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18)>
컴퍼스
제도용 기구인 컴퍼스(compass)는 사람을 닮았다. 몸통이 있고 두 다리가 있다. 한 다리는 제 자리에 고정시켜 두고 다른 다리를 회전시킨다. 이때 고정된 한쪽 다리는 회전의 중심축이 된다. 외발로 서서 춤추는 발레리나가 떠오른다. 컴퍼스가 점프를 한다면, 발레 슈즈를 동여매고 눈처럼 투명한 발레복에 팽팽하게 바람을 불어넣으면서 한 바퀴 회전을 하여 공중으로 뛰어오른다면 영락없는 발레리나이다. 그럴 때 컴퍼스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짧지만 큰 도약의 해방감에 도취될 것이다. 삶의 지난한 무게를 벗어나 솟구쳐 오르는 일은 그 자체가 곧 희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컴퍼스가 도약할 수 있는 한 제도사는 컴퍼스의 신이 된다.
컴퍼스는 그린다. 작은 원에서부터 큰 원까지, 반원에서부터 온전한 원까지 자유자재로 컴퍼스는 영역을 만든다. 자신의 중심은 그대로 두고 외연의 일정한 구역을 획정하고 확장한다. 원 밖의 원으로 그려 나가다 보면 때로는 다른 원과 교차하게 된다. 원들의 다면적인 복합 교차를 통해서 새로운 생명들이 아름답게 창조된다. 새로운 세계들이 생성되는 것이다. 선들의 사랑을 컴퍼스가 만들어내고 사랑의 결실 또한 컴퍼스가 만들어낸다.
컴퍼스는 이동한다. 껑충껑충 뛰면서 중심점을 옮겨 다닐 수 있다. 중심점을 바꿔가면서 원을 그리다 보면 직각도 만들고 이등분점이나 꼭짓점을 찍어내기도 한다. 건축물이든 자연이든 간에 모든 형상물에는 컴퍼스가 스쳐간 자국이 있다. 컴퍼스의 흔적이 그것들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컴퍼스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끄집어 낸 도구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선물로 내어준 원리이다.
반원처럼 그리다 만 원이 있다. 그럴 땐 아직 밖과의 소통이 가능한 열려진 부문이 있다. 컴퍼스는 소통의 통로에 기둥처럼 서서 좌우를 나누어준다.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을 구분하여 준다. 반원 속의 세계는 한계 지워져 있지만 열려진 부분으로 촉수를 뻗어 밖의 무한한 세계를 끌어안고 있다. 우주가 거기로 뿌리 내리고 있다. 완성으로 가는 가능성들이 거기 집결되어 있다. 그리다 만 것은 그릴 수 없는 무한세계를 그린 것과 동일하다.
완전히 그려진 원은 완성된 존재이지만 완성되었으므로 폐쇄적이다. 완성은 고정이고 고착이다. 더 이상 변화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완성을 향해서 고군분투하고 각고면려하지만 결코 이루지 말아야 할 것이 그것이다. 미완의 사랑과 미완의 인격만이 숨 쉬고 생동하는 법이다. 완성된 것은 어디에도 온기가 없다. 완성된 것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컴퍼스가 나침반을 의미한다. 나침반은 지리적인 방향을 일정하게 지시하는 계기이다. 항공이나 항해 혹은 등반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자침은 수평으로 자유로이 회전하면서 언제나 남북을 가리킨다. 삶의 방향을 안내하는 나침반이 있다면 참으로 좋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아무도 방황하지 않을 것이며 인생을 에워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삶에는 컴퍼스가 없다. 신의 삶이 아니고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순간순간마다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 사람의 삶이다. 사람이 행한 판단과 선택의 결과는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그러니까 인간은 스스로의 십자가를 자기 자신이 만들어서 짊어지는 것이다. 나침반이 없기에 인간의 삶은 무미건조하지 않고 치열하게 된다. 컴퍼스가 없기에 사람의 삶은 삶이 된다.
일상적으로는 보폭을 컴퍼스라고도 한다. 보폭은 우리말로 ‘걸음나비’이다. 여기서 나비는 아마 너비에서 온 말인 것 같다. 우리는 흔히 다리가 긴 사람을 ‘컴퍼스가 길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은 같은 시간에 같은 힘을 들여서 걷더라도 다리가 짧은 사람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 내딛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얼음판에서는 누구나 까치걸음을 걷는다. 길다고 좋은 것만도 아니고 짧다고 나쁜 것만도 아니다. 컴퍼스 그 자체는 길고 짧음에 무관심하다. 컴퍼스의 폭을 늘리고 줄이는 것은 다만 인간의 소관사이다. 길고 짧음에 대한 가치부여는 경직된 인간의 관견에서 나온다.
시나루 동인 부회장인 정갑순 시인은 제도용 기구인 컴퍼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말을 하는 상대로서 컴퍼스를 의인화되어 너로 지칭한다.
언제나
말을 부드럽게 둥그렇게 내 뱉는다
늘 그렇게 웃는 입매로
멀어졌다가는 다시 되돌아오곤 한다
발끝으로 수줍게 닳아가는 네 독백을 듣는다
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제야 알아챘다
외곽을 따라 서성이는
네가 숨겨온
진심은
사실
떠난 뒤에야
더 선명해짐을.
― 정갑순, <콤파스> 전문
컴퍼스가 둥글게 그리는 원을 정갑순 시인은 부드럽게 내뱉는 말이라고 한다. 컴퍼스가 말을 하는 것이다. 종이 위나 혹은 대지 위에다 둥글게 선을 그리는 것은 곧 컴퍼스가 하는 말이다. 그 말은 부드럽지만 내뱉는 말이다. 여기서 부드럽다는 것과 내뱉는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내뱉는 것은 부드러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시인은 여기서 역설을 구사하였을까? 메타포로 읽으면 컴퍼스는 실존이며 말은 리비도로 읽을 수 있다. 억압되고 팽만한 리비도를 실존은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내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존은 대지를 염려한다. 대지에 충격이나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실존적 배려이다. 그래서 내뱉기는 하지만 부드럽게 내뱉는다.
컴퍼스는 웃는 입매를 짓는다. 컴퍼스는 멀어졌다가 다시 되돌아온다. 컴퍼스의 두 다리가 모두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한쪽 다리만이 그러하다. 여기서의 실존적 인격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일탈을 소망하면서도 본래적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컴퍼스의 이러한 행태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화자는 컴퍼스의 독백을 듣는다. 중심축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마음 한편은 언제나 외곽을 서성이는 실존적 자화상을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아챈다. 흐릿하게 들리던 독백이 떠난 뒤에야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떠난다는 것은 자아의 껍질 벗기에 다름 아니다. 한 껍질을 벗고 더욱 성숙해진 자아는 그 이전의 자아를 비로소 또렷하게 볼 수 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을 시인은 ‘숨겨온 진심’이라고 한다. 진심은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진심은 은폐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정갑순 시인은 과연 ‘숨겨온 진심’을 보았을까? 그것도 실로 선명하게 보았을까? 삶이 치열하면 할수록 실존은 더욱 실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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