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7)>
새와 지붕
새는 자유의 표상이고 지붕은 보호의 상징이다. 하늘을 날던 새는 지붕 위에 내려앉아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모든 새가 하늘을 날거나 지붕 위에서 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장 속의 새는 지붕이라는 우산 아래서 지붕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지붕 위의 새는 자유이고 지붕 아래의 새는 부자유이다. 그러나 지붕 위의 새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하지만 지붕 아래의 새는 타자로부터 보호 받는다. 자유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모든 자유는 일정한 한계 내에서의 자유이다. 새는 마음껏 날 수 있지만 대기권을 벗어날 수 없다. 그것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기압의 높이까지만 비상할 수 있다. 인격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격의 본질은 자유에 있지만 그 자유는 비인격의 영역에까지 넘어갈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비인격의 영역으로 넘어간 인격은 이미 인격이 아니다. 인격이 아니므로 자유도 없다. 우주 내에서 무제한한 자유란 없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神)의 자유에 속할 것이다.
부자유 또한 일정한 한계 내에서는 자유이다. 새장 속의 새는 새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부자유이지만 새장 안에서는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이다. 인간은 영생할 수 없지만 그가 영위해가는 수명 안에서의 삶은 자유이다. 그러나 자유로이 사는 삶의 결과는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와 부자유는 동일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자유와 부자유는 어떤 하나의 것이 가진 다른 측면임에는 분명하다. 동전의 한 쪽이라는 면에서는 양면이 동일한 것이지만 앞쪽과 뒤쪽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다른 것으로 된다.
난설독서회 황정혜 시인은 달력 앞에서 달력 속의 그림을 보면서 새와 지붕의 근원적 의미를 찾아낸다. 자유와 부자유, 지배와 피지배의 본래적 의미를 투시한다.
얕은 언덕
양철 지붕 위
작은 새 한 마리 꽈악 누르고 있다
옅은 바람에도 쉬이 날아갈 것 같은 아슬함은
가느란 두 발로도 충분하다
저 욕심 없는 주인이여
검불 사이로 삐죽이 솟는 이른 봄의 생명과
여름 내 빗줄기의 난타소리를 들을 그에게
늦은 가을밤
시원始原의 달빛 숨소리와 교감하고
새파란 눈밭에 첫 발을 딛는 영광을 가진 그에게
나의 오만은 아름답게 낙화 한다
지붕을 갖고 싶은 마음이여
지금 내 가슴에도
작은 새 한 마리 기다린다
― 황정혜, <달력 앞에서> 전문
화자는 달력 앞에서 달력 속의 그림을 본다. 그림은 풍경화인 듯하다. 낮은 언덕이 있고 언덕 위에 양철 지붕의 집이 있다. 그 양철 지붕 위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달력 속의 이러한 풍경을 보면서 시인은 시적 사유의 세계로 들어선다. 현실 공간 속에 있는 시인은 달력 속의 풍경화라는 공간을 거쳐서 시의 공간 속으로 그의 사유를 들여보낸다. 거기서 그가 보는 것을 화자의 입을 통해서 시로 진술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동일한 시간대에서 서로 다른 세 개의 공간을 함축한다.
지붕의 주인은 새다. 주인은 지배자이다. 낮은 언덕을 양철 지붕이 누르고 그 양철지붕을 다시 새의 가느다란 두 발이 누른다. 지배의 층 구조이다. 언덕 위에 집이 있고 집 위에 양철 지붕이 있고 양철 지붕 위에 새가 앉아있는 것을 시인은 층을 이루는 지배 구조로 보는 것이다. 지배의 맨 위층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있다. 양철 지붕을 꽉 누르고 있다. 지붕의 주인인 새가 지배자로서의 자아를 확인하는 것이다. 양철 지붕은 “옅은 바람에도 쉬이 날아갈 것 같”지만 “가느란 새의 두 발”이 양철 지붕을 누르고 있는 한 지붕은 안전하다. 지배받고 있는 자는 지배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안전을 보장 받는다. 피지배의 유익함은 종속의 안정성에 있다.
지배하는 자는 주인이다. 그러나 맨 상층의 지배자인 새는 욕심이 없다. 잠시 앉았다가, 앉아서 휴식을 취하다가, 쫑쫑거리며 놀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 그뿐인 새는 지붕을 소유할 욕심이 없다. 지붕을 누르고 앉아 있기는 하되 새는 지붕에 집착할 의사가 없다. 그래서 황정혜 시인은 새를 가리키며 “저 욕심 없는 주인이여”라고 감탄한다. 시인의 감탄은 새에 대한 감탄이기에 그것은 곧 무소유에 대한 감탄이며 자유에 대한 감탄이 된다.
사람은 소유욕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혼자만이 가지고자 하는 독점욕이 강하다. 내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시간이든 기회이든 나 혼자만이 독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인간이 영구히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고자 하는 인간의 소유욕은 쉼 없이 확장된다. 연인은 연인을 독점하고자 한다. 남편은 아내를 독점하고자 하고 아내는 남편을 독점하고자 한다.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독점하고자 하고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독점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이 인격인 한에 있어서 소유나 독점은 불가능하다. 인격은 원천적으로 자유이기 때문이다. 보다 확실하게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이나 권력의 소유도 한시적일 뿐이다. 사물도 유동하고 소유도 유동한다. 사물이나 권력이 그 자체로 소진될 수도 있다. 그래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다. 권세는 십 년을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높은 권세라도 오래가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사람의 소유욕은 한시적 오만에 불과하다. 그것이 한시적 오만인 것은 자연 앞에 선 인간이 느낄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의 왜소함과 무력함에서 입증된다. 그때 인간은 자신이 오만했음을 자각하게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소유의 존재인 것이다. 다만 실존적 본질에 대한 망각으로부터 인간의 소유욕은 발생한다.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만을 “저 욕심 없는 주인”인 작은 새 앞에서 시인은 깨우치게 된다. 그것도 실제의 새가 아닌 달력 위의 그림 속에 있는 새를 바라보며 시인은 생의 본질적 의미를 깨우친다. 자유의 근원적 의미에 시인의 사유가 다다르는 것이다. 새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자유의 존재가 된다. 봄에 터져 나오는 생명의 소리와 여름날의 빗줄기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게 된다. 가을밤에는 달빛의 숨소리와 교감할 수 있게 되고 한겨울 새파란 눈밭에 누구보다 먼저 발을 딛는 영광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욕심 없는 존재가 됨으로써 새는 모든 것을 얻게 된다. 인간은 이와 다르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마침내는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스스로 최고 존재로서의 자부심을 가진다. 바로 이것이 오만이라고 시인은 지적한다. “욕심 없는” 작은 새를 보면서 “나의 오만은 아름답게 낙화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여기서의 “나”는 시인 개인이 아니라 인간 일반을 지칭하는 말일 수 있다. 소유에 집착하는 인간의 오만은 궁극적으로 낙화할 수밖에 없다. 죽음 앞에서, 허무의 심연 앞에서 무너져 내리지 않는 오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낙화하는 오만을 아름답다고 한다. 무너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름답게 보는 자가 시인이다. 허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시인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반전을 기한다. 외롭고 쓸쓸한 실존으로서 보호 받고 싶어 하는 욕심을 시적 언술로 나타낸다. 설사 오만은 버렸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남는 최소한의 소망이라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랑과 자유를 기다리는 마음이다. 화자의 가슴은 황량하다. 지붕이 없기에 비바람을 있는 대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화자는 “지붕을 갖고 싶은 마음이여”라고 하면서 자기를 보호해 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고 지붕이 생긴다면 또한 그 지붕을 지배해 줄 새 한 마리를 기다리게 된다. 지붕 위에서 자유롭게 비상하는 새 한 마리를 꿈꾸게 된다. 시인은 보호 받고 싶고 자유이고 싶은 인간일반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거나 쇠약한 자라면 누구라도 이러한 시인의 대변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새와 지붕은 자유와 구속의 표상이고 상징이면서 인간 일반이 그리워하는 대상이자 영원한 기다림의 대상인 것이다. 달력 속의 그림 앞에서 시인은 자유를 꿈꾼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보호 받기를 소망한다. 만인의 꿈과 소망을 대변하는 자, 그의 이름이 곧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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