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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16] 길 위의 그리움-허남기 시인[칠곡인터넷뉴스]

김주완 2008. 11. 1. 14:40

2008-11-01 오전 9:43:33 입력 뉴스 > 문화&영화소개

길 위의 그리움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16)>

 

 

 

 

길 위의 그리움

 

 

 


길 위에는 그리움이 있다. 누군가 흘리고 간 그리움들이 풀풀풀 날리고 있다. 날리다가 풀꽃으로 피기도 하고 뭉게구름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는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머물러 있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것이 또한 그리움이 된다. 다소곳이 그대로 있는 그것을 마음의 캔버스에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는 일이 그리움이다. 살이 떨리도록 강렬하게 다가오는 그림 속의 이야기가 그리움이다.


길은 길로 이어진다. 길은 도처에 있다.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다. 몸 밖에도 있고 몸 안에도 있다.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길도 있고 붉은 꽃 주단이 깔린 화려한 길도 있다. 마른 길도 있고 젖은 길도 있다. 그렇다. 젖은 길이야말로 뜨거운 사랑이 왕래하는 길이다. 생명이 잉태되고 천지가 창조되는 길이다. 예수가 흙으로 아담을 빚을 때의 그 흙은 젖어 반죽된 흙이었을 것이다. 젖어 축축한 감성들이 아담의 자손들에게 전승되어 그들은 모두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젖은 길은 모름지기 축복 받은 길이다.


길은 흐른다. 흐르다 막히면 소용돌이치다가 돌아 나와 다시 흐른다. 철길을 보면 안다. 흐름 위에 얹힌 것들은 잠시 올랐다가 내린다. 흐르는 길은 시간이고 역사이다. 떠오르고 가라앉는 것들이 그 속에 있다. 영욕과 애증이 되풀이하여 부침한다. 길은 쉴 틈이 없다. 휴식하는 길은 이미 길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정적일 뿐이다.


길은 간혹 엉키기도 한다. 이 길 저 길들이 얽힌 실타래처럼 복잡한 미로를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미로 속에서 방황한다. 길 위에서 방황하는 것은 길을 잃어서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빠져 나가고 몸만 남아 휘청거리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자기를 찾을 때까지 길 위에서의 방황은 끝나지 않는다. 삶의 행로 대부분이 그러하다.


길을 가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들꽃 같은 사람도 만나고 엉겅퀴 같은 사람도 마주치며 가시나무 같은 사람과 부딪치는 수도 있다. 사람이 꽃이며 나무이며 야수이다. 꽃인 사람, 나무인 사람, 야수인 사람이 각각 서로 다른 낱낱의 사람이 아니다. 하나의 사람이 꽃이 되었다가 나무가 되었다가 야수가 되었다가 한다. 사람의 면모는 길을 가면서 길 위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모습이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지만 매양 우리가 거머쥐는 것은 그림자이다. 그러나 길은 그림자에게도 자리를 내어준다. 길을 가면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림자이다.


길은 삶이다. 삶은 사람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다. 물론 죽은 사람은 저승길로 가서 다시 저승 안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길 안에 있고 길 위에 있다. 길 위에는 너무 많은 것이 있어서 우리가 슬퍼질 수밖에 없다. 영원한 슬픔으로서의 길은 처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일이고 길을 닮아가는 일이다. 숙연한 길의 모습을 배워가는 일이다.


가을 이른 새벽에 드문드문 아직 꺼지지 않은 가로등 아래로 사람들이 걸어간다. 안개가 자욱한 둑길이다. 둑길 아래는 안개에 묻혀 식별되지 않는다. 깊고 깊은 낭떠러지가 거기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으므로 불안하지 않다. 이와는 달리 소심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더 큰 불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걸어간다. 길도 살아있고 가을도 살아있고 사람도 살아있다. 그래서 가을 새벽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경건하다. 그들은 어쩌면 하늘로 걸쳐진 사다리를 타고 신의 반열에 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길 위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있다. 낙동문학회 허남기 시인의 다음 시가 그러하다.


이 길을 따라가면

바다에 다다를 수 있으련만

떨쳐 버릴 수 없어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어설픈 꿈 풀어 버릴 수 없어

저기 타는 노을에 잠기는 생각

그림자는 키보다 더 길게 눕혀 놓고

소처럼 먹고서 다시 토해

되새김질 하는 시간들

이 길을 따라가면

물이 물로서 하나 되는 곳에

살 수 있으련만.....!

나는 오늘도 살아서

어둠이 스러지는 강물 위로

그리운 이름들만 불러 봅니다


        ― 허남기, <강가에서 2> 전문


허남기 시인은 길의 끝은 바다라고 한다. 여기서의 길은 강이다. 시인은 강가에서 길을 본다. 길의 끝을 본다. 강의 물길은 바다에 가서 멈추게 된다는 것을 시인은 안다. 바다는 안온한 완성이다. 만물이 지향하는 종착지이다. 그곳은 시작과 끝을 초월하는 곳이다. 모든 것이 용해되어 원융무애로 하나가 되는 곳이다. 시인에게 바다는 이상향이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은 불타는 노을 속에 머물러 있다. 지귀처럼 몸에도 마음에도 불길이 일어 불타고 있다. 뜨거운 화염 속에서 시인은 바다를 그리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바다로 가지 못하고 타는 노을 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물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시인은 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가.


떨쳐버릴 수 없는, 풀어버릴 수 없는 어설픈 꿈이 시인에게는 있다. 그 꿈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시인의 그러한 꿈은 지나온 길 어디쯤에서 영글다 말고 떨어진, 터뜨리지 못하고 말라버린 삭과이다. 키보다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시인은 지나온 시간들을 되새김질 한다. 거기, 발효되지 못하고 처음의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름이 있다. 불러도 불러도 그리운 이름이다. 참으로 그리운 이름이기에 어둠이 스러지는 첫새벽까지 시인은 지나온 길을 향해 서 있다. 흐름을 비켜난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길 위에서 놓쳐버린 그리움 한 점을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것이다. 물길 곁에서 걸어온 쪽으로 뒤돌아서서 두고 온 어느 이름을 망연하게 부르고 있는 시인의 계절은 가을의 끝자락쯤 되는 것일까.

 

 

 

 

 

<약력>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 / 순심중(17회)

시인(구상 선생 추천으로 1984『현대시학』등단)

철학박사 / 대구한의대 교수(현)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지도강사(현)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현)

대한철학회장 / 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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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덕 기자(cginew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