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15)>
말
인간은 말로써 인간이 된다. 인간은 말이고 말은 인간이다. 물론 여기서의 인간은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말은 정신이고 정신은 말이다. 말 속에 감정이 실릴 수 있지만 감정은 정신이 아니라 심리이다. 정신은 나에게서 너에게로 전달될 수 있지만 심리는 그 자체로서는 전달되지 않는다. 다만 정신(말)에 실려서 간접적으로만 전달될 수 있다. 말은 발성만이 아니다. 표정이나 몸짓, 손짓도 말이다. 수화가 대표적인 것이다. 발성과 수화의 동일성은 그것들이 가지는 정신성과 전달성에 의해서 성립한다.
존재가 존재일 수 있는 것은 말에 의해서이다. 이름 없는 존재는 설사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알 수가 없다.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있다. 그 별들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은 이름이 없고 우리는 그러한 별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가 없다. 새로운 별이 발견되면 새로운 이름이 붙여진다. 그렇게 붙여진 그 이름으로서 그 별은 비로소 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한다.
인간은 언어로써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언어로써 표현하고 전달한다. 사유의 넓이와 깊이는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만큼만 가능하다. 컴퓨터 전문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컴퓨터의 구조와 체계에 대하여 사유할 수 없고 생명공학의 전문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DNA의 염기서열이나 인간게놈프로젝트에 대하여 사유할 수 없다.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말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주 좁은 세계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한다.
말은 힘을 가지고 있다. 덕담을 많이 들으면 일이 잘 풀리고 악담을 많이 들으면 일이 엉켜 풀리지 않는다고 한다. 저주를 받으면 재앙이나 불행이 생긴다고 한다. 어린 아이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 주고 많이 불러주면 크게 성공한다고 한다. 욕설을 들으면 화가 나는 것도 말의 힘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얄미운 태도에 내가 화나는 것은 태도라는 말이 가진 힘 때문이다. 언어는 이와 같이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말을 삼가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왔다. 구상 시인은 일찍이 ‘언어가 가진 신령스러운 힘’을 ‘언령(言靈)’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우리는 만들어진 말을 사용한다. 만들어져 있는 그대로도 사용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의미를 변형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언어의 전승과 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언어 중에서 대표적인 언어는 시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시의 언어는 의미의 끝없는 창조이며 새로운 존재를 생성하는 모태이다. 시인은 기성의 의미로만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일상어를 사용하되 일상어와는 다른 의미가 되도록 구사한다. 기성의 의미와 새로운 의미 사이의 거리가 멀고 팽팽할수록 시적 긴장감이 생긴다. 그러나 그 거리가 너무 멀어지게 되면 난해한 시가 되고 독자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시의 언어는 자칫 미사여구나 교언영색이 될 수 있다. 비단 같이 매끄럽고 반짝이는 말이 되거나 아첨이나 아부의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남을 속이거나 유혹하는데 쓰이기가 쉽다. 불가에서는 ‘기어(綺語)의 죄’가 십악의 하나라고 한다. ‘기어’란 ‘도리에 어긋나며 교묘하게 꾸며 대는 말’을 이른다. 생전에 이러한 죄를 지은 자는 죽어 저승에 가면 무간지옥에 떨어져 혀가 만발이나 빠지는 형벌을 받는다고 한다. 기어를 범한 장본인이 인간이며 혀이기 때문이다. 구상 시인은 일찍이 시인이야말로 기어의 죄를 범하기가 가장 쉬운 존재라고 진지하게 경고한 바 있다. 언뜻 보기에만 그럴 듯하게 쓰인 시, 그러면서도 시인 자신조차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시가 곧 기어라는 것이다. 표상에 상응하는 등가량의 실재가 있는 시만이 참된 시라는 것이 구상 시인의 신념이다.
서양 속담에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다. 섣부른 달변 보다는 차라리 입 다물고 있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 잘난 체 하며 떠벌이는 것 보다는 조용히 침묵하는 것이 얻을 것이 더 많은 법이다.
생각과 말과 글의 관계를 주역 계사전에서는 ‘서부진언 언부진의(書不盡言 言不盡意)’라고 한다. ‘글로써 말을 다할 수 없고 말로써 생각을 다 전달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생각의 일부만 말로 옮길 수 있고 말의 일부만 글로 옮길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자만에 대한 경계이다. 글이 나무라면 말은 숲이고 생각은 산이 된다. 나무가 숲을 경시하거나 숲이 산을 우습게 여긴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는가. 나무가 웅변이라면 숲은 함성이며 산은 침묵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적 사유는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게 된다.
칠곡문협 김현희 시인과 장재홍 시인이 쓴 ‘말’을 주제로 하는 시를 살펴보자.
당신이 던진
날이 선 말 한마디에
나는
칼을 맞고 쓰러져
뜨거운 피 토해내며
헉헉
차오르는 숨결 삼키며
아무도 부를 수가 없습니다
바로
당신이 던진
날이 선 말 한마디에
오늘도 당신은
또 누구를 겨냥하며
번득이는 칼을 갈으십니까?
― 김현희, <날이 선 말 한마디> 전문
김현희 시인의 이 시에서 말은 곧 칼이다. 그것도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이다. 그 칼을 당신이 내게 던지면 칼을 맞은 나는 뜨거운 피를 토해내는 피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의 칼은 독설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설을 내뱉는 수가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습관화된 독설가도 있다. 습관이란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이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무심하게 되풀이하다 보면 마침내 독설가가 되고 만다. 이러한 되풀이는 칼날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하는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법이다. 서로 간에 어루만져 주는 말을 염원하는 시인의 심정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낮 동안에 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들
식탁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남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소리 죽여 은밀히 주고받은 말들, 주워 담지 못한 채
나도 모르게 흘린 말의 흰피톨 붉은 피톨들
이들 정처 없이 어디론가 떠 흐르다가 밤이 되면
다시 모여 하나씩 포자가 생기고 파충류의 긴 꼬리로 자라서
스물스물 기어 나와 무리를 이룬다. 그들 스스로 날카로운 송곳니도 생기고
집게발도 생긴다고 한다. 우리가 잠든 사이 생쥐처럼 우리의 잠 속에
포근한 집을 짓고 종족을 번식시킨다고 한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
드디어 세상을 떠돌던 온갖 말의 원혼들이
창을 넘고 어두운 침실로 찾아와 우리의 잠을 깨우나니
그들의 손에 들린 창, 그리고 검은 연기 자욱한 기관총
온 몸에 문신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저 포탄 더미들
밤새 우리의 잠은 온갖 아우성과 신음 소리로 가득하다.
힘겨운 밤의 전투로 간신히 아침에 눈을 뜨면
잘린 꼬리가 다시 자라나 긴 혓바닥 날름거리며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는
에얼리언, 숙주인 인간의 영혼을 점령하고야 마는 말의 씨앗들
― 장재홍, <말> 전문
장재홍 시인은 말의 맹목적 번식력과 파급력에 착안하고 있다. 무심코 입에서 나온 말들은 씨앗이 되어 정처 없이 떠돈다. 떠도는 말들은 하나씩 포자가 생기고 무리를 이룬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집게발도 생겨 잠든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포근한 집을 짓고 종족을 번식 시킨다. 여기서 잠든 사람들이란 의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말에 대한 의식 없이, 말에 대한 외경 없이 함부로 말하고 아무렇게나 들어버리는 사람들이 잠든 사람들인 것이다. 정신의 영역인 영혼은 말의 에얼리언이 기생하는 숙주라고 시인은 본다. 그러니까 말이 영혼을 맑고 건강하게 할 수도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영혼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에얼리언은 영화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이다. 외계 생명체인 에얼리언은 새끼가 자라기 위해서 숙주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 숙주가 바로 인간이다. 에얼리언의 기하급수적인 번식력 때문에 인간들이 죽어간다. 몸속에서 에얼리언이 자라고 있는 사람이 군인을 보고 ‘제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는 처절한 장면도 나온다. 의식 없는 말은 에얼리언이고 그것은 어느새 독설과 악담과 저주가 되어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 영혼을 파먹으면서 성장하여 무수한 번식을 되풀이함으로써 사람들을 피폐하게 한다는 것이다.
김현희 시인과 장재홍 시인은 위의 시에서 한결같이 말의 힘에 경외한다. 말의 본질을 꿰고 있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삿된 말 무심한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아는 것이다. 몸속에서 자라는 에얼리언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면 적어도 더 이상의 잘못은 막을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상의 말, 가장 좋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말은 침묵이라는 비약도 가능해진다. ‘말의 최고 정점은 침묵이다.’ 김현희 시인과 장재홍 시인은 어쩌면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약력>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 / 순심중(17회)
시인(구상 선생 추천으로 1984『현대시학』등단)
철학박사 / 대구한의대 교수(현)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지도강사(현)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현)
대한철학회장 / 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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