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19)>
전 생
한때 전생이 드라마의 화두가 된 적이 있다. 전생 시리즈가 쏟아져 나오고 누구든 한번쯤은 자기 자신의 전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전생 문제는 흥미본위의 일과성 화제로 끝나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의식 내에 이미 들어와 있다. 그러기에 전생을 주제로 한 단행본이나 가요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고 일본에서는 ‘전생’이라는 영화가 2006년에 만들어지기도 했다.
전생(前生)은 전생(轉生)을 전제로 한다. 전생(前生)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생(三生)의 하나이다. 삼생(三生)은 전생(前生), 현생(現生), 내생(來生)이다. 전생(前生)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생애를 이른다. 현생(現生)은 이승의 생애이며 내생(來生)은 죽은 뒤의 생애이다. 전생(轉生)은 다른 것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다고 본다면 전생과 현생과 내생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삼생은 각각의 세계일뿐 어떤 연관성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輪廻) 사상에 의하여 전생과 현생과 내생은 끊을 수 없는 고리로 이어진다. 내생에서 보면 현생은 전생이 되고 전생에서 보면 현생은 내생이 된다. 그러므로 전생-현생-내생은 하나의 둥근 원 위에서 순환하는 삶의 개별적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생의 지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서 지나간 삶은 전생이고 다가오는 삶은 내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전생-현생-내생은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되, 가다 보면 어느새 서 있는 지점이 현생이 되는 그러한 순환구조라고 할 수 있다.
전생(轉生)과 윤회(輪廻) 사상에는 생명의 영원성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생명은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돌고 돈다는 것이 전생이고 윤회이다. 불교에서는 윤회하는 세계에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ㆍ아수라(阿修羅)ㆍ인간(人間)ㆍ천상(天上)의 육도(六道)가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현재 우리들 앞에 있는 축생, 예를 들어 개나 말이나 소도 전생에는 인간이었던 것이 바뀌어 태어난 것일 수 있으며, 또 장차 우리들이 저승에서 그런 것들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종(種)은 달리 하더라도 생명은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사유이다. 그래서 불교의 교리는 살생을 금한다. 미물의 생명이나 인간의 생명이나 다 같은 생명이며 삼생을 윤회하면서 서로 간에 바뀔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6도 중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의 총체인 업(業)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 한다. 선업(善業)에 의하여 선의 세계에, 악업(惡業)에 따라 악의 세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전생(前生)의 업보라거나 인연이라는 말들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업보를 받는다’고 말하는 경우, 살아가면서 죄를 짓게 되면 다음 생에서 죗값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생각은 생명의 영원성 속에 개별 행위의 도덕적 인과성이 내재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전생의 원수가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태어나면 서로 미워하고 다투면서 살게 된다는 생각이 곧 전생(轉生)과 윤회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생(前生)의 실재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의 기원에 대한 창조설과 진화설을 끌어와 전생의 실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수도 있다. 창조설은 종교에 기인하고 있고 진화설은 과학에 근거하고 있다. 창조설에서 출발하는 논의는 전생의 존재를 주장하고 진화설에 근거하는 논의는 전생의 존재를 부정한다. 두 주장은 나란히 달리는 평행선과 같아서 서로 간에 접점을 찾지 못한다. 그렇다면 전생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종합명제가 되는 것인가? 그러나 그러한 종합명제는 성립할 수가 없다.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전생에 대한 논의가 있고 전생에 대한 사유를 우리가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출발한다면 전생은 다만 형이상학적 전제로서만 혹은 추상적 관념으로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유나 상상력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전생이라는 것이다.
삼생이 모두 현생이라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전생도 현생이고 내생도 현생이라는 시각이다. 내 속에 부모의 모습이 있으니 전생이고 내 속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 현생이며 내 속에 자식의 인자가 있으니 내생일 수 있는 것이다. 현생의 어려움은 전생의 업이 아니라 현생의 삶에서 내가 행한 행위가 원인이 되고 그 결과로서 생긴 어려움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내생으로 갔다가 다시 현생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환생(還生)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생의 역류이다. 그러나 환생에는 전생에서 현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또한 함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생의 순류인가? 환생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현생의 입장에서는 전생도 죽음이고 내생도 죽음이다. 죽음에서 삶으로 되돌아오는 환생(還生)은 전생(轉生)의 다른 이름이다. 생(生)과 사(死)에는 역류도 순류도 없다. 전생(前生)에서 현생(現生)으로 태어나는 것도 환생(還生)이고 내생(來生)에서 현생(現生)으로 되살아나는 것도 환생(還生)이다. 인간으로 환생한 사람은 전생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은 삶의 기준점을 현생에 둔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전생과 현생과 내생은 서로 다른 세계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의 최옥이 시인은 현생의 모습을 통해서 스스로의 전생을 다음 시와 같이 유추하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식당 종업원 이었는지
무엇이라도 맛있는 것만 하면 장사가 하고 싶어진다
국수 삶아서 맛있으면 국수 장사 하고 싶고
된장 끓여서 맛있으면 길가 어디 마당 넓은 집에서
쌈밥 장사라도 하고 싶다
동네 어귀에 서말찌 솥 걸어 놓고 슬슬 끓는
국밥 장사라도 해 볼까 요새 같으면
푸른 청대 속잎 따다 한 단지 삭혀 놓고
경주 큰장 어디 골목에 앉아 삭힌 콩잎이라도 팔아 볼까
먹성 좋은 우리 딸 같은 사람이 많으면 장사가 될 것이고
젓가락으로 반찬 골라 먹는
우리 아들 같은 이가 많으면 아마
일찍 전을 걷어야 될 것이다
국시 장사 했던 친구는 국시 장사 못하게 말리고
한정식 했던 친구는 밥장사 못하게 말리고, 그래도
아이비 담벼락에 철철 걸쳐 사철 우거지게 키워 놓고
그 사이에 세월도 같이 걸어 두고 나는
식당 주인이 되고 싶다
우리 어머니 허리 휜 채전 밭에서 풋고추 얻어 와
다진 풋고추 알그리하게 뽁아 팔아도 팔릴 건데
가끔 대통 시리 된장 찌지다가
엉뚱한 단맛에 빠져
된장에 사카린 넣는 실수만 안 하면 되는데
나는 아무래도 전생에 식당 종업원 이었는지
식당 주인이 되고 싶다
― 최옥이, <나는 식당 주인이 되고 싶다> 전문
최옥이 시인은 전생의 자기가 식당 종업원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현생에서는 식당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종업원의 애환과 그로 인해 주인이 되고 싶어 했던 전생의 소망이 현생에서 나타난다는 얘기이다. 요컨대 전생에 이루지 못했던 일을 현생에서 이루고 싶어 한다는 말이다. 시인은 아무 때나 식당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라도 맛있는 것만 하면 장사가 하고 싶어진다.” 국수 장사도 하고 쌈밥 장사도 하고 국밥 장사도 하고 싶어 하며 삭힌 콩잎도 팔고 싶어 한다. 최옥이 시인은 주부의 손맛이 묻어나는 맛깔스런 전통음식을 모두 나열하고 있다. 입에 침이 절로 나도록 미각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장사를 하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장사를 했던 친구들은 못하게 말린다. 그래도 시인은 화자의 진술을 통해서 식당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시인은 왜 돈과는 상관없이 장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인가?
시인은 베풀고 싶어 한다. 맛있는 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식당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시인의 심성은 나눔의 미학으로 형성되어 있다. 시인은 생래적으로 나누고 싶어 하고 베풀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시인은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제로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식당에 올 수 있는 사람뿐일 것이다. 식당에 올 수 있는 사람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올 수 있는 거리 안에 사는 사람들뿐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 올 수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어 하는 시인의 마음은 곧 이웃사랑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은 잠재적으로는 누구나 다 이웃이다.
이웃사랑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덕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제일의 덕목이다. 이웃사랑은 마음의 중심을 자기에서 타인에게로 옮기는 일이다. 타인의 곤궁을 나의 곤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웃사랑이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타인의 행복을 긍정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웃사랑은 인간을 선택하지 않는다. 이웃사랑에 있어서는 사랑할 만한 값어치가 없는 인간이란 있지 않다.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웃사랑은 타인의 인간성 전체로 향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겨 나오는 것이 이웃사랑의 감정이다. 이웃사랑의 시선은 현존하는 고뇌자, 수난자, 약자에게로 쏠린다. 이웃사랑은 이웃을 따라가며 느끼고, 함께 느끼고, 함께 체험하는 일종의 정서적 회상이다. 이웃사랑에는 이기심이 극복되어 있다. 이웃사랑은 동정적이고 온화하며 관대하다. 이웃사랑의 위대함은 그 헌신에 있다.
시인은 장사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장사를 하고 싶어 한다. 그냥 베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장소의 분위기까지 염두에 둔다. 그래서 시인은 담벼락에 아이비를 걸쳐서 사철 우거지게 키워 놓고 싶어 한다. 아이비는 늘 푸른 덩굴나무이다. 담쟁이덩굴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아이비 “덩굴 사이에 세월도 같이 걸어 두고” 베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 사이에 세월도 같이 걸어 두고 나는/식당 주인이 되고 싶다”는 이 구절은 가히 절창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인의 여유로움과 유유자적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나눔의 미학과 이웃사랑으로 형성된 시인의 인격이 여기서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 시인은 설명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는다. 최옥이 시인은 그가 가진 이웃사랑의 실천적 면모를 문면에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행간에서는 헌신하는 시인의 심성이 꿈틀꿈틀 살아 나오고 있다. 그리고 최옥이 시인 특유의 맛깔스러운 표현이 시원한 호흡으로 이어지고 있다. “푸른 청대 속잎 따다 한 단지 삭혀 놓고”에 오면 읽는 이의 오감이 하나 같이 자극을 받아 살아난다. 로마인들은 시인을 ‘보는 사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미 남들이 본대로 본다면 아류에 불과할 것이다. 처음으로, 개성적으로, 자기만의 시각으로 볼 줄 알아야만 참된 시인이다. 최옥이 시인은 전생에서 식당 종업원이었던 자기 자신을 보면서 현생에서는 마음껏 베풀 수 있는 식당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자기 자신을 본다. 전생도 보고 현생도 보면서 아이비 담벼락에 세월도 같이 걸어 둠으로써 선업을 쌓는다. 그것은 곧 내생 또한 내다보고 있는 것이 된다. 잘 볼 줄 아는 최옥이 시인은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너무 많이 갖추고 있는 참된 시인이다.
<약력>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 / 순심중(17회)
시인(구상 선생 추천으로 1984『현대시학』등단)
철학박사 / 대구한의대 교수(현)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지도강사(현)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현)
대한철학회장 / 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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