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층층나무 연대기 / 김주완
외톨이 층층나무 근처에는 고생대의 퇴적암 같은 침묵이 흐른다. 층층나무가 입을 열지 않는 것은 부족의 오래된 금기, 삼엄한 계율이다. 진리는 묵언默言 안에 거주하는 것, 오월에 피워 올리는 하얀 웃음이 시대에서 시대를 건너온 묵시록의 표지이다. 층층나무 수피는 쥐 오줌 얼룩진 고서古書처럼 사시사철 거풍을 한다. 바람이 몰려오면 팔들을 휘적이지만 날아오르고자 함이 아니다. 땅에 발 딛고, 선 자리에서 깨치며 증거하는 각覺
해와 별과 달은 물론, 날짐승과 길짐승, 물고기들이 그에게로 와서 성층구조를 배워 갔다. 세상 사람들은 외형만을 배워서 갔다.
하늘과 땅은 층층의 제 자리를 내어주며 상생했다. 짐승과 물고기는 먹을 만큼만 취하며 더는 몸집을 키우지 않았다. 번데기는 먹은 것만으로 잠을 자고 우화한 나비는 층층나무를 오르내렸지만 어느 곳에도 거처를 소유하지 않았다. 산은 오는 대로 품어 안았고 강은 흐르는 대로 떠나보냈다. 이들에게는, 층은 있으되 층이 없었다. 사람들만 우화등선을 꿈꾸었다. 층층을 만들어 힘들게 기어오르다 추락하곤 했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 하고 가난한 자는 더 곤궁해졌다. 오갈 수 없는 층과 층 사이의 허공이 까마득하게 멀어져 갔다.
겨울이 오기 전에 층층나무 붉은 열매는 경전의 글자처럼 까맣게 여문다. 빈 몸으로 긴 삼동 내내 층층나무, 다음 해로 넘겨줄 필사본을 만들 것이다. 세상이 모두 읽을 수 있어도 사람만이 해독하지 못하는 반야경이나 시편 같은 전범典範, 말은 버리고 뜻을 남기는 층층나무의 주문呪文을 지층 깊이 각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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