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철학과 현실』2012-여름호(통권93호),2012.06.01. 2~3쪽 권두시 발표
2016 동해남부시 제40집 발표
[시]
해무 / 김주완
바다 아닌 곳, 안개 끼지 않은 앞길이 없다는 걸 알아
그럼…, 바다엔 늘 안개가 끼어 있지
기상 위성은 밤과 구름을 투시하여 지상으로 통신을 보내오지만
출항계에 찍히는 스탬프 그늘에는 늘 해신海神 부적이 숨어 있어
지금은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수밖에 없지
지뢰처럼 터져 비산할 한 치 앞의 암초를 분별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조류潮流는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갈 거야
바다 깊은 아래서 바람은 불고
좌초는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 있어
바다의 생애가 훈증 너머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지연紙鳶처럼 펄럭이며 따라오던 바닷새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수평선과 분분한 섬들이 사라지고 외로움의 그늘만 연기처럼 남았다
선수船首가 지워지고 사방 분간이 지워졌다, 자침磁針이 흔들리는 나침반
때 아닌 곳에서 우두커니 서 버린 시간
정적은 엄마가 보이지 않는 오후의 대청처럼 무서워
등대는 맑은 밤에나 소용에 닿는 불빛을 내지 달빛이나 별빛은 모두 솜이불 속으로 들어가 묻혀 버렸어 혹등고래의 혹 같은 돔을 뒤집어쓴 월드컵 경기장 백 미터 트랙에 땅강아지 한 마리 엎드려 있는지도 몰라 빗살처럼 하얀 수염의 방향을 잡아주던 북두칠성이 침몰했겠지 아무리 날아올라도 이미 그건 퇴화하는 날개일 뿐이야 해안은 이미 무너졌어
너의 옆엔 지금 너밖에 없어
우리가 너의 안개를 벗겨 줄 순 없어
안개 속에 내일이 있다는 건 시간을 건축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이야 네가 내일 살아 있다면 그것은 내일이 아니라 안개 낀 오늘인 거야 설령 내일이 실제로 있으면 뭐 해 네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걸 안개 속의 항해잖아
정박에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어
출근길의 지하철 승강장처럼 우리는 모두 떠밀려 가는 거야
기껏 오늘에서 오늘로 가는 거야, 거기서 돌아오는 거야
기도는 안개 너머로 날려 보내는 종이비행기 같아
축축이 젖어서 내려앉은 자존심이 입 다물고 소리 내는 복화술이야
해무로 밀봉된 바다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부질없는 짓이지
봄꽃 한 송이 피는 일은 곧 봄꽃 한 송이 지는 일인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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