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백화점 사보, 『大百』, 1991. 3·4, 12~13쪽>
[산문 / 봄의 수상록]
봄을 느끼게 하는 것 ― 思春
김 주 완
집은 달서구에 있고 직장은 경산시에 있는 터라 오갈 때는 흔히 순환도로를 탄다. 대구를 싸안는 앞산의 중허리를 따라 꿈틀거리는 이 길을 지날라치면, 으레 만나는 것이 계절의 숨결이다. 그것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어느 계절이든지 간에 그 특유한 내음과 기운이 그곳에는 충만해있다. 길의 위쪽으로는 나무와 풀과 바위와 흙이 물씬한 자연미를 풍기고, 아래쪽은 이국의 정취가 그윽한 레스토랑과 식당건물들이 군락을 이루어 조형미를 더해주고 있다. 끝과 끝쯤에는 실용성과 규격화로 일관하는 아파트촌이 자욱히 솟아나고 있다. 자연미와 조형미 사이, 원시와 문명 사이의 이 길에 인간이 등장하면 바야흐로 생동하는 삶의 흐름이 출렁이게 된다.
자기만의 색깔을 쏟아내는 계절과 인간이 하나의 변주곡으로 순환한다.
순환의 방향과 거리는 일정하지 않지만 바라봄의 위치에 따라 오랜 과거나 먼 미래의 어느 지점 혹은 무한상공이나 깜깜한 지층 아래로 방만한 사유가 자유이동한다. 내게 있어 순환도로는 순수영혼으로 회귀하는 본래성의 길이다.
3월과 4월의 건널목쯤에는 순환도로로 봄이 온다. 수줍게 터진 목련이 연한 속잎을 드러내고, 자욱하니 피어오르는 개나리 떼가 군데군데 작지만 진한 얘기들을 풀어놓으면, 벚꽃은 투과하는 빛살을 쏟으며 온 하늘 온 땅에 때아닌 눈발을 뿌려 하얀 길을 틔우고 만다.
길은, 돌아온 길은 적막하였다. 지난 겨울은 춥고 추웠다. 엎드려 기다리며 보낸 삼동의 차디찬 육신을 모질게 칼질하던 바람과 맨발로 걸어온 얼음장이 그러나 지금은 눈부시다. 그리운 봄밤의 꿈 한자락
강물이 풀리고 수런거리며 살아나는 물풀들의 머리 위로 물결무늬들이 잘게잘게 밀리고 있었다. 작고 외진 모래언덕 아래, 건너편 강안을 바라보며 다소곳이 앉은 소녀의 등과 목선이 서럽도록 고왔다. 단발머리 아래로 밀려나온 면도자국이 선명하게 목뒤로 푸르렀다. 바로 그, 뼈가 시린 서러움과 가슴저린 푸르름이 우리 사이를 가르는 투명한 벽이 되고 있었다. 이쪽의 나는 무력하였고, 통제구역의 섬찍한 팻말 너머에서 그녀의 병은 깊어가고 있었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녀는 현숙한 중년의 아이 엄마가 되어 있지만 아직도 잠들지 못한 영혼의 방랑을 바람결에 편편히 듣고 있다. 저 선연한 수채화 한 폭의 지워지지 않는 충격의 잔존.
사춘(思春)의 들머리에서 무대 뒤로 돌아간 짧디짧은 계절의 봄은 그러므로 영원하다. 소리없이 다가왔다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그것은 실제의 봄이 아니라 꿈의 봄이다. 영롱한 환상의 화석으로 남은 영원한 설레임이다. 순간과 영원은 봄이 가진 양면성이다. 실사시간과 직관시간은 시간범주의 두 수레바퀴이다. 계절의 흐름 속에서 봄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부분으로서의 봄은 한 부분일 뿐이다. 그것도 짧은 한 부분일 뿐이다. 부분으로서의 봄은 한번 지나가면 지나간 부분이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봄은 늘 다시 오고 그것은 묵은 봄이 되어 사라진다. 사라진 봄은 돌아오지 않지만, 잊을 수 없는 봄 속으로 우리의 직관과 기억은 되돌아갈 수 있다.
실사시간은 미래라는 한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지만, 직관시간은 방향의 구속성을 벗어난 자유이다. 먼 미래와 오랜 과거로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직관시간은 인간이 가진 특권이며 회상과 상상이라는 예술적 힘의 원초적 근거가 된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니이체) 아픔이 그리하여 생성되고 존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의 봄다움, 봄의 본질은 변함없이 한결같다. 이리하여 「봄은 순간이다. 그러므로 영원하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있어 자명해진다.
수액이 줄기 끝으로 차 오르듯이, 겨울 지난 싹이 땅을 뚫고 치솟듯이 새로운 봄에는 새로운 그리움이 살아난다. 봄의 살아남이 살아남의 그리움으로 치환되어 솟아난다. 어딘가에 누군가로 있을, 어쩌면 없음으로 있을 그러한 사람이 그리워진다. 그리움의 대상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촉촉이 봄비에 젖는 돌밭일 수도 있고 먼바다의 외딴 섬 언덕일 수도 있다. 처음 가본 도시의 한적한 찻집, 창가 자리일수도 있고, 스러져버린 어느 날의 잊지 못할 황혼이나 빈 거리의 썰렁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이라면 더욱 좋다. 그것도 세상 아무도 모르는 곳에 바깥을 모르고 살아가는 맑은 눈의 사람이거나, 혹은 오래 남는 샴퓨향을 뿌리며 엘리베이터를 사뿐히 나서는 아래층의 그림자같이 연약한 미지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더욱 좋겠다. 살아나는 그리움은 봄의 생성력이며 시적 창조력이다. 따라서, 봄을 사는 사람은 모두가 시인이다.
시인은 평생을 봄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보는 것은 봄이 아니라 겨울이며, 그가 딛고 선 대지는 결빙의 땅이다. 봄을 가장 절실한 봄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인의 재능은 그가 딛고 선 겨울의 언 땅 때문이며, 그가 가진 정직하고 민감한 감수성 때문이다. 시인이 늘 새롭게 살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봄의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며, 깨지 않는 꿈속의 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시인과 시인의 정신을 무력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꿈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그리하여 그 꿈이 살아있는 꿈인 한에 있어서 그들은 결코 무력하지가 않다. 봄이 무력함이 아니듯 말이다.
봄의 존재방식은 ‘그리움’이며 ‘기다림’이다. 봄의 존재양상은 ‘밝음’이고 ‘환함’이고 또한 그것들을 ‘내다봄’이다. 봄의 생리는 갈증을 ‘풀어냄’이 아니라 ‘일어섬’이며, 살아남의 출발점이자 지향점이다. 화창한 봄날의 아름다움은 그러므로 위험하다. 살아감이 곧 위험이기에 그러하다.
** 이 글은, 대구 앞산 순환도로가 확장되기 이전, 구길이었을 때의 풍광을 묘사한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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