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완 교수의 아침산필 (14)>
가을 안개
가을 안개가 자주 끼는 시기이다. 안개는 기상현상이며 여러 가지 생활상의 불편을 초래하기도 한다. 자동차 운전자나 비행기 조종사 혹은 선장의 시야 장애가 대표적인 불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안개가 많이 끼면 비행기는 아예 이착륙을 하지 못한다. 고속도로에서는 대형 교통사고가 나기도 한다. 바다에서는 선박이 좌초하거나 충돌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안개는 반갑지 않은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가을 안개는 쌀 안개, 봄 안개는 죽 안개’라는 말이 있다. 가을에 안개가 끼면 날씨가 맑아서 벼가 잘 익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가을 안개에 풍년 든다”는 속담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안개라는 기상현상을 통하여 계절적 특성을 농사와 연관시켜 파악한 조상들의 지혜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안개가 우리에게 보내오는 이미지는 위와 같은 실용성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이러한 생활상의 불편과는 달리 안개는 우리의 미적 감수성을 풍성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안개가 내려앉은 강둑이나 물안개가 자욱한 호반은 우리로 하여금 신비감을 느끼게 한다. 새벽안개가 낀 산책길이나 밤안개가 흐르는 거리를 걸어가면서 우리의 감성은 바야흐로 일상을 떠나 낭만 속으로 접어든다. 안개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저쪽에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래 전에 떠나간 어떤 사람이 옷자락 끝으로 성성한 물방울을 달고 안개 속으로 돌아오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안개 낀 아침 숲길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아늑하게 팔짱을 낀 채 걸어가고 있다면 그들은 세상과 자연이 주는 축복을 느끼면서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절정에 이른 단풍이 불타고 있는 산 속의 저수지에 새벽안개가 내려 서 있고 어릿어릿한 수면에 산자락과 단풍이 또한 어늘어늘하게 반영되어 있다면 그러한 풍경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어쩌면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안개가 반드시 낭만의 대상만은 아니다. 가시거리가 멀어질수록 시계가 넓어지고 가까워질수록 시계는 좁아진다. 짙은 안개가 끼어 시계 제로가 되었을 때 우리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으며 마치 안개 속에 빠져 숨 막히는 듯 한 공포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럴 때 안개는 아마 뭉글뭉글 소용돌이 칠 것이다. 평소에 보지 못하던 생소한 광경에 질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이와는 달리 시계 5미터나 10미터쯤의 안개가 끼었을 때 사람들은 마치 솜이불에 싸인 것처럼 안온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혼곤한 영혼으로 졸음이 몰려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수한 지역이나 지형이 아닌 한 이러한 안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렵다. 그만치 드물다는 것이다.
안개는 상징으로도 활용된다. 불확실성이나 은폐성은 안개로 치환될 수 있다. 전망이 불투명하고 해법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안개라는 수식어를 사용한다. ‘안개정국’이니 ‘안개상황’이니 하는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안개는 시야를 가리는 존재이며 가려진 시야 때문에 사람들은 대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보지 않은 것은 결코 알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안개는 기상현상이지만 그것이 상징으로 쓰였을 때에는 의식이나 관념 또는 정신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회원인 나동훈 시인은 안개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보이지 않아요
들길을 지웠어요
초록을 지우고
나 혼자만 두고
나무도 풀잎도 잠들고 있어요
당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지만
보이지 않아요
그녀에게
달려가야 하는데
안개가 길을 지워 버렸어요
당신에게도
내가 지워 졌으면
어쩌나요
― 나동훈, <안개> 전문
안개는 들길을 지운다. 오는 길도 가는 길도 보이지 않도록 만든다. 초록빛이 지워진 나무와 풀잎들은 잠들 수밖에 없다. 누군가 안개 속으로 오고 있을 것 같아 바라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길을 지워 버리듯이 안개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내가 이미 지워졌을 수도 있다.
이 시에서의 안개는 안개이면서 동시에 망각이며 실종이다. 망각의 완성으로 가는 길목엔 안타까움이 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떠나간 사람이 더욱 그리운 법이고 오지 않는 사람이 더욱 기다려지는 법이다. 이 시에서 ‘당신’은 반드시 연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나 목적일 수도 있고 소망이나 기원일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보이지 않는 길 저쪽에 있는 당신이 항상 우리를 안달하게 한다. 그 안달이 어쩌면 삶의 원동력이 되거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잊을 수 없는 당신, 나를 기억해줄 당신이 없는 삶은 이미 삶이 아니다. 그것은 시계 제로의 안개 속에 갇힌 식물적인 무기수일 뿐이다. 시계 제로의 상태에서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바라보며 가슴 설레게 그리워하는 자가 시인이다.
<약력>
칠곡 왜관 출생
왜관초등(47회) / 순심중(17회)
시인(구상 선생 추천으로 1984『현대시학』등단)
철학박사 / 대구한의대 교수(현)
구상문학관 시창작교실 지도강사(현)
구상문학관 시동인 ‘언령’ 지도교수(현)
대한철학회장 / 한국동서철학회장/새한철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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