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탈 6 / 김주완
동짓날 어머니는 부엌에서 팥죽을 끓이고 어린 나는 북풍 맞받는 부엌문을 자꾸 기웃거렸다 하늘은 찌푸려 있었고 헐렁한 옷깃 사이로 바늘바람이 파고들었다 설설 끓는 팥죽솥을 저으며 붉은 소용돌이 속으로 새알심을 떨어뜨릴 땐 퐁퐁 푸른 종소리가 났다 식구들 무탈하라고 맨 먼저 뜬 죽사발을 조왕전에 올리고 어머니는 지레 펀 팥죽을 칠기 벗겨진 소반에 얹어 내게 주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을 후후 불어가며 붉은 물이 든 쌀알이랑 새알심이랑 떠서 나는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식구 가운데 가장 먼저 두 그릇이나 먹었다 입천장이 화끈거렸다 다음날까지 울컥울컥 생목이 치밀었다 과식으로 부풀어 오른 배가 쉼 없이 우렁거렸고 나는 마침내 한 이틀 배탈이 났다 할머니는 바가지에 샘물을 떠서 숯을 띄우고 식칼을 담근 채 방으로 들어왔다 나를 눕히고 뜨거운 이마에 비스듬히 열십자를 긋고는 그 칼 내 입에 물렸다 어금니와 아랫니 사이에 낀 칼날, 섬뜩하게 입술에 닿은 차가운 칼등으로 바가지의 물 두어 방울 흘려 넣었다 목젖 시린 그 물방울, 식도를 타고 내릴 때쯤 할머니는 대문을 향해 그 칼 냅다 던졌다 칼끝이 대문 밖을 향해 드러누우면 나는 곧 씻은 듯이 나았다 탈을 물린 것이다 일 년 탈을 모두 막는 팥죽을 먹고 생긴 탈을, 식칼로 물리면 대문 밖으로 일순에 물러나던 배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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