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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시] 삶 둘, 시 하나 / 김주완 [2012 낙강시제 강연 원고]

김주완 2012. 10. 15. 10:49

 

2012 상주 낙강시제 문학 페스티벌 다섯시인 강연회(2012.10.13.토.14:00/도남서원) 원고

제62회 낙강시제 시선집『2012 낙동강』(2012.10.10.발행) 162~173쪽 게재

 

 


삶 둘, 시 하나

김주완


시인은 두 개의 삶을 산다. 일상적 삶과 시적 삶이 그것이다. 생활인의 삶이 전자라면 시인의 삶이 후자이다. 시인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시인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저절로이든 의도적이든 시를 생각하거나 쓸 때만 시인이다. 그러나 일상적 삶의 편린들은 어쩔 수 없이 시 속에 녹아들게 되어 있다. 정신은 몸과 생활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두 개의 삶을 살면서 하나의 시를 만들어내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삶 둘, 시 하나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시인의 존재규정이 된다. 누구든 살고 싶은 삶이 있고 사는 삶이 있다. 시인도 마찬가지이다. 살고 싶은 삶을 살아온 시인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인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철학을 전공하여 대학에 몸담고 있다가 퇴직을 했다. 남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강의를 하고 연구업적을 남기려 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학회활동도 게으르지 않게 하여 전국학회 회장을 몇 군데나 맡으며 철학계에선 이름이 조금 알려지기도 했다. 총장 이외의 거의 모든 행정보직을 두루 맡아 경영에 참여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모두 부질없고 신통찮았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교원인 집사람과 일찍 연애결혼을 하여 지금까지 42년 간 수굿하게 살고 있다. 딸아이 셋을 두었는데 위로 둘은 중등교사이고 막내는 법조인의 길을 가고 있다. 모두들 고만고만 살아가고 있으며 남다른 재능을 가졌거나 뛰어난 외모를 가진 이가 없다. 외손자녀가 다섯이고 태중에 또 하나 더 있다. 퇴직 후의 나는 고향인 경북 칠곡군 왜관읍 낙동강가로 돌아와 조그만 거처를 마련하여 서재랍시고 생활하고 있다. 대구의 살림집 보다 왜관에서 보내는 날들이 더 많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도움을 주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다.


나를 태워

너의 겨울, 한 구석을 덥힐 수 있다면

겨우 남은 몇 장의 마른 잎을 단 채

뼈마디 툭 툭 부러지는 아픔을 견디며

나는 걸어서 아궁이로 갈 것이다

구차한 삭정이로 묶여있지 않고

새털처럼 가벼운 자유가 되어, 뒤늦게

빨간 꽃 한 송이 피울 것이다

늦은 귀가를 기다리는 구들목의 밥 한 그릇

뜨거운 온기를 지킬 것이다

겨울 허기, 그 무량한 결핍을 꽉 채워주고

나는 한 줌 재가 되어 이승을 뜰 것이다

새털처럼 가볍게 떠날 것이다


      ― 미발표 근작 졸시 <나뭇가지 5> 전문


시인이 된 내력은 길고 멀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예반에 들어가 각종 백일장을 쫓아다닌 문청시절이 내게도 있긴 했지만 등단은 남들보다 많이 뒤늦게 했다. 35세가 되던 해인 1984년에 구상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지를 통하여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월간 사진 잡지에 시 비슷한 글과 사진작품을 한동안 연재하였는데 그 시들이 우연히 구상 시인의 눈에 띄어 초회 추천을 받았다. 그 후 과제로 부여된 50편의 시를 써서 구상 선생에게 갖다 드림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었다. 첫 시집 『구름꽃』과 두  번째 시집 『어머니』를 자비 출판하였고 세 번째 시집인 『엘리베이터 안의 20초』는 구상 선생께서 연결해 준 덕분에 기획출판으로 내었다.

 

돌아보면 나는 시와 철학이라는 양 극단을 오가는 순례의 길에서 방황하는 한 생을 살았던 것 같다. 시를 습작할 때는 철학이 목말랐고 철학 속에 있을 때는 시가 그리웠다. 시는 어머니 같았고 철학은 아버지 같았다. 시의 세계는 따뜻하고 윤습하였으며 철학의 세계는 차갑고 메말랐다. 시는 감성의 다의적인 지대에 있었고 철학은 이성의 일의적인 지대에 있었다. 시인은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철학자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나는 두 세계의 혼융을 꿈꾸었다. 그러나 무망했다. 하이데거나 칼릴 지브란과 같이 시인이면서 철학자인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두 세계를 얼마나 조화롭게 혼융시켰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나는 철학에 매몰되어 오랫동안 시를 쓰지 못했다. 1994년에 제3시집을 출간한 후 지금까지 19년 동안 새 시집을 못 내었으니 거의 절필하다시피 한 셈이 된다. 2007년부터 고향인 경북 칠곡 왜관에 있는 구상문학관에서 시 창작 강좌를 맡으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연중무휴로 계속되는 시동인 ‘언령’ 회원들의 스터디에 부과하는 습작 시제를 가지고 나 또한 배우면서 쓰고 있다. 2009년에 퇴직을 하고 난 이후부터는 거의 시에만 전념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두 편을 쓸 때도 있고 십여 편을 쓸 때도 있다. 덕분에 지금은 500편 이상의 시를 재고로 가지고 있다. 시집 여섯, 일곱 권은 족히 될 분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집은 아직 못 내고 있다. 기획출판은 해 주려는 데가 없을 것 같고 자비 출판은 내키지 않는다. 쓰이는 대로 시를 쓰서 내 블로그에 올리고 어쩌다 오는 원고청탁에 응하는 것이 지금의 나로서는 할 일의 전부이다. 만개한 꽃을 보면서 환희가 아닌 슬픔을 보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일이다.


꽃을 본다

만개한 꽃의 슬픔을 본다


맘대로 걸어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 붙잡혀 피는 꽃은 가련하다


바람이 와서 자주 흔들고 가지만

따라 나서지 못하는 꽃은 그저, 거기 서서

슬프게 몸을 떤다


자유를 꿈꾸는 낮은 신음呻吟, 감당할 수 없는

신열로 꽃은 속에서부터 몸부림치며 피고

춤, 춤추는 슬픔은 아름답다,고 우리는 명명命名한다


절정은 소실점이다

돌아앉아 흘리는 눈물 사이로 보이는

까마득한 소망의 증발 지점이다


남남으로 있는 모래알처럼 말라 있는 것이 아니라

수챗가에 선 분꽃은 발이 젖어 있어 꽃을 피운다


무릇, 만개한 꽃의 슬픔에는 오래 된 물기가 있다

물기에 젖어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다운 법,

슬픔의 찬란한 물방울은

저만큼 밀어내 놓고 보아야 반짝인다, 투명해진다


꽃의 만개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다

처연하게 아름다운 슬픔, 슬픔으로 보인다


          ― 미발표 근작 졸시 <아름다운 슬픔> 전문


그렇게 흔한 문학상 하나 받은 것이 없다. 앞으로도 받을 일이 없을 것 같다. 미련이나 기대도 없다. 상이란, 나처럼 가출했다가 어정쩡하게 돌아와 시에 발 담그고 있는 사람의 몫이 아니다. 시에 인생 전부를 건 사람들, 완성도 높은 시들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사람들, 그들의 몫이다.

어쩌다 책을 읽을 땐 다음 시에 등장하는 까만 조약돌을 서진으로 쓴다.


강마을에 인접한 갈수기의 샛강에서 데려왔습니다 하얀 모래에 반쯤 얼굴을 묻고 까맣게 반짝이던 그녀의 얼굴, 그 조그만 얼굴이 하얗게 웃을 때는 까무러치게 곱고 매끄러웠지요 책상 위 가까이에 두고 지금껏 함께 살았습니다 강심의 뜨거운 다비식에서 나온 사리 같은 그녀를 나는 손에서 놓지 않고 지냈어요 책을 읽다 쉴 때면 바로 그곳에 얼굴을 대고 그녀는 글쓴이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행간에서 길을 잃지 않았어요 미로 같이 얽힌 책 속의 길을 가까스로 빠져나올 때도 있었고요 동백기름 발라 쪽 지은 춘향이 머릿결처럼 흑청 빛으로 반질반질해진 그녀의 전신엔 기실 내 손때가 깊이 배어 있어요 나 죽어 염습을 할 때 수의 속에 넣어 달랄 요량입니다 어느새 그녀는 저승까지 같이 가고픈 동반자가 된 거지 뭡니까 다 놓고 이승을 떠나면서도 그녀만은 포기할 수 없는 거지요


              ― 졸시 <조약돌 사랑하기> 전문


왜관에 살면서 자주 강변을 산책한다. 간혹 시상이 떠오르면 폰을 꺼내 에버노트에 저장한다. 베란다에 앉으면 풍만한 낙동강의 허리가 한눈에 들어선다. 환풍기를 틀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문다. 주간 숙제로 주어진 시제를 생각하다 보면 문득 시상이 떠오른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지금의 내 시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다음 시는 강변 산책길에서 얻은 시이다.


장면모드를 일몰로 바꾸고 붉은 강물에 내려선 검은 산과 회색나무의 잔가지들, 길게 걸린 주홍빛 구름자락 끝에 매달려 서산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 풍경을 촬영했다 잘라낸 풍경은 스마트폰의 갤러리에 자동으로 저장되었다 강도 산도 이제 꼼짝없이 메모리에 들어가 버렸다 푸른 하늘을 품어 안고 푸른 물이 들어 쉬지 않고 꿈틀거리던 풍경이 홍조 띤 절정의 표정으로 정지해 버린 것이다 숲의 새나 강의 물고기 떼는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생명이 빠져나간 풍경의 연한 껍질 하나를 벗겨 코딱지만 한 마이크로 SD카드 속에 가둔 셈이 된다 가슴이 빈 날은 죽은 그것들을 불러내어 나는 눈으로 어루만질 것이다 사랑을 독점한 권력자의 쾌락을 누릴 것이다 바보처럼


                ― 졸시 <갤러리에 갇힌 풍경> 전문


청소년기엔 태권도를 했고 장년기엔 검도를 했지만 고단자까지는 되지 못했고 별로 쓰일 데도 없었다. 도복과 진검 몇 자루만 그 시절의 유물로 남아있다. 서재에서 소일하다 심심할 때면 당구를 치러 나간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주로 당구장 주인과 게임을 한다. 당구장 주인들은 대개 고수가 많아 내가 자주 진다. 샷을 한 후 생각과는 다르게 굴러가는 당구공을 보면서 내 모습을 본다. 나는 나의 주인이면서도 주인의 뜻과는 먼 삶을 살아 왔다. 그러나 지금의 생활은 고요하다.


고요는 하얗고 쓸쓸함은 잿빛이라 생각했다


갈대숲이 제 자리에 있다 거기 그렇게 있다 햇살을 헤집고 날아오르는 물새 한 마리 푸른 하늘에 투명한 아지랑이 한 줌 빛살 가루로 뿌리는데 수양버들 가지 끝이 잠시 휘어지며 허공을 받쳐든다 개울의 여울목엔 하얀 물살이 내달리지만 풍만한 품새를 풀지 않는다 물소리에 묻어 있는 고요의 빛깔이 허공처럼 쓸쓸하다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한낮의 여름 답답하게 길다 물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떼도 그 답답 걷어가지 못 한다 쌀알 만 한 풀꽃이 사방으로 피어 분주한 생의 한 가운데 아무도 딴전을 피우지 않는데 들판 끝에 쓸쓸하게 나앉은 사람만 외로이 고요를 본다


빛깔과 빛깔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서 홀로 돌아앉은

적요의 빛깔은 버려진 자의 탈색, 혹은 텅 빈 무색이다

시간이 정지한 지대에서 말없이 바라보는 허공의 빛깔


            ― 미발표 근작 졸시 <적요의 빛깔 1> 전문


요즘은 시보다 시인의 자세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다. 세속의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염치와 도리를 알면서 사는 일, 일반인들이 시인에게 기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맑고 고결한 정신을 지켜가는 삶을 고민한다. 세련된 시를 쓰는 것에 못지않게 다른 문인들을 욕되게 하지 않고 문단을 오염시키지 않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시적 자존은 작품과 삶이 함께 견지해 줄 때 유지된다. 속물이나 사이비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정치 후진국인 한국적 사회현실에 때로는 분노하면서 애써 달관을 얻으려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골, 다공증을, 앓는 그, 녀, 부지불식, 간에 방바닥에 주저앉아, 고관, 절 골절, 상을 입었다, 툭, 엿가락 부러트린 단면에 뚫리는 구멍인 듯, 숭숭한 크고 작은 구멍들, 깜깜하다, 불 꺼진 지하철, 역사 같은 어둠, 속에서 벌레들, 기어 나온다, 하얀, 뼛가루를 파먹고, 올챙이처럼 아랫배가 볼록한, 그들, 공복公僕이 집을 나선다, 공복空腹에 허겁지겁 퍼먹은, 것을 조금씩, 뱃속에서 꺼내, 투망질하듯 던져 놓는, 부동산 투기, 외진, 골목 끝에서, 뱃속, 깊이 구겨 넣는, 무량한, 무기명 채권, 뭉치, 자꾸 불룩해지는, 뱃가죽 아늘아늘, 부푸는데, 모, 성은 뜯기고 뺏기면서, 자, 신은 피폐해지는 것, 전신이, 꼬들꼬들 말라가는, 빈사의, 그, 녀는 뒤로, 물러난 산천山川이다, 부패지수, 일위의 딱지, 만장처럼 펄럭이는, 얼굴, 창백한 그, 녀,


            ― 미발표 근작 졸시 <골다공증> 전문



  바다 아닌 곳, 안개 끼지 않은 앞길이 없다는 걸 알아


그럼…, 바다엔 늘 안개가 끼어 있지

기상 위성은 밤과 구름을 투시하여 지상으로 통신을 보내오지만

출항계에 찍히는 스탬프 그늘에는 늘 해신海神 부적이 숨어 있어


지금은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수밖에 없

지뢰처럼 터져 비산할 한 치 앞의 암초를 분별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조류潮流는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갈 거야

바다 깊은 아래서 바람은 불고

좌초는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 있어


바다의 생애가 훈증 너머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지연紙鳶처럼 펄럭이며 따라오던 바닷새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수평선과 분분한 섬들이 사라지고 외로움의 그늘만 연기처럼 남았다

선수船首가 지워지고 사방 분간이 지워졌다, 자침磁針이 흔들리는 나침반

때 아닌 곳에서 우두커니 서 버린 시간

정적은 엄마가 보이지 않는 오후의 대청처럼 무서워


등대는 맑은 밤에나 소용에 닿는 불빛을 내지 달빛이나 별빛은 모두 솜이불 속으로 들어가 묻혀 버렸어 혹등고래의 혹 같은 돔을 뒤집어쓴 월드컵 경기장 백 미터 트랙에 땅강아지 한 마리 엎드려 있는지도 몰라 빗살처럼 하얀 수염의 방향을 잡아주던 북두칠성이 침몰했겠지 아무리 날아올라도 이미 그건 퇴화하는 날개일 뿐이야 해안은 이미 무너졌어


너의 옆엔 지금 너밖에 없어

우리가 너의 안개를 벗겨 줄 순 없어


안개 속에 내일이 있다는 건 시간을 건축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이야 네가 내일 살아 있다면 그것은 내일이 아니라 안개 낀 오늘인 거야 설령 내일이 실제로 있으면 뭐 해 네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걸 안개 속의 항해잖아


정박에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어

출근길의 지하철 승강장처럼 우리는 모두 떠밀려 가는 거야

기껏 오늘에서 오늘로 가는 거야, 거기서 돌아오는 거야


기도는 안개 너머로 날려 보내는 종이비행기 같아

축축이 젖어서 내려앉은 자존심이 입 다물고 소리 내는 복화술이야

해무로 밀봉된 바다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부질없는 짓이지


봄꽃 한 송이 피는 일은 곧 봄꽃 한 송이 지는 일인 거지, 뭐


          ― 졸시 <해무> 전문 (계간『철학과 현실』2012-여름호 권두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