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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2] 러닝머신-정은희 시인[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8. 12. 13. 15:09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2)>

 

러닝머신

 


러닝머신은 쳇바퀴를 닮았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라는 속담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거나 발전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아무리 달려도 다람쥐는 제 자리에 있다. 쳇바퀴만 빙글빙글 돌아간다. 러닝머신도 마찬가지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걷는 사람은 제자리걸음만 한다. 쳇바퀴는 둥글게 휘어진 모양이고 러닝머신은 길쭉하게 펼쳐진 모양이다. 다람쥐는 쳇바퀴 안에서 달리고 사람들은 러닝머신 위에서 걷거나 달린다.


햄스터나 다람쥐는 쳇바퀴를 굴린다. 이때의 쳇바퀴는 애완동물들의 놀이기구이다. 그들 스스로 만든 놀이기구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 준 놀이기구이다. 그러나 햄스터나 다람쥐에게도 과연 그것들이 놀이기구일 수 있을까? 러닝머신이나 쳇바퀴에서 걷거나 달리는 것은 과연 제자리걸음이기만 할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몸만이 아니다. 마음이나 정신도 제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앞으로 나갈 수도 있다. 러닝머신에서 운동하는 사람은 운동하지 않는 사람보다 몸을 더 멀리 보내고자 하는 사람이다. 몸을 더 멀리 보낸다는 것은 건강한 수명의 연장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는 그렇지 않은 다람쥐 보다 더 날렵해지고 더 건강해질 것이다. 깊이 생각할 일이 있는 사람은 러닝머신 위에서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러닝머신은 주위의 장면이 변화하지 않으므로 산책보다 집중이 더 잘 된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때 마음은 현실이 아닌 과거나 미래로 가 있다. 마음은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도 해외순방 때는 공군 1호기에 러닝머신을 장착해 운동한다고 알려져 있다.


난설독서회 2대 회장인 정은희 시인은 러닝머신에서 운동하는 아침을 삶의 본원적 모습으로 진술하고 있다.

 


이 아침

4미터 남짓 세상에서 하루를 연다

멈출 수 있는 자유는 이미 내 것이 아니며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몸이라야만 아름답다

모든 뼈마디에 윤기가 흐르고

장기들은 즐거움의 호홉을 한다

어둠은 어느새 새벽을 깨우고

하늘 끝까지 닿아 있다

영업 중

지금 흘리는 땀방울 하나 깨지지 않게

미래를 안고 뜀박질은 계속된다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고


        ― 정은희, <런닝머신> 전문

 


정은희 시인에게 있어서 ‘아침마다 하루를 시작하는 4미터 남짓한 세상’은 무엇일까? 러닝머신이 놓인 아파트 베란다일 수 있고 아니면 헬스장의 한 쪽일 수도 있다. 정은희 시인은 거기서 운동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운동은 움직이는 일이다. 운동은 관성을 가지고 있다. 운동은 운동을 지속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멈출 수 있는 자유는 이미 내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운동은 놀이가 아니다. 놀이도 그 자체로 관성을 가질 수가 있겠지만 운동의 관성과는 다른 관성이다. 하기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운동이지만 놀이는 그렇지 않다. 놀이는 하고 싶어야 할 수 있고 싫증이 나면 언제라도 그만 둘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햄스터나 다람쥐에게 있어서 쳇바퀴는 놀이기구가 아니라 운동기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그들 스스로가 만든 운동기구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서 그들에게 던져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동기구인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자유의 본질을 이야기 하고 있다. 철학의 여러 이론들 가운데 ‘자유의지론(自由意志論)’이라는 것이 있다. 인간의 행위는 합법칙성과 인과성에 의하여 결정되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의지는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요컨대 의지는 자유라는 것이 의지자유론이다. 그러니까 자유는 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 의지자유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은희 시인은 “자유는 이미 내 것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자유의지론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는 과연 내 것인가, 아닌가?


이것이든 저것이든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면 그것은 곧 선택의 자유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자유의 본질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선택의 자유는 선택에 묶여있는 자유이다. 선택의 자유에는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주어져 있지 않다. 다만 선택하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이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선택의 자유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부자유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자유는 완전하게 내 것이 아니다.


모든 자유는 일정한 한계 내에서의 자유일 뿐이다. 세상에 무제한의 자유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자유는 포괄적인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다. 양심의 자유라든지 주거이전의 자유라든지 신앙의 자유라든지 하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그러한 한계 내에서의 자유는 곧 ‘자기 자신에게 맡겨져 있음’이다. 자유는 누구이든 그것에 대하여 아는 만큼만 그를 자유롭게 한다. 현대철학자로서 존재론을 완성한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인간이 가진 자유의 한계를 규정한 바 있다. “인간은 그가 가진 자유에 대한 의식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의식이 곧 삶의 울타리인 것이다. 의식은 내 것이고 그 의식이 가지고 있는 자유에 대한 생각대로 행하는 자유의 실천 또한 내 것이 된다.


삶에는 ‘멈출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음을 정은희 시인은 안다. 사람마다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은 그의 자유이지만 삶 그 자체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러닝머신 위에서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몸”은 곧 생의 현장을 살아가는 실존의 모습이다. 시인은 그러한 몸이라야만 아름답다고 한다. 치열한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람은 지금 “영업 중”인 사람이다. 그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러닝머신 위에서 걷는 것을 제자리걸음이라고 보는 것은 고정된 시각이나 미시적 시각에서 연유한다. 유연하고 유동적인 시각에서 보면 러닝머신 위에서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거시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한 개인의 삶은 어쩌면 제자리걸음이다. 그러나 인류는 대를 이어 삶을 영원으로 이어가고 있고 우주 또한 그러하다. 미시적 시각으로 보면 우주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태양계나 은하계의 운행조차도 제자리걸음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존재는 그것이 존재인 한에 있어서 유동한다. 존재는 유동하는 한에 있어서 존재일 수 있다. 속도가 빠르든 늦든 간에 흘러서 어디론가 가고 있다. 이것은 근원적인 문제로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러닝머신 위에서 “지금 흘리는 땀방울 하나 깨지지 않게/미래를 안고 뜀박질은 계속된다”고 정은희 시인은 말한다. 러닝머신은 생의 현장이고 꿈의 근원이며 희망의 배태지(胚胎池)임을 시인은 알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라고” 보는 시인의 시각은 그래서 긍정적이다.


철학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시는 말할 수 있다. 철학적 이론서들이 두터운 전문서적 한 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시인은 이와 같이 단 한 줄로 축약하여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철학을 능가한다. 시인은 철학자 보다 윗자리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