로


        ― 김 효임골롬바 수녀, <숲> 전문

 


이 시에 따르면 숲은 ‘거기 있음’이다. “거기 있음”은 현존(Da Sein)이다. 숲은 과거일 수도 미래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대하는 숲은 언제나 특정한 장소인 거기에 바로 지금 존재하는 현존의 숲이다. 숲은 살아있으므로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으며 중층구조의 영겁회귀 속에서 흘러가고 있지만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숲은 늘 거기 그대로 있다. 흐름과 변화 속에서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그대로 거기 있는 숲은 경이롭다. 그러므로 시인은 숲을 보며 놀란다.


숲은 무질서한 여러 나무와 넝쿨과 풀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숲의 품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하나하나 저마다의 욕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숲의 본성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기에 흠결이 없다. 숲이 내는 소리는 감미롭다. 숲 속에서 새가 울며 풀잎이 몸을 비비는 소리는 음악이다. 음악이 즐거운 소리일 수 있는 것은 길고 짧고 높고 낮은 소리의 조화 때문이다. 그러므로 숲 속의 무질서는 무질서가 아니라 조화가 된다.


숲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숲 속으로 내리꽂히는 한 줄기 햇살이 있는가 하면 자욱한 나무줄기와 잎들이 만드는 두터운 그늘이 있다. 가시넝쿨과 풀숲으로 막혀버린 밀림 속의 암흑이 있다. 그러나 빛이 없으면 어둠이 없고 어둠이 없으면 빛도 없다. 길을 내며 숲을 헤쳐 나갈 때 어둠은 빛으로 바뀌게 된다. 빛은 빛 속에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찾아가는 것이다. 빛과 어둠을 그의 품 안에 끌어안고 있는 숲은 그러나 말이 없다.


숲은 ‘무언의 통달’을 하고 있다. 숲은 말없이 현존하고 있지만 막힘없이 환히 통하고 있다. 숲은 전지전능하다. 그러므로 숲은 신적 존재로 격상된다. 따라서 숲은 곧 “하늘로 가는 길”이다. 신을 만나고 싶으면 숲으로 가면 된다. 신은 숲처럼 말없이 존재하면서 빛과 어둠을 주재하고 있다.


이러한 숲의 본질을 환하게 바라보고 있는 김 효임골롬바 수녀 시인은 “숲을 이루는 한 그루의 나무/한 줌의 가시넝쿨로” “여기, 이렇게 있으려” 한다. “여기”는 사도직에 있는 시인의 현존재이다. 시인은 숲 밖의 숲을 보고 있으므로 숲 속의 숲으로 남고자 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신앙하는 수도자의 길이며 자세이다. 신 앞에서 경건하게 고개 숙이며 신의 말씀과 말씀의 원리에 복종하고자 한다. 신으로서의 숲의 말씀에 헌신하는 자, 그는 곧 영성이 맑고 고운 시인이다. 시인은 ‘말씀을 전하는’ 사도직이다. 말씀으로 시를 쓰되 말씀 앞에서 고개 숙이는 자, 말씀의 숲에서 끝없이 말씀의 길을 찾아가는 자, 그의 이름이 곧 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