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21)>
유년의 겨울바람
지구 온난화로 겨울이 짧아지고 있다. 간혹 한파가 몰려오기도 하지만 혹독한 추위는 없다. 값비싼 모피 코트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장롱 속에서 잠만 잔다. 맨몸으로 드러누운 강이 한겨울에도 이제는 얼지 않는다. 양지쪽에선 성질 급한 봄나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나오기도 한다. 한반도 남쪽, 영남 지방의 겨울 풍경이 그러하다.
사오십 년 전만 해도 겨울은 겨울답게 추웠다. 지금의 오륙십 대가 기억하고 있는 유년의 겨울풍경은 참혹한 추위 그 자체이다. 벌벌 떨면서 화롯불을 끼고 앉아서, 혹은 투박한 무명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겨울의 긴 밤을 보내야 했다. 못내 참다가 하는 수 없이 뒷간에라도 갈라치면 쇠로 만든 문고리가 쩍쩍 손에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우물둔덕은 빙판이 져서 날마다 두터워져 갔고 두레박질하기가 밤에는 아예 겁부터 났다. 덕지덕지 때가 끼고 헤진 옷을 겹겹이 껴입은 채 새우처럼 몸을 오그려 잠자리에 들었다.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뒤울안 대나무 밭을 짓밟거나 감나무 잔가지를 후려지는 삭풍 소리가 맹수의 울음소리처럼 날카로웠다. 소름 끼치는 휘파람 소리가 밤새도록 세상을 흔들고 있었다.
유년의 기억은 겨울 밤하늘에 박힌 별과 흡사하다. 나이가 들어도 잊혀지지 않고 초롱초롱 되살아난다. 반면에 최근에 일어난 일들은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근래의 기억이란 세차게 흐르는 강물에 던져 넣는 모래알과 같다. 강물 아래 모래알이 분명히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래알이 보이지 않는다. 세찬 물살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경을 쓴 채로 안경을 찾아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진다. 인간의 뇌는 풀 오토 시스템으로 작동되고 있다. 불필요한 기억은 힘들이지 않고 지워진다. 아름다운 것이나 가슴 찌릿하게 감동적인 일은 잊혀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문득문득 되살아난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잊고 싶은 일은 지워지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일은 쉽게 망각해 버리는 것이 그 경우이다. 이것이 기억력이 가지고 있는 신비하고 오묘한 힘이며 조화이다. 그래서 여자는 첫 아이를 낳던 살인적인 산통의 아픔을 잊어버리고 둘째 아이를 낳는다.
늙어가면서 기억력이 영향을 받는 것은 저장 능력이 아니라 재생 능력이다. 저장은 되는데 불러오기가 안 되는 것이다. 모래알을 강물에 던져 넣기는 쉽지만 그것을 다시 건져내기가 힘이 든다. 밤하늘에 박혀 얼어붙은 별들은 저절로 반짝거리며 재생된다. 사람들이 밤하늘을 쳐다보든 않든 간에 상관하지 않고 별들은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하늘을 한번 쳐다보게 되면 별들은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그의 앞에서 반짝이는 것이다. 유년의 기억은 별같이 저장되고 나이 들어서의 기억은 강물에 휩쓸려가는 모래처럼 저장된다. 유년의 기억은 별빛처럼 투명하게 재생되고 나이 들어서의 기억은 안개처럼 답답하게 재생된다.
낙동문학회 윤영학 시인은 유년의 겨울바람을 다음 시와 같이 형상화 하고 있다.
늘 문득 목화 솜 같은
구름 하나를 보았습니다.
하얀 구름이 정겹게 느껴지며
어릴 적 옛일들을 몰고 내려옵니다.
나뭇가지 윙윙거리며 불어가던
겨울바람에 이부자락 당겨 얼굴을 묻고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잠이 들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빈집에 어둠이 내리면
막연한 두려움에 촛불 심지 돋우고
어른거리던 그림자에 가슴이 콩알만해지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잠이 들다 가위 눌려
식은땀 흘리면 옆에서 주무시던
부모님이 흔들어 깨우시던
그 손길이 그립습니다.
감기 들려 고열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울음을 삼키며 누워
천정이 돌아가는 이상한 세계를 보며
어머님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창들을 흔들며 바람이 거세게 불어 갑니다.
어느새 구름은 간 곳이 없고
노을만 서산에 걸려 있습니다.
― 윤영학, <구름> 전문
윤영학 시인에게 있어서 구름은 유년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시곗줄이다. 최면을 걸때 눈 앞에 시계를 흔들어 반수면 상태로 이끌어 가듯이 시인은 하얀 목화솜 같은 구름을 보면서 유년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환언하면 구름이 “어릴 적 옛 일들을 몰고 내려”온다.
인간의 기억은 매개가 있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 정겹게 느껴지는 하얀 구름을 통하여 유년의 기억으로 생생히 돌아가는 이러한 현상을 점화 효과 (Priming Effect)라고 한다. 점화효과는 특정한 정서와 관련된 정보들이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가지 정보가 자극을 받으면 관련된 기억들이 함께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배추를 당겨 올리면 배추꼬랑이가 뽑혀져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윤영학 시인이 어떻게 해서 구름에서 점화효과를 얻게 되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다. 사람마다 점화효과를 얻는 계기가 다를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대뇌피질에 남겨진 흔적의 그물망이 이루는 체계가 각각 다른 데서 연유한다는 것만 알면 우리로서는 충분한 것이다.
윤영학 시인이 바라보는 유년의 겨울 밤바람은 허공을 찢으면서 전력 질주한다. 멀리서 다가오는 바람의 비명이 공중에서 소용돌이 칠 때면 누구든 공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높낮이와 박자와 가락이 있는 바람의 울음소리는 금방 세상을 요절낼 듯한 기세로 마을의 지붕들을 넘어서 하늘 가운데로 달린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청력의 한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사람들의 가슴에 공포감을 불어 넣는 것이다. 어린 시인은 겁이 난다. 한계선상을 넘나드는 소리에 대한 공포이다. “이부자락 당겨 얼굴을 묻고/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어린 시인은 잠이 든다. 얼굴만 묻으면 일체의 사물과 절연되는 시절이 유년이다. 그래도 한참동안은 바람이 내는 휘파람 소리에 공포감을 느끼는 어린 시인의 가슴은 콩닥거린다. 그 콩닥거림이 조금씩 가라앉으면서 잠이 든다. 늙어가는 현재 시점의 시인은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 유년의 시절, 그 시절에 겪었던 공포와 안도를 그러나 그리워한다.
윤영학 시인이 그리워하는 것은 유년의 겨울바람 소리만이 아니다. 공포를 몰고 왔던 유년의 풍경들이 모두 다 그리운 것이다. 공포 그 자체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지금은 두렵지 않은 그것들이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었던 유년의 순수한 마음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소리의 공포’에 이어서 윤영학 시인이 그리워하는 공포는 ‘어둠의 공포’, ‘악몽의 공포’, ‘질병의 공포’로 나타난다.
어른들이 돌아오지 않은 빈집의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촛불심지를 돋우던 어린 시절을 시인은 그리워한다. 밝음 속에서 안도하고 어둠 속에서 두려워지는 인간의 심리는 보이는 것만을 믿고 싶어 하는 무의식의 작용에서 기인한다. 성장기에는 잠자는 중에 악몽을 꾸다가 가위가 눌릴 때도 있다. 몸에서는 생리적 반응으로서 식은땀이 흐른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여지지 않고 꿈을 깨고 싶어도 깰 수가 없어진다. 실낱같은 신음소리만 내게 된다. 그럴 때 옆에 있던 부모님이 잠든 어린 시인을 흔들어서 깨운다. 악몽에서 깨어나도록 해 준다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부모님은 곧 신적 존재이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그의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감기 걸려 고열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울음을 삼키며 누워/천정이 돌아가는 이상한 세계를 보며” 통증에 시달리다가 어머니의 극진한 간호의 손길로 회복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약도 병원도 흔치 않던 그 시절에는 그랬다. 정성스런 어머니의 손길과 물수건 찜질만으로도 신열이 내리는 수가 있었다. 객귀를 물리치는 한 바가지의 물과 부정한 것을 쫓는 한 줌의 소금, 그리고 대문 밖으로 내던져진 식칼의 효험으로도 감기가 낫는 수가 있었다. 어머니의 정성과 어머니에 대한 어린 시인의 신뢰가 거뜬히 병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어진 시인은 그러한 어머니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의 1행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람, 그러니까 ‘창들을 흔들며 거세게 불어가는 바람’은 유년의 바람이 아니라 늙어가는 현재 시점의 바람이다. 이 바람은 구름을 밀어내는 바람이다. 구름은 최면의 시곗줄이었다. 최면의 시곗줄을 밀어낸다는 것은 곧 최면상태를 깨우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바람은 최면 깨우기에 다름 아니다. 유년의 그리운 기억 속으로 젖어 들었던 윤영학 시인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고 그때는 “노을만 서산에 걸려 있”는 석양녘이다. 여기서의 석양녘은 윤영학 시인이 예감하는 노년으로 읽혀진다. 엄중한 현실인 노년 앞에서 시인은 유년을 기억하면서 그 유년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리워하는 자이다. 아름답고 간절했던 것만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의 기억조차 그리워한다. 공포 그 자체에 머물러 있는 공포가 아니라 극심한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던 부모님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기억 속의 젊은 부모에게 의지하고 싶어 한다. 귀소본능에서 연유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년은 만인의 고향이다. 유년의 겨울바람은 아련한 고향의 잊혀지지 않는 풍경이다. 시인은 말로써 그리운 풍경을 그리는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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