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문학동인회, 『봄날의 계단에서 그리움에 젖다』, 서울:도서출판 화남, 2011.04.25., 250~257쪽 수록.
시와 철학 - 내 삶을 이끌어 온 두 개의 지주
김주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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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봄, 대구고등 1학년이었던 그 때 나는 교내 백일장에서 ‘흙’이라는 시로 입상을 했다. 차하였다. 국어과의 이유철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격찬을 하셨다. 갓 입학한 신입생으로서 전교(24학급)에서 3등을 한 셈이니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가슴 뭉클한 흥분은 오래 갔고 친구들 사이에선 문학도로 공인을 받게 되었다. 이 시는 같은 해『계간 경북문예』가을호에 수록되었다. 1966년 1월 19일자로 발행된 교지 『달구』 5호에도 실렸다. ‘문원’ ‘시’란에 당시 3학년이었던 최교주(6회), 노명석(6회) 선배의 작품 바로 다음에 나의 시 ‘흙’이 수록됨으로써 자부심은 더 커졌다. 나의 시 다음에 10명의 시가 더 수록되었는데 이문진(7회) 정덕환(6회) 선배들의 작품도 그 뒤편에서 발견된다. 당시 교지 편집을 지도하셨던 이유철 선생님께서 내게 보낸 기대와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 교지엔 문우 서상홍(8회)의 콩트 ‘외밭으로 기던 날’이 실려 있고 이하석(7회) 선배의 희곡 ‘흉가’도 실려 있다. 당시에는 주로 필경하여 등사한 유인물이 통용되던 시절이라 활판으로 찍혀져 나온 교지에 작품이 실리고 그 교지가 전교생에게 배부된다는 것이 여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전부터 ‘시’ 비슷한 것을 끼적거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시라고는 써본 적이 없었다. 다만 8년 연상인 누님이 읽은 소설이나 시집 등을 초등학교 시절부터 옆에서 주워 읽기는 했다. 참 많이 읽었는데 지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소월시집』과 소설 『청춘극장』,『다정불심』,『무영탑』정도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백일장 입상 시 ‘흙’이 써졌던 것 같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45년 동안 나는 시를 쓰다 말다 해오고 있지만 아직 더 이상의 상이라고는 받아보지 못했다. 그 당시 여러 대회에 출전했지만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했다. 처음이자 끝인 고1 때의 백일장 입상이 나로 하여금 어쭙잖은 시인으로서의 일생을 살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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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이 입상을 계기로 나는 시인이 다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살게 되었고 공부와는 차츰 거리가 멀어졌다. 입학 당시 학급 석차 3위권 내였는데 성적은 계속해서 떨어졌고 마침내 학교 수업을 듣는 외에는 일체의 공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출간된 『한국연간시집』『한국전후문제시집』『세계전후문제시집』같은 책을 가방에 넣어 다녔다. 그리고 협객을 동경하면서 당수(오늘날의 태권도)를 배우러 도장엘 다녔다. 주먹과 시 ― 이것이 그 당시의 내 삶의 전부이자 지고한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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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대구고등 2학년 시절, 같은 학년(8회) 문우였던 신동익, 서상홍, 이순락 등과 자주 어울렸다. 효성여고 문예반원들과 삼송빵집에서 미팅도 했고 밤의 경북대 캠퍼스로 옮겨가 산책도 했다. 벚꽃이 핀 캠퍼스의 가로등 아래 벤치에 쌍쌍이 앉아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는데 지금은 이름도 대화내용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1966년 연말, 대구역 서편에 있는 KBS 2층 공개홀(지금의 시민회관 자리)에서 문학의 밤 행사(대구지구 송년 문학제)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밤 행사에서 나는 ‘여명’이라는 제목의 시로 서시를 낭독했다. 소위 오프닝 무대에 나선 것이다. 조명이 끌어당기는 대로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갔고 눈이 부셔 글씨가 잘 안 보이는 가운데 흥분된 마음으로 시를 읽었다. 꽃다발을 몇 개씩이나 받았다. 소위 나의 문학일생에 있어서 이때가 어쩌면 전성기이며 황금기였던 것 같다. 이때의 시 ‘여명’은 묵혀 두었다가 1968년 4월 12일(대학 1학년 때) 발행된 『달구』 7호에 실렸다. 1966년엔 시탑동인으로 시화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66년 대구지구 송년문학회와 시탑동인 시화전에 참가한 사람으로는 나 이외에도 이하석, 이문진 선배와 서상홍 문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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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은 당시 3학년이었던 이하석(7회) 선배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나가는 대회마다 장원을 받아오고 우수상도 받아왔다. 이문진(7회) 선배도 제5회 신라문화제 한글백일장 시 부문 차하를 받아왔다. 산문으로는 서상홍(8회) 문우가 상을 휩쓸었던 해이다.
그해 가을 신라문화제에는 대구고등학교에서 대거 참가했다. 학교에서 지급받은 여비가 상당했다. 우리 2학년 문우들, 신동익, 서상홍, 이순락과 나는 하루 전날 경주에 도착하여 밤의 화려한 등불행렬을 구경한 뒤 시내의 막걸리 집으로 갔다. 술값은 추렴했다. 만 17살인 우리보다는 10여년 연상의 작부가 들어왔는데 한복을 차려입고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하고 있었다. 천연두 자국이 빼곡히 남아있는 얽은 얼굴이었다. 우리는 거기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더러는 옆에서 새우잠을 자고 더러는 밤을 새우면서 술을 마셨다. 우리는 그날 밤 거기서 처음으로 여인의 젖가슴 맨살을 만져볼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돈이 떨어져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백일장에 참가했다. 그러니 우리 2학년들은 줄줄이 낙방할 밖에 무슨 수가 더 있었겠는가! 이문진(7회) 선배는 시 부문에서 따끈따끈한 차하를 받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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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은 또 『계단문학』이라는 동인지를 처음으로 찍어낸 해라고 기억된다. 1963년 이후 정덕환(6회) 선배의 주도로 이어져 오던 ‘계단문학의 밤’이 중단됨에 따라 서상홍(8회), 신동익(8회) 문우의 발의로 내가 이하석(7회), 서지원(7회) 선배의 허락을 받아 국반절판 규격의 등사판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계단문학』동인지 창간호가 되는 셈인데 아무리 찾아도 지금 내게는 그 책이 없다. 어쩌면 모교 도서관에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1967년 1월 20일 발행된 『달구』 6호에 2학년 신분의 나는 단편소설 ‘크리스마스이브’를 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당시 나는 천지를 모르고 깝죽댄 것 같다. 소설까지 손을 대었으니 말이다.『달구』 6호에는 문우 서상홍의 수필 ‘들길에서’와 이순락의 시 ‘별’이 실려 있으며 선배인 이하석의 시 ‘구름’, 서지원의 시 ‘환희’, 이문진의 시 ‘샘’과 수필 ‘단상기’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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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공부도 부실했던 1967년, 고3이 끝나갈 무렵 대학입학원서를 써야 했다. 당초에는 국문과를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연구주임을 맡고 계셨던 이유철 선생님께서 “계속 글을 쓰려면 국문과 보다 철학과가 나을 것 같다”고 귀띔을 하셨다.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로 원서를 냈고 1968년 3월에 입학을 했다. 대학 1학년 시절도 나는 여전히 시인이라는 환상 속에서 어영부영 보내고 있었다. 교양학부라 제대로 된 철학을 배우지도 못했고 다만 지긋지긋한 교복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채 반들반들 구두를 닦아 신고 다녔다.
같은 대학 사회학과를 다니는 이하석 선배를 만났다. 그를 통해서 만난 정덕환 선배는 같은 대학 법대생으로서 학보사 편집국장을 맡고 있었다. 정덕환 선배의 배려로 그해 봄 경북대학보에 나의 시 ‘4월 아침에’를 싣기도 했다.
문학적 열정이 워낙 뜨거웠던 이하석 선배가 정덕환 선배와 상의를 하여 시화전을 하기로 했다. 정덕환 선배가 그림을 그리고 이하석 선배와 내가 2인 시화전을 열게 된 것이다. 한 달 이상 학보사에서 정덕환 선배가 시화를 그렸다. 파스텔로 신들린 것처럼 그림을 그리는 정덕환 선배 옆에서 강의가 비는 시간에 우리는 함께 가서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하얀 귀공자의 얼굴을 가진 정덕환 선배가 그림에 열중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1969. 5. 12.~5. 17.까지 경북대 시청각실에서 열린 <이하석ㆍ김주완 시화전>(팸플릿 스캔 첨부)에는 두 사람이 각각 10편씩의 시를 전시했다. 이하석 선배의 시는 ‘눈짓’, ‘봄아침에’, ‘분위기 2’, ‘장미와 감기’, ‘촛불’, ‘시 2’, ‘청산淸算’, ‘발견 3’, ‘발견 5’, ‘작품’이었고 나의 시는 ‘산책’, ‘바다 Ⅱ’, ‘일상의 기원’, ‘통근열차’, ‘인형’, ‘4월 아침에’, ‘봄 Ⅱ’, ‘봄 Ⅲ’, ‘열애’, ‘꽃집’ 등이었다. 전시공간이 마침 음악 감상실이어서 많은 학생들이 북적거렸다. 시내의 다른 대학 여대생들도 많이들 찾아와서 시화를 감상하였다.
나는 그 이후 변변한 시를 쓰지 못한 채 ‘시인’이라는 환상 속에서 연애에 열중하고 있었다. 꾸준히 시작에 정진한 이하석 선배는 1971년 대학 3학년 시절에 『현대시학』 추천완료가 되어 화려한 등단을 하였다. 부러웠다. 그러나 나는 응모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등단 대신에 결혼을 했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1971년 12월 25일, 지금의 집사람과 결혼을 한 것이다. 결혼 후에도 시를 동경하고 시집을 뒤적거리긴 했지만 오래 동안 시를 쓰지 못하고 절필하다시피 하였다. 시도 철학도 그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는 채 나는 그것들로부터 떠나 버린 것이다.
여기까지가 나의 문학청년기의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 언급하는 것은 그 이후에 어쩌다가 시인이 되어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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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 근무하는 아내에게 얹혀살면서 방위소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첫 직장을 잡았다. 시를 버린 나는 늘 공허하였다. 보상심리로 사진에 심취하였다. 『월간사진』에 사진작품을 몇 년간 연재했다. 편집자의 권유에 따라 사진 옆에 글을 실었다. 시의 형태를 띤 글이었다. 그 중에서 ‘구름꽃’이란 글이 우연히 구상 시인의 눈에 들었던 것 같다. 그 글로 1984년에 초회 추천을 받고 같은 해에 ‘마이산에서’란 시로 추천완료가 되었다. 1986년에는 전봉건 선생이 알선해 준 혜진서관에서 첫 시집 『구름꽃』을 묶었다. 구상 선생이 서문을 쓰고 이하석 선배가 해설을 썼다.
1988년엔 박상봉(18회) 동문을 뒤늦게 만나 문학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 박상봉 동문은 같은 해 5. 13, 대구시 중구 문화동에 있는 <문화공간 시인>에서 ‘제28회 시인과 독자의 만남’에 나를 초대시인으로 불러 주었고 같은 해 8.5.~8.7.까지 경북 월성군 대본해수욕장에서 열린 ‘제2회 여름시인학교’의 문학세미나에서는 ‘시와 철학’이라는 주제로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등단 당시 나는 대학원 재학 중에 있었고 1980년대 후반에 대학교수가 되었다. 박사 학위논문은 「존재론적 예술철학에 관한 연구」였다. 이 논문을 쓰면서 나는 비로소 시와 철학의 정체를 조금씩 파악하게 되었다. 예술작품으로서의 시의 존재구조를 알게 되었고 철학하는 정신의 준열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국현대철학의 제1세대 학자인 하기락 선생님의 지도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후 시를 주제로 하는 철학논문 여러 편을 전문 학술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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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8, 나는 정년을 5년 6개월 남겨둔 채 대학강단을 버리고 명예퇴직을 했다. 2010. 6. 2. 지방선거에서 고향인 칠곡군수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실패했다. 기만의 흙탕물에 빠졌다 나온 기분이다. 2010. 10, 만 61세가 된 지금은 칠곡군 왜관읍에 소재하고 있는 구상문학관에서 몇 년째 계속하던 시 창작 지도를 다시 시작했다. 가르치면서 시를 새로 배우고 있다. 내 스스로 매주 1편씩, 어떤 때는 몇 편씩의 시를 쓰고 있다.
첫 시집『구름꽃』(1986) 이후 『어머니』(1988),『엘리베이터 안의 20초』(1994) 등 두 권의 시집을 냈고 『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2004)란 제호의 카툰에세이집도 1권을 냈다. 세 번째 시집 이후 지금까지 16년 동안 나는 시집을 묶지 못했다. 신통찮은 작품들로 시집 2~3권 분량의 재고가 있긴 하지만 자비출판이라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아 묵히고 있다.
구상문학관에서 시 창작 지도를 하면서는 문인수(4회), 김종섭(5회) 두 분 선배의 도움과 성원을 많이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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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생을 이끌어 온 두 개의 지주가 곧 시와 철학이라는 생각이 요즘은 자주 든다. 시를 사사한 구상 선생과 철학의 눈을 뜨게 해 준 하기락 선생, 두 분 은사님께 자꾸 죄송스럽다. 그분들의 기대는 높았고 나의 도달은 낮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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