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 시집 수록 시편/제4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2013]

[시] 선잠 3 / 김주완 [2011.07.19.]

김주완 2011. 7. 19. 19:11

[시]

 

해동문학 2013년 겨울호(통권 84호) 129쪽 수록


                     선잠 3 / 김주완


선잠은 누워서도 서서 자는 잠이다


창밖의 어둠 속에서 누가 나를 보고 있다

올빼미는 아니다, 해파리처럼 흐물거리는데

형체가 분명하지 않다

천장에서 날아 내리는 나비의 한쪽 날개가 움직이지 않는다

심근경색이 시작된 나비, 기우뚱한 방의 저편 구석에서

쌩하니 날아오른 모기가 반동 없이 어딘가 내려앉는다

익사의 숨 막히는 공포

흡혈귀는 누군가의 피를 빨고, 나비의 박제가 시작된

안개 속에는 가라앉지 못하는 불안이 숨어 있다

하나씩의 부레를 가진 초조가 연줄 끊긴 연처럼 허공을 떠돌고 있다

비눗방울이거나 어느 축제일의 풍선 같이 앞 다투어 떠오른다

발걸음과 발걸음 사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내장 같은 함정이 섬뜩 떠오른다

삭제한 파일 조각들이 휴지통에서 압수수색 당할 수 있다

들이 낭떠러지에서 우수수 떨어진다

걱정을 분쇄하는 이 가는 소리가 모질게 방의 어둠을 부수며

더욱 촘촘하게 어둠의 깊이를 파내고 있다

새의 깃털이 부드럽게 나부끼고 있는 저만큼

늪의 진흙이 구물구물 나무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장신구인 양 나무가 늘어뜨린 칡넝쿨가랑비를 흩뿌리고 있다

잠의 파도가 넘실대고 누가 차츰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문득, 방향도 없이 몰려오는 걱정과 분노가 치솟는다

망치 같은 멧돼지 주둥이아버지 산소를 파 뭉개고 있는지 모른다

놈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다

전갈자리에 앉아있는 독사 같이 뾰족한 놈의 얼굴이 가증스럽다

사악한 놈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대비해야 한다


곰곰이 생각하는 반격의 자세, 비스듬히 허리 아래로 비껴든

서슬 푸른 진검의 싸늘한 칼날이 제격이다

사방팔방으로 열린 필살의 각도가 머금은 일진광풍이 거기에 있다


펄밭을 파고드는 갯지렁이 꼬리를 잡아당겨 내는 것처럼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던 잠의 꼬리가 이끌려 나와

어스름 속에 어지러이 뒤척이는 선잠의 정체, 정신이 저 혼자 서서 본다

 

詩作노트

 

그림움의 본질은 과거지향성이다. 그리움의 시점은 현재이지만 그 대상은 언제나 지나간 것들이다. 그리워 할 것이 많다는 것은 추억의 창고가 그득하다는 말이 된다. 나는 그립다. 어린 날의 어머니가 그립고 비온 후의 목단 꽃잎 같은 누나가 그립다. 싸한 토마토 잎 냄새가 그립고 붉은 꽃무늬 우산이 그립다. 그러나 지금은 외롭다. 외롭기에 나는 나로 남는다. 회화나무 그늘은 어머니 품 같다. 아늘아늘 터서 얼룩진 어머니 가슴살의 아늑한 젖내를 거기서 맡을 수 있다. 옮겨가는 회화나무 그늘의 흔적이 거기, 그렇게 그리움으로 흔들리고 있다. 잠들지 못하는 나의 선잠은 그 그늘에서 졸음이 되어 쏟아진다. 닦던 진검을 저만큼 밀어둔다. 너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고 싶다. 멀고 슬픈 길에서 더러 시인이 되는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